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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목양칼럼


요즘 찬혁이가 시험기간이다. 본인의 말로는 시험공부를 매일 5시간 정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시험에 임하는 준비가 남다르다. 우선 밤 10시가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 준비를 해서 늦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잠자기 직전에 샤워를 하고 꼭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는데, 이것은 숙면을 위한 처방이다. (평소에는 따뜻한 우유가 아니라 날씬한 몸매를 위해 감식초를 넣은 우유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시 샤워를 한다. 물의 온도가 중요한데 40도 정도가 적당하다. 이 정도 온도라야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 최선의 컨디션을 발휘하게 된단다. 또한 뇌를 위해서 꿀물을 한 잔 마셔준다. 적당한 당분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찬혁이는 말한다.

아들 녀석의 호들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녀석이 뭐를 해도 하겠구나! 온 식구들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저렇게 컨디션을 챙기고, 자기를 아끼는 것을 보면 시험결과도 분명 나쁘지 않겠구나…’

사람은 믿음 속에서 성장한다. 특별히 자신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면 타인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 상호작용에 의하여 사람은 위대하고,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이다.

미래는 결코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어제와 오늘의 결과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굴곡(屈曲)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기를 향한 믿음을 지키고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여길 때에, [=자중자애(自重自愛)] 마침내 희망의 해가 떠오른다. 어려운 때가 지나고 기회가 왔을 때에, 그는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를 되도록 넓게 하라. 항상 노력하고, 기회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회 없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내가 나를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편안함 속에 방치하며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돌아갈 희망은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에도 거울을 보고 말하라. 너는 소중하다. 너는 할 수 있다. 너의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함부로 살지 말고 가장 소중한 사람답게 훌륭하게 하루를 살자!

유명한 처칠의 연설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패배이다. 그러나 자기를 지키면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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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목양칼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론 밥을 먹고 산다. 그러나 밥이 전부는 분명히 아니다. 

사람에게는 밥 이상의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절실한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고프고, 허전하다. 

요즘은 생각을 많이 한다. 책상 위의 모니터를 응시하다가도 생각에 빠지면 한 동안 시간을 잊는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정신이 잠시 나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속으로는 생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흘러간다.

생각이 많아진 것을 보면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쉽게 내리던 결정도 거듭거듭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나름 신중해졌다는 느낌이다. 그 생각의 깊이와 무게만큼이나 내 인생도 더 풍요하게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생이 손 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야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조금 낭비를 하고 객기를 부려도 괜찮지 싶다. 하지만 중년에 들어서고,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하여 알아가면, 점점 시간의 무게를 느끼고, 자기 인생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30대를 지나면 고민이 시작되고, 40대를 지나면 고민이 숙성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왜 일본에 가서 굳이 고생을 하느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은 그게 내 이유다. 내 인생은 소중하기 때문에, 하찮은 일에 쓰기 싫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 적어도 만만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싶었고, 후일에 뒤돌아 보았을 때에 후회하지 않게 살고 싶었다

아직은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의도한 대로 살아낼 수 있을지. 가끔은 후회도 들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긍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보람이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삶에 끌려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환경에 갇힌 노예와 다름이 없다. 

왜 한 번뿐인 인생을 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낭비하는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고, 보람을 거둘 수 있는 인생을 살아라. 그게 정말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신 선택해 주시지 않는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하면서 마냥 기다리지는 말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며, 하나님은 이미 그 선택을 위해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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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5 목양칼럼


믿음은 소망이다.

믿음 안에는 ‘No’가 없다. 우리가 불가능을 말하고 인정하는 순간, 믿음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며 남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뿐이다.

물론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믿음은 안 되는 일이라도 일단 도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성공만이 아니라 그 도전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성공보다 더 가치 있을 때, 우리는 성공보다 더 행복한 실패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의 구약을 서술한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말은 ‘경험한다’는 말과 구분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믿는다’는 말과 ‘행동한다’는 말을 역시 구분하지 않는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의 결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먼저’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행동 속에 이미 믿음의 깊이와 분량이 드러난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이미 믿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처해 있는 위험이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기도와 믿음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믿음과 반대의 방향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기 자신의 언어와 행동에 대하여 더 깊이 살피고 발견할수록 믿음을 마음으로부터 삶으로 끌어내 완성해가는 능력이 자라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모습과 자기 자신의 현실을 착각하지 말라. 기대한다고 그것이 그냥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소망이 헛된 꿈과 다른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소망 안에는 그에 합당한 행동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를 아름답게 하려면 자기를 알아야 하고, 고쳐야 하고, 발전해가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소망하자. 그리고 그 소망을 향하여 한 걸음씩(One step at a time!) 나아가자. 때때로 찾아오는 어둠의 시간은, 불평과 원망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때가 바로 믿음을 말하고, 보여줄 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시는 때이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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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9 목양칼럼

 

하나님,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막연한 이 땅에서 가족과 나의 미래와 사명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합니다. 그 모자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를 느낍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결국 은혜로만 당신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 내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만 모든 선한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가난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면 고통도 크겠지만, 막상 내려놓아라 하시는데 별로 내려놓을 것이 없습니다.

일본으로 출발하던 때와 같이 그저 빈손이면 족합니다.

긍지는 사라지고, 자존심은 상처 받았습니다.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묻습니다. 

그래도 내게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건 당신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세상을 변화 시키려는 비전도, 의지도 잃어버린 무력한 그리스도인을 인하여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저를 울게 하고, 불타게 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이 시대의 영적인 잠을 깨울까? 어떻게 하면 이기심 가득한 우리 마음의 벽을 허물고 헌신하는 기쁨과 섬김의 행복을 알게 할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건물이나, 예식이 아니라 바로 변화된 사람임을 깨닫게 할까?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차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꿈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나를 울게 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가슴이 뛰게 하고, 살게 합니다. 아무리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절망 앞에서도 용감하게 합니다.

나도 그것이 늘 신기합니다. 항상 너무 쉽게 무너지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침과 함께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은혜가 놀랍습니다.

지금은 내 가슴에 켜켜이 슬픔과 상처가 쌓여 가지만, 언젠가는 이 절망으로부터 세상을 치유하는 맑은 샘이 터져 나올 것을 믿습니다.

그 기대가 있기에 나는 여기 홀로 설 수 있습니다.

나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본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기도가 나의 호흡이며, 찬양이 나의 옷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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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2 목양칼럼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물론 보는 것에 정도(正道)가 따로 있지는 않아서 꼭 지식을 앞세워야 훌륭한 감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무식(無識)은 제대로 보는 것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것을 이해하고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변적인 지식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미술도, 음악도, 역사도 그러하고, 심지어 사람도 그러하다.

목회자가 되고서 사람에 대한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세상에 이해될 수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직 그 사람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하여 비난만 일삼을 때는, 잠시라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정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그에 대하여 얼만큼, 무엇을 알고 있을까?’

사람은 모르는 것을 쉽게 단정한다. 그 성급함이 때로는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또한, 사람은 변한다. 좋게도 변하고, 나쁘게도 변한다. 심지어 나쁘게 변하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희망의 그림자일 수 있다. 만약 사람의 선과 악을 한 번의 행동이나, 어떤 시간에서 확정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한 번 악인은 영원한 악인이어야 한다면, ‘사람’이라는 말과 ‘희망’이라는 말은 서로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은혜를 주신다.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의 잘못을 돌이키고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까닭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그 약점을 스스로 고쳐갈 수 있는 선택과 노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 부부간의 사랑이라도,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하물며 교회로 만나서 성도들을 믿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 많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함께 걸어줄 동행이 없다면, 이 망망한 인생의 광야를 건너 주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멀고 험한 길을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만이 위로요, 희망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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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목양칼럼


 

그래도 새벽 2시가 넘어서면서 조금 주변이 조용해졌다. 

늘상 차가 다니는 소리로 시끄러운 예배당에 잠시의 정적이 흐른다. 

신호등의 위력인가? 얼마의 여백 후에 다시 차가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는 소음과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이 새벽에도 멈추지 않고 어디를 향해 저렇게 달리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새 구두를 맞추러 왔다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연인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맹세하지만, 결국 아주 사소한 문제로 이별을 한다. 자식이 철이 들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고생을 벗어나면 아내가 병이 든다.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조금만 일찍 철이 들고, 조금만 더 참으면서 사랑하고, 조금만 더 건강해주면 안 되는 것인가? 

조금만 더 푸르고 싱싱한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고 보다 신중하며 너그럽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 얼마나 엉터리 같은 존재인가? 깊이 생각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는 번번이 무지와 감정으로 눈을 감는다. 그래서 나부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다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푸른 5월이다. 첫 주에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둘째 주에는 어버이를 생각하고, 오늘은 마음의 스승을 생각하는 주일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말했다. (3장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결국에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싶다. 우리를 사랑해 주고, 우리의 행복을 함께 만들어 주는 사람들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기자고. 

사람이란 아무리 배부른 환경에 놓여도 함께 웃어주고 손잡아 줄 사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행복은 시작이야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되어야 하겠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웃음과 행복에서 채워지는 법이다.

이것을 미처 알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제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예수님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상상은 잠시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아마도 그런 인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바로 내 스스로 만들어내는 지옥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어머니가 계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내 스승과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 계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나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풍성한 관계에서 나오는 향기라고 고백하고 싶다. 이 모든 소중한 ‘사랑’ 없이는, 나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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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목양칼럼

 

쉬운 길로 가지 마라!

편해지고 싶고 그래서 타협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잘 알기에 마음에 새기고 외치는 소리다. 그러나 그 말의 진의(眞意)가 고통을 무조건 사서 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흉내 내어 십자가에 스스로를 못 박은 모양이다. 완전한 자살인지, 누군가 협조했는지 아직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모든 정황이 스스로의 결정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어 왔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 몸을 상해(傷害)하고 심지어 스스로 죽기까지 했다.

인간의 본능에는 고통을 숭배하는 마조히즘(masochism)적 경향이 있는가 보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맹목적인 고통이 아니라, 희망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소망을 위한 인내’이다. 만약 소망이 없다면 인내는 무의미해진다. 이것은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이다.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자체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고통은 삶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고통이 은혜의 통로가 되려면, 그 안에 소망이 역사해야 한다. 고통을 이기는 소망의 힘, 그것이 바로 신앙의 비밀이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선물이다.

쉬운 길로 가지 마라.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쉬운 길로 가라.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삶을 긍정하는 것은 신앙의 반대가 아니다. 다만 행복과 쾌락이 소망의 가치를 훼손하여서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代價)마저 회피하려고 할 때, 그 때만은 쉬운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영혼이 사는 것이다. 그 선택에서조차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 쉬운 길을 선택할 때에, 신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엄이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으니, 인간이란 계속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름답게 되더라. 완전하고 강해야만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약하더라도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계속 노력할 때에 그 진심(盡心)에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힘이 나오는 것 같다.

일부러 고통을 즐길 필요는 없다. 행복할 수 있으면 되도록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나 생각하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쉬운 길로 가지 말라는 외침의 속뜻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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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목양칼럼



바람이 분다. 거센 바람이 건물마저 흔들고 있다. 그래서 바람도 지진처럼 느껴진다. 햇살과 바람이 번갈아 불어댄다. 종잡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 센다이로 간다. 400명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구호물품을 들고 가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물건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일본에 올 때도 그랬다. 내가 불쌍히 여겼던 것은, 재정적인 상황이나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목회자가 없는 것이었다. 문제가 없는 세상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따뜻한 사람 하나 있어서 그 마음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귀한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마음은 값지고 소중하다. 나는 일본에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직접 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마음이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부족했다. 이번의 지진을 겪으면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뼈 아팠고, 지금도 많이 아프다. 

상황은 잘 보면서 마음은 보지 못하는 안목이 안타깝다. 지난 5년의 세월을 겪고서도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는 오해들이 슬프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지금의 상황과 나를 향하는 모호한 시선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차겁고 냉정한 그 말들이 아프다. 

센다이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참혹한 현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아주 오랜 시간 계속해서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사용하신다면, 분명히 내 기도를 통해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물질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다. 결국 나는 이 재난으로부터 타인(他人)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센다이로 가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손해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걱정인 것은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를 포함하여 누구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 믿음의 상은 없다.

어떻게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인 줄 아냐고? 그럼 누가 어떻게 감히 날마다 땅을 흔들리게 할 수 있을까? 현실은 돈 문제인 것 같지만, 원인은 보다 깊은 차원이다. 돈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차원이다. 이것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장님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도해야 하는 시간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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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 부활절 목양칼럼



아이가 태어났다. 머리숱이 많은 여자아이라고 한다. 

아빠는 송재영, 엄마는 서주은.  두 분 다 서른이 훨씬 넘어 부모가 되었다.

산통을 하다가 결국에는 수술을 했다고 하지만, 다행이도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고 하니 감사하기만 하다.  

사연 많은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아이는 해맑게 태어난다.

막달에 들어선 산모가 지진을 피해 12층 아파트에서 계단으로 내려왔을 때, 그리고 동경에서 나고야로 피난하고 다시 흔들리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할 때, 내심 불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생명은 현실보다 강했고, 은혜는 고통보다 컸다.

아직도 매일 땅이 흔들린다. 그 후유증은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세상이 계속 흔들리는 것처럼 불안을 느끼게 한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몇 달 전의 평화와 안도감은 꿈처럼 희미하게 기억된다.

그래도 살 이유가 생겼다. 아직도 연한 초록 같은 내 자식과, 이 모진 세상이라도 희망을 품고 태어나 준 아이를 위해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그들 손에 물려주기 위해서 안간힘이라도 써보아야 한다.

희망은 파도 저편의 등대처럼 반짝거린다.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음을 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절망을 무찌르는 칼날 같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신다. 이제 뭘 어떻게 할꺼냐고? 나는 대답한다. 기다리겠다고. 희망을 믿고 나의 인생을 그래도 사랑하겠다고. 아픈 사람을 다독거리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며 아직도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겠다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씀 드린다.

꿈은 죽었다. 높이 오르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사형 당했다. 그러나 꿈이 죽은 자리에 새싹이 다시 돋았다. 지금 내곁의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없다던 테레사 수녀의 말씀과 같이, 나는 이미 그런 삶에 내 인생을 걸었고, 그 여정에 고생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

이해 받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아직 멋지다고 생각한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한참 내 인생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벌써부터 내 인생의 결말이 몹시 궁금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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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목양칼럼


항상 지혜로운 사람은 내일을 살고, 우매한 사람은 과거를 살아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내일의 씨앗으로 삼아 살아가지만, 우매한 사람은 오늘을 어제의 찌꺼기로 낭비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후회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의 인생에는 후회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설사 실수와 같은 경험을 통해서도 점점 지혜로워집니다.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내일은 달라지기 위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하여 점점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완성되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거의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오히려 현실은 초라하고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결국 이런 자랑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만약 그가 말만 하는 허풍쟁이가 아니라면, 이 사람이야말로 미래에 유력한 사람이고, 실력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신을 곰곰이 살펴 봅시다. 당신의 생각은 미래를 더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를 더 향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현실에서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당신이 아니라 미래의 당신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고, 승리를 얻으며 여기까지 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흘려 보내고, 이제 다시 허리 띠를 졸라 매고, 무엇을 향하여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이 생각처럼 길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고 능력은 작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자기의 의지와 능력을 집중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능숙함이란 단지 그 일을 많이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힘을 빼고, 집중할 곳에 힘을 모아서 사용하는 판단력이 관건입니다. 그런 분별력이 없으면 아무리 그 일을 오래 해도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포기하고, 어디로 그 힘을 가져다가 집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결국 이 결정의 핵심은, 내가 정말 원하고 되고 싶은 인생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나’에 대하여 대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그분의 대답이 가장 정확하고 옳습니다. 그 대답을 듣기까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들어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되지 말고 미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당신은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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