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와 시대유감
‘기레기’와 시대유감
-- 희망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띄우는 편지 --
김종선 목사 (동경드림교회)
2014-05-08 목양칼럼
신조어(新造語)는 시대의 고민과 정신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없는 단어가 생겨나는 것인데, 그 없는 단어를 사람들이 찾고 만들어낼 때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와 필요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요즘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기레기’다. 기러기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엇일꼬?
이 신조어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기자’와 ‘쓰레기’의 조합이다. 그러니까 좀 풀어서 말로 설명을 하자면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라는 뜻이다.
기자(記者)는 본래 단순한 기록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시대를 감시하고, 사실을평가하고, 심지어 대중을 설득하는 기능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시로 글을 써 교류하는 지금에도 기자는 전문직으로 존중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엄한 기자(記者)라는 말에 쓰레기가 장식되었다. 왜일까?
그 본연의 임무를 천연덕스럽게 포기하고 권력과 금력에 야합했기 때문이다. 재벌의 잘못은 아무리 커도 신문에 오르지 못하고, 권력의 실수 또한 알아서 가려주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글[文]은 정직하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사회로부터 ‘쓰레기’의 취급을 받는 것이다.
세월호 사고를 앞에 두고, “한 해 일어나는 교통사고에 비하면 많이 죽은 것도 아니다…”는 말을 했다는 국영방송 KBS의 보도국장을 만나기 위해 유가족들이 방송국을 찾았다고 한다. 그것도 어버이날에 말이다. 물론 만나지 못했다. 경찰은 다시 차로 벽을 쌓고 권력의 힘으로 변절한 펜을, 기자를, 방송을 보호했다.
죽어가는 단원고 아이들 수 백 명은 멀거니 지켜보면서도 보호하지 못했던 정부가 입으로 똥을 뱉어내는 이런 사람은 잘도 보호한다. 물론 당장 번거롭고 곤란한 입장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시대는 ‘기레기’라는 말로 그런 류(類)의 사람들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단어를 처음 듣는 순간,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개정개역,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재미있는 것은,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반어법의 강조구문이 역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해석되어 있다.
(쉬운성경,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표준새번,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개역성경은 ‘짜게 하리요?’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소금을 대체하는 어떤 다른 것을 찾고 있는 것과 같은 인식을 주지만 원문의 내용은 이와 다르다. 다른 역본들의 번역과 같이, 소금이라는 것이 한 번 맛을 잃으면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결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리 양이 많아도, 색깔이 멋져도, 모양이 훌륭해도, 이전에 얼마나 비싼 값으로 구입했더라도… ‘쓰레기’라는 것이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어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만 교회 안에다만 가둘 수 있겠는가?
선장이 다급한 순간에 승객을 포기하고 제일 먼저 도망하면, 구조대원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서도 속셈만 거듭하다 자기 목숨이 아까와 달려가지 못하면, 경찰과 검찰이 불의를 잡아들이지 못하면, 기자가 정직한 글을 쓰지 못하면, 권력이 국민을 섬기지 못하면… 그것들은 다 맛을 잃은 소금이며, 쓰레기에 불과하다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기독의 기’를 천한 ‘개’로 바꾸어 ‘개독교’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는가! 이 이 얼마나 통탄할 시대인가?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말을 해보라. 죽어가는 자식 앞에서, 혹은 죽어버린 자식 앞에서 오열하는 부모들의 애통을 앞에 두고 ‘종북’은 무엇이고, ‘좌우’는 무엇인가? 이념은 무엇이고, 정치와 선거는 무엇인가?
그보다 원시(元始)적인 인간의 바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진정 보지 못하는가? 바다 보다 깊은 애통함이 진도 앞바다를 건너 온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 정녕 보이지 않는가?
금발 아가씨도 알고, 흑인 아저씨도 아는 사람의 기본적인 정서(情緖)를, 슬픔을 어찌 같은 나라의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기자가 모른다는 말인가? 어찌 목사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것도 모르면서 어찌 밥을 먹겠는가? 어찌 나라를 통치하고, 글을 쓰고, 강단에서 설교를 하겠는가? 그 빛깔이 아무리 고와도 그런 류(類)의 부산물은 결국 부패하고 냄새 나는 쓰레기가 되지 않겠는가? 말을 해보라, 말을…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는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신랄한 경고가 등장한다.
(개역개정,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제사’의 타락은 ‘제사장’의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어떻게 제사장이 야합하지 않는데, 잘못된 제물이 드려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죽음을 기다리며 배설하는 짐승들의 떼를 몰아내실 때까지 이러한 야합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과격한 호통을 치신 다음에도 아주 오랜 동안 종교는 돈과 권력에 탐닉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말라기서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그들의 자손을 꾸짖고, 짐승의 똥을 그 얼굴에 바르셨다. 부정한 것들을 제하여 버리듯이 그런 자들을 순식간에 망하게 하셨다.
그러나 죄는 깊었다. 돈과 권력을 위해 타락할 사람들은 언제나 줄을 서 있었고, 잠시라도 진정되었던 맑은 물은 그들에 의하여 순식간에 흙탕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속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싸움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내가 품는 희망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들이 철이 들고 돈보다 귀한 가치를 깨닫고 훌륭한 인격으로 돌아오기에는, 인생이란 너무 짧고 돈과 권력의 심연(深淵, abyss)은 너무 깊다.
그러나 아무리 그 유혹이 교묘하고 죄의 성세(成勢)가 대단하다 하더라고, 죄는 결국 심판 아래 있고 창조주의 정의(正義)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경고한다.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여, 회개하라.
그렇지 않다면, 이제 그 얼굴에 창조주의 손으로 똥칠할 것을 기다리라. 그대들의 권력과 돈이 불[火]의 심판 앞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대들의 명성과 화려한 옷은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의 이유가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그 때가 이르러 후회조차 늦기 전에, 지금 후회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
선량한 사람들이여, 낙심하지 말라. 어떤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망은 인조(人造)의 공산품이 아니라, 언제나 창조주의 자연(自然)의 산물이다. 그것은 죽은 씨앗처럼 겨울을 지나지만, 봄에는 반드시 싹이 트고, 여름에는 자라나 온 대지(大地)를 덮는다.
정의와 희망은 무릇 그런 것이다.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도 없지만, 죽일 수도 없는, 더 본질적인 하나님의 것(devine thing)이다. 그러니 불의한 시대를 잘 참고 견디라. 타협하지 말라. 같이 쓰레기가 되지 말아라. 얼굴에 똥칠할 짓을 조심하라. 그리고 묵묵히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진리의 길을 가라. 믿음대로 살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천천히 실현하라.
답답함은 무릇 의인의 보상이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다. 의인들의 한숨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다짐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땅을 떠나지 않았고 다시 꽃 피워 우리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니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을 결코 불행이라 여기지 말라. 그 씨가 자라게 될 미래는 반드시 있다. 하여,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편 12편
(1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12: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12: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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