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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목회/목양칼럼 / 2014. 6. 28. 19:46



(1)

생각하는 대로 당장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또한 마침내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마음'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에 있어 키(helm)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결국에는 열매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2)

우리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이것을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저것을 바라기도 하고, 혹은 이것저것 다 불만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변덕'은 어떤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의 특성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렵다.

공부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 공부인 까닭이 이 때문이다. 마음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자라야, 인생의 항로를 원하는 곳으로 잡을 수 있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은 알면서도 자기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서 실패하는 것이다. 


(3)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시간이 걸린다. 잊지 말라. 마음은 쉽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의 마음도 그렇고 남의 마음도 그렇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포도주와 같은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오해와 의심의 안개가 걷어지고 마침내 서로 또렷하게 상대방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을 외롭게 살다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4)

표피적인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사람의 사회에서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것은 별로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관계는, 반드시 그 서로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서로 닮게 하고, 격려를 주고받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사랑은 다른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서로가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5)

모든 사람은 변덕쟁이면서도 한결 같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데, 우리는 그런 특성들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잠시 다른 이를 흉내 내는 것은, 착각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친구를 만들어 주진 못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정직해야 한다. 자기를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친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6)

'친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마음이다. 아무리 곁에 살아도 마음이 하나로 묶이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 친구가 아니다. 또한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마음의 뜻이 같고 생각이 닮으면 가히 친구라 할 수 있다. 

친구는 출신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7)

마음을 다스리고 제대로 간파하기 원한다면, 시간을 벌고 좋은 사람을 곁에 두라. 

깊이 생각하고 많이 사랑하라. 그림자에 속지 말고 실체에 가까와지라. 

되도록 자주 정직함을 마주하라. 자기가 믿는 것이나 상상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 자신의 실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 



(8)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다. 특별한 언어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나의 실체는 항상 나의 일상에 담겨 있다. 그것을 곰곰이 보라.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눈빛을 보는 것이다. 그의 일상을 보는 것이다. 그의 현재를 똑바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는 눈이 좋아지면 남도 잘 보이게 된다. 그러면 인생의 항해도 쉬워질 것이다. 빨리 가든, 더디 가든... 결국 마음에 있는 지도를 따라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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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목양칼럼


사람은 그렇다. 마음이 삶을 지배한다. 생각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자꾸 가는 곳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변화가 생겨난다. 그래서 마음을 얻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한국에 들어간 동안에 가족묘원을 잠시 방문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일찍 자리를 잡은 덕분에 성남의 ‘남서울묘원’이라는 곳에 나름 좋은 자리를 잘 잡았다. 처음에는 할머님의 묘지로 썼던 자리가 지금은 가족 납골묘가 되어 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도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부의 격차는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대리석으로 묘를 꾸며도 자손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은 빈틈없이 잡초가 가득하고, 소박해도 누군가 그리움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묘는 손질이 깔끔하다. 그 정돈의 차이에서, 죽은 자의 재산과 명예가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그리움이 읽혀졌다.


대단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좀 배려하며,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사랑하며, 격려하며, 응원하며… 그렇게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앙의 열매라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교회다운 교회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니 스스로 그렇게 되지 마시라! 


교인들의 마음을 짓밟고서라도 큰 예배당은 지어져야 하고, 그러면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욕망이 한국교회를 지배하면서 교회가 망가졌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도 숫자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교인들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양산되고, 결국에는 교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사라졌다. 

마음이 떠난 예배당은 거대한 대리석 묘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욕망의 잡초만 무성하고, 사람들의 변화도, 하나님의 영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거대해도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얻어야 하고, 다치지 말아야 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마음을 다치면서 하는 일은 결국에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런 독선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스스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파렴치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다고 우리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교회라면 모름지기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더욱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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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목양칼럼



일본(동경)에서는 '애호박'을 구할 수 없다.

물론 신주쿠에 있는 한국시장에 가면 수입한 한국산 애호박이 있기는 하지만, 바다 건너 오신 몸이라 귀하고 비싸다. 

그럼 일본 사람들은 호박을 안 먹냐고? 있기는 있는데, 쥬키니호박이 있다. 차이를 궂이 말하자면, 애호박은 아삭하고 쥬키니는 스펀지 같다...

그래서 쥬키니호박으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호박전이다. 

호박전, 이 사소한 음식을 먹으려면, 한국에서 공수해 오든가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게 특식이다. 고국의 맛이고, 그리워 하다가 먹을 때는 감탄하는 별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이집트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를 그리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은 이 또한,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은 민족인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불평이 이해가 갈 것이다. 간사한 입맛의 끈질긴 구애가 사람의 정신 세계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건 사람에 따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자장면이, 양념치킨이, 순대가, 설렁탕이 눈 앞에 삼삼해져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말을 마시라...


말하고 싶은 점은, 신앙의 난관이 결코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질에 이미 깊이 들어와서, 사소해 보이면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욕망들이다. 마치 바다에 흐르는 빙산처럼, 그 노출된 부분은 작아 보여도 그 뿌리는 거대하여 강철 같은 의지라도 침몰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신앙적 승리는 내면의 욕망을 깊이 이해하고 작은 욕망들을 더 잘게 부수는 과정을 반복해야 얻는 것 같다. 

욕망에 대한 관용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낳는다. 인격의 건전성과 파멸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기 욕망의 한계를 보려는 시도는 극히 위험하다. 차라리 아직 건전할 때에조차, 내면에 찾아오는 욕망들을 부수고 또 부수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이를테면, '내가 마늘조차 못 먹다니 얼마나 비참한가!'의 생각에서 '내가 마늘도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군대가 될 수 있겠는가?'의 생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 때 마늘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도 아니고, 행복의 조건이나 건강의 보루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내 마음의 욕망을 통제하는 하나의 지렛대일 뿐이다.


웃기는 고백이지만, 고국이 그리운 날에는 오래 기도를 한다. 그리움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들고 고국을 떠난 사명자에게는 결코 당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죄스러운 것이다. 

내 신앙은 사소한 감정과 욕망들을 죽이고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자랐다. 남들에게 다 허락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사명'이라는 말의 출발선이 아닐까 한다.

자신에게 관대하지 말라. 그러면 욕망이 사람을 삼킨다. 우리가 관대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 엄격하게 살아가는 것이 맞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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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8 목양칼럼


미국의 여러 주의 고속순찰 경관들은 2 갤런 정도의 코카콜라를 차에 싣고 다닙니다. 그 코카콜라의 사용목적은 교통사고가 났을 때 길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비프스테이크를 코카콜라로 채워진 대접에 넣어두면 2일 동안에 그 고기 덩어리가 다 삭아 버립니다. 

변기의 때를 없애는 데에는 코카콜라가 좋습니다. 변기에 묻은 때는 코카콜라에 함유된 시트르산이 말끔히 제거해 줍니다. 

자동차의 배터리에 녹이 슬었으면 배터리 케이블에 코카콜라를 부으세요. 거품을 내면서 녹이 없어집니다. 녹이 슬어 빠지지 않는 볼트가 있으면 코카콜라를 발라 주십시오. 수 분 후면 그 볼트가 빠집니다.

기름에 찌든 옷을 세탁하려면 기름이 묻어 있는 곳에 코카콜라를 부은 후에 세제를 가하여 세탁을 하면 말끔히 씻어집니다. 

코카콜라의 주요성분은 인산인데 그 pH치는 2.8입니다. 그 정도의 pH치면 보통크기의 못을 4일 내에 녹여버립니다. 미국에서 코카콜라의 농축액을 운반하는 트럭들은 독극물에 적용되는 유해물질 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

저런,.. 그래도 기름진 음식이나 피자, 햄버거를 먹을 때는 콜라 생각이 나겠지요.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몸에 배인 습성은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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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8 목양칼럼


창형흡충이라는 기생충이 있다. 창형흡충의 종숙주는 소다. 즉 성충이 돼 알을 낳기 위해서는 소에게 가야 한다. 문제는 창형흡충의 중간숙주, 즉 유충을 보유하고 있는 생물체가 개미라는 점이다. 소를 면밀히 관찰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식동물인 소는 풀 같은 것만 좋아하지 개미를 먹진 않는다.  개미 안에 들어있는 창형흡충의 유충이 소에게 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창형흡충은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 개미에 있는 창형흡충의 유충 중 한 마리가 개미의 뇌로 들어가고 침투에 성공한 유충이 개미에게 명령을 내린다. “풀로 올라가라.” 해가 지면 명령을 받은 개미는 무엇에 홀린 듯 풀로 올라간다. 가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풀잎에 붙어 있다. 

소는 섬세한 면이 부족해 풀에 개미가 붙어도 그냥 섭취하는지라 풀에 올라간 개미는 소에게 잡아 먹힐 확률이 높아진다. 그날 밤 소가 풀을 뜯지 않으면 개미는 풀에서 내려와 자신들의 소굴로 간다. 다른 개미들이 묻는다. “오늘 저녁 때 어디 갔었어? 통 안보이더라.” 유충이 들어있는 개미는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응, 그냥 산책 좀 했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마음과 생각에도 못된 기생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후회할 짓을 하지마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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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의 법칙

목회/목양칼럼 / 2014. 5. 28. 16:42




2014-05-28 목양칼럼


관상어 중에는 코이라는 잉어가 있는데, 이놈은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합니다.

같은 물고기인데도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 기르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코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환경이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능성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는, 돈보다 주변의 사랑과 기대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도 주변에서 자꾸만 못한다, 부족하다, 틀렸다는 말을 듣고 구박을 받으면 마음이 죽게 됩니다. 반대로 조금 부족한 자질의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사랑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주면 놀랍도록 성장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귀머거리에 맹인이었던 헬렌켈러를 훌륭하게 키워낸 애니설리반이나, 낙제생이었던 에디슨을 위해 가정학교를 열었던 어머니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에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함께 고민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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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목양칼럼 


중국 <후한서(後漢書)> 최인전에는 '褰裳濡足(건상유족)'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일이 있을 때면 (마땅히) 옷을 걷고 발이 물에 젖는 것을 무릅써야 한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도 (발이 젖는 게 두려워) 구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人溺不拯則非仁也)이 이어진다. 어려울 때에는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救俗), 평상시에는 예를 지키라(守禮), 벼슬자리에 나가면 공정을 행하고 사사로운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도 보인다.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비겁한 양심은 아는 것을 사는 것으로 대치해 버리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언제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배웠다. (엡 4.13)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어떻게 더러운 것을 치우겠으며, 발이 젖지 않고 어떻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교회’가 세워지며, 나를 헌신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은 삶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관념이 아니다. 신앙을 삶으로 승화하지 않는 이상, 그 신앙이 당신을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철저히 마음에 새기고 명심할 교훈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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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목양칼럼


진리는 태생이 외롭다.

진리가 드러나면 만민이 환영하며 나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유치한 생각이다.

진리는 역사 속에서 항상 그것을 음해하거나 죽이려는 위험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악인은 진리 앞에서 더욱 악해질 뿐이지 좀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래서 악의 결말은 대부분이 멸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는 매력이 있다.

진리의 매력은 진리가 주는 이익(profit)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 그것은 죽여도 죽지 않으며, 꺾어도 꺾이지 않는다. 진리는 순교를 당하더라도 반드시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진리는 강하다. 진리 자체가 죽일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함께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생명(life)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진리와 함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그것이야말로 사는 길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도 가치 없게 하는 타락과 거짓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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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動因)이다.

무기가 없으면 막대기를 가지고도 싸울 수 있지만 밥이 없으면 아무리 용맹한 군대라도 싸울 수 없다. 

아무리 중대한 일도 밥 먹고 해야 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일들은 밥을 먹기 위해 그것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밥은 중요하다. 중요할뿐 아니라 심각하다. 

밥의 문제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며, 밥이 있고서야 비로소 인간의 만사(萬事)가 세워지는 것이다. 

과거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다(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했는데, 이는 결국 밥을 만드는 사람이 천하의 근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밥에 얽힌 사건이 참 많다.

제일 유명한 오병이어(五餠二魚,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이 군중의 밥을 해결한 사건이고, 또한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훑어 먹어서 생겼던 안식일의 논쟁도 역시 사단(事端)은 밥에서 시작되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는 배고픔에 무화과 나무의 가지를 들었다가 열매 없음을 보시고 저주하셨는데, 이는 결국 밥값을 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경고라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는 밥상 공동체다. 초기에는 성찬과 애찬이 잘 구별되지 못했다. 같이 밥을 먹는 것이 곧 예배의 과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설교보다 식사가 교회의 주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만찬과 성찬을 함께 교훈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 교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목회를 잘 하려면, '먹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반은 맞는 말이다. 잘 먹을뿐 아니라 제대로 먹어야 하고 또한 잘 소화시켜야 한다. 밥을 다스리고 정복하지 못하면 목회는 버거운 일이 된다.

목사는 자기만 잘 먹을뿐 아니라 공동체를 잘 먹여야 한다. 밥상을 훌륭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으면 공동체는 메마르고 와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의 가장 큰 후원자는 잘 들어주는 '마리아'도 있지만, 뒤에서 열심히 상을 차려내는 '마르다'도 있는 것이다. 모든 마르다를 꾸짖어 마리아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은 오히려 목회를 저해(沮害)한다.


밥을 무시하고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꼭' 금식을 권하고 싶다. 일단 사흘만 굶어보라. 밥에 대한 생각이 기본부터 달라질 것이고, 먹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세포 하나하나로 깨달을 것이다. 그 절박함과 간절함을 이해하고서만이, 세상에 흔한 밥상 다툼이 보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이해될 것이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밥(=떡=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비중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런 삶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까 신앙을 단순화 시켜서 말해 본다면, 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예수 그리스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쉽지 않은 싸움이며, 숭고한 싸움이다. 자기 밥을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위대한 사람이며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다.

초대교회의 교우들이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은, 사이비 집단을 연상시키는 광신(狂信)의 현상이 아니라, 그들이 은혜로 밥을 극복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기 밥을 위해 살아가는 수준의 인생이 더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파격적이었겠는가! 

밥을 잘 짓고, 그 밥을 넘어서라. 밥도 못 짓는 사람은 신앙을 이룰 수 없다. 자기 밥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떡(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괘변이다. 밥이 중한 줄을 알아야, 비로소 그 말씀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 그렇게 절실하게 밥을 배운 후에, 그 밥보다 귀한 은혜를, 말씀을 배운다면, 그는 분명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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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 목양칼럼


제인이라는 인형을 좋아하는 소녀의 집에 아저씨 한 분이 놀러 왔다.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을 내보이며 아저씨에게 자랑을 했다. 갑자기 아저씨가 “제인, 너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하고 묻자, 소녀는 잠시 깊이 생각한 다음에 아저씨를 바라보고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런데 절대로 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가 약속을 하자, 제인은 방에 들어가더니 아주 못생긴 인형을 들고 나왔다. 코는 문드러졌고, 팔 다리는 떨어졌으며, 옷은 형편없이 낡아있는 인형이었다. 아저씨는 제인에게 “무엇 때문에 이 인형을 좋아하지?”하고 물었다. 그러자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은 사랑 받을 만한 이유가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 없으며,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경쟁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와 황금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지만, 가장 고귀한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랑에 조건을 걸지 말라. 단서를 붙여 입맛대로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실망을 준다면, 그것은 ‘더 큰 사랑’을 요구하는 청구서와 같다고 여겨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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