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입문자를 위한 바로크음악
인생/음악이야기 / 2015. 3. 19. 18:17
에반게리온 아스카 라스트 전투씬
세상의 모든것을 포용한 바흐 관현악 조곡
바흐가 30대 쯤에 작곡에 미쳐 있을때, 자고 일어나면 작곡만 하던 그 시절.
교회, 영주등 그당시 상위 계급의 빨때꼽고 곡을 써내라고 했지만,
거침 없이 작곡하여 다 만족 시켰던 그시절 만들어진 곡입니다.
당연히 창작열 최고조 일때라서 곡의 수준이 엄청납니다.
오늘날의 조곡이 모음집을 뜻하는데, 바흐시대는 조곡 형식이란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는 무슨 조곡 어쩌구 조곡 하는게 무진장 많아요.
각설하고 이 음반은 1 번의 그 장엄함으로 시작해서
3 번으로 넘어가면 그 유명한 "AIR" 가 납옵니다.
우리가 "지 선상의 아리아"라고 알고 있는 곡이 이겁니다.
아마 편곡만 한 1 천가지는 될듯.
프랑스풍의 스케일 큰 서곡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서곡들'이라고 불리우는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타일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결합했다. 라이프치히의 칸토르 바흐는 그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해 단순히 춤곡들을 엮어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조의 효과를 강조하고, 관현악을 세련되게 다듬었으며, 대위법적인 요소를 강화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 장르를 재창조했다. 2세기가 지났지만, 바흐의 이 걸작은 대체 불가능한 바로크 시대의 보물로 남아있다.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시대 악기 연주로서는 쉽사리 도달하기 힘든 세련미와 기교적 완벽함을 바탕으로 바흐의 이 걸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모든 시도의 새로운 종착역 같은 음반.
헨델수상음악
바로크음악의 화려함의 끝판왕 수상음악
《수상 음악》(水上 音樂, Water Music)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작곡하여 여러 관현악 악장을 모은 곡으로, 흔히 세 모음곡으로 여겨진다. 조지 1세 임금이 템스 강에서 연주회를 요청하여 1717년 6월 17일 초연되었다. 이 연주회는 왕의 유람선 선상에서 임금과 측근들이 듣는 가운데 50명의 악사들이 공연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왕의 측근 가운데는 볼튼 공작부인, 뉴캐슬 공작부인, 고돌핀 백작부인, 킬마르노크 부인, 오크니 백작 등이 있었다) 조지 1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하여 지친 악사들로 하여금 이 곡을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자곡가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된 귀족의 선전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王宮의─音樂,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HWV 351번)은 1749년 조지 프리드릭 핸델이 작곡한 모음곡으로,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불꽃놀이를 열기 위하여 영국의 조지 2세 임금이 요청하여 만든 음악이다. 이때 불꽃놀이 행사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종식되고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해 알렸다.
연주 악사들은 극장 설계자인 세르반도니가 고안한 특별 건물에서 연주를 하였다. 이 음악은 토머스 드굴리에(Thomas Desguliers)[1]가 계획한 왕궁 불꽃놀이 행사의 배경 음악이었다. 그러나 음악에 비해 불꽃놀이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조지 2세의 부조가 무너지고 난 뒤 거대한 목조 건물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행사 6일 전인 4월 21일에 벅스홀 가든에서 리허설을 해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연한 바 있었다.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2실링 6펜스를 내고 공연에 몰려들어, 당시 새로이 건설했던 런던 다리의 중앙 아치가 무너져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어 이곳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마차로 3시간 동안 교통 정체를 일으켰다.
출판 당시 헨델은 이 곡을 서곡으로 내놓길 바랐으나, 왕실에서는 인기 없던 조약과 군주를 위한 선전 수단으로 삼고자 이 곡을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라고 명명하도록 하였다.
출처 : 위키
호른과 오케스트라가 화려한 대화를 펼치는 1곡에서부터 지휘자 사발의 빼어난 해석이 돋보인다. 참으로 나긋나긋하면서도 상쾌하다. 제 3곡 프랑스풍의 춤곡 부레도 우아하기 그지없는데, 특히 애조띤 표현에서의 오묘한 표정이 일품이다. 사발의 지휘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지만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바로크 양식에 매우 충실한 연주를 들려준다.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에 관한 한, 사발의 연주가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음반의 연주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것이 아닐까!
물론 다른 명반도 많지만
워터랑 불이랑 같이 있고 게다가 사발!
바흐 브란덴부르크
글쓴이가 젤 먼저 돈 주고 샀던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안는 음악!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총 여섯 곡의 협주곡 세트. 떡밥처럼 되어 있는 제목에 낚이거나 키워를 벌일 가능성이 충만한 곡인데, 실제로 이 곡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예 이 곡만을 파고든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
1. 개요
바흐는 수백 곡에 달하는 칸타타나 성경의 복음서를 기본으로 한 수난곡을 비롯한 종교음악 작곡가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소나타나 협주곡, 독주곡 등 세속 기악곡도 꽤 여러 종류를 작곡했다. 1721년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협주곡 세트는 그 중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데, 다만 제목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세트는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공작이었던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헌정되었는데, 곡의 이름도 공작의 영지였던 브란덴부르크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작곡될 때부터 브란덴부르크 공작에게 헌정하겠다고 마음먹고 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악기 편성을 살펴보면 오히려 브란덴부르크 공작 소속의 악단보다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쾨텐 궁정악단의 편제에 더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협주곡' 이라는 명칭도 고전 시대 이후 확립된 것과 꽤 차이가 많은데, 온전히 이해하려면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곡을 관현악 장르에 넣을지, 아니면 실내악의 범주에 놓고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꽤 논란이 많았다.
2. 각 곡에 대해
일단 곡에 따라 다양하게 첨가되는 독주악기나 관악기 등을 제외하면 현악 파트의 기본 편제는 현악 5부(바이올린 I&II-비올라-첼로-비올로네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 관현악처럼 한 파트에 여러 명이 들어가는 현악 합주로 보느냐, 아니면 파트 당 한 사람씩 쓰는 경제적인 실내악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연주 편성이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3번이나 6번같이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바로크 음악의 감초인 통주저음도 물론 쓰이는데, 대개 하프시코드(독일어로는 쳄발로)가 맡는다. 독주 악기나 그에 준하는 파트가 앞에 나서는 대목이나 느린 악장에서는 모든 현악 파트가 쉬고 첼로 한 대만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곡이 다 그런 것도 아니다. 독주 악기의 선택에 관한 문제도 있어서,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꽤 골치아픈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 물론 이것을 다양한 선택의 여지로 해석하고 즐기는 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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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엔하위키미러
생명력과 기쁨이 흘러 넘치는 이탈리아적 미감의 극상!
알렉산드리니는 마치 바흐가 원하는 최고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수없는 연습을 통해서 이 음반을 만들었다.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
*인터내셔널 레코드 리뷰 - 커버 스토리
앨범이랑 딱 떨이지진 안지만 참고하시라고, 연주가는 같은팀
세상의 모든 아침. 그 노래 그 작곡가 마랭마레
1656년, 파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성가대에서 노래
했다. 호트만(Hotman)과 쌩콜롱브(Sainte-Colombe)에게 비올을 사사하고
20살 때 왕실 오케스트라에 독주자로 입단해서 연주했다. 같은 무렵에 장 밥티
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가 이끌고 있었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 오케스
트라에서도 연주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륄리로부터 작곡기법을 익혔다.
륄리에게 배우는 동안 그의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1676년에 궁정음악가
로 시작해서 1725년까지 루이 14세와 15세를 위해서 근 50여년간 봉직 했다.
작곡가로서는 5권의 비올 소품집을 썼고(이 곡집엔 550곡 이상의 다양한 비올
작품이 있다), 그 작품들이 당시 궁정에서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비올 제국을 세웠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이밖에 륄리의 영향으로 4곡
의 오페라 <알시드, Alcide>, <아리아드네와 바카스, Ariadne et Bacchus>,
<알시오네, Alcione>, <세밀레, Semélé>를 썼고, 트리오 소나타, 테 데움 등
의 작품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도처에서 자주 연주되었
다. 마랭 마레는 당시 이탈리아의 음악적 영향 아래 있었던 프랑스 음악을 독
창적인 프랑스 음악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비올은 17세기와 18세기에 널리 연주된 악기로 크기에 따라서 모두 9종이 있었
다. 그 모든 비올을 통칭해서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라고 불렀다. 마
렝 마레의 연주가 얼마나 신기에 가까웠는지 블랑(Hubert le Blanc)은 “천사처
럼 연주했다”고 썼고, 요한 발터(Johann Gottfried Walther)는 “비교할 자 없
는 프랑스 비올리스트”라고 놀라워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유럽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품”이라고 요아힘 네마이트(Joachim Christoph
Nemeit)가 평가했고, 티톤(Titon)은 “풍요롭고도 우아한 재능이 넘쳐나는 작
품. 어디에서건 훌륭한 맛과 놀라운 다양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레는 카트리느 다미쿠르와 결혼하여 1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음악인생
은 1991년에 제작된 영화 <세상의 모든 음악, Tous les matins du monde>에
서 잘 그려졌다.
출처:곽근수의 음악 이야기
마리안 뮬러는 제가 특집으로 다룬적이 있습니다.
바흐 첼로 조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작곡한 여섯 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역사상 무반주 첼로 솔로를 위해 쓰인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곡들은 바흐가 en:Köthen에서 카펠마이스터로 활동했을 때인 1717년부터 1723년 사이에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모음곡들은 다양한 기술적 요소, 풍부한 감정적 표현, 그리고 바흐의 호소력 짙은 음색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음곡들을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바흐의 작품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친근함'이 아닌가 싶은데, 이는 각각의 스타일을 열령하게 추종하는 애호가들이 원하는 만큼 다양한 음악적 해석을 바탕으로 녹음한 곡들이 많다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원래 이 모음곡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다리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다 감바 스타일의 첼로가 아닌 바이올린처럼 어깨에 얹고 연주하는 다 스팔라 악기를 위해 작곡되었다고 한다. Sigiswald Kuijken과 Ryo Terakado는 오늘날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로 알려진 이 악기로 연주한 첼로 모음곡 음반을 발표했는데 이 악기들은 악기 제작자 Dmitri Badiarov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당시의 악기들을 일컫는 용어의 범람은 오늘날 큰 혼란을 유발했으며, 이 덕분에 "바흐가 의도했던" 악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토론은 현재진행형이다.
모음곡들은 바이올린, 비올라, 더블 베이스, 비올라 다 감바, 만돌린, 피아노, 마림바, 클래식 기타, 리코더, 프렌치 호른, 색소폰,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트롬본, 유포니움, 그리고 튜바와 같은 다양한 악기들로 편곡되어왔다.
모음곡들이 작곡된 연도를 완벽히 정립하는 것은 모음곡들이 작곡된 순서와 바이올린 소나타와의 전후관계를 고려해보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작품들의 스타일을 비교분석했을 때, 첼로 모음곡들은 바이올린 소나타들이 작곡된 1720년 이전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첼로 모음곡들은 1900년대 이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았고 보통 이 작품들이 에튀드의 목적으로 쓰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13세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그뤼츠마허판본의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했다. 그가 이 곡을 공개적으로 연주한 것은 그의 나이 48세였던 1925년이었다. 그는 그의 연주를 녹음하는 것을 동의했고, 처음으로 여섯개의 조곡 전부를 녹음한 그의 음반은 곧 유명세를 탔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연주 중 하나이다.
무반주 첼로 조곡에 피아노 반주를 작곡하려는 시도는 슈만에 의해서 상당히 진전되었고, 1923년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는 모음곡 2번과 3번, 5번을 솔로 피아노를 위해 대위법을 사용한 편곡을 완성했다.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와는 다르게,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자필 서명된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연주용 원본 악보는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안나 막달레나의 자필본을 포함한 2차 자료들을 분석해서 슬러나 기타 아티큘레이션 기호를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원본 악보에 상당히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단독 인정된 버전이 아닌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다윈시에 위치한 찰스 다윈 대학교 음악 대학의 Martin Jarvis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는 안나 막달레나가 그녀의 남편의 이름으로 된 이름의 작품 중 몇몇 곡을 직접 작곡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Jarvis는 막달레나가 여섯 개의 첼로 모음곡을 쓴 장본인이며, 골드베르크 변주곡 (BMV 988)의 '아리아'를 작곡하는데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많은 수의 음악학자들과 연주자들은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빈약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카잘스가 생전에 사용했던 첼로, 마태오 고플리러와 스승 레오나드
로즈의 활로 연주하는 그의 바흐는
가슴 넘치는 감동이 있습니다.
현대 음악 전문가신데, 그가 보케리니로 데뷔하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역시나 시대의 첼리스트임이
여지 없이 들어나네요.
3CD 입니다.
쿠푸랭 키보드
몇 백년전 작곡한 그곡이 오늘날 더 세련되게 들리는 마술 쿠프랭
쿠프랭의 키보드 워크
프랑수아 쿠프랭 (François Couperin, 1668년 ~ 1733년) 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대(大) 쿠프랭이라고도 한다.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쳐 파리에서 알려진 음악가의 가계(家系)인 쿠프랭 일족(一族) 가운데에서 최대존재라는 점과, 그의 백부(伯父) 역시 같은 이름 프랑수아이기에 구별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쿠프랭가(家)는 루이, 프랑수아, 샤를의 3형제가 장크 샹폴 드 샹포니엘(1602-1672,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창시자라고도 한다)에 의하여 파리에 초대받은 후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루이, 그리고 그가 죽은 후는 샤를이 생 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으나 대(大) 쿠프랭은 샤를의 아들로 그도 역시 이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다(샤를이 죽은 후는 이 직책을 대행하고 있던 랄랑드에게서 1685년 내지 1686년에 이어받아 1723년에 조카인 니콜라스에게 양도했다). 1693년 콩쿠르 결과, 그를 부친과 함께 가르친 토므랑의 후임으로 왕궁 교회당의 4인과 오르가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 뒤 부르고뉴공에게 클라브생과 작곡을 가르친 것을 계기로 왕족·귀족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이름 높은 루이 왕가의 신임도 두터웠으나 끝내 별로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작품 세계
그는 오르간 음악, 종교음악, 나아가서는 실내음악의 작곡가로서도 뛰어났으나 특히 그의 이름을 영원토록 한 것은 클라브생을 위한 작품군(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샹보니엘에서 루이 쿠프랭, 장앙리 당글베르(1628-1691), 니콜 르베그(1631-1702, 오르가니스트), 리자베트클로드 자케 드 라 게르(1664경-1729), 대(大) 쿠프랭, 루이 마르샹(1669-1732, 오르가니스트), 루이 니콜라스 크레랭보(1679-1749, 오르가니스트), 라모, 루이 클로드 다캉(1694-1772)으로 계속되는 베르사유 악파 클라브생 음악가의 빛나는 계보에서 대(大) 쿠프랭이야말로 뛰어난 거장임에 틀림없다. 그는 4곡에서 수십곡에 이르는 소곡을 모음곡으로 정리하여 오르돌이라 했다. 한곡 한곡의 각 소곡은 전통적인 춤곡적인 요소를 남기고는 있으나 문학적 내지 회화적인 표제를 지니며 암시적으로써 듣는 이의 상상력을 한층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섬세한 울림과 우아한 꾸밈음(裝飾音)으로 장식된 유려한 멜로디는 이른바 로코코의 세련된 감각미로 넘쳐흐르나 밑바닥에는 때때로 깊은 우수가 간직되고 또한 기지(機智)와 풍자를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항상 절도가 있는 억제가 오히려 감성의 풍요함을 돋보이게 한다. 억제와 고귀한 질서에 의한 애호(愛好)로 쿠프랭의 고전주의적인 성격은 뚜렷하며 그는 라모와 함께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절정으로 쌓아올렸으며 '이성(理性)과 감정의 약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에 두어진 표정적인 감성'으로 바흐나 헨델과 같은 이국(異國)의 거장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大) 쿠프랭의 클라브생곡은 1713, 1717, 1722, 1730년에 출판된 4권의 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240곡(27오르돌)에 덧붙여 1716-17년의 전주곡 6곡이 있다. 이 밖에도 모테토나 종교곡을 주로 하는 성악곡, 오르간을 위한 2개의 미사곡, 코렐리의 영향을 보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종합하려는 듯한 여러 가지 실내악곡 등, 어느 작품이나 모두 거장 대 쿠프랭의 이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출처:위키
틱 톡 쇽, 쿠프랭, 배회하는 망령, 편물짜는 여자, 키타이롱의 자명종, 선발된 뮈제트, 아탈랑트, 파사칼리아,
뮤즈 플랭탱, 전리품에 계속되는 노래, 전쟁의 소음, 자장가 또는 요람에의 향수, 몽상가, 귀여운 어린이 또는 사랑스런 라주르 외
바로크 음악 해석에 탁월한 선택! 라벨의 솔로 피아노 전곡집과 장 필립 라모 헌정 녹음의 호평으로 ‘디아파종 도르’, ‘르몽드 드 라 뮈지크’의 쇼크상 외에도 BBC 뮤직 매거진, ‘스탠더드’ 지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며 세계 피아노 음악계에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알렉상드르 타로는 2006년 11월에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내한 공연에서 순도 높은 음악세계를 들려준바 있다. 매우 지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연주를 들려주는 그는 HMF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2006년 5월 파리 상젤리제 극장에서의 공연은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크게 드높이게 된 연주회였다.. 특히 그의 라모 등의 바로크 음악 해석은 클라브생 연주자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해석을 하고 있다. 쿠프랭의 클라브생 모음집은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음반으로 현대악기와 고악기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속에서 타로의 연주는 그런 논쟁이 다 필요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올해를 빛낼 가장 휼륭한 음반 중에 하나이다. *음악의 세계 쇼크, 클래식투데이 만점, 스케르초
헨델 키보드 조곡
달빛흐르는 푸른밤을 날아서 추억을 마주하는 시간
헨델의 키보드 조곡
<런던 모음곡>으로도 알려져 있는 1720년 헨델이 직접 출판한 건반을 위한 8개의 대 모음곡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한 작곡가의 초기 걸작이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사 스미르노바는 헨델, 바흐에서 하이든, 슈베르트, 그리고 슈체드린, 실베스트로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팩트럼의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최근 유행하는 시대악기 연주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피아노의 풍성한 울림으로 작품의 아름다움을 한껏 펼쳐내고 있다. 특히 모음곡 2번 아다지오의 청아한 선율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연주를 전면에 내세움으로 그 차별화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바로크시대의 대세 음악은 이것
"라 폴리아"
그윽한 품격으로 승화된 격정적 무곡
원래 포르투갈의 격렬한 무곡이었던 폴리아는 16,17,18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고, 작곡가들은 이 선율을 가지고 많은 변주곡을 남겼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이 음반에서도 압권이지만, 단연 코렐리의 것이다. 코렐리의 작품같은 경우 우리는 오늘날 세련되고 달콤하게 편곡된 것에 익숙해있지만, 도저히 옛 악기, 옛 편성, 옛 방식으로 들려주는 그윽한 옛맛을 내지는 못한다.
* 디아파종 '황금상'
* 음악의 세계 '충격적인 명연주'
* 레페르트와르 '최고의 평점'
여러 작곡가의 라폴리아를 모은 겁니다.
알비노니 파헬벨.코렐리,바흐.헨델.비발디. 기타등등
바로크 대표곡 모음
원래 모음집은 이 시리즈에 넣지 안으려고 했으나
바로크의 특성상 곡이 짤막한게 툭튀어 나오는 식으로 한곡씩 있는 경우가 많아서
넣습니다.
이왕 넣는거 비교도 되고 서로 빠진것도 챙길겸 다양하게 4 개 넣었습니다.
다들 특성도 있고 연주도 훌륭합니다.
그랑사라방드만 mp3 입니다.
헨델의 사라방드(락음악에도 쓰임)가 여기에만 있어서..제대로 된것이..
현과 오르간 통주저음을 위한 아다지오 사 단조는 레모 자조토가 1958년 발표한 곡이다. 흔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자조토가 작곡한 것이다.
레모 자조토는 알비노니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피폭된 드레스덴의 작센 주립 도서관의 잔해에서 알비노니의 이 작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1998년 사망할 때까지 필사본을 공개하지 않았고, 그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자조토 자신이 쓴 작품으로 보인다.
존 다울랜드가 흘렸을 눈물의 한조각
퍼셀의 보석같은 노래들.
헨리 퍼셀(영어: Henry Purcell, 1659년 9월 10일 ~ 1695년 11월 21일)은 영국의 작곡가이다.
퍼셀의 대표 작품으로는 오페라,《디도와 에네아스》가 있다.
런던 출신으로 가수와 작곡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가곡을 쓸 만큼 재능이 풍부했지만 집안이 어려워 왕실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하프시코드를 조율하거나 악기를 손질하는 일을 했다.[1] 존 블로에게 사사했으며 1677년에는 궁정의 상임 작곡가 및 지휘자가 되었다. 1679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더 나아가 왕실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유언을 남기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죽었다.[1] 짧은 생애 동안 400곡이 넘는 다수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을 남겼으며, 이 밖에도 《디도와 아이네아스 Dido and Aeneas》(1689)를 비롯한 《아더왕 King Arthur》 《요정의 여왕》 《인도의 여왕》 등의 오페라를 씀으로써 영국 바로크음악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은 메리 2세를 위한 장례 음악이었다.[1]
퍼셀의 작품들은 기수(奇數)의 소절(小節)로 이루어진 주제(主題), 불규칙한 프레징, 박자와 리듬의 충돌 등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것들로서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의 영국음악은 그의 창작에 의하여 비로소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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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반은 그중 당연 훌륭합니다.
그당시 혁명과도 같았던 작곡가가 지금은 고전중의 고전이 된 경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이탈리아어: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년 1월 4일 ~ 1736년 3월 16일)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장중한 바로크 음악양식으로부터 명쾌한 고전파양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활약하고 27의 나이로 단명한 천재적 작곡가로 오페라 부파의 초기의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생애
중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소년 시대에 현저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영주의 경제적 원조를 얻어 나폴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는 바이올린에 뛰어났으며 특히 교사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즉흥 연주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1731년 21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오페라 및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그 뒤 불과 5년간 작곡가로 활약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폴리 귀족의 악장으로 일했으나 그 동안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에도 진출하여 1733년에 발표한 막간극(幕間劇)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으로 페르골레시의 이름은 곧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파리에서 상연된 <마님이 된 하녀>가 루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부퐁 논쟁'을 야기시킨 일은 유명하다. 1734년 2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735년경부터 지병(持病)인 폐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2월 의사의 권유로 전지요양을 떠났으나 3월 16일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풍은 장대한 구성력이 부족다는 평이 있지만 멜로디의 매끄러움, 신선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으로 걸출하다. 특히 성악의 텍스처(書法)는 광채를 느낄 수 있다.
마님이 된 하녀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볼 수 있는 오페라 부파의 전성 계기를 만든 역사적 작품이다. 등장 인물은 불과 세 사람이고 게다가 한 사람은 벙어리여서 전혀 노래를 하지 못한다. 오케스트라도 현악기만으로 된 소규모이다. 전부가 2막으로 되었다. 나폴리의 부호 우베르트는 하녀인 세르피나가 너무나 횡포를 부려, 결혼하여 세르피나를 내보내려고 결혼상대를 구해 오라고 세르피나에게 명령한다. 세르피나는 한 계략을 생각하여, 벙어리 하인 베스포네의 힘을 빌려 멋지게 우베르트의 부인으로 들어앉는다는 줄거리이다.
출처:위키
바르톨리의 스테파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디에고 파솔리스와 이 바로키스티가 우리시대 가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카운터테너 필립 야로우스키와 데카에 데뷔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율리아 레즈네바와 함께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를 들려준다. 진정 최고의 기량이라고 할수 있는 야로우스키와 레즈네바의 하모니는 소름끼치는 서늘한 감동을 안겨주며, 파솔리스의 지휘는 명료하면서도 과도한 감정을 자제하여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의 영적 깊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화성학의 대가, 신비의 작곡가였던 라모
장-필리프 라모(프랑스어: Jean-Philippe Rameau, 1683년 9월 25일 ~ 1764년 9월 12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그는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이론가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 발레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음악이론가로서 근대화성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일대기와 작품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장-필리프 라모는 디종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일찍부터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였으며, 1706년 <클라브생곡집 제1권>을 출판하였다. 1715년에는 리용에서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유명한 <화성론-Traize de l'harmonie>의 저술을 시작하고 1722년 파리에서 출판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723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면서부터는 극장에 내놓을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클라브생 제2권>을 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만년에는 프랑스의 악단을 통솔하는 궁정실내악작곡가가 되었고, 죽기 직전에 귀족으로 봉해졌는데 이 때에는 그의 명성이 점차로 높아져 1739년 걸작 <다르다누스-Dardanus>가 공연되고 있었다. 라모는 이론가 및 작곡가로서 역사상의 중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화성론>의 발표이후 화음의 전위음악에 대한 이론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현대 기능화성법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J.S.바흐와 더불어 12평균율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대가였다.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옹호자로서의 그는 륄리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율주의. 성악중심주의에 대항하여 후일의 글루크과 더욱이 바그너의 오페라 개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악작곡가로서의 그는 F.쿠프랭과 함께 표제적 경향의 모음곡을 다수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오늘날 연주회 레퍼터리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들은 쿠프랭의 선율성과 장식인 세련보다도 더욱 근대적인, 힘찬 합리적인 화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으며, J.S.바흐 등 많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발레, 오페라 분야에서는 J. B. 륄리에 의해 기초가 확립된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발레양식을 더욱 발전시켜, 음악적으로 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바흐나 헨델과 더불어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나 프랑스적인 특성과 그의 작품을 계몽하기에 부족했던 프랑스악파로 인해 프랑스 밖으로 그의 작품들이 전해지지 못했다. 독일의 지휘자 니키시는 만일 “그가 독일인었다면 바흐보다도 더욱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라모의 데뷔작인 서정 비극인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와 오페라-발레인《우아한 인도의 나라들》(Les Indes galantes)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화성론(Traize de l'harmonie, 1722년)이 있다.
4CD 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새 하프시코드를 듣고 즐기고 게십니다.
소나타의 모든것을 확립한 스카르라티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부터 당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본좌 작곡가였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매우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당대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교사들이었던 가에타노 그레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베르나르도 파스키니 등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과 작곡, 이론, 화성법, 대위법을 배운 뒤 1701년에 나폴리 궁정 예배당 전속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다.
1704년에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아들을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의 베네치아로 보내 음악적인 경험을 더 쌓도록 했는데, 이 시기 동안 초기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을 작곡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활동 양상이나 일화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이후 1709년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망명 왕실의 여왕 마리 카시미르의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 시기 동안 하프시코드 명연주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심지어 독일 출신의 동년배 라이벌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현피연주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 연주 대결은 그냥 높으신 분들의 여흥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남았다.
로마 부임기에는 건반 소나타 외에도 여왕이 운영하던 사설 극장을 위해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1715년부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가대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영국 런던에서 자작 오페라를 상연하는 등 명망있는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1719년 포르투갈 왕실에서 초빙 제의를 받고 성가대장을 사임한 뒤 리스본에서 당시 포르투갈 공주였던 마리아 막달레나 바르바라의 전속 음악교사 겸 쳄발리스트로 활동했다.
1727~28년에는 잠시 로마로 돌아가 일하면서 첫 아내 마리아 카테리나 젠틸리와 결혼했고, 1729년에 다시 스페인의 세비야로 가 4년 동안 부임하면서 그 지방의 민속 춤곡인 플라멩코를 비롯한 스페인 전통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733년에는 이전 고용주였고 1729년 스페인 왕세자와 결혼해 스페인 왕가의 일원이 된 바르바라 공주의 부름을 받고 왕실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후 평생 동안 직책을 유임하면서 수백 편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1742년에 첫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스페인 여성인 아나스타시아 마하르티 히메네스와 재혼해 여생을 보냈고, 당대 본좌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와 친교를 맺고 그를 위해 성악 작품들을 써주기도 했다. 1757년에 마드리드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산 노르베르토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앙타이는 마술을 부려서 자기만 따로 쓰는
하프시코드를 만들어 낸다.
오색창연 이란 말은
이런 연주를 위해서 쓰는말
샤르팡티에는 몰라도 이노래는 안다!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년~1704년 2월 24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랄랑드와 비견되는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 음악가인 동시에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등과 협력을 하여 코메디 프랑세즈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였고 오페라《메데》(1693)로 갈채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카리시미에게 사사하였을 뿐이나 륄리의 사망 후 이탈리아풍 부활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만년은 교육과 종교음악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100곡이 넘는 모테토 외에 많은 종교 음악이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힘찬 표현을 보이는 24곡의 《성스러운 이야기》는 카리시미의 오라토리오를 프랑스에 이입(移入)한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샤르팡티에의 ‘테 데움’은 텔레비전과 럭비에 의하여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럽 방송 연맹이 방송 테마 음악으로 이 작품의 전주곡을 사용하고 있고, 6개국 럭비 토너먼트의 찬가로도 사용되고 있어 그 어떤 클래식 작품보다 대중적이라 할 수 있다.
밝고 경쾌하며, 희망을 주는 듯한 느낌이 듣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은 CD로 2장 분량이 되는 꽤나 긴 곡입니다.간단히 곡 설명을 하자면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비발디는 평생 쓴 500여개의 협주곡 중 절반 이상이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화성의 영감 no.6는 작품번호로는 RV356에 속합니다만, 비발디의 경우 작품 번호를 Ryom이란 사람이 정리한 RV를 사용하는데, RV의 경우 일반적인 op와는 달리, 작곡가가 작곡한 순서별이 아니라, 조성별로 정리했기 때문에 작곡 시기와는 관계 없습니다. 그리고 비발디가 클래식중에서도 정말 고전인지라, 정확한 작곡시기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이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이지만, 조화의 영감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L’estro armonico'라는 부제 때문인데, 간단히 해석하면'estro'는 ‘영감’을 의미하고 'armonico'는 ‘조화의, 화성의’ 또는 ‘음악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합쳐서 '조화의 영감' 혹은 '화성의 영감'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출처:유명한 클래식이야기
그렇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때 본넘들입니다.
포첼의 신보도 좋지만 그녀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이게 좀더 씨원합니다.
2CD 입니다.
텔레만
밥먹고 X 싸는 시간까지 아마도 양손으로 작곡해댔을 바로크의 핵심! 텔레만
자면서도 작곡했을듯...
"...코렐리와 쟝 바티스트 륄리는 단지 명예를 얻었지만, 텔레만은 모든 찬사 위에 있다."
- 요한 마테존(J.Mattheson),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건반 악기 주자
1. 설명
독일 태생의 바로크 작곡가이자 악장.
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뒤늦게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이후에는 함부르크에서 악장을 맡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라이프치히 쪽의 악장 자리에 티오가 나자 거기에도 지원했지만 사실 이것은 훼이크로, 함부르크에게 자신의 봉급을 높여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 텔레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함부르크의 악장으로 지냈다.
오늘날에는 클래식덕후가 아닌 이상 생소한 이름이지만 적어도 바로크 시대 당시만 해도 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만큼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다만 바흐의 음악이 음악학적으로 파고들 만한 건덕지가 있는 대신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충분한 식견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텔레만의 음악이 대중성 측면에서는 좀 더 유리했다.
바흐와 헨델에 비하면 4세 연상이었는데, 사적으로는 바흐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텔레만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C.P.E.바흐와 텔레만의 끈끈한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서 텔레만 사후 공석이 된 함부르크 악장 자리에 C.P.E.바흐가 임명되기까지 쭈욱 이르렀다.
2. 작품세계
음악학적으로 텔레만은 후기 바로크를 빛낸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일부 작품들은 고전파적 성향까지도 예견했다는 해석도 있다. 작곡에 있어서는 장르를 거의 가리지 않아서,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양쪽에 모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오페라, 성악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건반 악기용 소품, 모음곡, 협주곡 등등 별의별 분야에 손을 댔다.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다른 지역에서 발흥하는 바로크 음악들도 한꺼번에 모아서 녹여냈으니 가히 바로크 음악세계의 도가니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텔레만의 작품들은 듣기에 부담이 없고 간결하며 직관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다. 복잡하고 현학적인 대위법이나 고난이도의 기교는 반대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다르게 말하면 아마추어도 금세 연주가 가능할 만큼 대중적이고 무난한 악풍을 보여준다. 한 예를 들자면 36개의 건반 환상곡(TWV.33:1~33:36) 같은 경우는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보다도 더 쉬운 내용이며, 유튜브에 7~8세 꼬꼬마들이 연주하는 영상들이 수두룩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은 푸가(TWV.30:21~30:26),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카논적 소나타(TWV.40:118~40:123), 네 대의 바이올린만을 위한 협주곡(TWV.40:201~40:204) 등등, 정말 기본적인 기량만을 갖춘 아마추어 하나, 둘, 셋, 넷 정도만 모이면 연주할 수 있는 작품들이 숱하게 많다.
3. 작곡하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작곡했습니다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기악곡 부문) 역사상 최다 다작 작곡가.
텔레만의 작품들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이 잊혀졌으나, 음악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현재까지 상당수가 발굴된 상태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수는 확인된 것만 무려 3,000~4,000여 곡(!)에 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일부는 텔레만의 작품들이 아마 6,000~8,000여 곡에 달하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할 정도이다. 아무튼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 중, 아침마다 가볍게 푸가 한 곡씩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는 바흐는 천여 곡 넘는 수준으로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의뢰를 받을 때마다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협주곡들을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간 비발디가 800여 곡 정도를 작곡했다고 알려진 걸 생각하면 흠좀무할 따름.(…)
사실 여기에는 안습한 속사정이 있는데, 텔레만이 이렇게 작품을 열심히 작곡해야 했던 건 그의 재혼한 아내였던 마리아 카테리나(Maria Catherina)가 도박 중독자라서(…)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작품을 출판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나.
대충 바로크 언저리에 걸쳐지면 다 바로크로 몰아서 넣었습니다.
바흐의 키보드 음악들.
얼리뮤직에 가까운 몬테베르디, 그레고리안찬트, 바흐의 칸타다와
요한 빠숑, 마테빠숑,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먼가 바스락 거리기만해도 눈물을 흘렸다는 존 다울랜드는
제가 지쳐서....빼버렸어요. 용량도 너무 많아요 .
칼리히터,호그우드,마리너,가디너,카라얀, 기타등등 기라성 같은
지휘자,고음악 지휘자등의 음반을
하나씩 찾아서 들어보시길 바래요.
à la belle éto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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