2010-01-31 예배의 다양성에 대하여
2010-01-31 예배의 다양성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겨 경배하는 예배의 기능을 생각하면 금새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번트(servant, 종)’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서비스’를 정성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이 서비스가 주객이 전도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면, 점점 하나님을 향한 서비스에서 사람들을 향한 서비스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열린예배(Open Service)란 원래,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지칭한다. 이 말은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할 때에 그것을 친절하게 돕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아직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신자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음식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때문에 이 열린예배 자체가 이미 닫혀진 제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작정 맘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곧 성경의 내용 안에서만 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원칙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최근 유럽에서 생기는 참람한 사태처럼, 예배당에서 예배와 함께 칵테일을 제공하거나, 댄스 파티와 예배를 동시에 제공하는 기발한 발상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복잡한 예식의 규칙들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타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예배는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이 있는 것이다.
예배의 근간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다. 다양성은 이 본질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편의와 기호를 최대한 배려하더라도, 결국 예배의 중심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다가도 다시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때도 있다. 설교의 최종적인 평가는 항상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설교를 지금 전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통해 결정한다. 설사 사람들이 거북해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원칙에 확신이 서면 강단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신이다.
지난 주에 <직분자회의>를 하다 보니, 오전예배와 오후예배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왜 두 번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신앙이 어리거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당연히 그런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다들 헤아렸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서 다소 혼란을 겪은 것은, 정말 신앙이 어린 신자들을 향하여 뭔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직분자 자신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이었다.
맞다, 되도록 예배는 지루하지 말아야 하고,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품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고유한 색깔을 살리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핵심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고, 영혼을 목양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가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두 편의 긴 설교를 듣는 것은, 그 시간이 목양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것을 명령한 것도, 전통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과 내용을 결정한 것은 목회자로서의 나 자신이다.
나는 동경드림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예배의 핵심만큼은 목회자로서 양보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내가 설교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에 대하여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쓴 약일수록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먹어야만 하는 당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면 환자는 입에 쓴 약을 먹으려고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란 죄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시간이다. 선포되는 진리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우리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풀어가고 설명하려면 그런 과정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예배의 다양성과 변화는 이런 과정을 되도록 편안하게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다. 때문에 거북함과 지루함과 같은 요소들을 다 제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감싸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양을 아무리 멋지게 드려도 그것이 목양을 대신하지 못한다. 기도를 아무리 긴 시간 드려도 그것이 기독교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 오랜 시간,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목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영혼의 구원과 목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것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성경이고, 이 모든 것을 책임 있게 추구하며 인도할 인도자는 설교자로서의 목사라는 사실은 타협될 수 없다. 만약 이 근간이 흔들린다면, 교회는 예배를 예배되게 지켜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예배자가 단지 수동적으로 수용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극적인 예배자의 참여와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바탕에서만 정리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조정이 없다면 그야말로 모든 의견은 혼돈만을 더할 것이다.
예배와 관련된 사역자는 모두 설교자를 도와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가 가장 능력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기 색깔을 고집하는 예배사역은 모두 잘못된 쇼맨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고, 그 초점은 언제나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이다. 이 점을 바르게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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