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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정서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9

2012-01-08 목양칼럼

 

설교는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과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신문’이 지금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성경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설교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험과 율법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같은 설교자로서 그 이면에 숨겨진 제3의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긍휼과 사랑, 그 정서가 없는 설교를 나는 성경에서 단 한 편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불려지는 것이리라.

설교가 막힌다. 물론 새로운 지식의 충전도 필요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나는 설교야말로 연애의 감정 속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자기가 인도해야 하는 양떼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정서와 무한한 책임감… 그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설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이 문제이다. 부부도 평생 사랑하는 것이 힘든 것이 세상이고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온갖 오류의 가능성과 문제 속에서 만난 목회자와 신자가 서로 변치 않는 사랑을 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헤어짐이 흔하다. 하지만 헤어짐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것은 비슷한 양상의 문제로 재발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하기 힘든 신자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도 다시 또 그런 신자가 찾아오고, 사랑하기 힘든 목회자를 떠나도 다시 또 그런 목회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를 어쩌랴!

비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만나는 것이다. 설교자도 예수를 통해 신자들을 만나고, 신자들도 예수를 통해 설교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we)’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사랑의 정서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 길만이 내가 스스로 설교에 실패하지 않는 길이라 믿는다. 신자들에게 더 좋은 설교를 먹이고 싶은 갈망으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강단에 서면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과 열정으로 자기에게 부어진 은혜를 쏟아내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설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설교는 강연이 아니다. 설교는 공명(共鳴)이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가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 증폭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오늘 설교에는 ‘아멘’이라는 소리가 자주, 그리고 커졌으면 한다. 그것은 설교자 개인에 대한 찬동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탄성이며, 감동이어야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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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목양칼럼

 

아기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감정이 순해진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이제는 잊고 살아가는 모습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감정과 생각이 아주 단순해서 평화롭던 시절, 울음소리조차 편안하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아기의 손은 투명하다. 햇살이 투과하는 손가락은 현실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심지어 아기의 체모조차 투명해서, 한국에서는 그것을 ‘솜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햇살은 아기 위에 내려앉고 미끄러진다. 빛이 흐르는 아기의 몸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누구나 흙과 함께 빛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현실의 나는 어떠한가? 우선, 감정이 너무 복잡하다. 내가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나도 모를 때가 많다. 웃으면서도 분노하고, 울면서도 계산한다. 과감하고 단호해지기를 추구하지만, 현실의 감정은 항상 지저분하다. 이러면서도 저러고, 저러면서도 이러한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을 흔들고 나면, 나조차 나를 모르겠고 사랑하기 버겁다. 그러니… 하물며 누구에게 사랑을 바랄까!

눈빛도 탁해졌다. 간혹 실핏줄도 터져있다. 빛은 흐르지 못하고 몸에 고인다. 그늘이 축축하게 깃들어 몸이 춥다. 흙과 빛으로 지어졌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흙만 남은 것 같다. 싫지만 날마다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난 날이다. 예수님의 생일이다.

하나님은 왜 아기가 되었을까? 이 시즌에는 백화점마다, 성당마다, 교회마다 작은 마구간의 모형을 만든다. 거기 엄마와 아빠와 아기가 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참한 환경이지만 가장 환하고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있다.

난 이 장면을 모형과 그림으로 볼 때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추억한다. 나도 저렇게 행복했지. 나도 저렇게 욕심이 없었지. 나도 저렇게 하나님께 가까운 시절이 있었지. 나도 빛이 깃들어 춥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지. 간절히 회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만드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가끔이지만 어린 아이의 표정과 느낌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아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웃고, 떠들고, 손짓하고, 머리가 바람에 날릴 때에, 빛이 사람 안으로 깃들고 다시 안에서 밖으로 우러난다. 그 모습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영락없는 아기이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던 아담의 모습이고, 바로 이 천 년 전의 오늘에 우리 곁에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복잡하지 말아라. 감정도 생각도 단순함을 추구하라. 솔직하라. 순(順)하게 살아라. 말구유에 살아도 따뜻해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몹쓸 생각으로 몸을 그늘지게 하지 말아라. 아기처럼 투명하라. 거침없이 손짓하고 말하라. 자기다워라.

하나님께서 아기가 되셨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려고 아기가 되셨다. 구유에 누운 아기의 해맑은 눈빛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느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기억해야 한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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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목양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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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좀 해라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2

2011-09-25 목양칼럼

 

공부(工夫)는 본래 ‘일하는 사내’를 뜻한다. 때문에 이 말은 학문을 익힌다는 뜻과 기술을 익힌다는 뜻을 다 갖는다. 보다 어원적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공부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조선시대까지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이 존재했다. 직업도 일종의 사회적 지위와 같아서 그 업종에 따라 차별을 받았다. 이것은 비단 조선시대만의 사회적 그늘은 아니다. 중세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의식이 깨뜨려지고, 우리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밝은 세상을 맞았다.

그러나 사회적인 공언(公言)과 달리 현실은 아직도 전근대적(前近代的)이다. 당신은 정말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공부(工夫)는 학문과 기술, 아니 삶의 모든 영역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있는가?

이를 테면, 운동선수의 연습이 공부이고, 장사꾼의 장사가 공부이고, 댄서의 춤이 공부이고, 가수의 노래가 공부이다. 자기를 갈고 닦는 것, 자기 안의 소질을 계발하고 세상에 이바지 하려는 모든 노력이 ‘공부하다’는 말로 신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어, 수학만이 공부라 일컬어진다. 댄서의 춤은 공부 밖의 일탈이고, 운동선수의 땀 흘림은 공부를 회피하는 차선(次善)이며, 장사꾼의 장사는 공부와 대칭되는 저급한 일로 인식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종류의 꽃으로 세상을 덮지 않으셨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수학을 잘하고, 어학에 감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의 색깔과 향기가 어우러질 때에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움의 하모니를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부(工夫)는 신성(神聖)하다. 자기의 소질을 알고 그것을 갈고 닦아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여기에 노동자의 작업복과 목사의 가운이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안에 얼마나 진지한 땀과 열정을 채우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제일 바보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공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어부가 수학에 낙제를 하면 어떤가? 미술가가 조금 음치라고 낙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밥 잘하는 엄마는 공부 잘하는 것이다. 운동회 때마다 계주 선수로 선발되는 아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그 아이의 공부는 운동장에 있는 것이다.

공부 좀 해서 공부(工夫)가 되자. 녹차 티백(tea bag)이 첫 잔에는 예쁜 녹색으로 우러나지만, 서너 번을 우리면 점점 녹색이 사라져간다. 그런데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얻은 재주로 평생을 우려내 먹고 살려고 한다. 쉽게 쉽게 살고 진정한 공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허허롭다.

잘 하는 일을 격려하고, 평생을 열정으로 살게 하라.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이다.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보일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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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목양칼럼

 

중국에서는 지금도 동북공정이 계속되고 있다.

본래 중국은 한족(漢族)의 나라였다. 때문에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중국(中國)]이라 선언하고, 주변의 소수민족들을 모두 야만인과 오랑캐로 취급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도 동이(東夷)라 불렸었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달라졌다. 소수민족을 동화시켜 거대한 중국에 안착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역사의 조작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공산당이 맘을 먹으면 어용학자(御用學者)들이야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고, 역사적 증거들도 조작할 수 있다. 자기들의 뜻에 맞는 증거들은 선전하고, 불리한 증거들은 은닉(隱匿)하는 것이다. 과거 일본이 식민지사관의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비석에 정을 대었듯이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도둑질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싸움은 우리에게 심각하게 불리하다. 일단 고대사의 현장이 전부, 현재는 중국의 실효적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다 보니, 우리 학자들은 탐사도 함부로 못하고, 역사적 증거들도 맘대로 수집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료들은 계속해서 훼손과 행방불명을 당하고 있다.

역사를 잃으면 긍지와 정체성도 사라진다. 가난한 시절이야 조상의 유물 또한 낡고 누추한 것의 취급을 받겠지만, 여유가 생겨나고 사회가 힘을 가지면 족보와 유물들이 황금 이상의 가치로 이해되고 연구된다. 대한민국이 프랑스로부터 규장각 문서의 반환을 추진하고, 세계 각처로 흩어진 조상들의 보물을 찾아 돌려오기 위해 지극한 정성과 막대한 재화를 들이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韓國)의 고대사 문제는 단지 몇몇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에만 맡기기에는 너무 위중(危重)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제국이 되어서 우주선을 쏘고,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폭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헤커부대를 운영하는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라도 방심하다가는, 정말 우리의 고대사가 다 날라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한민국에 하루 빨리 동북공정을 전담하는 팀이 꾸려져서 정부와 학계(學界), 그리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우리의 고대사를 방어하고 역사적 증거와 자료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식민지 시절에 역사를 식민지사관에 내어주고, 그 후유증에 오래도록 나라가 멍들었던 교훈을 다시 한 번 유념하기를 바란다.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는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이 소리 없는 전쟁을 결코 가벼이 생각지 말고, 진실의 수호를 위해 다같이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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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목양칼럼

 

사람이 피곤하면 예민하게 되고, 예민하면 짜증스럽다. 육체적인 피곤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피곤함은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순환한다.

피곤한 사람의 주변에서는 피곤한 사람들이 양산된다. 말과 표정, 느낌의 찌꺼기가 오물처럼 사람들을 습격한다. 단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마음을 고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나 할까!

세월은 사람을 좋게도 변하게 하고, 나쁘게도 변하게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병적이다. 한 번 그 흐름에 빠지면 헤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적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점점 나아지는 변화가 꼭 필요한데, 스트레스는 나쁜 변화를 주도한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이미 죄를 짓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에 충분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상황에 빠지면 사람은 대부분 나쁘게 변해간다. 아무에게나 짜증을 내고, 자기를 쉽게 변명하며, 반성하지 않고, 흥분하고, 때로는 우울하고, 심지어 웃으면서도 슬프다.

나는 스트레스가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은 땀 흘리는 노동과 땅의 엉겅퀴와 가시나무의 저주를 말씀하셨다. 쉽게 풀어 말한다면,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노력해도 실패하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은 고민하고 힘겨워 하며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아담 이후로 이 저주의 굴레에서 사람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기도의 제목은 나의 마음의 주권을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전부이다. 나이를 먹고, 언제부턴가 ‘문제’도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를 반응하게 하고, 생명의 의욕을 가지게 만든다. 배고픔을 모르면 먹는 즐거움도 모르게 되는 것처럼, 문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평안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러니 문제도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부이다.

다만 그 문제를 통해 스트레스 상태에 휘말리는 마음이 진짜 문제이다. 실망과 좌절을 겪고서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부끄러운 옹졸함이던가! 좀 더 대범하고 강단 있게 대처했다면 문제의 시기가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고 긍지를 주지 않았을까? 마음이 암울한 환상을 만들고, 행동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에 실수했던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 마음이 진짜 문제다. 산책길에 줄을 풀어주면 사방으로 날뛰며 뒹구는 강아지처럼, 문제를 기회 삼아 여실히 허접함을 드러내는 나의 마음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수이다.

예수님, 내 마음을 좀 맡아주세요. 줄로 묶어 주세요. 그러나 다치지 않게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만져 주세요.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안아 주세요. 미련하고 좁은 마음이 소중한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 내 마음이 더 이상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당신의 소유라고 말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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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은혜

목회/목양칼럼 / 2011. 7. 23. 15:00

2011-07-24 목양칼럼

SDC10369

여름이다. 더위에 지치면 입맛이 없기 쉽다.

입맛이 없을 때는 밥상에도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일어난다. 화려한 것보다는 뭔가 복고풍(復古風)의 담백한 음식을 찾는다. 개인적으로 그 중의 하나가 깍두기이다.

새로 담근 깍두기가 아니라 잘 익었거나, 혹은 조금 신맛이 나는 깍두기가 좋다. 깍두기를 담글 때에 찹쌀이나 쌀로 풀을 쑤어 넣었다면 나중에 국물이 약간 걸쭉해서 밥을 비비기 좋다.

이 국물을 하얀 쌀밥에 듬뿍 얻는다. 물론 깍두기도 적당히 들어가야 한다. 수저로 밥을 비비기 시작하면, 신맛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면서 벌써 침이 꼴깍 넘어간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비빌 필요도 없다. 먹으면서 천천히 비벼가도 되니까… 당장 밥그릇의 윗부분을 벌겋게 비벼서는 깍두기와 함께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깍두기가 좀 매운 맛이 강하다면, 담백한 나물이나 생선 같은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그냥 시원한 냉수 한 잔만 있으면 뚝딱 밥 한 그릇을 해치우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밥을 먹는 어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햄이나 장조림이 맛있지 깍두기에 무슨 찬사를 돌린단 말인가! 깍두기는 그저 촌스런 반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진가(眞價)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혼자서도 한 끼의 식사를 책임질 수 있는 저력, 그리고 숙성(熟成)의 과정을 통해 오묘하게 입맛을 끄는 매력까지…… 깍두기는 밥상의 지존이다!

사람이 그렇고, 인생이 다 그렇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달콤한 것이 좋지만, 그런 것은 오래 가지를 못한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수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고, 어떨 때는 지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자극이 곧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만 살 수 있을까? 인생은 짧지 않고, 신앙은 평생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는 깊은 강을 건너 주님의 나라에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주 담백하고 평범해 보이는 원리의 실천이다.

하루에 한 번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기, 그리고 성경을 늘 곁에 두고 묵상하며 살아가기, 주일은 예배에 빠지지 말기(덧붙여 늦지도 말기),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 밥을 먹을 때에는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이런 것들이 정말 간단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신앙에 있어서도 ‘깍두기’로 돌아가야 한다. 햄과 치즈, 장조림을 내려놓고, 내가 정말 시대와 환경에 상관없이 나를 입맛 돌게 하는 깍두기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여름철 입맛이 없다고 신앙까지 무력해지지는 말자. 계절에 맞는 입맛이 있듯이, 신앙에도 각각의 때에 적당한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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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목양칼럼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잘 키운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각자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좋은 영양상태를 통해 발육과 체력을 양호하게 하는 것,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것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아이가 장성한 부모들은 아직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그 때가 좋았다!”고 흔히 말하는 것이다.
물론 밤잠을 설치며 아이의 젖병을 물려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친구관계를 신경 쓰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반항에도 대처하는 일은 그런 일들보다 분명히 더 어렵다.
더구나 아이의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는 아니었다.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하여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부모’는 자식을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부모는 부모답게 변하고 세워진다. 때문에 부모가 되도록 시행착오를 덜 하는 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비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약간의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이름하여 좋은 부모의 조건이다.


첫째, 넓고 깊게 배우라. 직감이나 추측으로 하기 보다는 경험을 찾고,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의 부모님에게서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거의 대가족 제도는 그런 점에서 큰 이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젊은 부모들은 책이나 인터넷의 지식을 너무 과신하는데, 이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참고하더라도 너무 확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 어떤 것들은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찾고, 탐구해야 한다.


둘째, 아이와 교감하라. 부모가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쏟아 부으면, 효과도 떨어지고 심지어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원하게 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줄 때에, 부모의 사랑이 가장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다. 아이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부모가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꼭 아이를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아이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아이의 곁에 함께 있어주면 된다. 물론 눈과 귀를 기울이고, 아이에게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원칙을 가져라. 불안정은 일관성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떨 때에는 허락되었다가 어떨 때에는 금지되는 것은 아이에게 도덕과 선, 규범을 배우게 하는 것에 결정적 방해가 된다.
부모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확고하고, 또한 설득력이 있을수록 아이는 안정감을 가지고 자라게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기준을 삼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도록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면, 아이의 정서와 도덕,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늘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으로 말하고, 그 성경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에, 아이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이런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복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라. 아이를 위해 살라. 그것이 모든 부모들의 사명이다. 하지만 이 말이 단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으로만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이를 위해 사는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아이의 모범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떤 면으로든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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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은발

목회/목양칼럼 / 2011. 6. 21. 17:00



2011-06-21 목양칼럼

capture-0009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본래 억울하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육신의 노쇠함 이상으로 그의 정신과 인격이 풍요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세월에 대한 한탄은 흘러간 세월에 비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나이만 먹었지 도대체 인생에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성경에는 나이 먹은 사명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새출발을 결단한 것이 75세였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사명의 나무를 보았던 것은 80세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도 70세가 훨씬 넘어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일찍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의 준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셉과 다윗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사 아주 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압축된 세월 속에서 사명자를 ‘나이 먹게’ 하신다. 속된 말로 ‘애늙은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숙성의 과정이 없이 사명자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능이 아니라 지혜를, 기술(skill)이 아니라 경륜을 원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은혜 속에서, 보낸 세월(나이)보다 훨씬 깊은 것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룬 것이 적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 것이 늘어갈수록 언젠가는 이것들이 꼭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명자로서의 내 세월은 결국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목회로 인하여 많이 속상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났다.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기도자리에 앉았다. 가슴에서 펌프질을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 말씀을 들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일은 그냥 억울한 일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세월일 뿐이다. 결국 이 슬픔도 내 재산이 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인생의 상처들을 통해 오히려 하늘의 진주들을 만드실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손을 들고 감사했다. 문제는 잊혀졌고, 은혜만 남아 빛이 났다.

흰머리에 부끄럽지 말자. 세월은 나를 익어가게 한다. 역경과 고난은 그분의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분은 나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내 안의 메시지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피 묻은 복음이 필요하다. 비루한 것들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광야에서 나에게 그 검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면 세월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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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목양칼럼

capture-0008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비결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한다.

특별히 일본에 와서 그것을 더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 함께 일본에 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다가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친구로 와서 원수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방법, 곧 ‘화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도 극단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화해(和解)’란 서로 조화를 찾고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먼저 암묵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싸움을 했더라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충돌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잊지 못할 수준의 모욕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망각은 불편한 약점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운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남기게 되면 아무리 화해를 위해 노력해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싸울 때에는 감정에 취해서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에 두고 싸워야 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화해’할 것을 미리 계산하면서 싸우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중에 화해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다면, 우리의 표현과 방법이 당연히 많이 순화되게 될 것이다.

화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결함이며, 잘못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함이다. 미련한 사람은 갈등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계속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개선해야 할 내용을 생각한다.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것[타산지석(他山之石)]이 참된 지혜이다.

화해하라. 되도록이면 사람을 잃지 말아라. 설사 헤어지더라도 화해하고 헤어지라. 야곱과 에서도 화해했지만 그들이 이후로 함께 살지는 않더라. 하지만 계속 미워하며 떨어져 사는 것과 서로를 향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떨어져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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