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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목양칼럼

 

2006년 2월4일, 그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목양칼럼은 거기서부터다. 교회 홈페이지에 333번 칼럼이 걸려 있다. 그게 2012년1월8일이다. 그 후로도 매주 빠짐없이 이 글을 썼다. 더러는 주중에 몇 번 호외를 날리기도 했으니, 대충 400여편의 목양칼럼을 써온 것 같다.

분량은 워드 문서로 좀 빡빡하게 A4 한 장이다. 그것을 폰트크기와 문단간격을 조절하여 주보의 한 페이지에 앉힌다. 이전에는 글이 길어진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가독성을 생각해서 길면 잘라낸다. 그리고 잘리지 않은 원본은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다.

기쁨도 많았다. 어떤 분은 검색엔진을 통해 들어왔다가 목양칼럼의 애독자가 되었다는 분도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품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았다는 분도 있었다. 친구 목사는 이것을 묶어 책을 만들어 보라고 지금도 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이다.

이 칼럼이야말로 내가 목양하는 내 교회의 양무리들을 위한 나의 충성이었다. 그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시의적절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으며,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목양칼럼만 읽어서도 목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은 쓰는 사람의 생각으로 낳는 자식과 같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 온 400편의 글을 헌사 받은, 나의 양무리들(물론 주님의 양무리지만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내가 섬기는)은 이 목양칼럼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그들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필로스에게 헌사했다. 그 정중한 헌사로 인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데오필로스를 로마의 황족이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모든 신자가, 특별히 누가가 목회했을 양무리가 모두 데오필로스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두 권의 책은, 몇몇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무수한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교회를 전율하게 했다. 그 안에 담겨진 신앙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나 같은 말단의 목사를 울게 한다.

감히 누가의 글에 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정서는 같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양무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부디, 이 모든 글을 신문 귀퉁이의 일상적인 잔소리처럼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을 배우고,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성숙함이 자라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면 주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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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4 :: 목양칼럼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소중한 재산은 자기 자신이다.

아무리 요란한 풍랑도 자신을 날려버리지는 못한다. 죽지 않는 이상, 자신은 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인생에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몇 번은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자기와 깊게 만난다. 만약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가장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은 자기를 버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 버림은, 쓰레기처럼 그저 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의 버림은 진정한 자기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욕망과 습성에 갇힌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분은 노예나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위해 칼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칼을 잡는 제자를 향해, 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해방자가 분명하다. 그분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우리 맘대로 섬기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되찾게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信者)는 신자(神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을 깊이 만나는 일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목마른 '나'에 대하여 깊이 허전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 같은 나를 길들여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찾지 않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자기와 묶지 못하면 신앙은 실패한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습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시끄럽기만 하다. 이제 정중하게 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대하여 말해 보라. 자기를 정직하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게 허전하고 부실하기 때문에, 늘 인생이 불안하고 신앙은 허약하며 꿈이 연기처럼 그저 흩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지금은 아니라도, 인생에는 반드시 모든 겉옷을 벗고 벌거벗은 자기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그 날에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자기만 확실하다면,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고,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련도 없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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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

목회/목양칼럼 / 2012. 10. 28. 15:31

  

2012-10-28 목양칼럼 :: 자기다움

 

사람도 악기와 비슷합니다.

너무 조이면 끊어지고, 너무 풀어주면 음색을 잃습니다.

최선과 최하의 어디쯤에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조금씩 발전해 가는 것이 건강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에는 그 ‘자기다움’이 없습니다.

모두 승자가 되려고만 하고, 모두 단번에 정상에 오르려고만 합니다.

그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가 자기의 가장 큰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꿈을 꺾고 해를 끼치기 이전에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기를 학대하여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그 경쟁에 질려 아예 삶을 포기하고 무능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 속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중한 사색과 단호한 결단력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교하지 않고, 깊이 자기를 이해하며, 항상 자기다운 길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살아낼 수 있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고유하며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와 비슷한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해답이 나의 해답이 될 리도 만무합니다.

내 인생의 해답은 내가 찾아야 합니다.

가장 나다운 선택으로만이 내 인생의 여백을 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괴로워 합니다. 조급하거나 우유부단하다고, 그것이 치명적인 단점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치명적 단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답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공장의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급한 사람도, 우유부단한 사람도 필요에 의해 만드셨습니다. 그 특성은, 죄와 연결되고 유혹에 넘어갈 때에 위험한 것이지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특성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역할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지 않은 적당한 자기를 찾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도 훌륭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그리고 그 어깨를 다독거려 격려하십시오. 자기와 화해하지 못하면 누구와도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소중하게 여기고 기대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자기답게 최선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잘 관리해 주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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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1 목양칼럼  :: 달빛 같은 은혜

 

저녁에 산책을 나섰다가 달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아파트의 불빛 위로 달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달빛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뽀얗게 속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저 달빛을 예수님도 보셨고, 중국의 시인 소동파도 보았고, 지금 고국에 계신 나의 어머니도 보시겠지요.

달빛은 그렇게 오래도록 변함없이 외로운 사람, 고민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왔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을 보니 더욱 예뻐서 내 것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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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밝힌 조명과 하나님이 밝히신 달빛의 밞음은 느낌이 다릅니다.

조명이 자극적이라면, 달빛은 온유합니다. 달빛은 눈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빛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어울리며, 또한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의 위로가 됩니다. 조명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달빛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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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착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선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것은 달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다른 것처럼 아주 먼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힘이 들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심지어 마음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게 아닌데… 신앙생활은 달빛 같은 것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면 저절로 빛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 맡기면 쉽게 성장해가는 길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해서 혼자 일어서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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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영을 생각해 보세요. 물에 뜨는 것을 배워야 팔을 젓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물에 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빼야 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힘껏 팔을 움직이면서도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사람의 노력이 오히려 선함에 방해가 됩니다. 성령 없는 노력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 정말로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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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목양칼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열심히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물론 고결한 지식을 가르쳐 주지만, 단지 지식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고,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의 대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묵상하며,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고난이 예상될 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뻔히 보이는 결과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는 불나방 같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우선은 문제를 회피하고 문제가 없다고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잃어버립니다.

성공하는 기도에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기도를 낳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에 이르게 합니다. 둘째는 타이밍입니다. 물론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꼭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기도로 당장 효과가 나타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습니다. 그러나 무익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 기대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지만,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그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려움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도,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는, 고난 앞에서 반드시 그 문제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도해 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로, 고난 속의 기도는 특별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항상 특별하셨습니다. 그분은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새벽 어둠의 시간에 한적한 곳을 찾아 홀로 열정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땀이 핏물처럼 흘러내린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유일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 죽을 만큼 기도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는 기도생활,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예수님마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처럼 처절한 기도를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신앙은 뜨거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은 그 뜨거운 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시기입니다. 고난 앞에서도 미지근한 기도와 망설이는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가 세웠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해야 할, 그것도 특별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교회라면 성령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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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목양칼럼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도, 미래의 할 일을 미리 예단하는 것도 믿음의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겉을 화려하게 하고 허명(虛名)에 의존하는 것처럼, 믿음도 현재가 부실할 때에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거창한 일을 하겠다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당장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환경과 능력을 핑계합니다. 그러나 정작 환경과 능력이 충분해서 믿음을 실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처한 세상은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에 있어 우리의 능력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가로 막는 정확한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과 싸우는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믿음을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는 것은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선한 의도만이 아니라 믿음을 빙자하여 쉽게 성공하려는 잘못된 의도도 가졌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런 마음들은 믿음에 있어 불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향을 제거하신 후에야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주십니다.

항상, 현재를 전부라고 여기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 최선을 다하십시오. 환경의 지배를 받지 말고, 마음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심은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믿음의 도리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과연 나중이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관중(觀衆)의 입장으로 교회와 신앙을 방치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인생의 황금 같은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중’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끝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르십니까? 오늘이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헌신을 드리는 지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다른 바램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한 가지, 바로 여러분이 지금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주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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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30 목양칼럼

한국의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만, 그 시기가 미국의 절기에 맞춘 것이라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늦은 가을, 혹은 겨울의 문턱에 위치하는 추수감사절을 한국의 명절인 추석과 동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추수감사절을 조금씩 당기는 추세입니다. 

교회가 이런 절기를 기념하는 것은, 그 날에 얽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의미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날짜를 지키느냐 하는 것보다 그 날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가위는 풍성한 열매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생활을 점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열매를 얻습니다. 비록 농사를 짓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수고를 통해 곡식과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현대인은 그것을 금전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노동의 결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둔 결실이 결코 노동만의 결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농사를 지어도 이 논과 저 논의 소출이 다릅니다. 사람의 노동도 이와 같아서, 같은 수준의 수고를 하지만 얻는 소득은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심지어 수고만 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일어납니다.

물론 수고한 대로 적당히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는 그 당연한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여서 사람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억울한 원성이 쌓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거둔 것은,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땀 흘린 노동의 대가이지만 동시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선한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소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설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얻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한다면 하나님께 반드시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얻은 것을 내 것으로만 여기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하나님도 그에게 엄격한 정의를 찾으실 것입니다.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나눔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이 결코 전부 나의 것만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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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목양칼럼

 

신앙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믿음은 살아가는 것과 일치한다. 믿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이다.

살아가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선’을 경험한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惡)이다. 아무리 열렬한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위선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한 청년이 잠시 컴퓨터를 내게 맡겼다.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목사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낯선 이름의 폴더에 포르노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청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청년은 중요한 고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작정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하고, 그 사실을 목사인 내게 알려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민망한 이 사실을 그냥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충고할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교회로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자기를 인정하고 기도생활을 위해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사람은 잘못을 한다. 그것이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잘못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삶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을 품고서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열렬한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면서 삶과 믿음이 분열된다.

포르노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더 추악한 문제들도 많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당연히 양심이 찔려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대하여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거나, 그 정도는 가볍다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를 계속하는 동안, 영혼은 파선하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파야 한다. 믿음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지배하지 못하던 삶의 영역들에 믿음이 들어가 지배하려면 눈물은 필수이다. 찔리고 아프고 고민할수록 영혼은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된다.

위기는 이런 역동적인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면, 심지어 사람에게 보이려고 더 열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혹시 있다면 빨리 자기를 점검하라. 병이 깊어지면 약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희망은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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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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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조건

목회/목양칼럼 / 2012. 8. 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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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아무리 용서를 해주려고 하더라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이가 제대로 수용하지 않으면 용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용서에 앞서 용서를 구하는 사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해주겠다고 하면 그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기분 나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용서 받은 죄인이다. 복음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용서의 소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난제(難題)가 떠오른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것인가? 결국 복음의 선결과제는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백하게 하는 일이 된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기 잘못의 인정을 회피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원죄의 장면부터, 변명과 핑계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람은 대개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은 맹인(盲人)과 같이 보지 못한다. 남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이성이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겸손한 자성(自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죄인의 분명한 자기 한계이다. 그리고 이 한계 때문에 위대한 용서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거절된다. 도대체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죄인이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때때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참혹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용서’를 나타내시는가에 대하여 질문한다. 십자가는 그만큼 불편하다. 거룩하고 따뜻한 하늘의 위로를 기대했건만 참혹한 피로 얼룩진, 처절한 고통의 십자가라니… 이게 과연 전능한 하나님,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미시는 화해의 손길이란 말인가?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어 대문과 같다. 그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야 마땅하다는 고백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용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영혼의 거울이다.

 

아직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자신하는가?

십자가를 보라. 예수가 피 흘리는 자리에 그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고백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역시 파렴치한 죄인일 뿐이다. 다른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우매한 죄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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