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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1 달빛 같은 은혜
  2. 2012.09.23 자기를 점검하라.
  3. 2012.07.10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4. 2012.07.10 신앙은 일상의 점령이다
  5. 2012.07.10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2012-09-21 목양칼럼  :: 달빛 같은 은혜

 

저녁에 산책을 나섰다가 달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아파트의 불빛 위로 달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달빛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뽀얗게 속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저 달빛을 예수님도 보셨고, 중국의 시인 소동파도 보았고, 지금 고국에 계신 나의 어머니도 보시겠지요.

달빛은 그렇게 오래도록 변함없이 외로운 사람, 고민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왔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을 보니 더욱 예뻐서 내 것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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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밝힌 조명과 하나님이 밝히신 달빛의 밞음은 느낌이 다릅니다.

조명이 자극적이라면, 달빛은 온유합니다. 달빛은 눈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빛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어울리며, 또한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의 위로가 됩니다. 조명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달빛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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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착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선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것은 달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다른 것처럼 아주 먼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힘이 들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심지어 마음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게 아닌데… 신앙생활은 달빛 같은 것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면 저절로 빛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 맡기면 쉽게 성장해가는 길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해서 혼자 일어서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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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영을 생각해 보세요. 물에 뜨는 것을 배워야 팔을 젓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물에 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빼야 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힘껏 팔을 움직이면서도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사람의 노력이 오히려 선함에 방해가 됩니다. 성령 없는 노력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 정말로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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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목양칼럼

 

신앙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믿음은 살아가는 것과 일치한다. 믿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이다.

살아가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선’을 경험한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惡)이다. 아무리 열렬한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위선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한 청년이 잠시 컴퓨터를 내게 맡겼다.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목사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낯선 이름의 폴더에 포르노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청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청년은 중요한 고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작정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하고, 그 사실을 목사인 내게 알려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민망한 이 사실을 그냥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충고할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교회로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자기를 인정하고 기도생활을 위해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사람은 잘못을 한다. 그것이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잘못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삶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을 품고서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열렬한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면서 삶과 믿음이 분열된다.

포르노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더 추악한 문제들도 많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당연히 양심이 찔려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대하여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거나, 그 정도는 가볍다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를 계속하는 동안, 영혼은 파선하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파야 한다. 믿음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지배하지 못하던 삶의 영역들에 믿음이 들어가 지배하려면 눈물은 필수이다. 찔리고 아프고 고민할수록 영혼은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된다.

위기는 이런 역동적인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면, 심지어 사람에게 보이려고 더 열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혹시 있다면 빨리 자기를 점검하라. 병이 깊어지면 약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희망은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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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 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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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라는 대답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는 않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을 찾았다고 하자. 과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기의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여서 그것이 하나님이 응답으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다시 확정한다. 그러면 이제 혼란과 불안만이 남는다. 다시 또 하나님의 대답이 필요한 경우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이 결코 편안하지 못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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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확실한 방법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직통(直通)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가 무당 비슷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담을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소통의 방법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죄의 담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가로 막는데, 그것은 기도 조금 하고 성경 얼마를 안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에 들어선 자이지, 그 길을 완주한 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청동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즉, 장차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명백하게 듣고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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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여서, 지레 포기하거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전유물인 것처럼 자기에게 오면, 혹은 자기의 방법을 따르면 언제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칭 예수인 사람들의 확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말씀 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시다. 말씀을 하실 때에도 이유가 있고, 하지 않으실 때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잘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어서, 사실 소상하게 설명해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말씀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또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리지 않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뭔가를 말씀하실 때에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요점을 말해야 하겠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나 상황, 자연,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렇지만 기도와 말씀은 가장 확실한 통로이며,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와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의 신자들이 지성소와 법궤를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 하는 것은 지성소와 법궤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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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음성을 듣는, 기도와 성경묵상의 방법이 따로 있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이 조건은 우리가 제일 약한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인내’ 혹은 ‘성실함’이다. 나는 두 단어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성실함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것이 바로 인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보는 결단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는데, 성실하게 해야 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응답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이 인스턴트적 사고가 신앙적 혼돈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의 초보에 있어, 이런 식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절박한 필요, 혹은 절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청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마치 한밤에 떡을 빌리러 이웃집의 문을 크게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방법이 습관이 된다면 어떨까?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면, 다음에는 미리 떡을 준비하는 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시 빌린다고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급박한 기도를 통해 응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변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변화가 아니다. 성실한 기도생활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이제는 다윗처럼 성경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여기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덮어버리고 기도는 멈춘 채 자기 맘대로 살다가, 어떤 위기와 답답한 상황을 만나서야 다시 그것을 찾는다면, 이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점(占)집을 찾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실 때에조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치 오래 살아온 가족이 서로의 의도를 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어떤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그냥 아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를 읽어 보았는가? 신기한 것은, 거기에는 기적도 없고 응답도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이 느헤미야에게 전달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넋두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탄식하는 그 모든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신비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함께 하셨다. 돕는 사람들을 붙이시고, 때로는 대적의 실수와 결정을 통해서도 느헤미야의 길을 도우셨다.

하나님의 뜻을 꼭 말로 해야 알 수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차원보다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차원 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그러면 말씀을 해주실 때에도, 말씀을 안 하실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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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늘 감사한다. ‘예정’이라는 교리를 믿거니와 그 예정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독선적 리더십의 횡포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런 횡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설사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결국에는 의도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있다. 마치 요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했지만, 다윗의 시편과 같이 그는 결코 한 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예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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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은 결국 우리의 실존을 드러내는 기회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 깊어졌고 지혜가 늘었으며 자신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매번의 선택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택을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낼 뿐이다. 인생은 결국 전능자의 손에 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든, 아니면 직선으로 가든... 인생은 그분의 지혜가 예정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리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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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2 목양칼럼

 

신앙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무엇에서만 신앙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단한 기적이 나타나든지 순교의 현장 같은 극단의 상황이 되어야만 신앙을 찾고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은 대부분의 경우 일상이다. 지루한 생활에서 짜증이 일어날 때, 옳은 것과 바른 것이 충돌할 때, 몸이 고달플 때에, 그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자기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문제가 생겨야만 기도하고, 고민이 있어야만 성경을 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없다. 그들의 하나님은 문제에 대한 응답이지, 성경이 말해주는 인격적인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욥을 보라. 그가 훌륭한 것은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을 당해서도 그 믿음의 실천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정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형통하던 날에, 더 이상 아무런 응답을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시절에도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갈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고난 속에서 더 황당했을 것이다. 고난 자체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린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욥을 근본부터 흔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다.

일상을 믿음으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과 인생에서 낙제하게 되어 있다.

신앙은 요식행위가 아니다. 액세서리가 아니다. 신앙은 실존의 모든 것이다. 일상이다. 말이 신앙이고, 생각이 신앙이고, 먹고 사는 게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점령해야만 한다. 신앙이 우리의 모든 것을 점령하기까지 우리는 갈망해야 하며, 마음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아, 슬프다. 신앙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슬프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 장을 펴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슬프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말하는 것이 슬프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도, 전혀 자기의 일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슬프다.

그렇게 살다가는 낙망할 때가 올 텐데… 인생의 기회는 그리 많지도, 길지도 않은데 그것을 모르고 막연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픔이다.

돌아오라.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간단한 실천으로부터 신앙의 부흥은 시작된다. 그것은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도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조용히 읊조리며 내 마음의 주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것이다. 하루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사는 것이다. 몇 번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나의 습관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방법을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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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목양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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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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