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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6 행복은 다시 우리 곁으로
  2. 2020.03.2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어야 한다

 

2020-03-26 목양칼럼

 

벚나무가 꽃을 떨구며 싱싱한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요즘입니다.

조그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으로 공원을 누비며 꽃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끼고 싶은 봄인데... 이번 봄은 너무도 잔인하게 질병의 공포와 싸우며 보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만 갇혀 지내다보니, 갑자기 <안네의 일기> 생각났습니다.

유태인 소녀, 안네는 13살에 일기장을 선물받게 됩니다.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소녀의 소소한 일상을 적어나갔습니다. 유태인 가족에게 나치 독일의 강제징용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가족은 은신처에 숨어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족은 194484일에 나치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보내졌고, 안네는 다음해에 15살의 나이로 그곳에서 병사했습니다.

안네의 일기장은 후에 발견되어 2009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안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행복을 다시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세요. 그리고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다면 행복은 당신의 곁으로 다시 찾아와 줄겁니다."

 

 

우울함과 고통 속에서 용기를 가지려고 싸웠던 사람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13살의 소녀도 희망을 잡고 노력하다가 별이 되었습니다.
아직 우리는 정도로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엄살 부리지 말고, 일기장에 다짐이라도 적으면서 힘을 내어 봅시다.
우리가 다시 용기를 가지면, 안네의 글처럼, 행복은 다시 우리들 곁으로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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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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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초고령사회이다.
노인들이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데, 앞으로도 받을 수 있을 것이냐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솔직히, 청년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서 노인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는 것 같다. 
그 갈등이 의외로 ‘코로나19’ 위기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아래는 3월2일의 글이다. 


비슷한 것으로 더 최근(3월21일)의 페이스북 글이다. 


주목할 것은 ‘좋아요’가 7만이나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갈등을 빚었다. 서로 시야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갈등의 수준을 지나 충돌의 지점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현실은 슬프고 걱정스럽다.

‘고려장’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고려의 풍습이 아니다. 
일제시대에 한국의 역사를 비하하기 위하여 날조되었다는 의견은 참고할 만하다. 
가뭄과 기근이 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청년과 아이들을 살리기 위하여 노인들을 산에 버려 희생시켰다는 이야기는 미개하고 끔찍하게 들린다. 
그러나 지금, 코로나19의 쓰나미에 노인들이 쓸려가서 일본의 청년들이 부담을 좀 벗으면 좋겠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이 ‘고려장’의 구도와 닮아 있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을 과연 ‘부담’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노인문제가 자꾸만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를 방치하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가 자기 부모를 공경하고 최선을 다하여 섬긴다면, 국가는 불우한 노인들에게 보다 집중하여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문제가 있는 가정이 아닐지라도 자녀가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노인복지는 더 강화될 필요가 생기고, 이제 보편적으로 모든 노인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슬픈 사실은 거기 드러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이 살다가, 돌아가시면 그제서야 슬픔으로 후회하는, 그리고 묘지를 이쁘게 꾸며서 효도를 못한 자기를 위로하는 어리석은 행태이다. 
20~30대의 청년과 40~50대의 장년은 노인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이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자기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돈’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배운다.

그래, 좋다.
아마 바라지 않아도 코로나19는 많은 노인들을 데려갈 것이다. 그들은 더러 먹기만 하고 운동도 할 수 없는 중증의 환자들일 수도 있고, 치매에 걸려 자기 자식도 몰라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삶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런 노인들에게도 자식과 손자가 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에게는, 밥만 축내거나 쓸모 없는 노인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이고 ‘할머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기억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어릴 적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나이가 들어서도 찾게 되고, 어려서 받은 사랑은 나이가 먹어서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와 배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지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무가치하다고 다 버리는 사람은 결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없으며, 자신의 인간성을 건강하게 보존할 수 없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제목이 지니는 인상이 깊었다. 그 제목만으로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서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을 지우고 우리가 도달하려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청년들의 어깨가 가벼워진 미래? 과연 그것뿐일까? 우리는 노인들과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말살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노인들과 함께 우리의 추억과 성장과 안정감을 다 지우게 되지 않을까?
코로나19라는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부모도 없는 자식으로 변해가게 하는 ‘돈’의 탐욕이다. 그 저주가 나는 전염병보다 더 정말 무섭다.

P.S. -- 

우리의 노인들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전쟁에 부름을 받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이 쇼파에 앉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다. 

 

(코로나19) "나는 (인류의) 인간성을 테스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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