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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성경 : 마태복음 3:1~4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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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갈라디아서 2:16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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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주일예배




제목 : 지혜의 외침, 복음

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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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잠언8장’의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보통 지혜라고 하면,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시험을 잘 보는 어린 아이를 가리켜, 혹은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전문적인 지식의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잠언, 지혜의 말

 

잠언은 본래 ‘지혜로운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상식의 수준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반쪽만 보이고, 심지어는 반쪽조차도 아주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좋은 태도는, 나의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성경적 관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위 요즘 유행어로, ‘오픈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지혜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나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싫으시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 성공, 명예, 승리는 모두 우리가 가지는 신앙과 예배의 목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위한 책

 

그렇다면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예배가 가능합니다. 만약 성경이 없다면, 기독교는 모든 이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종교심에 의지하여 막연하게 창조주를 찾는 ‘짐작의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가 제대로 믿는지 확인해 줍니다. 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인도합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무엇을 위해 쓰였습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 곧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믿으십니까?

 

어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무슨 이야기 끝에, 너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더니 찬혁이가 발끈했습니다. 엄마는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며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반은 장난이었지만, 반은 진심이 담긴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낮에 어떤 일을 하는데, 핸드폰에 있는 노래를 7~80곡 정도 들을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찬혁이가 “삼칠의 이십팔, 이백팔십 분을 한 거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노래 한 곡이 3분 정도 되니까, 7~80곡을 들으면 그 정도의 시간이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 때, 준혁이가 웃었습니다. “야, 임마 삼칠이면 이십일이지, 왜 이십팔이냐?”

순간 모두 큰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거들면서 말했습니다. “괜찮아. 아직 중학교도 졸업 못해서 그런거니까, 많이 배운 우리가 이해해야지. 찬혁아, 괜찮아!”

엄마가 7~80곡이라고 하니까 머리로는 80곡을 생각하고 입으로는 70곡을 대입하여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찬혁이 편을 들었습니다.

“찬혁아, 솔직히 나이 들면 구구단 쓸 일 별로 없다. 몰라도 괜찮아!”

 

어떻습니까? 여러분 요즘 살면서 구구단 사용하십니까?

쓰더라도 아주 가끔이지요.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몇 년을 사시는 분도 많아서, 이 시간에 구구단을 게임으로 하면 아주 많이 재미 있을 겁니다.

지식과 지혜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습니다. 주변적인 것도 없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혜는 그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그 자체를 위해 필수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구단 몰라도 살고, 영어 못해도 살고, 심지어 자기 이름을 몰라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의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근본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영어를 좀 잘 하면 지혜가 많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 비싼 학원을 보내고, 심지어 영어를 쓰는 나라로 여행이나 연수를 보내기도 합니다.

아직 자녀가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투자하지 않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합니다. 비싼 영어교재를 사고, 학원을 수강하고, 원어민 강사와 마주하여 영어를 배우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매일 지각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졸기 일쑤입니다. 소설은 손에서 놓지를 않으면서 성경은 읽는 법이 없습니다. 아내와 오붓하게 분위기를 잡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과 오붓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일은 생각도 못합니다. 취미와 접대를 위해 돈을 쓸 때에는 아낌 없는 손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릴 때에는 항상 적은 액수의 지폐를 찾습니다.

 

이런 행동을 일삼으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말씀을 드리는 바와 같이, 신앙은 취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로 바꾸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것은 부수적인 지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지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우리 인생의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8장은 처음부터 이 구원의 지혜를 의인화 시켜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절박한 지혜의 외침

 

지혜가 이처럼 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좀 더 성공하고 잘 살기 위한 수단 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선택하는 절박한 결정입니다. 때문에 지혜는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저 편에서 큰 덤프 트럭이 달려 오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 점잔을 부리며 천천히, 예의 바르게 말해야 합니까?

그 순간에는 존댓말도 필요 없습니다. “비켜! 위험해!” 있는 힘껏 배에서 나오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요? 경박한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아니죠, 지금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잠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37~39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는 이 복음의 절박함을 다시 마음에 인식해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봐야 아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 평생을 살았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이 비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영원한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경외하지도 않고 산다면,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불신에 대한 무서운 심판뿐입니다. 설사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나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비참한 후회를 하며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날마다 각성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정말 그분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가? 예배를 귀히 여기고, 성경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가? 교회를 사랑하는가? 주의 종과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반성이 없고, 회개가 없고, 날마다 성장하는 모습과 새로운 각오가 없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어떤 평판을 받고, 주변에서 무엇이라 칭찬을 듣든지 간에, 그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보다 귀하고, 진주보다 비싼 이 복음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해야 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예배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충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성경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봐야 할 때

 

오늘, 우리는 이제 2012년도를 한 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땅히 일년을 돌이켜 생각할 때입니다. 잘한 것은 격려하고, 못한 것은 반성하여 각오를 가져야 새해를 맞을 수 있습니다. 달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의 옷을 새롭게 갈아 입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자기를 돌아봅시다. 외치는 복음의 지혜 앞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되돌아 봅시다.

집사가 되고서도 오래도록,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빠지지 않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않는 일을 몰래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면서도 축복을 달라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구원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의 복음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지혜의 음성을 듣고 바로 이 거룩한 고민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 이 설교의 PDF 파일입니다.

"2012-11-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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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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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9 목양칼럼


요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씨의 경험담이다.

대학시절 가난한 동네로 의료봉사를 나갔다. 열심히 진료했지만 환자들이 잘 낫지를 않아서 아직은 미숙한 학생들이 진료를 해서 그런 줄로 알았단다. 그런데 어느 날, 진료소 앞마당에서 아이들이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의료봉사 차원에서 약을 공짜로 나누어주니 환자들이 약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니 병도 낫지를 않았던 것이다.

결국 100원이라도 약값을 받았다. 그랬더니 자기 돈으로 산 약이라고 귀히 여기고 약을 복용했다. 얼마 후에는 환자들이 다 상태가 좋아져서 진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두 세 시간씩 버스를 타고서 진료를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도 생겼다는 것이다.

공짜는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을 눌렀다. 

왜냐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라는 지독한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처방하신 생명의 약이다. 그런데 그 값이 너무 귀해서 사람이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공짜’로 나누어 주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복음을 은혜(=공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 약을 무시한다. 값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당연시 한다.

세상에 당연한 은혜는 없다. 모든 은혜는 누군가의 희생과 선의가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소홀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부당하며 무례한 사람이고, 그런 자에게서 은혜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안철수씨는 그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100원의 상징적인 가격을 정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런 설득이 불가능하다. 복음이 곧 은혜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셔서 인간적인 조작이 불허되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복음이 푸대접을 받더라도 복음을 통해 생명이 살아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싸우도록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런데 좌우를 살피면, 돌팔이 약장사들이 난장(亂場)을 벌인다.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이라는 약값, 예배당 건축이라는 약값, 심지어는 나름대로 도덕적 삶의 규범들을 복음의 약값으로 둔갑시켜 팔아먹으니 오히려 공짜(=은혜)였을 때보다 장사도 더 잘 되고, 사람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 허탈한 현실을 뭐라 말해야 좋을까? 먹고 나으니(과연?) 다행인가? 아니면 결국에는 모두 불법을 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걱정해 주어야 할까?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분명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은혜는 값이 없는 것이지 값이 싼(저렴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복음은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rule)대로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엄격하다. 때문에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치열한 고민 속에 살수밖에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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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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