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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영혼의 고통을 아는가?


신뢰를 쌓는 것은 힘들지만 허물기는 너무 쉽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신뢰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을 신앙이라고 한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도 쌓기는 어렵지만 허물기는 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한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과 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현재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큰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신앙생활에 자기의 정체성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너무나 비신앙적인 삶을 살면서도 전혀 자기를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와 함께 하시고 모든 일에서 자기의 편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부족하다고 버리시거나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우리의 태도와 상태에 따라서 '선택'을 후회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 이것을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구 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비유, 혹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결혼'의 관계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빌어 '내가 네게 장가들어'(호 2:19~20)라고 선포했고, 예수님께서도 새예루살렘에서 장차 성도들을 맞이하실 때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계 19:9)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은 쌍방의 신실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호세아와 고멜의 경우와 같이, 그 한 편이라도 신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면 결코 일방적으로 끝나지 못하는 관계가 결혼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며 우리 맘대로 살아갈지라도 한 번 마음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열심으로 우리를 추적하며 압도하는 것이다.

그 런 점에서 인생의 한 때라도 정말 순수한 열정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겨 보았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가 없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의 뜨거운 첫사랑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붙들어 주는 생명의 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 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추억'은 있으되 '신앙'은 없는 공허한 과거를 발견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바쁘게 뭔가를 했던 추억을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본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낙인이 찍히는 일은 결코 훈련이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를 졸업한다고 모두가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혹은 선교단체에서 리더가 되어 열심히 모임을 이끌고 전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과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정말 그 영혼이 거듭나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는가이다. 이 점이 스스로 설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회심과 구원은 아직도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참신앙을 경험하고도 신앙에서 무너질 수 있다. 인간은 생각처럼 강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아무리 편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품에서 누렸던 평안과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더 갈급하고, 결국에는 주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 지만 신앙의 추억만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세상의 안락한 삶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들의 영혼에는 영적 감동이 원래부터 없었기에 세상의 즐거움이 아무 저항감 없이 그들의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점령해가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라!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그리고 그 현재와 과거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만약 부족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고민하며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적신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무너짐과 비신앙적 삶에 전혀 무감각하지는 않는가? 가끔은 너무 용감해져서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쓴웃음을 짓게 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영혼은 위험하다. 그것은 당신이 그토록 믿고 있는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당신이 처음부터 전혀 무관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거룩은 없다. 그리고 거룩한 고통을 겪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성도도 없다. 

건 강하다는 것은 작은 고통들을 통해 유지된다. 배가 고프니까 먹고, 다리가 아프니까 쉬고, 눈이 피로하기에 잠을 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영혼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잘난 척을 해도 불쌍하기만 하다. 휴우~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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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부모의 조건



아이는 자란다. 그 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도 물론 필요하다. 교육도 해야 한다. 되도록 좋은 학교를 보내고, 되도록 훌륭한 교사를 만나게 하는 것은 부모가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아이를 위하여 3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고사(古事)로 전해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과연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일까? 되도록 많은 것을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최고의 미덕은 무엇일까?

성장한다는 것은 미완으로부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는 처음부터 탁월하고 잘하는 존재가 아니라, 점점 나아지는 존재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아이는 아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성장의 가능성에 있어 현실만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현실은 '지금(now)'을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유치원의 우등생이 반드시, 대학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사회에서도 유능한 인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6학년에 훌쩍 크는 아이가 있고, 고등학교에 훌쩍 크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어떤 아이는 일찍 소질이 드러나고, 어떤 아이는 늦게 소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무작정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에 별로 의미가 없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마다 고유함이 드러나고 찾아질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유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소설가 이외수 씨가 방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좀 더 절망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자살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막상 살아남고 보면 죽을 만하다고 느껴졌던 일들도 별것 아닐 때가 많은데, 그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죽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러니 절망에 좀 더 익숙해져서 살아남아 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우등'이 아닌 '열등'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보다 본인에게 속상하고 아픈 일이다. 

누군가 우등상과 표창장을 받을 때에, 그 외의 기타등등으로 서서 박수만 치다가 퇴장하는 경험은 결코 행복한 경험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는 누구나 잘하고 싶어한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싸움질이라도 잘하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일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는 것이고, 내가 반드시 모든 것에서 일등이어야 한다는 법칙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에 서서히 패배주의와 포기하는 마음이 뿌리를 내리면, 그 아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시드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앞에서 물었던 대답을 스스로 해야겠다. 부모의 제일되는 사명은 아이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너는 열등하다'고 할 때에도 부모는 '네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을 믿고,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부모는 아이가 잘할 때가 아니라, 아이가 못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아무래도 욕심이 너무 많다. 아이들이 포기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포기하거나 단정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부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함량 미달의 부모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부모를 믿고 아이를 맡기셨다. 그 아이는 내 속으로 낳았으나 나의 소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섬세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고, 매사에 희망을 뿌리는 농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내고, 조롱하고, 단점을 말해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결코 한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드러나지 못한다. 아이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은 사랑과 격려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할 줄 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부모일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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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신앙의 두 길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에서 비전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민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는 폐허가 되고, 정신마저 황폐해진 청년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모으고 유명해질까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부흥케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고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찰스 피니라는 목사님은 대학 캠퍼스에서 부흥운동을 벌여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라는 분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비전과 꿈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에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고 인생을 재정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 박사 부부 (Francis & Edith Schaeffer)는 1955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기슭 위에모(Huemoz)란 동네에서 라브리를 시작하였습니다. 라브리는 불어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이 작은 쉘터는 누구든지 신분과 사정을 따지지 않고 쉬어갈 수 있는 영적 피난처였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머무르는 동안 쉐퍼 박사와 함께 노동하고, 저녁이면 예배와 학습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어줌을 통해 정말로 위대한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으며, 용기뿐 아니라 인생을 새롭게 할 비전과 기쁨을 찾아 돌아갔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라브리'라는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양적으로는 찰스 피니의 선택이 좋았지만, 질적으로는 프란시스 쉐퍼의 인생이 더 아름다운 결과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따지고 논할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두 분 다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으시겠지요...

 

신앙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번의 설교로 5천명을 회심시키는 베드로와 같은 길입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역자들을 통하여 대중이 하나님을 만나고, 시대에 부흥이 일어나며, 교회의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평생을 내적 경건과 섬김으로 살았던 사도 요한과 같은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신약의 서두인 복음서와 마지막인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 복음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증인이었으며, 사람들에게 신앙의 핵심을 되짚어주는 영적 파숫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 사도야말로 초대교회의 스타였지만 그의 이름으로 저작된 성경은 극히 짧은 두 통의 편지 뿐이고, 은둔자처럼 살았던 사도 요한은 복음서와 세 통의 서신과 묵시록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두 길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요한이 없으면 베드로식 교회는 깊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베드로가 없으면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교회의 비전을 묵상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교회를 위하여 각기 다른 길에 세우시고 각각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베드로식 교회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교회의 영광이라 여기고 그것만을 목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잘못된 풍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교회를 빙자하여 충족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목적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자기다움을 지키고, 자기에게 주신 고유한 길을 가야 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이 환호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께는 버림받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삶을 살지라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헌신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참으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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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예배를 위해 헌신합시다


제가 예민한 부분이 좀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까다롭지 않고,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도 아닙니다만, 두 가지에 대하여는 제가 생각해도 예민합니다. 

하나는 말입니다. 저는 '언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사용하는 단어를 잘 골라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절하지 못한 말에 대하여 오래 기억하고 많이 감정이 상하는 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제가 행하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것에 관계된 것에 예민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목사에게 오전은 개인적인 묵상과 경건을 위한 시간입니다. 또한 금요일부터 토요일은 주일의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숨을 고르고 마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되도록 감정을 단정히 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의 가족도 이런 특징을 압니다만, 이제는 여러분도 알고 섬겨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에게 토요일에 근심을 주는 것은 주일의 예배를 망치라는 말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그런다면 그건 더 심각한 일이구요. 너무 심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습니다. 

설교는 단순히 원고를 읽는 행위가 아닙니다. 준비한 말씀을 진심으로 동의하며 감동 속에서 전해야 하고, 그렇게 나 자신과 동화된 말씀이야말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스포츠의 프로 선수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얼마나 긴장하고 예민하게 몸을 준비합니까? 만약 목사가 이러한 마음의 각오와 준비 없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강단에 서면, 단순히 예배 시간에 졸음에 시달리는 성도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도록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스스로 은혜가 되는 말씀일수록 전할 때에는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20년을 강단에 서 왔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의 눈을 보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은혜를 받아 기뻐하며 말씀에 몰입하는 성도도 있고, 더러는 항변과 거절의 생각으로 말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설교하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온갖 반응과 생각의 혼돈 속에서 길을 찾고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강단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강단에 설 때마다 온 마음과 몸의 힘을 소진하고 내려오게 됩니다.

일주일의 삶이 있는데, 물론 목양을 제대로 받고 신앙이 건강한 성도들은 수시로 교회에 들려서 은혜를 받고 자기를 살찌웁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그 일주일의 하루, 그것도 1시간 반짜리 예배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삼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은 매일 같은 말을 듣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들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없거나 멀리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울타리 안의 99마리를 전부로 삼지 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사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은 길입니다.

목회자를 배려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 주십시오. 목사의 입이 순결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맘껏 외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 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축복입니다. 그런 목사를 통해서만,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고 깊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되도록 앞자리로 오십시오. 눈을 마주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시다. 예배 시간에 주위를 산만하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 목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모르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충 넘어가는 방식은 왕이신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정말 지금의 내 모습이 최선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집사님들에게 특별히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제 교회의 집사입니다. 예배만 드리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섬기러 나오셔야 합니다. 예배 전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의 손으로 살피고 섬기셔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목사의 조력자로 세워져 있습니다. 목사가 예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예배의 좋은 모범이 되셔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을 보고,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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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2009-04-19

 

사람은 누구나 내면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인생에도 가속도라는 것이 있다. 되도록이면 하던 방식으로, 가던 길로, 익숙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스스로 살피고 돌아보지 않으면 내가 비판하던 바로 그 방식을 내가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다. 조급한 마음이 압도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과정에 대한 반성은 뒷전이 된다. 그러면 설사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때부터 길이 어그러져 이후로 계속되는 잘못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 들면 들수록 더욱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고, 목적을 확인하고, 과정에 대하여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분량의 1/3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십자가의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만큼 긴박하고 다양한 사건과 이해, 목적이 서로 실타레처럼 얽혀진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는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누구나 마지막 정리를 하려고 하면 감상적이 되기 쉽고 이런저런 회한이 들기 마련인데 역시 예수님은 뭔가 많이 다르시다. 그분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서운함과 자기 십자가에 대한 고뇌를 작지 않게 표현하셨지만, 그러나 뭔가 황급하여 당황스러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 긴박했던 인생의 속도를 서서히 줄여 가셨다. 마치 정차해야 할 선을 저 앞에 두고 미리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안전운전자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과의 동행을 마무리 하시고 있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천국을 소유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과로 영원하고 복된 시간을 약속하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생겨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여유'가 아닐까 한다.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되, 세상의 시간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고 좀 더 멀리 보고,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요즘 동경드림교회의 미래를 자주 생각한다. 내가 정년이 되었을 때, 혹은 그 이전이라도 좋은 목회 리더십의 이양이 필요한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생각해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시대까지는 적어도 교회가 이 정도의 비전을 이루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교의 불모지, 동경에서 한국인들의 손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일본과 세계를 섬기고 사역하는 역동적인 동경드림교회의 내일을 마음에 그려본다.

그래서 오늘 더 잘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과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절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겠다. 

목적을 잊어버린 과정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비판하던 바로 그 방법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항상 '모두'와 함께 노력하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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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목양칼럼


Dream's Freedom! :: 너는 크게 자유를 외치라! (사61:1~3)

복음이란 무엇이고, 전도란 무엇인가? 가장 고귀한 가치들이 세속적인 가치들로 인하여 퇴색하고 혼란에 빠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귀한 것을 너저분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전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일면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전도를 일종의 종교적 강요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밥을 사고 선물을 주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선동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서 '전도'에 대한 불쾌감 혹은 두려움을 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전도의 본질은 아니다. 전도(傳道)란 '도를 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터미널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도(道)를 아십니까?'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도란 '복음'의 한자적 차용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전도라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복음을 영어로 '가스펠'이라고 하는데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을 번역한 것으로 '기쁜 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1차적으로, 전하는 사람도 기쁨으로 전하고 받는 사람도 기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를 겪으면서, 우리는 대중을 찾아가는 서비스가 돈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광고를 해야 하는 기업은 구매자들을 지겹도록 좇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러한 매판적 전략이 묘하게도 전도의 방식과 맞물려 돌아갔다. 

물론 전도에도 훌륭한 전략이 필요하다. 상업적인 방식이라고 하여서 무조건 잘못된 것이고, 옛날 방식으로만 전도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잃고 방법의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교회마다 전도를 강조하고 시행하는데 거기 전략과 방법은 있는되, '전도' 본래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본질이 유앙겔리온, 곧  '기쁨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하겠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은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 그 즐거움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주변과 이웃, 사회로 흘러가는 것이 성경적 전도의 방법이다. 때문에 성경에는 전도에 대한 과도한 무게감이 없다. 오히려 전도를 하기 위하여 자기를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들의 자유가 보인다. 

사람들은 핍박을 받아 흩어져도 자연스럽게 전도했다. 그것은 전도가 특별한 훈련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변화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부터 Dream's Freedom! 이라는 이름으로 전도행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에는 별 호응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자기에게 은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뭘 전할 것이 있을까? 그런 전도에서 어떻게 유앙겔리온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3년을 목회하고 새로운 현실을 보고 있다. 토요일마다 모이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절박한 현실에 이끌려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근심과 억지로 끌려가는 그늘짐은 발견할 수 없다. 

성도의 모임은 언제나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전도를 하는 동안에도 서툴지만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의 기도와 소원들을 볼 수 있다. 사람마다 이쁘고 대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에서 능률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서 더디게 보이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성급하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것은 이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평생을 예배자요, 전도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먼 길을 가는 것이기에 조급하기 보다는 성실하고 건강한 과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일단 7부 능선은 올랐다. 전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먼저 축하할 사실은 우리 안에 작은 열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열정이 자라고 능숙해지고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양만 흉내내는 어떤 이들의 그것 보다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주에도 전도하기 위해 동경의 각지로 흩어질 지체들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누군가가 교회로 오기 전에 바로 당신들의 그 모습이 목사의 눈에는 이미 응답이라는 것을. 힘들겠지만 끝까지 복음을 '기쁨의 소식'으로 붙들고 전하는 삶을 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 예배당이 가득 차고 비좁아 지는 날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바라는 것은 교회가 항상 복음, 곧 '유앙겔리온'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내게는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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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9



말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새롭게 된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의 원인(the Origin)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의 종착점(the Finale)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과정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피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다.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퇴락이 생겨났고, 사람이 구원을 받음으로 세상도 함께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의 구주인가? 곰과 호랑이의 구주인가? 남극의 펭귄과 아프리카 물소들의 구주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 칭하셨는데, 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아들로 스스로를 부르신 까닭은 분명하다. 그분의 관심과 목적이 바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기독교가 바라는 구원과 섬김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구원과 섬김이어야 한다. 

이것이 요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이 요점에서 많이 빗겨가는 느낌이다.

건물이 사람보다 우선된다. 이유를 물으면 건물이 크고 훌륭하면 사람들은 저절로 모인다는 것이다.

방법이 사람보다 우선된다. 이유를 물으면 방법이 결국 사람을 이끌고 인도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도 좋고, 비전도 좋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말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면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의 동경에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누구의 교회인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셨던 예수의 교회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 교회를 통해 무엇을 가장 하시고 싶어 하실까? 예수가 지금 이 동경땅에 서 계신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는 종교적 무지와 미신과 싸우셨을 것이다. 예수는 한국인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전통과도 싸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싸움보다 먼저, 예수는 누군가를 찾아 부르시고, 친구가 되시고, 그들에게 바른 신앙의 삶과 모범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사람이다.

건물은 형편에 맞게 옮기고 다시 지을 수 있다. 방법은 현실을 반영하고 경험을 통해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안 맞으면 뱉어내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작은 구멍가계조차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교회가 어떠하겠는가?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격려할 줄 알아야 하고, 믿고 사랑할 줄 배워야 한다. 아무리 비능률적이고, 무능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롱하거나 무례하게 대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도 위해서  피흘려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Dream's Freedom! 행사를 위하여 토요일마다 전도지를 들고 나간다. 참 귀한 일이다. 20명 이상 초청에, 10명 이상 정착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전도하고, 좋은 신앙으로 세우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그분의 결정을 완전히 신뢰하고 바른 목적을 향해 성실하게 걸어가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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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2009-03-22



서울 종로구 적선동 금천교 시장. 지난 20년간 이곳에서 떡볶이로 장사해온 김정연 할머니가 오늘도 가계를 열고 있다. 올해 93세인 할머니는,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 시장의 골목에서 아이들과 사람들을 상대로 떡볶이를 판다.

할머니는 원래 개성 분이다. 고향에서는 어려서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자랐을 정도로 집이 꽤 유력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중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고, 결혼을 해서도 남편과 함께 사업을 했다. 그러다가 6.25 동란으로 인해 남편이 실종되고, 할머니는 자식 셋과 함께 살기 위하여 남편을 대신하여 서울의 동대문에 대금을 받으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혼자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 서른 셋이고 이때부터 할머니는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사람에게 잘해주면 누군가는 내 자식에게 잘해줄 것이라 믿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가 최근에 2300만원 전재산을 복지재단에 기부했다. 전세금 800만원과 예금으로 모은 돈 1500만원을 고스란히 '아름다운 유산 남기기' 본부에 기부금으로 위탁한 것이다. 물론 할머니 생전에는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지만, 돌아가신 후에는 그 돈이 복지재단에 기부된다.

연탄 아궁이에 하루종일 떡볶이를 팔아도 요즘은 사람들이 줄어서 하루 매상이 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가 쌀떡과 국산 고추가루를 고집하기에 장사에서 남는 이익은 겨우 2천원 정도이다. 그렇게 어렵게 지난 20년을 벌어서 1500만원을 예금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것이다.


가난이라는 것이 현실보다 심정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남편과 자식을, 가족을 모두 잃으면서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동경드림교회의 말로 바꾸면, 사람 귀한 것을 알게 되셨던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힘들다. 섬기는 일은 분명히 섬김을 받는 것보다 힘들고, 고단하다. 폼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섬기는 일을 천대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구질구질한 일을 해야만 하냐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 귀한 것을 깨달았을 때에, 섬긴다는 것은 귀하고 즐거운 일이다. 섬길 수 있는 누군가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주는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타인을 위해서 소중한 나의 인생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꿈이 있다. 내 인생의 말년을 소외된 이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음식과 물, 그리고 교육이 부족한 지역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 인생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사랑을 베풀며 섬기다가 주님의 품에 가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정말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나눌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식에게 물질을 주는 것보다 자부심과 좋은 모범을 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눔과 섬김은 절대로 돈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 누구와 나누고 있는가? 무엇으로 섬기고 있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미루기만 하다가 끝이 날 수도 있다. 소중한 기회를 버리지 말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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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때가 이르다

 

며칠이나 비가 오는 날씨가 계속되면 집안에 빨래가 쌓인다. 우리 집에 수건이 꽤 많다. 한 상자가 좀 넘는데 숫자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았지만 한 30~40장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3일만 비가 오면 그 수건이 모두 세탁기에 들어가 있다. 별 의식이 없이 하루에도 서너 장이 넘는 수건을 사람마다 사용하는데, 식구가 네 명이니 3~4일이면 그 많은 수건이 모두 물기를 머금고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빨래가 어찌 수건만 있겠는가? 속옷, 양말, 셔츠에 기타 등등까지 줄줄이 밀려드는 빨래가 마침내 포화상태에 이르면 할 수 없어 세탁기를 일단 돌리기는 돌린다. 하지만 이제 그 많은 빨래를 집안에서 어떻게 말려야 할지 대책이 막막하다.

개인적으로는 눈에 거슬리게 어지러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가 계속되는 날이면 다른 선택의 도리가 없다. 벽마다, 공간마다 빨래를 널어두고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에 날이 갠다. 찬란한 햇살이 베란다에 들어서면, 그날은 집안에서 아직도 축축한 빨래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상쾌한 바람이 간간이 분다. 하루 종일을 집안에서 씨름해도 충분히 마르지 않던 빨래들이 고작 2~3시간 사이에 바싹 마르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볕이 좋은 날에는 세탁기를 두 번, 세 번 돌려도 충분하다. 심지어 밤에 널어둔 빨래라도 아침이면 이미 개운하게 준비되어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억지로 되지 않는다. 솔로몬은 만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 (전 3:1~8)

사람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않고 노력만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그것은 비오는 날에 모든 빨래를 집안에 널어두는 일과 같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능률은 없다. 결과도 신통치 못하고, 과정도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과정이 흥겹고, 결과가 보람되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것이 절묘하게 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느껴지고, 사람들은 일의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

목회도 때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사람이 무엇을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기획을 하고, 행사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이 때를 대신할 수는 없다.

2009년도에는 동경드림교회에서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뿌리는 때였다면, 이제는 거두는 때가 된 것이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하겠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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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


이번 주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하셨습니다. 그것이 천주교 용어인지 모르겠지만 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종, 선한 결말... 마침 내 이름을 뒤집으면 선종이 됩니다. 그래서 나도 '선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69년 4월인가에 아시아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되었더군요. 그 후로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을 겪으며 격정의 근대사를 끌어안아 왔습니다. 그분이 일제 시대에 학도병에 복무했다거나, 혹은 최근의 파견근로자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기독교의 진영은 비판과 비난의 경계가 모호해서 일단은 흠잡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정의로움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런 태도가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 시절에 몇 권의 책을 보고, 천주교는 심각한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의 교리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는 연륜이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용감하게 한 평생을 살았던 김수환 형제의 삶을 존경합니다. 그분이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젊은이들과 소통하려고 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던 것에 감동을 느낍니다.

성경을 보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매우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누군가의 학벌이나, 파벌, 혹은 종파에 미혹당할 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영혼의 실체를 보십니다. 믿음에 대한 말이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고 살았던 삶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러해야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마지막 유언으로 '서로를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교황의 빛나는 금관이 아니라, 바로 이런 마음과 태도로 주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추모객들의 발걸음을 뉴스로 보면서, 과연 우리 기독교에서는 누가 사회적으로 이러한 '선한 결말'의 모범을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가난한 자, 쫓기는 자, 억울한 자, 슬픔을 가진 자의 친구가 되어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에서는 누구도 그런 삶을 바라지 않으며, 부를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 유명한 사람들의 친구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정말 내 인생에 선한 결말이 있기를 원합니다. 단절이 아니라 소통 속에서, 되도록 많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는 권력과 부의 허울을 쓰고 살아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진가는 남겨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떠난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게 될까요?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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