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7 용서, 위대한 선택
2010-06-27 용서, 위대한 선택
사람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라는 값진 선물을 그만 타락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이 선택의 결과로 사람은 죄가 주는 불행과 싸우는 길고 고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신학에서는 ‘구속사’라고 한다.
‘구속(救贖)’이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여 구원한다는 의미이니, 결국 구원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를 타락에 사용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긴 역사의 시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하신 것도 역시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용서는 아프다. 아픔이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간단하게 되는 법이 없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사랑의 마음을 위협하는 자기 안의 질문들과 싸우지 않고 간단하게 용서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죄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파괴한다.
죄와 하나님은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죽고, 하나님이 살면 우리 안에 죄가 죽는다. 그래서 죄는 필사적이다.
특별히 죄는 용서를 파괴한다. 원한을 오래 품고, 더 열렬하게 미워할수록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용서하는 마음은, 죄를 무력하게 한다.
당장은 분노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도, 용서하면 그것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 역시 용서의 중보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다시 제자로 세우셨다.
결국 용서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본받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운명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 용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스스로 하든지, 타의로 하든지 어렵고 힘든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만 용서하라.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용서하라.
당신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뜻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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