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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목양칼럼 :: 만년필(萬年筆)


저에게는 20년쯤 묵은 만년필이 하나 있습니다.

Parker Sonnet France라는 모델인데, 아주 고가품은 아닙니다. 그래도 금도금의 닙(nib,펜촉)에 고전스러운 스타일로 대략 10만원이 넘는 제품입니다. 제가 구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저의 외조부님께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보통 초고를 씁니다. 요즘은 어깨 통증이 생겨서 자판 사용을 되도록 삼가다 보니, 이 녀석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 같은 펜입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에 잉크를 묻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대상처럼 순순히 반응하다가도, 갑자기 토라져서 잉크를 내놓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참 글을 쓰다가도 펜촉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오래 방치한 죄가 있습니다. 매일 써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만년필의 특징입니다. 관리를 잘해주고 좋은 잉크를 사용하면 덜하지만, 혹여 질 나쁜 잉크를 먹이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심통을 부립니다.

어떻게 관리를 하냐고요? 대략 한 달에 한 번은 미지근한 물로 만년필의 모든 묵은 잉크를 씻어내야 합니다. 익숙하면 간단하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무지 번거로운 필기구를 비싼 돈 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를 신봉하는 세상에서 잉크를 계속 넣어줘야 하고, 찌꺼기를 청소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 녀석을 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녀석의 매력이 있습니다. 서걱거리는 필기감이 주는 손맛은 물론이고, 그렇게 까탈을 부리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를 못합니다. 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글에 정성이 베이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펜이 그려내는 자신의 글씨를 보면서, 성급함을 자제하고 생각의 꼬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쉽고 깔끔한 것만이 미덕(美德)은 아닐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덜 깔끔해도 그 위에 스며드는 한숨과 땀이, 눈물이 더 인간적인 무엇을 탄생하게 만듭니다. 그 미완의 불편함이 좋아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오래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이놈이 나를 닮고, 내가 또 이놈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감정적인 글을 토해내려고 할 때 이 녀석이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좋은 글을 쓸 때에는 술술거리며 저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펜과 사람 모두에게 성장하고 길들여지는 과정 같습니다. 

펜이 사람에게 그러하듯, 사람 또한 펜에게 그러합니다. 

만년필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우며, 고단하고, 냉철합니다. 그래서 펜은 마음을 강하게 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면, 이 녀석은 저와 평생을 갈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을 지금까지도 묵묵히 받아 적어 주었던 이 녀석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특별하듯, 저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이 펜과의 동행에 이미 담겼으니, 제가 펜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펜은 언제나 저에게 대화의 상대이며, 설득의 처음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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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4 목양칼럼 :: 삼한사온(三寒四溫)


추위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겨울 날씨를 흔히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고 합니다. 냉막한 추위도 사흘이면 사그라들고 다시 나흘은 따뜻한 날씨가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확하게 지켜지는 규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연을 통해 얻어진 인생의 통찰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간 역시 지나갈 것이며 결국에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저는 ‘삼한사온’이라는 말 속에서 긍정과 소망의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상에는 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물론 있습니다. 극지방이나 적도에서는 실재로 그런 날씨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순환의 주기는 약간 다르다 할지라도 추위와 따뜻함의 반복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여정 역시 비슷하다고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추위가 찾아왔다고 너무 두려움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소망의 불씨를 인내의 입김으로 북돋으며 기다리면 됩니다. 반드시 따뜻한 날은 우리 곁에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옛날 이야기를 하듯 지금의 어려움을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손길 속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삼한사온(三寒四溫)을 기억하십시오. 많이 힘들다는 것은 거의 지났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물론, 지금까지 따뜻한 날들을 보내신 분들은 추위도 각오하셔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모험이니까요… 그것은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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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기에

목회/목양칼럼 / 2014. 10. 28. 02:39



2014-10-28 목양칼럼


목회생활을 해오면서, 경험으로 깨닫게 된 오의(悟意) 중의 하나는 ‘대단히 신앙적인 모습에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못지 않게, 교회와 신앙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그들에게도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앙은 자신의 신념과 일체화되어 있어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는 전형적인 장애가 됩니다.

물론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들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수호신(守護神)이 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사익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하나님(private-god)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자기부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오직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는 길을 찾아내는, 이를테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던 ‘점 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과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버리면, 이야기는 끝이 난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가시나무새의 핏빛 울음이 아니라 혈기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엘리야가 와도, 바울이 와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듣기 원하는 목소리만 듣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하고 근본적인 목회의 사역이지만, 이 경우의 기도는 전혀 교통하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숙제가 됩니다. 

그래도 영혼은 귀하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은 시기상조(時機尙早)입니다. 오히려 시도할수록 더 깊은 상처의 기억을 남길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 외식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보통은 교만한 자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는데, 이 이상한 신앙은 이기적이면서도 연대를 잘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전한 영혼을 보상하기 위해서일지 모르지만, 매우 든든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그 연대의 자기편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 목사와 그런 성도들이 연대하는 교회는 최악입니다. 이것은 교회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배당을 장식하는 장식품일 뿐이며, 전혀 십자가의 도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 송아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 그들이 부르는 찬양, 그들이 선전하는 은혜는 모두 ‘황금’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배교(背敎)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함정이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설하는 그들의 어법이 너무 초보적이고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욕망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영적인 진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그들이 찾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과연 하나님의 주머니를 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술’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들도 교회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하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사역자로서 내가 갖추어야 할 미덕(美德)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기름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그런 사람들과 내 신앙이 한 배를 탈 수 없고 멀리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들의 성경에 대한 난독(難讀)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의 자기 부정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도구화 해버리는 강력한 자아를 건드리는 메시지는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충돌은 양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의 치열함 속에서, 그리고 저열한 사람의 바닥을 보는 경험들을 통해, 결국 이런 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증거의 강력한 훼방자는 분명히 교회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안방을 다 내어준지도 모릅니다. 가는 곳곳에서 경험하고 듣게 되는 이야기가 이런 심증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십시오. 시대가 악합니다. 우리는 변질된 복음과 황금 송아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 안에서 듣고 경험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믿었던 것에서 가장 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갈 수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대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성경 자체뿐입니다. 묵상이 없는 사람은 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의 진리를 갈고 닦지 않으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사방이 어두워 자기 손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 앞길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에 생명을 거십시오.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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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아스의 각성
성경 : 사사기 6.25~32


(6: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6: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6: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6: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6: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6: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6: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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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6 목양칼럼 :: 터프한 아들 놈 두 마리


엊그제 작은 아들에게 '라인'이 왔다. 다정한 부자(父子)사이라고? 그런 거 같다. 하지만 평소에는 먼저 보내지 않으면 절대 오는 법이 없다. 그 일방적인 관계에서 가끔 이렇게 ‘선빵’을 날리는 성은(聖恩)이 주어지는 것은,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역시나 그랬다. 학교에서 자전거가 펑크 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로 종사한지 어언 19년에 이제 자전거 정도는 후딱 수리하는 전문인이 다 되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도 앞바퀴는 10분, 뒷바퀴는 30분 걸리는 작업이라 물었더니 역시나 뒷바퀴라고 한다.

작업은 어렵지 않은데, 두 가지 난제가 있다. 펑크가 난 튜브는 또 펑크가 나기 쉽다. 아마도 노후 되어서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펑크 수리를 계속해서 사용했는데, 그 경우 얼마 안 가서 다른 곳이 또 펑크가 났다. 경험적으로 두 군데 이상은 펑크 수리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여건이 된다면 튜브를 바꾸어 주는 것이 덜 고생하는 선택이다. 그런데 집에 여분의 튜브가 없다. 

두 번째 어려움은 예상도 못할 것이다. 바로 모기다. 요즘 우리 아파트 앞은 모기와의 강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너무 많이 달려들고 몹시 적극적이라, 심지어 양말 위로도 흡혈을 한다. 자전거 30분 고치면 온 몸이 헌혈을 하고 반나절을 ‘욕 나오는’ 상태로 고생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형의 자전거를 쓰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이미 뒷바퀴 펑크란다. 결국 긴 바지에, 후드 점퍼를 모자까지 쓰고 어두운 주차장에 나가서 달려드는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자전거 바퀴를 수리했다. 온 몸이 푹 젖었고, 그래도 손가락을 서너 방 물렸다. 

그런데 이 놈의 자전거가 30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주저 앉았다. 역시 튜브가 낡았거나, 모기 덕분에 작업에 집중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다음 날, 작은 녀석은 엄마에게 차비를 받아 챙기고는, 한 번도 안 타던 롤라브레이드를 꺼내 타고 학교를 갔다. 그것도 버스 놓치고 지각할 것 같으니까 대충 신고 달리는 바람에 발목에 상처가 나서 학교 가자마자 보건실 신세를 졌다고 한다.

급히 인터넷으로 자전거 튜브를 주문했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고, 그것을 들고 정오의 주차장으로 나가서 태양 아래서 자전거 두 대를 수리했다. 비(rain)의 ‘태양이 싫어’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흘러 나왔다. 

아들 녀석들의 자전거를 보니 그야말로 만신창이다. 철로 된 자전거가 사방 깨지고 휘어지고 끊어진 것을 보니, 이 녀석들이 그야말로 ‘짐승’ 같다. 뭐라고 해도 소용도 없다. 자기들은 언제나 조심했고, 신경을 썼으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억울하다는 슬픈 표정을 지을 때면, 훌륭한 연기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된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 시비는 가려 무엇 하랴? 너희들만 안 다치면 된 거지. 

나는 고치고 너희들은 타고, 나는 모기 물리고 너희들은 건강하고, 나는 더위를 무릅쓰고 너희들은 편안하고… 그래도 너희들의 행복이 나에게도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니? 그러니까 힘내라. 가슴 펴고 환하게 웃어라.

아직도 서툴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사람 위의 사람이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 깊은 의미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거창한 어떤 일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판가름된다. 마치 신앙처럼 말이다. 

아이들도 잘해야 하지만, 부모야말로 잘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이미 부모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점점 부모가 되어간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더 훌륭한 부모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아이들도 훌륭하게 자라나 있지 않을까?

터프한 두 아들놈 때문에 내가 사람이 되어간다. 더 깊은 사랑을 배우고, 더 인내하는 인격을 만들고, 더 기도하는 신앙을 맞이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값진 은혜는, 내게 이 녀석들을 보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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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목양칼럼


공감(共感)은 특별한 능력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자기를 대입시켜서 생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람은 이 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고, 그 결과 거대한 감정의 일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감정의 힘은 생각보다 크고 강합니다. 때문에 공감의 연대는 약자들이 강자를 이겨내는 기초입니다. 약자들이 공감을 통해 하나로 묶여졌을 때, 비로소 강자를 이길 수 있는 힘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남의 입장에 대입시키는 생각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도덕의 가장 높은 경지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공감의 가장 정점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는 ‘내가 널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을 때, 그 명령은 예수님과 같은 낮아짐과 헌신을 통해 서로 공감할 것을 명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공감은, 단순한 미덕(美德)이 아니라 제자됨의 사명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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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본문 : 사사기 6:11~14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6: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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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목양칼럼


갈등 속에서, 우리는 대체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의 대화는 오히려 더 많은 오해를 불러오거나 갈등을 심화하는 과정이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 대화는 양편 모두를 더 깊이 상처 받게 하고, 오히려 화해할 여지를 줄여 버립니다.

대화가 가능하면 대화를 하십시오. 그러나 대화할 수 없을 때는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간격은 좁고도 깊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면서도 늘 외로운 것이 사람입니다. 아무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화목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 없이 우리는 '나'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등 속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기도 같습니다. 기도를 통해 갈등에 대한 내적 성찰을 얻고, 또한 예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기도하면, 분명히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대화의 노력은 그 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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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0 목양칼럼


그리스도인이 돈을 버는 것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런 경고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시간과 체력은 물론 정신과 마음까지 아낌없이 소모합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을 상하게 하여 마침내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삶을 ‘열심’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삶을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열심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얻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돈을 위해 인생을 다 소진한 후에야, 비로소 뒤늦게 잘못 판단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돈을 경계하고, 돈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조심해야 합니다. 돈보다 귀한 가치를 항상 묵상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돈이 마음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마침내 신앙에서도 파선하게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어야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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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목양칼럼


빙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수면 상승은, 물가에 있는 많은 도시들에게 적극적인 위협입니다. 또한 이로 인하여 파생될 기후변화도 예측 불가능한 지구의 대재앙일지 모릅니다.

최근 국제적인 연구팀의 조사에 의하면, 빙하가 사라지는 원인의 70%가 인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산업화의 결과로 이산화탄소가 늘고, 그것이 지구 온난화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이론은 아직 확증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해로는 그것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며, 이를 방치하면 인류가 공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어느 정도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전쟁’이라는 공멸의 위협을 경계해 왔습니다. 사실 전쟁 이외에는 인류에게 별다른 위협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후의 시대에 있어, 가장 강력한 인류의 천적은 ‘자연’이 될지도 모릅니다.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핵무기에 못지 않은 사상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본의 대지진을 통해 배우지 않았습니까.

안일한 삶을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위태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만 잘 챙기면 여전히 미래가 저절로 열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일함에서 깨어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부디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미래를 생각해야 할 요즘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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