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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1


오바마 대통령이 공무를 시작한 이후에 가장 시급하게 처리한 일중의 하나가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를 폐쇄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오바마 대통령은 모든 정보기관과 군에서 고문을 금지시키는 명령에도 서명했다. 이 자리에는 퇴역한 미군 장성들이 초대되어 함께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에 대하여 ‘미국의 수치’라며 그것을 없앨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에서는 엄동설한에 철거민을 향하여 물대포를 쏘며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다가 화마(火魔)에 인명이 많이 상하고 6명의 고귀한 목숨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이 일은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경찰과 철거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같이 한다. 하지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 투영된 사건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삼가 고인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공화당이 원래가 보수적이고, 또한 기독교 인물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은 교회가 공화당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반면에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교회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독실한 크리스천 대통령이 고문을 허용하고, 인권을 위협하는 무법적인 수용소를 만들고, 남의 나라를 침공했었다. 이라크 침공은 명백하게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가정하고 저질렀던 일인데, 제대로 사과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결국에는 퇴임했다.

한국도 그러하다. 교회의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마다 성경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사용하고 국민의 종복(從僕)을 자처했다. 하지만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자유는 축소되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 모순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로 일관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시대로부터도 태어난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 시대의 정신과 무관할 수 없으며, 특별히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미국과 한국의 시대 정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중요하게 여겨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오늘의 현실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교회다운 성경의 길을 버리고 대중과 영합하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세속적으로 형통하는 길을 택해왔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성경을 전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눈이 멀었다. 어느 신자에게 '부흥'이 뭐냐고 물었더니 목사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것이 우리의 과거이고 현실이다.

때문에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자를 버리며, 욕망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전혀 그것을 신앙적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받는 사회적 지탄을 '핍박'과 '순교'로 주장하기까지 한다.


회복의 기회는 있다. 그러나 나는 '선거'가 그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는 현실이고 수단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만, 나무를 든든히 하려면 뿌리를 살펴야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려면 사람들의 정신을 정의로 젖먹여야 한다. 그 과정이 축적되어 한 시대를 꽃피우고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건강한 교회가 희망이다. 교회부터 십자가 아래의 신자들을 바른 대통령 감으로, 장관 감으로 키워야 한다. 시대가 순응하고, 사람들이 흠 잡을 수 없는 준비된 일꾼들을 배출하여 사회의 물을 맑게 해야 한다.


우찌므라 간조로부터 성경공부를 했던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국인 조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그들의 곁가지가 후일 <무교회주의>를 낳아 이단의 시비를 받았지만, 따지고보면 그것 또한 망국의 현실에서도 교권에만 집착했던 정치적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낳은 결과였다. 아무튼 그들의 심정은 순수했고 신앙 또한 깊었다.

그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역사적 기독교 잡지가 바로 <성서조선>이다. 이 유학생들의 간단한 신앙잡지는 두고두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 창간사를 여기 옮겨 본다.




성서조선 第 1 號 (1927年 7月)


하루 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해진 것을 알아차렸던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루 저녁에 "아무리 해봐야 조선인이로구나!" 하고 연락선 갑판을 발로 구른 자는 둔한 자였다.


나는 학창시절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면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 하며 스스로 위로했었다. 장엄한 회당 안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들을 때에도 수없이 감사했다. ‘온 세상이 형제 동포’ 라는 말을 순진하게도 믿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애국자 몇몇이 ‘제 2 국민’ 이었던 우리 조선인을 가르치려고 식사도 잊고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계획은 원대함에 이르렀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를 하랴?" 

과연 학문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으로는 온 세상이 가슴 속에 있었다.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나의 앞 길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이 뜻을 깨우치니 모든 것이 헛되었다. 또한 이 헛됨을 이해하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 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웃을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요즈음 우리 동포들 사이에 평소의 사상과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자기를 굽히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기뻐할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효성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 같은 불효자들이야 두 말해서 무엇 하랴? 상황이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아무리 같은 사랑이라도 그 표현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를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서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성서를 주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열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니, 그들의 탁월한 이성 앞에서 우리의 수준 낮은 욕망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에도,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먹여서 신앙적 가정을 일으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저속한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만민'을 위한 보편적 기독교를 교회로부터 부활시키는 것만이 이 시대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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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5


목사는 말하는 직업이면서도 말을 듣는 직업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문학을 통해 남의 인생을 엿보고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극적인 소설도 사람들의 진짜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오히려 가소롭다.

말을 많이 듣다보니, 말이 곧 사람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 배경이 어떠하든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 사람의 실존이 서서히 드러난다. 숨은 생각과 성품의 편린들이 드문드문 입에서 떨어져 사람을 다시 보게 한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길들일 수 있어도 혀는 길들이기 힘들다고 하였고, 심지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하는 것의 덕스러움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말이 곧 우리의 성품과 신앙을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이 미우면 아무리 잘 생겨도 미워 보이고, 말이 고우면 아무리 못난 사람도 곱게 보게 된다. 물론 잠시야 누구나 탈을 쓰고 고운 말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게 잠시만 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좋은 사람들은 항상 곁에 두고 1년을, 10년을 지켜보게 되니, 누가 그 긴 세월 동안에 자기다운 말을 감출 수 있겠는가? 때문에 사람은 결국 진실을 입으로 토한다. 

말을 변화시키려면 내면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역사할 때에, 우선은 기존의 습관과 싸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은 은혜의 지배를 받고, 행동과 말은 습관의 지배를 받는 모순이 과도기적으로 생겨난다. 

신자에게는 이 시기가 중요하다. 이 시기에 습관에 지면 결국 은혜의 변화(change)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를 은혜로 승리하면 서서히 말과 행동이 변화한다. 이전의 자기와는 다른 새로운 자기를 성취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다. 항상 비꼬는 화법이나 직설적인 화법만을 사용하던 사람이 남을 칭찬하고 관용하는 말을 하는 것은 낯이 간지럽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사실이 아니다. 옛습관이 주는 일종의 저항감일 뿐이다.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받고, 그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말하는 습관을 쌓아가면 서서히 이러한 이질감이 사라지고 곧 새로운 성품에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해지면 새로운 성품도 하나의 건강한 습관이 되어서 우리 삶을 채우게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의도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의 성품이란 여리고성과 같다. 하나씩 차례대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변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래서 은혜의 승리는 극악한 죄인도 성자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자신에게 적용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정진해야 한다. 노력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뜻을 정하고 집중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말에 주의하라. 그것은 내 영혼을 보는 창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가를 살피라. 그것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라. 말을 통해 은혜를 높이고 덕을 끼치려고 힘쓰라. 당신은 당신처럼 말할 것이며, 또한 말하는 대로 당신이 변화될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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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18 사람은 사람이다!


오사카의 한 아파트에서 40대의 독신남이 죽은지 한 달 만에 발견되었다. 파견 근로자로 일하던 그는 작년에 예고 없던 해직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다가 이 겨울에 굶어죽은 것이다. 부검을 담당한 경찰은 그의 위장에는 아무런 음식물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증언했고, 그의 주검을 발견한 아파트 관리인은 그의 냉장고에도 역시 음식물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언론은 시끄럽게 무심한 시대를 한탄했고, 앞으로 긴 경제적 겨울이 이어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맞물려 사람들의 눈빛을 더욱 침울하게 했다.

기사를 읽으며 우선은 답답했다. 사십이나 된 사람이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부유한 나라 일본에서 그가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살 길이 있지 않았을까? 

왜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끄럽거나 게을러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가 그를 살고 싶은 의욕으로부터 갈라놓은 것은 아닐까... 한 달의 약칭이 39,000엔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석달이나 약칭을 못내고 있었다. 이제 곧 강제로 집을 비운다면, 그는 이 겨울에 어디로 가야할까? 나이 사십에 말이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희망에 가난하다. 성공과 사치에 대한 갈증이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비참하게 하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매도되기도 한다. 소위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식의 말들이 사람들의 정신 속에 강박증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하기사 엄청난 스트레스의 사회생활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의 배수진이라도 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세뇌적 방법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직장에서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과 상담한다. 맑은샘교회에서도 그랬고, 동경드림교회를 담임하면서도 그랬다. 직장생활의 과중한 업무가 건강을 악화시키고, 부부관계를 금가게 하고, 신앙을 무력하게 하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가져 보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한 발 물러서 있는 우리들은 "왜 그러면서까지 그 직장을 다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자기 이야기가 되고나면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한다.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당분간 견디는 것이 곧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서적 공백(패닉)이 찾아오고, 크게 무너진다.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이러한 무너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신경증적인 감정의 충동에 휩싸인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것은 중요한 명제이다. 그가 나쁜 일을 해도 사람이고,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못해도 사람이고, 심지어 사회에 악을 행해도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까지 '사람'의 범주에 넣고 존중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사람의 사람됨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람의 기계화, 혹은 부속화의 위험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의 사람되는 결정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판단하고 폄훼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인간의 사형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을 보고, 격려하며, 희망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인생의 한 시점이 전부가 아니라 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함께 돕고 사랑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 더 간절한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복음의 핵심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나는 복음 안에 이러한 희망이 이미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먹고 마시며 고생하셨다. 그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고생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보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모범을 배웠다.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그분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인생을 깊이 변화시켜 사도가 되게 했고, 전도자가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나 전도자가 아니라도 자기의 자리에서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그분이 가르쳐 주셨다.

일본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결코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의 문제이며, 희망의 문제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나약한 짐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는가? 그러면 사람을 세우고, 섬겨라!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사람에게 있다. 모든 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 그러면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복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교활한 사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로 움추리는 지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하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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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과거는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아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비관하거나 미래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삶은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시간을 관리한다는 말의 의미는 시간을 규모 있게 사용할 뿐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잘 해석하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버릴 것은 없습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할 때에는 언제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되었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정식 재판도 없이 무기징역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시간은 그를 진정한 리더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고통’이라는 대학에서 훈련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을 만나고도 그 마음에 원한이 아닌 용서와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명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통을 통해, 오히려 가족의 중요성과 자기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지만, 지나 온 발자취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입니다. 참고하고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든 미래를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새로운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과거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성경이 가지는 의미를 존중하셨지만 사람들의 전통과 유전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도전하셨습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폄하했지만, 그분의 삶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신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을 사모해야 합니다. 습관이 아니라 진심으로, 전통이 아니라 새 노래로, 다른 사람들의 방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새해의 첫 주일입니다. 입학식을 하고 처음 등교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익숙함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무의식적인 예배가 되지 않도록, 모든 것 하나하나에 정성과 사랑을 담도록 합시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주실 은혜를 기대하도록 합시다.

새 부대가 아름답게 준비되면, 주님이 새 술을 부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전의 포도주보다 새 포도주가 훨씬 탁월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처음보다 나중의 은혜가 크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대로 살지 마십시오. 과거대로 예배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를 취하게 하실 새 술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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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8

유종(有終)의 미(美)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Happy Ending’ 정도가 될까요. 과정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결말에 이른다는 것은 그 과정을 잘 참고 견딘 모든 사람들의 보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결말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땅의 삶을 소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삶이 바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현실을 마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믿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분명 이 세상의 가치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며, 그 날에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넘치는 보상으로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분의 섭리는 살아 있어서 우리를 책임지고 인도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기대, 곧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 믿음의 삶을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그 소망의 내용이 과연 약속된 말씀과 일치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2008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일의 예배를 준비하며, 저는 과연 우리의 1년이 어떠했는가를 곰곰이 살피고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믿음의 진보가 있었다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섰다고 생각할 때가 곧 넘어질 때라는 성경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결코 자만하지 말고 더욱 신앙에 진력하는 새해를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더욱 노력할 부분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깨닫기를 바랍니다. 구멍을 때우지 않고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근본적인 자기 살핌과 회개가 없이 기울어진 신앙의 수레를 계속 미는 것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만들 뿐입니다.


교회를 생각해보면, 2008년은 아름다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적인 순례에 있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교회적으로 진보가 있었고, 비전을 향해 더욱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일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말씀과 기도를 회복하고, 신앙적 삶에 대하여 의지를 가지며, 교회 안에 성경적 가치관의 일군들을 세우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일들은 더디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올바른 일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바르게 변화된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큰 교회를 세워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는 생각을 돌려 자기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먼저 그리스도 앞에 바르게 세우도록 합시다. 주님의 은혜가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시고,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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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행복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의 날짜는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A.D. 0년이 아니라 B.C.3년 경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도의 ‘호적령’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방교회가 12월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는 것과 달리 동방교회에서는 1월4일을 성탄절로 기념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태양을 숭배하던 축제일을 그대로 이어서 예수님의 탄신일로 지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기원이 되었으니, 성탄절은 이방종교의 유산이고 지킬만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들립니다.

산타클로스나 루돌프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서 아기 예수님의 생일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부정되려고 하는 것은 근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날짜가 마치 중요한 것처럼 따지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생일을 정확히 기념해야 한다면, 성경이 그것을 유월절 절기와 같이 명백하게 기록하였거나 혹은 12명의 사도 중에 누군가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1세기 당대의 교회는 이 일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1년 중의 하루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날이 성탄절이요, 부활절이요, 감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성탄절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성탄에 있어 날짜가 아니라 그 의미성을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념’이라는 특별한 의미 속에서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X-MAS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엑스마스’가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크리스토’의 머리 글자가 영문자 X와 모양이 똑같습니다. 여기에 ‘예배’를 의미하는 ‘마스’를 붙여서 성탄절의 이름을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라고 읽고, 이 날의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잘 활용해 왔습니다. 화려한 볼거리와 예배를 준비하고, 많은 주변의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축제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함께 예배하도록 초청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마다 이루어지는 예배는 바로 새신자를 초대하는 열린예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있으나 예수가 없는 일본땅에서 4번째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교회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내년에는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주변의 일본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같이 나누고, 우리가 준비한 소박한 아마추어 발표회를 나누고, 그 가운데 소중한 복음과 예배를 같이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불신자에게도 왠지 익숙한 크리스마스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기회요, 교회의 복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꼭 그렇게 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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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전라도 화순 적벽의 은행나무 이야기를 보았다. 

은행나무는 대개 암수나무가 같이 있어야 은행이 여는데, 적벽의 은행나무는 외짝인데도 해마다 가마니로 거둘 만큼 은행 소출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에게 은행나무 혼자서 어떻게 은행이 열리느냐고 물었더니, 적벽의 물에 드리운 제 모습을 서방님 삼아 은행알을 낳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은행나무에 은행이 여는 건 그곳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건 물론 아니다. 은행나무는 수나무가 10리 밖에 있어도 바람을 타고 암나무를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상식만 중요한 건 아니다. 사물이나 자연의 이상한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그에 걸맞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인간의 고유한 장점이다. 

생땍쥐베리는 <어린왕자>를 통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아이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어른’의 의미로 표현했다. 때문에 <어린왕자>에는 과학과 이성을 뛰어넘는 상상력들이 난무한다. 그것은 풍자스럽지만, 결국에는 이면에 감추인 본질을 정확하게 조명한다. 아이들의 동화 같은 이 책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어른들의 손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생각이 굳어지면 자기의 틀에 갇히게 된다. 유리판을 덮은 그릇에 넣어 두었던 귀뚜라미 이야기를 들었는가? 온몸으로 유리판과 충돌하던 귀뚜라미는 결국 유리판을 치워도 더 이상 높이로는 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이다. 마음이 갇힌 사람은 현실도 갇힌다. 

형편에 맞는 것만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물론 사람은 처해진 상황을 직시하고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없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사치나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욕심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것들에는 낭비해도 괜찮다. 

형편(形便)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양을 편안히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양은 꼭 현실과 육체의 모양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신앙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마음이야말로 우리 모양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편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현실뿐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상상력이 죽지 않도록,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한 주머니로 컵라면을 사먹고, 커피는 멋진 카페에서 마시는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그건 사람만이 하는 짓이다. 비록 그 모양새가 그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아 철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의 삶에 그런 부분이 있기에 마음이 덜 굳어지고, 상상력이 살아 있으며, 눈에 호기심이 어려 날마다 총기로 빛날 수 있다면 그것도 그의 형편(形便)에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 마음이 굳어져 우리 현실이 생각의 감옥을 이루는 것이다. 갇힌 마음은 기도하는 것조차 방해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정말 딱하게 여기신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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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조국을 가졌는가?


근간에 아이들을 한국에 보낼 생각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버지로서의 고민이 담긴 결정이다. 일본에 왔을 때에, 준혁이는 5학년, 찬혁이는 3학년이었다. 당장 일본학교에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이 일본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언어적 장벽으로 인하여 부모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아이들을 앞세워야 하는 상황들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격려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긍정적으로 말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갔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 아이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것에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참 감사하다.

하지만 조금씩 아이들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특별히 준혁이와 찬혁이가 소학교와 중학교로 갈라진 이후, 각자의 학교생활에서 혼자여야 하는 한국인으로서의 어려운 입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물론 한국에는 과도한 사교육 열풍과 입시전쟁, 그리고 점점 퇴락하는 ‘학교’라는 곳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 이민을 선택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이 달라질 수는 없다. 문제 많은 사회지만, 그래도 내 나라이고 내 땅이다. 사람들의 정서도, 생각도, 체질도 비슷한 우리의 조국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리 말을 잘하고 훌륭하게 적응해도 우리는 영원히 이방인이요,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난 아이들이 점점 ‘조국’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우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어를 익히고, 수학을 잘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살던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완벽한 사회라는 말도 아니다. ‘조국’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요, 내가 헌신해야 할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한국이라는 땅이 영원히 아이들의 가슴에 그립고 향수가 있으며, 좋은 추억의 땅으로 각인되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한국에 보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위해 헌신한다.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말은 잘하지만 전혀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실상 다른 것을 더 사랑하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말려도 헌신한다. 그들의 가슴에 담긴 사랑이 헌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도록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동해바다의 일출과 설악산의 웅장함과 지리산의 고단함과 서해의 갯벌을 만나고 사랑하게 하고 싶다.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설움을 오래 겪은 후에야 ‘조국’의 가치를 가슴에 새겼다. 언제나 테러가 일어나고, 주변국가들의 침략이 끊이지 않는 땅이지만, 그 모래벌판이라도 내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사를 통해 배웠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바른 정체감이 있는가? 우리 아이들을 누구로 키우고 있는가? 우리 교육의 목표는 영어 잘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올바른 인간이요, 신앙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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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연말의 분주함에 바쁘시지요? 

2008년의 한 해가 이제 정말 달력 한 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용히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이지만, 정작 마음도 시간도 분주해서 그럴 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일들도 많았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추억의 책장에 담아놓고 두고두고 꺼내어 생각하면 지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항상 현실은 쉽지 않고, 그래서 좀처럼 행복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에 감사했던 것들에 대하여 같이 생각해볼까 합니다.

첫째로, 모든 식구들의 강건함에 감사드립니다.

건강으로 인한 소동이 많았습니다. 사모는 달팽이관의 이상에서 오는 어지러움증에 시달렸고, 장수호, 이선경 부부는 화분증에, 그리고 목사는 비염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김선연 권찰은 과로에서 오는 증상으로 회사를 한 달이나 쉬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환경은 점점 공해로 나빠지고, 식품의 안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두 오늘까지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이 기도했던 일이기에 가장 많이 감사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둘째로, 교회의 안정과 믿음의 성장에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유학생들을 받아들이고 보내는 과정이 서운하기도 하고, 아직은 장년이 부족해서 교회의 일을 나누고 책임질 사람들이 적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비로소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한 해 동안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십자가를 감당해 주었던 지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로, 비전과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비전은 공상과 다릅니다. 비전은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공상은 수고가 귀찮아서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전을 나누고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있습니다. 동경드림교회의 꿈나무들입니다. 저는 이 아이들 때문에 주일학교를 꿈꾸고, 장학사업을 꿈꾸고, 선교사 파송을 꿈꾸게 됩니다. 

최진웅 권찰이 결혼을 했습니다. 므라키상의 등장으로, 그렇게 말로만 하자고 했던 일본어 찬양이 예배에 등장했고, 일본인들을 섬기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교회가 앞으로 더욱 큰 비전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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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3 살아있는 믿음


믿음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그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이 반드시 기적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바른 믿음은 항상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탁월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면 기적이고,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면 응답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믿음이다. 예수님도 믿음의 최소조건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겨자씨는 ‘작다’는 말의 최상급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은 것이 어찌 겨자씨만 있겠는가? 예수님은 모래알만한 믿음이나, 먼지만한 믿음이라고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를 통하여 작지만 생명이 있는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모양은 있으나 전혀 능력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역시나 이 말씀에서도 중요한 기준은 생명이다. 믿음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치명적인 부족으로 이해하고,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창세기의 2장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되었다. 흙으로 지어진 육신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지어진 사람의 영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셨던 것이다. 왜 사람만 그런 존재일까? 그것은 사람의 생명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의 생기이기 때문이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호흡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바람이다. 그리고 이 태초의 바람이 사도행전 2장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져 ‘성령의 충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성령의 충만이란, 육신은 살았으나 영은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이며, 때문에 이것은 아담에게 호흡을 넣어 주시던 바로 그 장면의 리액션(reaction)이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사람이 ‘생령’이 되는 것과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장면은 본질이 하나인 셈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믿음이란, 성령이 부어진 믿음이다. 

성령은 살리는 바람이시다. 태초에도 그러했고, 신약에서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때문에 성령의 은총 아래서 믿음은 살아난다. 성령만이 믿음에 생명을 부으신다.

이렇게 생명이 있는 믿음은 그 양이 문제가 아니다. 겨자씨만한 크기라도 결국에는 산을 옮기고야 만다. 

왜냐하면 겨자씨만한 크기로 계속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껍질을 깨고 싹이 나서는 점점 자라고 마침내는 거목(巨木)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작은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마침내는 창대한 믿음을 이루었다. 바로 그들의 믿음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성령으로 믿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의지로 믿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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