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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2 목양칼럼

 

꽃은 져서 아름답고 인생은 끝이 있어 아름답다.

문득 정신이 들어 생각해보니 내 나이가 벌써 마흔셋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절반을 지나는 셈이다.

지난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듯이 남은 인생도 그렇게 가게 될까? 아니, 이제부터 정말 본격적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4월 말미의 벚꽃 나무에서 꽃잎이 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끝이 올 것이다.

화려한 꽃잎 다 바람에 떨구고 실체로 드러나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나도 그 때에, 벚나무 같았으면 좋겠다.

꽃이 떨어진 자리가 앙상하고 초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릇한 생명으로 다시 시작되는 그런 인생이면 좋겠다. 내가 품었던 꿈과 선한 뜻이 나의 인생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싹이 나고 더 푸르게 자라가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주님의 품에 가면 좋겠다.

솔로몬은 만물에 때가 있다고 노래했다. 그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공자가 말했던 ‘지천명(知天命)’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분의 때를 아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분의 주권 앞에서, 내가 주도하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기 위해서 더 기도해야 하겠다...

“언젠가는 그리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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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8 목양칼럼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무덤에 놓인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부활에 대한 예고가 그렇게 많이 있었지만,아무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차례대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똑 같은 현실을 본다. 매주마다 성경을 강론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라고 설교해 왔지만, 정작 사람들의 현주소는 무덤가 어슬렁거리기, 그 언저리다. 부활의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기 보다는, 믿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본다.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고, 아프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그 짐을 대신 지는 일이다. 양을 비난하는 목자는 없다. 설사 잠시 책망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양의 문제가 목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실천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분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목자의 길에 들어선 목회자라면,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엄숙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양들이 무덤가를 어슬렁거리는 무력함의 책임은 목자에게 있다.

다시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이다.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를 진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 그 고통의 크기와 넓이만큼 반대로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문에 성경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험난한 고생과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안전하다. 그가 없는 영화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반드시 잘 되게 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만 산다면 결과는 이미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그러니 무덤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생명이 넘실거리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시체가 아닌 예수를 만나라. 다시 사명을 받으라. 다시 사랑을 확인하라.

성경을 펴고 새벽을 맞는다. 어스름한 새벽 빛이 창가에 스민다. 아직은 싸늘한 기운이 냄새처럼 온 몸에 풍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부활절은 항상 그 변화의 무렵에서 나를 깨닫게 한다. 예수는 이미 세상을 이겼다. 때문에 나도 이길 것이다. 그것은 찬바람이 어쩔 수 없는 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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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1 목양칼럼

 

위험 앞에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눈을 감는다. 물론 눈이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을 감음으로써 어느 정도는 위험이 주는 공포를 회피하려는 본능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안정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눈을 감으면 일단 마음은 차분해진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위험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스포츠맨들은 이 본능을 극복하는 훈련을 한다. 이를테면 야구선수는 공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훈련한다. 맞더라도 공을 보면서 맞는 것이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격투기 선수들은 심지어 눈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이나 발길질에도 가드를 올리면서 상대를 보는 훈련을 한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 가장 절호의 찬스를 주기 때문이다.

꿩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사냥개로 꿩을 몰아간다. 꿩은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잔뜩 먹은 꿩은 오래 날지를 못한다. 결국 날아오르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하며 사냥개의 추격을 피한다.그러다가 절명의 순간, 더 이상 도약을 시도할 수 없는 저질 체력의 바닥이 드러날 때에, 꿩은 수풀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습성이 있다. 눈을 감아 버리는 본능과 비슷하다. 자기 머리를 감추고는 사냥개가 사납게 물기까지 그것으로 잠시의 평화를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순간에 아담은 수풀 사이에 숨어서 눈을 감았다. 저지른 죄가 막중하여 겁도 났겠지만, 그런다고 엎지른 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아담이 그 순간에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 앞에 대장부처럼 나타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가끔은 사람의 본능이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불안한 예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그것을 인정하지도, 준비하지도 않는다. 막연하게 ‘긍정적 사고’만을 추구하고 눈을 감는다. 무대책이 대책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남을 비판하고 남의 얘기에는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참 사람이란 알 수가 없다.

눈을 감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비록 싫더라도 현실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책임감 있게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위기가 기회가 되고,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다.

나는 항상 기도의 자리에서 눈을 뜬다. 기도는 현실과 나의 빈약한 존재 사이에서 고통 하는 시간이다.기도할 때에 교만한 마음이 무너지고, 내가 얼마나 꿩 같은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강을 건넌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항상 통곡을 지나 결단으로 끝이 난다.

삶을 막연하게 미루지 말라. 미루다 보면 후회로 끝이 난다. 눈을 뜨고 지금의 현실과 자신을 보라. 어쩌면 이미 사냥개의 사나운 이빨이 목덜미에 다가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한 번 더 도약할 힘이 생겨날지 누가 알겠는가? 눈이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주저앉는 법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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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 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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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라는 대답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는 않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을 찾았다고 하자. 과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기의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여서 그것이 하나님이 응답으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다시 확정한다. 그러면 이제 혼란과 불안만이 남는다. 다시 또 하나님의 대답이 필요한 경우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이 결코 편안하지 못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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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확실한 방법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직통(直通)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가 무당 비슷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담을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소통의 방법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죄의 담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가로 막는데, 그것은 기도 조금 하고 성경 얼마를 안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에 들어선 자이지, 그 길을 완주한 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청동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즉, 장차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명백하게 듣고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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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여서, 지레 포기하거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전유물인 것처럼 자기에게 오면, 혹은 자기의 방법을 따르면 언제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칭 예수인 사람들의 확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말씀 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시다. 말씀을 하실 때에도 이유가 있고, 하지 않으실 때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잘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어서, 사실 소상하게 설명해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말씀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또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리지 않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뭔가를 말씀하실 때에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요점을 말해야 하겠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나 상황, 자연,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렇지만 기도와 말씀은 가장 확실한 통로이며,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와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의 신자들이 지성소와 법궤를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 하는 것은 지성소와 법궤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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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음성을 듣는, 기도와 성경묵상의 방법이 따로 있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이 조건은 우리가 제일 약한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인내’ 혹은 ‘성실함’이다. 나는 두 단어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성실함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것이 바로 인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보는 결단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는데, 성실하게 해야 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응답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이 인스턴트적 사고가 신앙적 혼돈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의 초보에 있어, 이런 식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절박한 필요, 혹은 절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청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마치 한밤에 떡을 빌리러 이웃집의 문을 크게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방법이 습관이 된다면 어떨까?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면, 다음에는 미리 떡을 준비하는 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시 빌린다고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급박한 기도를 통해 응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변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변화가 아니다. 성실한 기도생활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이제는 다윗처럼 성경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여기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덮어버리고 기도는 멈춘 채 자기 맘대로 살다가, 어떤 위기와 답답한 상황을 만나서야 다시 그것을 찾는다면, 이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점(占)집을 찾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실 때에조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치 오래 살아온 가족이 서로의 의도를 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어떤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그냥 아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를 읽어 보았는가? 신기한 것은, 거기에는 기적도 없고 응답도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이 느헤미야에게 전달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넋두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탄식하는 그 모든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신비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함께 하셨다. 돕는 사람들을 붙이시고, 때로는 대적의 실수와 결정을 통해서도 느헤미야의 길을 도우셨다.

하나님의 뜻을 꼭 말로 해야 알 수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차원보다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차원 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그러면 말씀을 해주실 때에도, 말씀을 안 하실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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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늘 감사한다. ‘예정’이라는 교리를 믿거니와 그 예정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독선적 리더십의 횡포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런 횡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설사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결국에는 의도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있다. 마치 요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했지만, 다윗의 시편과 같이 그는 결코 한 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예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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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은 결국 우리의 실존을 드러내는 기회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 깊어졌고 지혜가 늘었으며 자신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매번의 선택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택을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낼 뿐이다. 인생은 결국 전능자의 손에 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든, 아니면 직선으로 가든... 인생은 그분의 지혜가 예정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리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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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2 목양칼럼

 

신앙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무엇에서만 신앙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단한 기적이 나타나든지 순교의 현장 같은 극단의 상황이 되어야만 신앙을 찾고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은 대부분의 경우 일상이다. 지루한 생활에서 짜증이 일어날 때, 옳은 것과 바른 것이 충돌할 때, 몸이 고달플 때에, 그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자기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문제가 생겨야만 기도하고, 고민이 있어야만 성경을 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없다. 그들의 하나님은 문제에 대한 응답이지, 성경이 말해주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욥을 보라. 그가 훌륭한 것은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을 당해서도 그 믿음의 실천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정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형통하던 날에, 더 이상 아무런 응답을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시절에도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갈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고난 속에서 더 황당했을 것이다. 고난 자체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린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욥을 근본부터 흔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다.

일상을 믿음으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과 인생에서 낙제하게 되어 있다.

신앙은 요식행위가 아니다. 액세서리가 아니다. 신앙은 실존의 모든 것이다. 일상이다. 말이 신앙이고, 생각이 신앙이고, 먹고 사는 게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점령해야만 한다. 신앙이 우리의 모든 것을 점령하기까지 우리는 갈망해야 하며, 마음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아, 슬프다. 신앙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슬프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 장을 펴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슬프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말하는 것이 슬프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도, 전혀 자기의 일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슬프다.

그렇게 살다가는 낙망할 때가 올 텐데… 인생의 기회는 그리 많지도, 길지도 않은데 그것을 모르고 막연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픔이다.

돌아오라.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간단한 실천으로부터 신앙의 부흥은 시작된다. 그것은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도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조용히 읊조리며 내 마음의 주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것이다. 하루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사는 것이다. 몇 번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나의 습관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방법을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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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9

2012-01-08 목양칼럼

 

설교는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과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신문’이 지금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성경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설교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험과 율법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같은 설교자로서 그 이면에 숨겨진 제3의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긍휼과 사랑, 그 정서가 없는 설교를 나는 성경에서 단 한 편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불려지는 것이리라.

설교가 막힌다. 물론 새로운 지식의 충전도 필요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나는 설교야말로 연애의 감정 속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자기가 인도해야 하는 양떼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정서와 무한한 책임감… 그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설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이 문제이다. 부부도 평생 사랑하는 것이 힘든 것이 세상이고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온갖 오류의 가능성과 문제 속에서 만난 목회자와 신자가 서로 변치 않는 사랑을 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헤어짐이 흔하다. 하지만 헤어짐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것은 비슷한 양상의 문제로 재발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하기 힘든 신자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도 다시 또 그런 신자가 찾아오고, 사랑하기 힘든 목회자를 떠나도 다시 또 그런 목회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를 어쩌랴!

비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만나는 것이다. 설교자도 예수를 통해 신자들을 만나고, 신자들도 예수를 통해 설교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we)’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사랑의 정서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 길만이 내가 스스로 설교에 실패하지 않는 길이라 믿는다. 신자들에게 더 좋은 설교를 먹이고 싶은 갈망으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강단에 서면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과 열정으로 자기에게 부어진 은혜를 쏟아내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설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설교는 강연이 아니다. 설교는 공명(共鳴)이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가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 증폭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오늘 설교에는 ‘아멘’이라는 소리가 자주, 그리고 커졌으면 한다. 그것은 설교자 개인에 대한 찬동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탄성이며, 감동이어야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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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목양칼럼

 

아기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감정이 순해진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이제는 잊고 살아가는 모습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감정과 생각이 아주 단순해서 평화롭던 시절, 울음소리조차 편안하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아기의 손은 투명하다. 햇살이 투과하는 손가락은 현실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심지어 아기의 체모조차 투명해서, 한국에서는 그것을 ‘솜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햇살은 아기 위에 내려앉고 미끄러진다. 빛이 흐르는 아기의 몸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누구나 흙과 함께 빛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현실의 나는 어떠한가? 우선, 감정이 너무 복잡하다. 내가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나도 모를 때가 많다. 웃으면서도 분노하고, 울면서도 계산한다. 과감하고 단호해지기를 추구하지만, 현실의 감정은 항상 지저분하다. 이러면서도 저러고, 저러면서도 이러한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을 흔들고 나면, 나조차 나를 모르겠고 사랑하기 버겁다. 그러니… 하물며 누구에게 사랑을 바랄까!

눈빛도 탁해졌다. 간혹 실핏줄도 터져있다. 빛은 흐르지 못하고 몸에 고인다. 그늘이 축축하게 깃들어 몸이 춥다. 흙과 빛으로 지어졌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흙만 남은 것 같다. 싫지만 날마다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난 날이다. 예수님의 생일이다.

하나님은 왜 아기가 되었을까? 이 시즌에는 백화점마다, 성당마다, 교회마다 작은 마구간의 모형을 만든다. 거기 엄마와 아빠와 아기가 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참한 환경이지만 가장 환하고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있다.

난 이 장면을 모형과 그림으로 볼 때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추억한다. 나도 저렇게 행복했지. 나도 저렇게 욕심이 없었지. 나도 저렇게 하나님께 가까운 시절이 있었지. 나도 빛이 깃들어 춥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지. 간절히 회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만드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가끔이지만 어린 아이의 표정과 느낌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아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웃고, 떠들고, 손짓하고, 머리가 바람에 날릴 때에, 빛이 사람 안으로 깃들고 다시 안에서 밖으로 우러난다. 그 모습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영락없는 아기이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던 아담의 모습이고, 바로 이 천 년 전의 오늘에 우리 곁에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복잡하지 말아라. 감정도 생각도 단순함을 추구하라. 솔직하라. 순(順)하게 살아라. 말구유에 살아도 따뜻해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몹쓸 생각으로 몸을 그늘지게 하지 말아라. 아기처럼 투명하라. 거침없이 손짓하고 말하라. 자기다워라.

하나님께서 아기가 되셨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려고 아기가 되셨다. 구유에 누운 아기의 해맑은 눈빛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느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기억해야 한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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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목양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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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좀 해라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2

2011-09-25 목양칼럼

 

공부(工夫)는 본래 ‘일하는 사내’를 뜻한다. 때문에 이 말은 학문을 익힌다는 뜻과 기술을 익힌다는 뜻을 다 갖는다. 보다 어원적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공부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조선시대까지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이 존재했다. 직업도 일종의 사회적 지위와 같아서 그 업종에 따라 차별을 받았다. 이것은 비단 조선시대만의 사회적 그늘은 아니다. 중세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의식이 깨뜨려지고, 우리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밝은 세상을 맞았다.

그러나 사회적인 공언(公言)과 달리 현실은 아직도 전근대적(前近代的)이다. 당신은 정말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공부(工夫)는 학문과 기술, 아니 삶의 모든 영역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있는가?

이를 테면, 운동선수의 연습이 공부이고, 장사꾼의 장사가 공부이고, 댄서의 춤이 공부이고, 가수의 노래가 공부이다. 자기를 갈고 닦는 것, 자기 안의 소질을 계발하고 세상에 이바지 하려는 모든 노력이 ‘공부하다’는 말로 신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어, 수학만이 공부라 일컬어진다. 댄서의 춤은 공부 밖의 일탈이고, 운동선수의 땀 흘림은 공부를 회피하는 차선(次善)이며, 장사꾼의 장사는 공부와 대칭되는 저급한 일로 인식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종류의 꽃으로 세상을 덮지 않으셨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수학을 잘하고, 어학에 감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의 색깔과 향기가 어우러질 때에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움의 하모니를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부(工夫)는 신성(神聖)하다. 자기의 소질을 알고 그것을 갈고 닦아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여기에 노동자의 작업복과 목사의 가운이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안에 얼마나 진지한 땀과 열정을 채우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제일 바보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공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어부가 수학에 낙제를 하면 어떤가? 미술가가 조금 음치라고 낙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밥 잘하는 엄마는 공부 잘하는 것이다. 운동회 때마다 계주 선수로 선발되는 아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그 아이의 공부는 운동장에 있는 것이다.

공부 좀 해서 공부(工夫)가 되자. 녹차 티백(tea bag)이 첫 잔에는 예쁜 녹색으로 우러나지만, 서너 번을 우리면 점점 녹색이 사라져간다. 그런데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얻은 재주로 평생을 우려내 먹고 살려고 한다. 쉽게 쉽게 살고 진정한 공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허허롭다.

잘 하는 일을 격려하고, 평생을 열정으로 살게 하라.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이다.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보일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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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목양칼럼

 

중국에서는 지금도 동북공정이 계속되고 있다.

본래 중국은 한족(漢族)의 나라였다. 때문에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중국(中國)]이라 선언하고, 주변의 소수민족들을 모두 야만인과 오랑캐로 취급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도 동이(東夷)라 불렸었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달라졌다. 소수민족을 동화시켜 거대한 중국에 안착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역사의 조작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공산당이 맘을 먹으면 어용학자(御用學者)들이야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고, 역사적 증거들도 조작할 수 있다. 자기들의 뜻에 맞는 증거들은 선전하고, 불리한 증거들은 은닉(隱匿)하는 것이다. 과거 일본이 식민지사관의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비석에 정을 대었듯이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도둑질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싸움은 우리에게 심각하게 불리하다. 일단 고대사의 현장이 전부, 현재는 중국의 실효적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다 보니, 우리 학자들은 탐사도 함부로 못하고, 역사적 증거들도 맘대로 수집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료들은 계속해서 훼손과 행방불명을 당하고 있다.

역사를 잃으면 긍지와 정체성도 사라진다. 가난한 시절이야 조상의 유물 또한 낡고 누추한 것의 취급을 받겠지만, 여유가 생겨나고 사회가 힘을 가지면 족보와 유물들이 황금 이상의 가치로 이해되고 연구된다. 대한민국이 프랑스로부터 규장각 문서의 반환을 추진하고, 세계 각처로 흩어진 조상들의 보물을 찾아 돌려오기 위해 지극한 정성과 막대한 재화를 들이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韓國)의 고대사 문제는 단지 몇몇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에만 맡기기에는 너무 위중(危重)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제국이 되어서 우주선을 쏘고,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폭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헤커부대를 운영하는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라도 방심하다가는, 정말 우리의 고대사가 다 날라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한민국에 하루 빨리 동북공정을 전담하는 팀이 꾸려져서 정부와 학계(學界), 그리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우리의 고대사를 방어하고 역사적 증거와 자료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식민지 시절에 역사를 식민지사관에 내어주고, 그 후유증에 오래도록 나라가 멍들었던 교훈을 다시 한 번 유념하기를 바란다.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는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이 소리 없는 전쟁을 결코 가벼이 생각지 말고, 진실의 수호를 위해 다같이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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