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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유래는 삼국지이다.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화용도(華容道)에 포위되었다. 이 때에 제갈량은 조조를 죽이도록 관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관우는 지난 날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게 퇴각할 길을 열어 주었다. 결국 조조를 놓친 제갈량은 관우를 참수하려고 할 정도로 격노하였지만, 유비가 중재를 나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하는 말 중에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사람의 일을 열심히 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진(盡)으로 바꾸어진 것은, 사람의 노력을 한층 강조하는 변화라 하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참 드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는 한 건가?


우리들의 함정은, ‘대천명’은 잘하지만 ‘진인사’는 소홀히 하는데 있다.

묵상과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쉽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시내산 자락에서 계속 기도하며 출애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다. 팔순의 노인이었던 모세가 지팡이를 짚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니, 단순히 찾아갈 뿐만 아니라 모세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했다. 먼저는 이집트와 싸워야 했고, 나중에는 노예근성에 물든 이스라엘과 싸워야 했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쉽지 않다. 순탄하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진심을 시험하시는 것 같다. 

늘 내가 원하는 것의 대척점에 있어 팽팽하게 긴장감을 주고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곤란하다. 그리고 아프다. 힘들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버겁다. 어느 정도까지는 곧잘 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것이 나의 최선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과연 나의 한계까지 왔을까?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도 좋은걸까?

진인사(盡人事). 

그 경지는 항상 팽팽한 긴장과 갈등의 저편에 있다. 이것은 편안한 자리에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벌거벗은 우리의 민낯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나오는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후에야, 비로소 대천명(待天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옥동자를 낳는 어미가 있던가? 힘들지 않고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있던가? 

하물며 우리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쉽고 간단할 수 있겠는가? 

그 과정의 눈물과 땀을 감내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신앙이 병드는 것은, 날로 먹으려는 병폐 때문이다. 

왕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초대된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왕은 파격을 결심했다.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다가 잔치의 자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몰려나가 그야말로 사람들을 쓸어 담았다.

평소에는 왕궁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던 걸인, 장애인, 창부,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모두 왕의 잔치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다. 왕은 성대한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가 감히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전개이다. 

술주정뱅이와 건달도 손님으로 영접하는 마당에 예복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예복을 입었으면 얼마나 변변한 예복을 입었겠는가? 

그러나 왕은 단호했다. 그를 끌어내어 잔치에서 내어 좇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데려올 때는 언제고, 옷이 맞지 않는다고 끌어내어 버리는 것은 또 뭔가?


왕이 요구한 ‘예복’은 최소한의 성의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실함에 대한 자각이 곧 왕의 자비를 더 돋보이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왕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염치조차 없었다. 그는 어차피 파격적으로 받아줄 것이라면, 이 따위 예복도 필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왕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섬길 각오가 먼저 서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미안하지만 사절이다. 왕은 내가 아니라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 뜻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가? 그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있는가?

그런 내면의 변화와 결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아낸 사람을 나는 성경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는가?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인가? 삽비라처럼 반은 숨겨 놓고, 반만 바치면서 경건을 사기 치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진인사(盡人事). 사람의 일을 먼저 다하라. 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서 대천명(待天命).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시켜라. 무척이나 어렵고 무거운 신앙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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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9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목회를 성역(聖役, 거룩한 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목사는 늘 서재에 앉아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생각만 하면서 살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목사도 사람이고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비약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아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가끔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목사들, 혹은 목사 후보생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너무 신령하고 거룩해서 감히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가 발산되는데, 마치 십계명을 받을 때의 시내산과 같아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역자로 25년, 목사로 10년을 지내면서 돈 걱정을 내려놓은 적이 별로 없다.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혼하고 처음 받은 월급이 전도사로서 40만원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받던 용돈보다 적은 나의 월급을 손에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때부터 시작된 '돈'과의 싸움은 지금까지 내 삶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내게는, 매달 생활비는 물론 이국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야칭(임대료)과 공과금도 쉬운 적이 없었다.


돈은 만만하지 않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자연의 생산물은 태어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고 썩어서 순환하는데,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 '돈'의 등장이다. 결국 돈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경제적 불평등을 극대화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라는 것은, 몰염치의 결실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미안함을 갖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게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부요함을 계속 늘려가려 하는 경향성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돈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때문에 돈과 관련해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는 문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자기 점검과 노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목사'라고 봐주겠는가!  

목사는 쌀이 떨어지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나? 목사는 교회 야칭(임대료)를 몇 달 밀려도 기도의 힘으로 간과(passover)되는가? 

좋다, 목사야 운명처럼 그런 가난을 받아들이며 산다고 치자. 그 가족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교회 중에서, 돈의 고민을 완전히 벗어던진 교회는 아직 보지 못했다. 

작은 교회는 나처럼 '생활'과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더 '큰 돈'의 무게에 눌려 목사와 교우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 현실이더라.

돈은 결국 싸움의 대상인 것 같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혹은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하기까지는, 그저 그 돈과 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경쟁하며 부침(浮寖)을 반복하는 과정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이상 돈에 대한 갈망, 염려, 애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 나름 귀한 것이다. 그리고 돈의 세상에서 돈을 이기는 법을 듣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교우들의 마음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하나를 연보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 동전이 그 여자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난한 형편이며, 얼마나 큰 믿음인가!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라. 가난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수입이 없는 것이다. 돈 벌기가 힘든 부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동전은 어디서 나왔을까? 길에서 주웠을까? 그래도 좋았겠지만, 예수님의 감탄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그 동전 속에서 상상하게 한다.

동전 하나를 벌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과부는 무엇을 했을까? 그 동전에 스며 있는 눈물과 한숨과 설움과 아픔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돈을 색깔과 숫자로만 본다면, 돈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돈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도풀갱어와 같은 자기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돈이 걱정이다. 돈에 돌아버릴까 걱정이다. 나의 교우들이 양심을 팔아 돈을 벌까 걱정이다. 내가 양손에 받아 봉헌하는 헌금주머니에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섞여 들어올까봐 걱정이다. 돈이 교회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할까봐 걱정이다. 돈이 사람을 핍박할까봐 걱정이다. 목회를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돈에 의존하여 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 때문에는 우는데 사람 때문에는 울지 못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의 전염병에 걸려 만족을 모르는 우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과 무관한 목회는 이상이다. 결국 교회도 돈과 겨루지 않을 수 없다. 돈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의 배후에는 죄가 있다. 신앙은 이 본질을 캐고 끊어내야 한다.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점점 극단적인 자본주의에 물들어, 내가 번 돈은 완전히 나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괴물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교회는 돈과 돈을 버는 방법과 돈에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 고민해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돈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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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목양칼럼 2014-07-15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질서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 말했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 하여서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하나님의 사랑이 덮은 사건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가 깨뜨려졌는가?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어떤 죄라도 이보다 더 큰 형벌을 구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의가 충족되었다. 심지어 정의를 충족시키고도 사랑이 넘쳤으니 사랑이 정의를 덮은 셈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만 유일무이한 복음이다. 이 역설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는 '인과응보'의 보편적 질서를 넘어서지 못하는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술을 끊지 못해서, 사업에 바빠서, 심지어는 가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죄송하단다. 그 마음이야 정말 이해한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복음은 본래 선물이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어차피 그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이어야 하고, 둘째는 그 값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값을 치룰 능력이 없으니 선물이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누구나 '부끄럽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들어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의 모든 약함을 대신 져 주시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를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당당함은, 은혜를 깊이 자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발적 응답의 모습이지, 고개를 쳐들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어떤 부끄러움도 상관할 필요가 없다. 많이 부족해도 괜찮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 자비를 깨닫는다면, '지금'이 바로 회개할 기회이며, 하나님을 만날 때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불쾌한 반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땅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은 많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한다. 그러나 창조주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다. 그것이 복음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금언은, 오히려 부족하다. 복음은 내일이 아니라 몇 시간 후로도 미루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지금이어야 한다.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당장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무릎을 꿇어라. 알량한 죄의식은 십자가에 못 박아라. 부족하다고 고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라. 

부끄럽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기도를 헛소리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빌라. 무엇을 도와달라고 할지 모른다면,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으셨으니, 이제 나를 정의보다 사랑의 눈으로 봐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을 경험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맛 본 사람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깊은 곳을 만진다. 알지 못했던 나를 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꿈꾸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을 자라게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맛을 본 사람은 알고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지니... 이것을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은 하나다.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라. 미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 만나고자 결심을 하고 당장 실천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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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목양칼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한 해가 훌쩍 지나고 10년이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상은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매일매일이 거의 같은 패턴의 반복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지루해져야 하고, 지루하면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느껴져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자체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경계가 뚜렷했습니다. 언제까지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입학, 졸업 등)가 있었습니다. 그 결승점 앞에서 시간은 압축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앞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고 자기를 독려하며 시간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나이부터는 더 이상 그런 긴장감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다음 주에 하면 됩니다. 그 막연함에 익숙해지면서, 시간 자체를 매우 허술하게 보내는 무감각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결국 ‘졸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무한정한 자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없을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교훈합니다. 시간 앞에 옷깃을 여미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시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합당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되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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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6 목양칼럼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맑은 말보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으면서 빨래도 문제고, 이런저런 일상에 불편이 따릅니다. 하루빨리 해가 나와서 눅눅해진 일상을 다 산뜻하게 말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막상 해가 나기 시작하면, 이제 적어도 9월까지는 더위와 열대야가 계속되겠지요. 그러면 그 더위 속에서는 지금의 서늘한 밤과 새벽이 다시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보내고 나면 그리울 것입니다. 

그리울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가는 그 불평하던 것에 대하여 아쉬울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남은 날들 중에 ‘첫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상 아무 일도 없는 인생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번잡해도 싸우고, 해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후회 없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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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목회/목양칼럼 / 2014. 6. 28. 19:46



(1)

생각하는 대로 당장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또한 마침내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마음'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에 있어 키(helm)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결국에는 열매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2)

우리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이것을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저것을 바라기도 하고, 혹은 이것저것 다 불만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변덕'은 어떤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의 특성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렵다.

공부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 공부인 까닭이 이 때문이다. 마음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자라야, 인생의 항로를 원하는 곳으로 잡을 수 있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은 알면서도 자기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서 실패하는 것이다. 


(3)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시간이 걸린다. 잊지 말라. 마음은 쉽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의 마음도 그렇고 남의 마음도 그렇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포도주와 같은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오해와 의심의 안개가 걷어지고 마침내 서로 또렷하게 상대방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을 외롭게 살다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4)

표피적인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사람의 사회에서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것은 별로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관계는, 반드시 그 서로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서로 닮게 하고, 격려를 주고받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사랑은 다른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서로가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5)

모든 사람은 변덕쟁이면서도 한결 같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데, 우리는 그런 특성들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잠시 다른 이를 흉내 내는 것은, 착각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친구를 만들어 주진 못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정직해야 한다. 자기를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친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6)

'친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마음이다. 아무리 곁에 살아도 마음이 하나로 묶이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 친구가 아니다. 또한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마음의 뜻이 같고 생각이 닮으면 가히 친구라 할 수 있다. 

친구는 출신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7)

마음을 다스리고 제대로 간파하기 원한다면, 시간을 벌고 좋은 사람을 곁에 두라. 

깊이 생각하고 많이 사랑하라. 그림자에 속지 말고 실체에 가까와지라. 

되도록 자주 정직함을 마주하라. 자기가 믿는 것이나 상상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 자신의 실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 



(8)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다. 특별한 언어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나의 실체는 항상 나의 일상에 담겨 있다. 그것을 곰곰이 보라.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눈빛을 보는 것이다. 그의 일상을 보는 것이다. 그의 현재를 똑바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는 눈이 좋아지면 남도 잘 보이게 된다. 그러면 인생의 항해도 쉬워질 것이다. 빨리 가든, 더디 가든... 결국 마음에 있는 지도를 따라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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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목양칼럼


사람은 그렇다. 마음이 삶을 지배한다. 생각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자꾸 가는 곳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변화가 생겨난다. 그래서 마음을 얻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한국에 들어간 동안에 가족묘원을 잠시 방문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일찍 자리를 잡은 덕분에 성남의 ‘남서울묘원’이라는 곳에 나름 좋은 자리를 잘 잡았다. 처음에는 할머님의 묘지로 썼던 자리가 지금은 가족 납골묘가 되어 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도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부의 격차는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대리석으로 묘를 꾸며도 자손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은 빈틈없이 잡초가 가득하고, 소박해도 누군가 그리움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묘는 손질이 깔끔하다. 그 정돈의 차이에서, 죽은 자의 재산과 명예가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그리움이 읽혀졌다.


대단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좀 배려하며,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사랑하며, 격려하며, 응원하며… 그렇게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앙의 열매라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교회다운 교회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니 스스로 그렇게 되지 마시라! 


교인들의 마음을 짓밟고서라도 큰 예배당은 지어져야 하고, 그러면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욕망이 한국교회를 지배하면서 교회가 망가졌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도 숫자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교인들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양산되고, 결국에는 교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사라졌다. 

마음이 떠난 예배당은 거대한 대리석 묘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욕망의 잡초만 무성하고, 사람들의 변화도, 하나님의 영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거대해도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얻어야 하고, 다치지 말아야 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마음을 다치면서 하는 일은 결국에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런 독선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스스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파렴치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다고 우리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교회라면 모름지기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더욱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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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목양칼럼



일본(동경)에서는 '애호박'을 구할 수 없다.

물론 신주쿠에 있는 한국시장에 가면 수입한 한국산 애호박이 있기는 하지만, 바다 건너 오신 몸이라 귀하고 비싸다. 

그럼 일본 사람들은 호박을 안 먹냐고? 있기는 있는데, 쥬키니호박이 있다. 차이를 궂이 말하자면, 애호박은 아삭하고 쥬키니는 스펀지 같다...

그래서 쥬키니호박으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호박전이다. 

호박전, 이 사소한 음식을 먹으려면, 한국에서 공수해 오든가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게 특식이다. 고국의 맛이고, 그리워 하다가 먹을 때는 감탄하는 별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이집트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를 그리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은 이 또한,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은 민족인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불평이 이해가 갈 것이다. 간사한 입맛의 끈질긴 구애가 사람의 정신 세계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건 사람에 따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자장면이, 양념치킨이, 순대가, 설렁탕이 눈 앞에 삼삼해져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말을 마시라...


말하고 싶은 점은, 신앙의 난관이 결코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질에 이미 깊이 들어와서, 사소해 보이면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욕망들이다. 마치 바다에 흐르는 빙산처럼, 그 노출된 부분은 작아 보여도 그 뿌리는 거대하여 강철 같은 의지라도 침몰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신앙적 승리는 내면의 욕망을 깊이 이해하고 작은 욕망들을 더 잘게 부수는 과정을 반복해야 얻는 것 같다. 

욕망에 대한 관용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낳는다. 인격의 건전성과 파멸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기 욕망의 한계를 보려는 시도는 극히 위험하다. 차라리 아직 건전할 때에조차, 내면에 찾아오는 욕망들을 부수고 또 부수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이를테면, '내가 마늘조차 못 먹다니 얼마나 비참한가!'의 생각에서 '내가 마늘도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군대가 될 수 있겠는가?'의 생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 때 마늘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도 아니고, 행복의 조건이나 건강의 보루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내 마음의 욕망을 통제하는 하나의 지렛대일 뿐이다.


웃기는 고백이지만, 고국이 그리운 날에는 오래 기도를 한다. 그리움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들고 고국을 떠난 사명자에게는 결코 당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죄스러운 것이다. 

내 신앙은 사소한 감정과 욕망들을 죽이고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자랐다. 남들에게 다 허락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사명'이라는 말의 출발선이 아닐까 한다.

자신에게 관대하지 말라. 그러면 욕망이 사람을 삼킨다. 우리가 관대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 엄격하게 살아가는 것이 맞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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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8 목양칼럼


미국의 여러 주의 고속순찰 경관들은 2 갤런 정도의 코카콜라를 차에 싣고 다닙니다. 그 코카콜라의 사용목적은 교통사고가 났을 때 길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비프스테이크를 코카콜라로 채워진 대접에 넣어두면 2일 동안에 그 고기 덩어리가 다 삭아 버립니다. 

변기의 때를 없애는 데에는 코카콜라가 좋습니다. 변기에 묻은 때는 코카콜라에 함유된 시트르산이 말끔히 제거해 줍니다. 

자동차의 배터리에 녹이 슬었으면 배터리 케이블에 코카콜라를 부으세요. 거품을 내면서 녹이 없어집니다. 녹이 슬어 빠지지 않는 볼트가 있으면 코카콜라를 발라 주십시오. 수 분 후면 그 볼트가 빠집니다.

기름에 찌든 옷을 세탁하려면 기름이 묻어 있는 곳에 코카콜라를 부은 후에 세제를 가하여 세탁을 하면 말끔히 씻어집니다. 

코카콜라의 주요성분은 인산인데 그 pH치는 2.8입니다. 그 정도의 pH치면 보통크기의 못을 4일 내에 녹여버립니다. 미국에서 코카콜라의 농축액을 운반하는 트럭들은 독극물에 적용되는 유해물질 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

저런,.. 그래도 기름진 음식이나 피자, 햄버거를 먹을 때는 콜라 생각이 나겠지요.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몸에 배인 습성은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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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8 목양칼럼


창형흡충이라는 기생충이 있다. 창형흡충의 종숙주는 소다. 즉 성충이 돼 알을 낳기 위해서는 소에게 가야 한다. 문제는 창형흡충의 중간숙주, 즉 유충을 보유하고 있는 생물체가 개미라는 점이다. 소를 면밀히 관찰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식동물인 소는 풀 같은 것만 좋아하지 개미를 먹진 않는다.  개미 안에 들어있는 창형흡충의 유충이 소에게 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창형흡충은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 개미에 있는 창형흡충의 유충 중 한 마리가 개미의 뇌로 들어가고 침투에 성공한 유충이 개미에게 명령을 내린다. “풀로 올라가라.” 해가 지면 명령을 받은 개미는 무엇에 홀린 듯 풀로 올라간다. 가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풀잎에 붙어 있다. 

소는 섬세한 면이 부족해 풀에 개미가 붙어도 그냥 섭취하는지라 풀에 올라간 개미는 소에게 잡아 먹힐 확률이 높아진다. 그날 밤 소가 풀을 뜯지 않으면 개미는 풀에서 내려와 자신들의 소굴로 간다. 다른 개미들이 묻는다. “오늘 저녁 때 어디 갔었어? 통 안보이더라.” 유충이 들어있는 개미는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응, 그냥 산책 좀 했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마음과 생각에도 못된 기생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후회할 짓을 하지마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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