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피아노 & 첼로
샤인 연습씬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영화 "샤인" 입니다.
교수에게 라흐마니노프 3 번 을 연주하겠다고 했더니
너 미친거냐? 이건 악마의 노래야...
라고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연습을 돕습니다.
주인공(헬프갓)은 의지를 불태우며 극한의 상황에서 연습을 매진합니다.
(3분 보시면 됩니다.)
샤인 공연씬
발표 당일입니다.!
이건 한글 자막이 나옵니다. 그냥 보시면 됩니다.
여기엔 안나오지만 연주를 마추고 헬프갓은 쓰러지고
정신병을 앓게 됩니다.(분열정동장애)
악마가 건내준 음악
피아니스트 황금기의 걸작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 번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1873년 4월 1일 러시아 벨리키노보고로드에서 출생,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부조니,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악파 성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리아빈의 에튀드 5번을 고작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론 2,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만에 완성했다고(...)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압도적인 비판을 받으며 그 충격으로 후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으니 뭔 설명이 필요한지?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노다메 칸타빌레에 등장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이 곡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우울증을 고치는 방법은 최면술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는데, 이 곡 1악장은 우울증을 치료한 것치곤 매우 격정적이며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악절이 상당히 많다.
뒤이어 1909년에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 극악의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많은 피아니스트 지망생들, 심지어는 프로 연주가들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곡.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도망갔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며,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레코딩이 존재한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이민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으며, 호로비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굉장히 유명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작곡보다도 연주회에 더 신경을 썼을 정도.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마르팡 증후군을 앓아 손가락이 길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
러시아 혁명 때문에 떠난 조국을 잊지 못해 소련이 독일에게 두들겨 맞을 때쯤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흑색종이 생겨 사망했다......고 원래 게시물에는 그렇게 써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연주여행 중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게 더 신빙성이 높은 듯, 당시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라흐마니노프가 일회성 방문이면 몰라도 귀국권유까지 받아들였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보통 작곡가의 악보를 두고 서로 자기 해석이 짱이다 그러는 곳이 클래식인데[ 클래식 작곡가 본인이 남긴 레코딩이라면... 다 버로우지 뭐.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위에도 언급되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그당시 녹음은 속도가 지맘대로다 믿을께 못된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유자왕의 라흐마니노프는 당분간 그 상대를 찾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작부터 깊은 동굴에서 걸어나오는 거인의 움직임같은
울림과 함께 상상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연주가 계속됩니다.
같이 커플링된 프로코피에프도 압권.(프로코피에프가 어렵게 느껴지시면 나중에 들으세요.^^)
노다메칸타빌레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 협주곡 부분, 노다메는 이 곡을 듣고 피아니스트로서 각성하게 됩니다.
이후 노다메는 미쳐 날뛰고 2 대의 피아노로 치아키와 이곡을 연주하게 되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번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발라드’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곡으로 재기에 성공해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3주 후, 스웨덴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탑니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연주를 마친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 192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잠시 체류하다가 193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지요.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며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미국 망명 전에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요.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키는구나. 나는 지쳤다. 성격도 많이 나빠진 것 같구나.”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부터 그 “끔찍한 나라”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45세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연주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작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곡은 고작 6곡에 불과합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는 그렇게,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뉩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지요.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1876~1957)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다는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해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의 언급이 전해집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습니다. 비버리힐즈에 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을까요?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더 심각했던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였을 겁니다.
출처:체널예스
시작부터 대범한 지머만의 명연주
감동의 극한까지 몰고가선 메몰차게
돌아섭니다. 아쉬움속에 한숨만 나오는
엄청난 음반.
불세출의 명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는 일생동안 3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했다. 1875년에 op23의 1번, 1880년에 op44의 2번(G장조), 그리고 op75의 E플랫장조의 세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1893년에 작곡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이라고 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1번이며 다른 두 곡의 협주곡은 녹음이나 연주되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앞에서 말한 슈만이나 쇼팽, 브람스의 협주곡들은 비록 그 수는 적지만 그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서 연주되는 기회도 매우 많지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은 대중적인 인지도에 있어서 앞의 협주곡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정말 대중적인 의미에서는 1악장의 도입부만이 인지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4대의 호른으로 시작하는 포르티시모의 충격적인 느낌, 그리고 러시아의 토속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서주 주제의 친근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사실 이 서주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매우 개성적이고 완성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1악장이 다소 산만한 것은 논외로 하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도입부가 충격적인 것이 많은데 - 리스트, 슈만, 차이코프스키,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생각해 보라 -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화려한 시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다. 아마 이전에 베토벤의 5번 협주곡이 화려한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된 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작곡과 초연
이 곡이 작곡된 것은 1874년 12월 무렵이다. 이 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비교적 조용했던 시절로, 1월에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고, 6월부터 3개월정도 오페라인 '대장장이 바쿨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당분간 창작활동을 하지 않던 차이코프스키는 12월 부터 약 1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이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하였으나, 초연은 의외로 1년 가까이나 지난 1875년 10월 25일 보스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얽힌 일화는 영화나 여러 문헌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 대로 당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장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였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1835-1881)과의 불화에 의한 것이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었던 안톤 루빈시타인(1829-1894)의 동생으로서 당시 형 못지 않은 상당히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고 하는데, 곡을 완성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협주곡이기도 한 이 곡의 피아노 파트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 12월 24일 밤에 루빈시타인과 그의 동료인 프베르트(1840-1888,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를 초청하여 이 곡을 직접 연주하여 들려 주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파트의 완성도는 어떻든 곡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을 기대했었지만 루빈시타인은 그 자리에서 혹독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이 부분은 동석했던 프베르트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만, 1877년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차이코프스키가 이 때 받은 심적인 충격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있다
'나의 피아노협주곡은 연주가 불가능한 듯이 보였으며, 쓰레기 같은 것이었다. 곡을 구성하는 패시지들은 어색하고 서투른 것이어서 구제불능이었다. 작품 자체가 좋지못하고 천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사보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 협주곡은 두 세 페이지만을 건질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다시 써야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격분한 차이코프스키는 방을 뛰쳐나갔으며 당황한 루빈시타인은 뒤따라나가서 몇몇 부분을 수정하면 자신이 연주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 하나의 음표도 고칠 수 없다'고 고집을 세웠으며, 당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이 곡의 초연을 의뢰하였다.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살펴보고 매우 만족해 했으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보스턴에서 가진 초연은 뷜로의 확신대로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뷜로는 이 사실을 전보를 통해 모스크바에 있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모스크바와 보스턴 사이의 최초의 전보가 바로 이것이라는 후문도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루빈시타인이 지휘를 맡아 1878년 3월 22일에 이루어 졌다.
헌정과 수정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원래 헌정받기로 되어 있었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아니라 당시 거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던 젊은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바쳐졌으며, 1875년 오케스트라 파트의 수정을 마친 후 다시 헌사를 한스 폰 뷜로로 수정하였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한 음표도 바꿀 수 없다'라고 고집을 피우던 차이코프스키이지만 나중에 이 곡의 기술적인 부분을 약간 수정하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악보로 수정된 것은 작곡된 지 약 15년이 지난 1889년 경이며 이 곡을 런던에서 초연한 영국의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단로이터에게 기술상의 조언을 받았다.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 대해서 조금쯤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하다. 현재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로 되어 있는 1악장의 서주도 원래는 '안단테'로 되어 있었으며 3악장의 코다 도입부 직전에 나타나는 'Tempo primo, ma tranquilo(원전에는 Tempo I ma piu plus lent)'의 속도지시를 비롯한 다양한 속도변화 지시는 거의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코다의 튜티가 시작되지 전의 피아노가 연주하는 맹렬한 옥타브 역시 대폭 수정되었는데, 원래 상당히 단순하고 직선적이던 이 부분이 수정에 의해 매우 극적이고 화려한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변화하였다.
출처 : 고클래식
막판까지 드리프노브와 저울질 했는데 드리프노브의 화려함보다는 Matsue 의 진중함을 택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쌓일수록 더 가슴에 남는 협주곡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원래 피아노 환상곡으로 발표할 예정이였던 곡을
클라라와의 결혼으로 안정을 찾은 슈만이
나머지 악장을 4 년에 걸처 작곡하여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슈만 곡에서 특이한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악장의 중요 주제가 2 악장 3 악장에서 변형 되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인데요.
이제 여러분은 주제와 변주 그리고 반복이라는 중요한 틀을 느낄수 있게 된겁니다.
키신의3 악장은 인간이 칠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공포에 가까운 명연입니다.
줄리니의 의연한 뒷받침도 젊고 혈기 넘치는 키신을 잘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끝없이 뻣은 도로위로 걸어가는
얇은 걷옷을 걸친 나그네의 쓸쓸함 같은 슬픔과 오열의 협주곡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는 그리그가 작곡한 소나타 형식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노르웨이풍의 서정과 리스트풍의 화려한 연주회 효과가 3악 중에 교묘하게 어울린다. 그리그를 낳은 베르겐 항구 근처는 비외른손의 소설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암석이 많은 황량한 산악이 피요르드의 해안 가까이까지 뻗치고 있으나 그러한 풍토나 짙은 조수의 내음, 또 안개가 많은 노르웨이의 기후가 낳은 환괴적(幻怪的)인 옛이야기 같은 분위기 등에 그리그가 강하게 이끌려 있던 것을 이야기하는 명곡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피아니스트 Leif Ove Andsnes 의 주특기.
현시대의 거장중 한명으로 우뚝선 그의 명연주를 즐기시길...
가슴으로 쓰는 피아노의 시
쇼팽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Op. 11)는 프레데리크 쇼팽이 1830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인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의 국립 극장(Teatr Narodowy)에서 열린 그의 고별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작품에 “1번”이라고 번호가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피아노 협주곡 2번보다 나중에 완성된 곡이다. 폴랜드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쇼팽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업자에게 의뢰하였으나, 지금의 피아노 협주곡 2번(Op. 21, 작곡일자는 더 빠름)이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들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피아노 협주곡 1번(Op. 11)만 먼저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악장은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더 트루먼 쇼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그 악장 전체가 연주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악장은 대한민국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쇼팽 스페셜리스트 잉그리드 플리터는 2000년 바르샤바 쇼팽 국제 대회에서 2위를 수상한 이후 쇼팽스페셜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남미특유의 기질과 우아한 프레이징과 속도감 넘치는 테크닉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베토벤 팬보이 브람스의 회심의 걸작
여친에게 잘 보이려고 만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알려져 있듯이 브람스는 1번을 작곡하고 20년이 넘어서야 2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브람스는 1번을 완성한 직후에 2번을 쓸 의사를 이미 표명했었지요. 하지만 1번이 라이프치히 연주회에서 엄청난 혹평(물론 지난 회에서도 말했듯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돼 있었습니다)을 받자 곧바로 작곡에 착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두번째 협주곡은 더 좋은 곡을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라이프치히에서 겪었던 모욕은 자존심 강한 브람스의 마음에 상처를 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브람스가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한참 뒤에야 작곡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정황상 유추가 가능할 뿐이지요. 하지만 오랜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두번째 협주곡은 다른 울림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은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를 쓸 무렵, 브람스는 음악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878년부터 작곡을 시작해 1881년에 마무리했으니, 말하자면 브람스가 쉰살을 눈앞에 두고 완성한 곡이지요. 이 때쯤이면 생활도 많이 안정되고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명성도 상당히 얻었을 때였습니다. <독일 레퀴엠> 같은 걸작을 비롯해 교향곡 1번과 2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이미 완성해 초연한 뒤였지요. 그리고 브람스는 이 무렵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브람스의 덥수룩한 모습은 이때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아주 말쑥하고 단정했지요. 꽃미남 청년이었던 브람스는 수염이 북실북실한 중년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갔고 체중도 많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술과 담배, 커피를 무척이나 즐겼다고 하지요. 그래서 점점 더, 배가 불뚝 나온 털북숭이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브람스의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결국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중년의 브람스가 20년의 장고 끝에 날린 회심의 강펀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풍노도처럼 격정적인 곡은 아닙니다. 오히려 청년기에 작곡했던 1번이 더 격렬하지요. 쉰살을 바라보는 브람스는 매우 신중해져 있었고, 그의 관현악법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1번에 비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완성한 직후에 엘리자베스 폰 헤르초겐베르크에게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는 편지를 보내지요. 참, 이 여성은 누굴까요? 그녀는 브람스의 피아노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빼어난 외모의 그녀에게 마음이 끌릴까봐 두려워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마음에 품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실제로 브람스는 여러 여성과 교제를 했지요. 하지만 결혼 직전에 번번이 관계를 단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것이 꼭 클라라 때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브람스라는 남자의 기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르초겐베르크는 브람스와 ‘우정’을 나눈 여자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가 협주곡 2번의 특징을 “사랑스럽고 연약한” “정말 작은” 등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대체로 ‘브람스적 역설’이라고 해석합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과는 달리, 이 협주곡이 중후장대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지요. 1번보다 곡의 길이도 긴데다 당시의 협주곡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4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도의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어서 피아니스트들에게 이래저래 부담이 되는 곡입니다. 하지만 피아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는 1번과 달리, 중년의 브람스는 이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등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출처:체널예스 문학수님
꽃미남 Freire 가 이리 늙다니.ㅠ.ㅠ
하지만 연주는 신의 영역에 들어섰군요.
브람스 협주곡 1, 2 번 다 압도적인 연주입니다.
빵~~~하는 시작과 폭포처럼 쏫아지는 피아노 소리로 사람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협주곡의 황제 피아노 협주곡의 모든것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작곡한지 약 2년 반 뒤인 1811년 11월 28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에서 성공리에 초연됐다.
초연 당시에, 피아노 파트는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1786 - 1853)가 협연했으나, 지휘는 베토벤 자신이 직접 맡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베토벤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 (1791 - 1857)가 협연한 빈 에서의 첫 연주(1812년 2월 11일 밤)때에는 무지한 청중의 무덤덤한 반응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월광' 소나타 또는 '운명' 교향곡 등의 별칭은 대체로 베토벤의 뜻과 무관하게 그의 사후에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나, 이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라는 별칭은, 베토벤의 막역한 친구인 독일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겸 출판업자 요한 B. 크라머 가 런던에서의 출판을 위해 넣은 것으로 사전에 베토벤과의 교감이 이뤄졌다고 볼 수도 있다.
곡의 구성은 다음과 같으며, 총 연주 시간은 38분 정도이다.
Allegro
Adagio un poco mosso
Rondo - Allegro ma non troppo
베토벤의 다른 마지막 협주곡들처럼, 피아노 협주곡 5번의 첫 번째 악장 역시 꽤 길다. 이 협주곡의 제1 악장 도입부분에서 피아노 카덴차는 즉흥이 아니라 악보대로 연주되며, 제2 악장과 제3 악장 사이는 쉬임 없이(즉 attacca 로) 연주된다.
출처:위키
러시아의 샛별 Sudbin 의 연주는
담백하고 세밀하며 그의 카덴차는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윈윈 하는
멋진 모습으르 보여줍니다.
상당히 많이 연구한 모양. 녹음 또한 훌륭합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하는 신이 만들어 적어준 악보
바흐 키보드 협주곡 "라르고"
바흐의 협주곡 열세 곡은 한 대 이상의 하프시코드와 현악기를 위한 곡들로, 라이프치히 시대의 작품이다. 아마 1729년에서 1744년경에 음악 감독으로 있던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해 이 작품들을 썼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이전에 쓴 현악 협주곡을 편곡한 것들로, 가끔 아들들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엠마누엘이 콜레기움 무지쿰에서 연주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은 훗날 건반 협주곡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설령 이 작품들 중에 C장조 협주곡(BWV 1061)만이 유일하게 원래부터 두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건반곡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바흐의 전기 작가인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은 이 작품에 대해 “바로 어제 작곡한 것처럼 신선하다. 마지막 알레그로는 정석을 그대로 따르는 훌륭한 푸가이다.”라고 했다.
1,2 두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흐 스페셜 리스트중 한분이십니다.
투명한 물속에서 유리구술을 건져 올릴때의 그 느낌. 그대로 연주 하시는분.[네이버 지식백과] 하프시코드 협주곡 [Harpsichord Concertos]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 2009.6.1, 마로니에북스)
검은 템즈강 저 밑에서붙어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영혼으로 써내려간
엘가의 첼로 협주곡엘가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첼로 협주곡입니다.
이 곡은 굉장히 슬픈 곡입니다 어째 곡 전체가 다 멜랑꼴리한 선율을 가지고 있지요
단 한번도 밝은 느낌을 주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곡인거 같습니다
특히 첼로 협주곡인 만큼 첼로의 소리가 정말 매력적인 곡이죠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이자리에 서기까지 뒤프레를 빼고 이야기 할 수 가 없습니다.
나중에 꼭 이 분의 연주를 찾아서 들어보시고
그 슬픈 이야기도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Queyras Belohlavek 자체가 복합적인 연주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엘레강스하고 나이스한 스타일이 이 어둡고 습한 곡을
잘 해석하고 있습니다.
촌스러움이 세계를 정복하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1894년 가을, 드보르작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첼로 협주곡(B단조)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들을 작곡했고 그 모든 경험이 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사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몇 달 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느낀 강렬한 체험에서 출발했다. 그때 빅터 허버트(Victor Herbert)라는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 2번을 처음 듣게 된 드보르작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드문 편성인 세 대의 트롬본을 사용한 점이 드보르작이 받은 감동을 증명하고 있다. 작곡가의 미국 체류 경험은 이 첼로 협주곡에 새로운 영감을 제시했으며,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문화가 체코의 슬라브 문화와 만나서 의미 있는 형식을 이끌어냈다. 만약 드보르작이 유럽에서만 활동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로 협주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첼로 협주곡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초연은 작곡가와 찰떡 궁합을 자랑하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š Wihan)과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복잡해졌다. 런던 필하모니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초연자로 첼리스트 레오 스턴(Leo Stern)을 강력하게 밀어부쳤고 작곡가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미안합니다만 이 첼로 협주곡을 지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오랜 친구인 비한에게 초연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런던 필하모니가 나의 첼로 협주곡을 그 날 꼭 연주해야 한다면, 저는 함께할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다른 기회가 또 있을겁니다.”
드보르작 자신은 이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런던 퀸즈 홀에서 1896년 3월 19일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니와 레오 스턴이 세계 초연의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같은 해 4월 17일에 이루어진 프라하 초연 때도 스턴이 연주했다). 이 일로 인해 체코 음악계의 거물이었던 비한과의 사이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드보르작의 마음 속에는 이 작품을 위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애썼던 스턴이 아니라 계속 딴지를 걸었던 비한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 같다. 첼로 협주곡의 헌정을 비한에게 바쳤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 대한 브람스의 반응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군가가 이와 같은 첼로 협주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이와 같은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만큼 드보르작의 이 작품은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첼로 협주곡이다. 영국의 첼리스트 줄리어스 해리슨은 “나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낭만 음악이라는 넓은 정원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꽃이라 생각한다” 라고 말하며 이 곡의 위대함을 칭찬했다.
이시대에 가장 로맨틱한 체리스트
카프송의 전매특허 레퍼토리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한느 첼리스트이기도 합니다.
첼로를 독주 악기로 성공시킨 행복했던 슈만의 추억
슈만 첼로 협주곡
슈만 역시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는 데 많은 고민과 시간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던 슈베르트는 예외로 치더라도, 그의 선배격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이려니와 동시대 동료인 리스트나 쇼팽, 멘델스죤, 브람스 등등 역시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첼로를 위한 작품 수는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피아노를 반주로 사용함으로써 첼로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독주악기로서 개성을 발휘하게끔 이끌었다.
베토벤, 브람스, 쇼팽 등이 작곡한 첼로 소나타들의 경우가 바로 그 예다. 첼로는 독주악기로서, 그리고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가장 서정적인 악기가 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의 환상적인 레치타티보도 그러하거니와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도 선율을 주도하는 악기는 바로 첼로였다. 더군다나 브람스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에서도 첼로의 역할과 비중을 높게 할애해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가진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19세기 초중반은 첼로라는 악기에 대한 비르투오소적인 관점이 팽배해지던 시기였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이후 첼로에 대한 관심은 본격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생상스, 랄로를 비롯하여 미요, 뒤티외, 포레, 댕디, 미요, 뿔랑,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등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첼로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다. 특히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달라피콜라와 크세나키스 등의 작품들은 첼로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과 표현력을 확장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운데 슈만의 [첼로 협주곡]이야말로 그 기법과 표현력, 형식면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첼로라는 악기는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기 이전부터 슈만에게 있어서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슈만과 첼로는 대단히 극적이며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은 슈만의 마지막 작품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은 피아노 작품으로, 1853년 10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gesänge der frühe] Op.133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슈만의 마지막 관심 대상은 바로 첼로였다.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에서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로망스]라는 작품이 슈만의 진실된 마지막 작품인 것이다. 슈만이 세상을 뜬 뒤 40여 년이 지난 1893년에 클라라 슈만은 요하임의 권유로 이 작품을 불에 태워 파기해버렸는데 만약 이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슈만의 천재성이 최고도로 발휘된 감동적인 걸작으로 평가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망 전마지막 행복한 시기에 작곡된 작품
1849년에 슈만은 괴테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드레스덴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슈만은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같은 제목의 극음악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바이마르에서 공연했다. 당시는 슈만에게 있어서 풍부한 결실의 해로서 수많은 합창곡과 관악기용 작품이 탄생했다. [피아노와 호른을 위한 네 개의 행진곡] Op.76,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위한 환상 소곡집] Op.73, [네 개의 호른과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Op.86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슈만은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음악가를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난 슈만 부부는 운 좋게도 1850년 가을 뒤셀도르프에 새로운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자유롭고 친절한 분위기가 슈만 부부로 하여금 행복한 나날을 꿈꾸게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클라라는 남편이 지휘대에 오르게 된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다. 이렇게 작곡과 연주 모두에서 로베르트는 진정한 음악적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이분의 모음을 한번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독일출신의 세계적 첼리스트입니다.
리히터.호로비츠.루빈스타인.제르킨,켐프,에밀길레스.프랑소와즈.미켈란젤리.아르헤리치.
폴리니,박하우스,리파티,코로토,브렌델,아라우,뒤프레,로스트로비치,카잘스,푸르니에,장드롱 등은
일부러 포함하지 안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비까 번쩍한 저분들의 녹음은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세요.^
저는 키신 빠돌이입니다.
솔직히 저기 추천 리스트 전부 키신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용량이 부족해서 더 정보를 넣고 싶지만 넣지 못하네요.
그럼..
à la belle étoile
모짜르트를 빼고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다려주세요.^
공간이 조금 남는것 같으니 보너스 영상
정명훈+키신 라흐마니노프 2번 전곡
예프게니 키신 라흐마니노프2번 지휘정명훈 + 비창 교향곡 까지.
'인생 > 음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피아노 독주곡 (0) | 2015.03.19 |
---|---|
[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 (0) | 2015.03.19 |
[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바로크음악 (0) | 2015.03.19 |
[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오! 마리아(프리 마돈나) (0) | 2015.03.19 |
[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실내악 (0) | 201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