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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목양칼럼


교황의 방문으로 한국 매스컴이 뜨겁다.

부끄럽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위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나의 개신교는 무엇을 했던가?

위로의 자리에 목사님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젊은 목사님들이 지금도 유족들과 함께 금식하며 최선을 다하시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는 적어도, 교황과 같은 어른이 없었다. 오히려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유족들을 욕보이는 언행을 일삼아 논란이 일었다. 그것은 신앙의 차원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심해야 할 언행이며, 인격의 차원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무형의 폭력이었다. 


비약된 관점이지만, 나는 교황의 방문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오른다.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이 이런 방식을 취한 것에는 정치적 흑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유대인과 하나될 수 없는 입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만의 독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유대교로부터 종교적 분리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유대교와 다른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표방해야 했다.

사마리아인의 종교가 갈리면서, 유대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것은 아마도 타종교보다 '이단'에 훨씬 큰 적대감을 느끼는 우리의 정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비유(누가복음10장)에서 이 사마리아인을 '선한 이웃'으로 등장시키셨다. 

예수님의 이 설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마치 '일베(일간베스트)'에서 설교하면서 '전라도 좌빨종북'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을 '선한 이웃'으로 설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논객'이 있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이 설교를 두고두고 씹었으리라. 

이 설교가 더욱 자극적인 까닭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종교적인 부류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 그려진 것에 있다. 이 정도 설정이라면,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또한 반유대적인 공격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주의자도 아니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예수님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도 않으시며, 전제주의나 공산주의를 지향하시지도 않는다. 

정치적 신념과 제도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혁된다.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며, 좋아질 때도 있고 나빠질 때도 있다.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적절하다. 유대주의 역시 한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보편적 부르심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임시로 사용하신 포장이다. 그렇다면 알맹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것을 ‘선량함’이라고 부르셨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위하여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목사로서,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신학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지성은 개혁신학을 옳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평생 믿고,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교황의 방문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설교를 다시 듣는다. 

한국 교회에 훌륭한 신학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깨달음은 풍성한데, 실천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렇게 감동적인 책을 저술하고 많은 신자들을 뭉클하게 설교했던 사람들이 과연 예배당 밖의 사건, 상처 받은 세상, 버려진 사람들, 다 죽어가는 강도 만난 자에 대하여는 어떻게 대우했던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제단에서 다 불타기도 전에,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방관하고 자기 발걸음을 바쁘게 가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황을 통해, 어쩌면 한국의 개신교를 꾸짖고 당혹스럽게 만드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했다. 공자는 함께 길을 걷는 세 사람 중에 한 명은 반드시 나에게 스승이 된다고 하였다. 천주교의 역사에 그야말로 ‘아니올시다’ 이었던 교황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교황은 나름 훌륭하지 않은가! 그 신학과 역사의 색안경을 통해 보기 전에, 그래도 이 정도면 과연 대화하고 선한 경쟁을 해볼만한 빼어난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 후에,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 실체의 부재를 따져봐야 할 때가 아닐까? 교황이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교회가 문제다. 한국교회가 문제다. 이것이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교황의 선행을 보며, 누군가는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자기를 위장한다고 하더라.

좋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훌륭하다. 그럼, 사탄도 광명의 천사를 위장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니, 당신은 사탄을 흉내내기로 작정이라도 했단 말인가…… 코스플레이도 아니고, 할로윈 분장파티도 아닌데 뭐 하는 짓인가? 그 비방과 모욕, 그 무례함이 과연 옳은 신앙의 뿌리에서 나온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비판만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사람은, 다른 종교의 약점을 잘 물어뜯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잘 보여줄 사람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직접 몸으로 말해야 할 차례이다. 세상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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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2 목양칼럼



귀한 자식일수록 천하게 키우라는 말이 있다.

호환(虎患), 마마와 같은 천재지변의 위험으로 자식을 많이 잃었던 과거에는, 귀한 자식에 대한 미지의 질투를 두려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타락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철이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반드시 아이에게 유익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부모들에게 경계하기 위하여 이런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요즘은 모두 자녀를 적게 낳는다. 늦게 결혼한 탓도 있겠지만, 자녀 양육의 환경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되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너무 돈이 많이 들어간다.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아이를 양육한다. 아직도 꽃다운 엄마들이 낡은 옷만 입고 추리하게 생활하며 아이는 공주님이나 왕자님처럼 꾸미는 것을 보면, 가슴 한 켠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 사랑에서 나오는 욕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아이를 ‘사람’으로 키워야지 공주님과 왕자님으로 키우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긴다. 아이를 위해서도 그것은 좋은 양육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도 굴곡은 있다. 좋은 날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인생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원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는 마법의 나라에 살다가 갑자기 치열하고 냉정한 현실에 내동댕이 쳐지면 그 충격이 어떠하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부모는 한시적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날아가야 한다. 험한 세상에서도 씩씩하게 이겨내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나의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내 새끼 입에 쌀밥 들어가는 풍경이라고 하더라. 어려운 시절에 나온 이야기겠지만, 나는 아직도 이 말을 실감한다. 내 새끼 입에 맛있는 거 들어갈 때, 내 배가 아니라 가슴이 포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 입에만 모두 넣어주면 안된다. 자칫 자기 몫을 모르고 자기 입에 다 넣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이가 되면, 결국 사회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습관이 몸에 배인 아이는 사랑 받기는 틀린 셈이다.

기다릴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알고, 때로는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의 자리에서도 충분히 자기에 대한 긍지를 지킬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부모에게는 자식 사랑이 본능이지만, 그 본능으로만 사랑하면 덕스럽지 못하다. 그 본능을 잘 절제하고 지혜롭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받는 아이도 유익하고,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될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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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목양칼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패스(pass)의 기법'을 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모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결국 풀 수 있는 문제도 못 푸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안 풀리면, 일단은 패스다. 적절하게 패스하고 먼저는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 비결이다.

그러나 '패스'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쉬운 것은 누구에게나 쉽고,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월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쉬운 것을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어려운 것을 결국 풀어야만 한다. 

최대한의 역량을 만들어서 패스한 문제로 회귀해야 한다는 뜻이다. 풀지 못한 문제는 결국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긍정'이 시대적인 미덕이 되면서, 사람들은 강점에 집중하라고 흔히 얘기한다. 잘하는 일을 계속하고, 그래서 칭찬을 듣는 것은 달콤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인생을 그렇게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성경은 곳곳에서 '완전'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준다.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불완전을 보상하는 십자가를 대신 져 주셨으면서도 왜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하라'는 명령을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이 부담스러운 명령을...

완전함은 '회복'의 다른 이름이다. 깨어진 부분을 보수하고, 부족해진 부분을 채우는 것이다. 없는 것을 새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부분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의 명령은, 우리를 잃어버린 실존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과 허물들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상실의 아픈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은혜를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는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은, 패스해도 좋다. 누구 말대로 자기의 강점에 집중하고, 장점을 살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장년에 이른 분들은 아니다. 이제는 보수공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이다. 더이상 화려한 겉치장으로 자기의 부실한 실존을 은폐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더우기 우리는 모든 것을 한 눈에 감찰하시는 창조주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패스했던 문제로 돌아가시라. 바쁘고 여유 없어 돌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라. 성격 급했던 분은 마음의 불을 좀 순하게 다스리고, 소심했던 분은 창을 열고 넓고 크게 기지개를 펴 보시라.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안하면 못 견디던 분들은 침묵의 은사를 받으시라. 인색했던 양반들은 굽어진 손을 펴서 좀 넉넉하게 주고 나누는 것을 연습하시라.

미치도록 긍정적인 분들을 보는 것은 버겁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이 모든 약점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내가 다혈질이라도 뒤끝은 없다, 뭐 이런 식이다. 사회생활은 그런 식으로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다르다. 일단 그 '다혈질'의 구멍을 메우지 못하면 은혜는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완전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대하여 불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긍정의 경향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만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자기의 부족함에 대하여 깊이 자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매우 그럴싸했던 사람들조차, 깊은 절망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은, 그로부터 회복의 노력이 시작되고 자기와 치열하게 싸우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단점을 긍정하지 않았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나는 성경에서 무수한 증인들을 끌어내어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주는 위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긴대로 살지 마라. 바라는 대로 살아라. '나답다'라는 말이 좋아 보여도 '예수님답게'라는 말보다 좋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를 찾아야 하지만, 거기서 우리의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 모순의 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답게'라는 무거운 준거를 우리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장년들이여, 패스했던 문제로 돌아가라. 자기를 바꾸라. 고민하라. 그리고 처절하게 싸우라. 싸우다 지치거나 실패하면,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양호실이 있음을 기억하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고로,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는 반드시 바뀐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밎지 않는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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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목양칼럼


힘든 시기를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 속에 이번 고비만 넘기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희망은 좋은 것이지만, 희망이 항상 현실은 아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고개에 올라서면 내리막길이 아니라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많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영원한 형벌처럼 오르고 또 오르고, 밀고 또 미는 것이 반복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고개 너머에 대한 상상을 조금 줄이고,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을 조금 더 깊이 체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려움도 피하려고 하지 마라. 어떤 어려움이든 감당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걷어내고 보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들꽃 같은 기쁨들은 무수히 많다. 그 하나하나의 향기를 음미하고, 누리는 것도 우리를 지극히 부요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 따지고 보면 심플하다. 맛있는 음식, 달콤한 잠, 약간의 웃음 그리고 감동의 눈물 한 방울… 그거면 처참하던 현실도 단숨에 행복한 추억으로 바꿀 수 있다.

결국 불행에 묶여 살아가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인생을 조율하는 능력이 형편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지 말고, 살고자 하는 대로 만들어 보시라.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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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를 내부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되는 울타리를 세워왔습니다.

그 울타리는 세속의 물결이 교회를 흔드는 것을 어느 정도 방어하였지만, 아울러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울타리의 보호를 받는 동안, 단기적으로 교회는 더 세상에 대하여 면역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더라도 교회 내부에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하며 '핍박'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월의 나이테 속에서 교회는 점점 귀머거리가 되어 갔습니다. 귀를 닫고 자기들끼리만 살아가는 섬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상을 잃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데, 그 말을 도대체 알아 듣지 못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핍박과 정당한 비판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든 세상의 소리를 신앙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나오는 사탄의 말로 폄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고 내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가 개척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성장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래도 목회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잘만 하더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장사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교회를 성장시켜 세상의 명성을 얻으려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일꾼으로, 영적 추수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설사 내가 감당하는 전투에서 다소 이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편이 실패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고민의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서, 인도네시아 지역의 여러 섬들은 국지적 전투가 한창이었습니다. 더러는 주민이 살지 않는 무인도까지 일본군과 미군은 죽고 죽이는 치열한 희생 속에서 공방전을 계속 했습니다. 

미국의 전면적인 공세 속에서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일본군은 자체적으로 전쟁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보급 없이도 군수품을 조달하고, 내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전투를 감당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섬을 점령하거나 원주민을 포로로 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고보니,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일본의 군대는 해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침마다 일본의 천황이 있을 곳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자기들의 계급을 유지하며 그들만의 전쟁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저는 일부의 교회가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득찬 예배당과 매주 걷어지는 연보, 돌아가는 조직, 계속되는 행사 속에서 세상을 보지도, 전체적인 교회와 자기들을 연결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매도 당하고 영적 전쟁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마치 나치의 선전영화처럼 자기들끼리 감동적인 영상을 찍고, 간증을 인쇄하고, 모임을 계속하면서 이러한 현실이 자기들의 교회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의 각 지체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몸이 수난을 겪는데 팔이 계속해서 즐겁기만 할 수 없고, 다리가 잘려 나가는데 입이 노래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시대의 변화는 각 교회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안깐힘을 써서 막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교회'라는 연대감을 가지고 이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주시하며 싸워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웠던 담장을 이제는 스스로 허물면서 말입니다. 

과거에 교회가 어리던 시절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담장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교회가 성장해서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만 한다면 교회는 소외되고 부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미래를 예고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미 울타리의 해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서 사람들의 숫자가 줄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즉각적인 결집와 해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곧 현대인의 특징이 될 것이고,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성도를 한 교회에 묶어두고 한 사람의 설교로만 양육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로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드라마를 보듯이 기독교방송을 보고, 어떤 설교자나 선교사의 팬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스스로 성경을 해독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신학을 배우고 있으며, 종종 해외에 선교지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결국 개별적인 교회의 울타리를 해체할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는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존속할지, 과연 그 복음의 건전성을 여전히 지킬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의 주권이 그리스도께 있으며, 때문에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합당한 은혜를 주셔서, 결국 교회를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가장 저항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목사'입니다.

목사들은 아직도 '담임목사'의 영향력이 자기 교우들에게 절대적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사람들을 자기 곁에만 묶어두려는 욕심도 보입니다. 

무너지는 울타리를 계속 보수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대부분 목사들입니다. 

이분들은 그것이 경건과 신앙의 보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결코 그런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자기 교회가 작다고 합시다. 그래서 보호와 특혜가 필요하다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하나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자신이 비록 열악한 환경에서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시대, 곧 지금의 시기는 이미 교회가 장성한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소수의 신자들과 작은 장소를 사용한다고 하여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자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설교를 듣고, 신앙의 길을 모색하는 것을 빗겨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목사는 더이상 어떤 개인적인 의도의 담장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담장 없는 교회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더이상 주석집에 나온 설교를 대충 짜집기해서 자기 설교로 삼는 스타일은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다운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면, 그런 목사는 점점 더 고립되거나 엄청나게 비교 당할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목사가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목사를 중심하는 하는 교회 공동체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수평이동에 대하여 말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심지어 예배당을 찾아다니는 수평이동이 아니라, 이제는 간단한 클릭과 터치로 수평 이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오프라인의 모임을 더 강화하고 지역사회와 연결된 활동을 더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교회의 노력은, 거대한 시대적 변화을 역행할 수는 없습니다.

문명은 더 빠른 교통과 더 폭넓은 정보망을 확충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독재자들조차 소셜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자기들의 고립된 세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교회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니 막을 수 없다면 그에 맞는 대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생각을 계속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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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유래는 삼국지이다.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화용도(華容道)에 포위되었다. 이 때에 제갈량은 조조를 죽이도록 관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관우는 지난 날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게 퇴각할 길을 열어 주었다. 결국 조조를 놓친 제갈량은 관우를 참수하려고 할 정도로 격노하였지만, 유비가 중재를 나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하는 말 중에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사람의 일을 열심히 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진(盡)으로 바꾸어진 것은, 사람의 노력을 한층 강조하는 변화라 하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참 드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는 한 건가?


우리들의 함정은, ‘대천명’은 잘하지만 ‘진인사’는 소홀히 하는데 있다.

묵상과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쉽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시내산 자락에서 계속 기도하며 출애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다. 팔순의 노인이었던 모세가 지팡이를 짚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니, 단순히 찾아갈 뿐만 아니라 모세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했다. 먼저는 이집트와 싸워야 했고, 나중에는 노예근성에 물든 이스라엘과 싸워야 했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쉽지 않다. 순탄하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진심을 시험하시는 것 같다. 

늘 내가 원하는 것의 대척점에 있어 팽팽하게 긴장감을 주고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곤란하다. 그리고 아프다. 힘들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버겁다. 어느 정도까지는 곧잘 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것이 나의 최선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과연 나의 한계까지 왔을까?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도 좋은걸까?

진인사(盡人事). 

그 경지는 항상 팽팽한 긴장과 갈등의 저편에 있다. 이것은 편안한 자리에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벌거벗은 우리의 민낯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나오는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후에야, 비로소 대천명(待天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옥동자를 낳는 어미가 있던가? 힘들지 않고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있던가? 

하물며 우리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쉽고 간단할 수 있겠는가? 

그 과정의 눈물과 땀을 감내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신앙이 병드는 것은, 날로 먹으려는 병폐 때문이다. 

왕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초대된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왕은 파격을 결심했다.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다가 잔치의 자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몰려나가 그야말로 사람들을 쓸어 담았다.

평소에는 왕궁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던 걸인, 장애인, 창부,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모두 왕의 잔치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다. 왕은 성대한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가 감히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전개이다. 

술주정뱅이와 건달도 손님으로 영접하는 마당에 예복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예복을 입었으면 얼마나 변변한 예복을 입었겠는가? 

그러나 왕은 단호했다. 그를 끌어내어 잔치에서 내어 좇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데려올 때는 언제고, 옷이 맞지 않는다고 끌어내어 버리는 것은 또 뭔가?


왕이 요구한 ‘예복’은 최소한의 성의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실함에 대한 자각이 곧 왕의 자비를 더 돋보이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왕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염치조차 없었다. 그는 어차피 파격적으로 받아줄 것이라면, 이 따위 예복도 필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왕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섬길 각오가 먼저 서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미안하지만 사절이다. 왕은 내가 아니라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 뜻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가? 그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있는가?

그런 내면의 변화와 결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아낸 사람을 나는 성경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는가?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인가? 삽비라처럼 반은 숨겨 놓고, 반만 바치면서 경건을 사기 치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진인사(盡人事). 사람의 일을 먼저 다하라. 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서 대천명(待天命).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시켜라. 무척이나 어렵고 무거운 신앙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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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9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목회를 성역(聖役, 거룩한 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목사는 늘 서재에 앉아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생각만 하면서 살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목사도 사람이고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비약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아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가끔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목사들, 혹은 목사 후보생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너무 신령하고 거룩해서 감히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가 발산되는데, 마치 십계명을 받을 때의 시내산과 같아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역자로 25년, 목사로 10년을 지내면서 돈 걱정을 내려놓은 적이 별로 없다.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혼하고 처음 받은 월급이 전도사로서 40만원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받던 용돈보다 적은 나의 월급을 손에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때부터 시작된 '돈'과의 싸움은 지금까지 내 삶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내게는, 매달 생활비는 물론 이국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야칭(임대료)과 공과금도 쉬운 적이 없었다.


돈은 만만하지 않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자연의 생산물은 태어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고 썩어서 순환하는데,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 '돈'의 등장이다. 결국 돈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경제적 불평등을 극대화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라는 것은, 몰염치의 결실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미안함을 갖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게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부요함을 계속 늘려가려 하는 경향성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돈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때문에 돈과 관련해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는 문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자기 점검과 노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목사'라고 봐주겠는가!  

목사는 쌀이 떨어지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나? 목사는 교회 야칭(임대료)를 몇 달 밀려도 기도의 힘으로 간과(passover)되는가? 

좋다, 목사야 운명처럼 그런 가난을 받아들이며 산다고 치자. 그 가족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교회 중에서, 돈의 고민을 완전히 벗어던진 교회는 아직 보지 못했다. 

작은 교회는 나처럼 '생활'과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더 '큰 돈'의 무게에 눌려 목사와 교우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 현실이더라.

돈은 결국 싸움의 대상인 것 같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혹은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하기까지는, 그저 그 돈과 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경쟁하며 부침(浮寖)을 반복하는 과정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이상 돈에 대한 갈망, 염려, 애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 나름 귀한 것이다. 그리고 돈의 세상에서 돈을 이기는 법을 듣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교우들의 마음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하나를 연보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 동전이 그 여자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난한 형편이며, 얼마나 큰 믿음인가!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라. 가난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수입이 없는 것이다. 돈 벌기가 힘든 부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동전은 어디서 나왔을까? 길에서 주웠을까? 그래도 좋았겠지만, 예수님의 감탄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그 동전 속에서 상상하게 한다.

동전 하나를 벌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과부는 무엇을 했을까? 그 동전에 스며 있는 눈물과 한숨과 설움과 아픔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돈을 색깔과 숫자로만 본다면, 돈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돈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도풀갱어와 같은 자기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돈이 걱정이다. 돈에 돌아버릴까 걱정이다. 나의 교우들이 양심을 팔아 돈을 벌까 걱정이다. 내가 양손에 받아 봉헌하는 헌금주머니에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섞여 들어올까봐 걱정이다. 돈이 교회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할까봐 걱정이다. 돈이 사람을 핍박할까봐 걱정이다. 목회를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돈에 의존하여 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 때문에는 우는데 사람 때문에는 울지 못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의 전염병에 걸려 만족을 모르는 우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과 무관한 목회는 이상이다. 결국 교회도 돈과 겨루지 않을 수 없다. 돈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의 배후에는 죄가 있다. 신앙은 이 본질을 캐고 끊어내야 한다.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점점 극단적인 자본주의에 물들어, 내가 번 돈은 완전히 나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괴물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교회는 돈과 돈을 버는 방법과 돈에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 고민해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돈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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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목양칼럼 2014-07-15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질서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 말했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 하여서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하나님의 사랑이 덮은 사건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가 깨뜨려졌는가?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어떤 죄라도 이보다 더 큰 형벌을 구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의가 충족되었다. 심지어 정의를 충족시키고도 사랑이 넘쳤으니 사랑이 정의를 덮은 셈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만 유일무이한 복음이다. 이 역설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는 '인과응보'의 보편적 질서를 넘어서지 못하는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술을 끊지 못해서, 사업에 바빠서, 심지어는 가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죄송하단다. 그 마음이야 정말 이해한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복음은 본래 선물이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어차피 그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이어야 하고, 둘째는 그 값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값을 치룰 능력이 없으니 선물이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누구나 '부끄럽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들어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의 모든 약함을 대신 져 주시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를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당당함은, 은혜를 깊이 자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발적 응답의 모습이지, 고개를 쳐들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어떤 부끄러움도 상관할 필요가 없다. 많이 부족해도 괜찮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 자비를 깨닫는다면, '지금'이 바로 회개할 기회이며, 하나님을 만날 때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불쾌한 반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땅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은 많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한다. 그러나 창조주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다. 그것이 복음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금언은, 오히려 부족하다. 복음은 내일이 아니라 몇 시간 후로도 미루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지금이어야 한다.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당장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무릎을 꿇어라. 알량한 죄의식은 십자가에 못 박아라. 부족하다고 고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라. 

부끄럽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기도를 헛소리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빌라. 무엇을 도와달라고 할지 모른다면,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으셨으니, 이제 나를 정의보다 사랑의 눈으로 봐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을 경험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맛 본 사람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깊은 곳을 만진다. 알지 못했던 나를 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꿈꾸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을 자라게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맛을 본 사람은 알고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지니... 이것을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은 하나다.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라. 미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 만나고자 결심을 하고 당장 실천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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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목양칼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한 해가 훌쩍 지나고 10년이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상은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매일매일이 거의 같은 패턴의 반복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지루해져야 하고, 지루하면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느껴져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자체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경계가 뚜렷했습니다. 언제까지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입학, 졸업 등)가 있었습니다. 그 결승점 앞에서 시간은 압축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앞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고 자기를 독려하며 시간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나이부터는 더 이상 그런 긴장감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다음 주에 하면 됩니다. 그 막연함에 익숙해지면서, 시간 자체를 매우 허술하게 보내는 무감각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결국 ‘졸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무한정한 자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없을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교훈합니다. 시간 앞에 옷깃을 여미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시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합당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되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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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6 목양칼럼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맑은 말보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으면서 빨래도 문제고, 이런저런 일상에 불편이 따릅니다. 하루빨리 해가 나와서 눅눅해진 일상을 다 산뜻하게 말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막상 해가 나기 시작하면, 이제 적어도 9월까지는 더위와 열대야가 계속되겠지요. 그러면 그 더위 속에서는 지금의 서늘한 밤과 새벽이 다시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보내고 나면 그리울 것입니다. 

그리울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가는 그 불평하던 것에 대하여 아쉬울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남은 날들 중에 ‘첫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상 아무 일도 없는 인생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번잡해도 싸우고, 해결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후회 없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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