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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이 있을까?


후배로부터 설교에 대한 조언을 부탁 받았다. 이런 부탁은, 일단 몹시 부담스럽다. 아직 그런 것을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실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전히 어렵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그리고 내가 느끼고 품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참 막연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몇 자는 남겨도 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둔다.


비결1, 좋은 설교자가 되라


좋은 설교는 좋은 설교자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셨다. 결국 사람은 그 열매를 통해 자기를 증명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설교를 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좋은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과 다를 수 없다고 믿는다. 만약 그 둘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설교가 아니라 '사기'일 것이다. 

때문에 좋은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영적으로도 그러하고, 또한 지적인 발전을 계속해야 하며, 그 깨닫고 아는 것이 삶과 괴리되지 않도록 인격적인 성장도 노력해야 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설교자가 좋은 설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노력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지점이라 하겠다. 영적인, 지적인, 그리고 인격적인 균형과 발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말씀을 흠 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비결2, 성경을 경외하라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져라. 성경은 암호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때문에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깊고 오묘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장인은 타인이 보기에는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에도 애정어린 손길을 몇 번 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의 눈길과 경험이 닿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완성하려는 열정이야말로 작품을 물건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마음(경외심)이 중요하다. 성경을 믿어야 한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대답을 하고, 구하는 자에게는 열려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지극히 깊이까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훈련이 설교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도사 시절부터 4~5시간을 소모했다. 

설교할 분문을 결정하고, 그것을 분해하여 이해하고, 어의를 살피고,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추출한다. 그리고 주석과 다른 책들을 통해서 나의 이해가 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혹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을 글로 옮긴다. 

초고는 보통 세 번을 다시 손질한다. 처음에는 작성한 직후에 읽으며 수정하고, 다시 본문을 새로 묵상한 이후에 가감하고, 설교하는 아침이나 직전에 다시 확인하며 손질한다.

일본에 온 이후에는 한 편의 설교 준비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경우, 주중에 전혀 모임이 없기 때문이고, 한 편의 설교로 하나의 주제를 제대로 설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교에 대한 준비 시간도 갑절로 늘어났다. 요즘은 보통 8시간 이상을 한 편의 설교준비에 사용하고 있다.


비결3, 좋은 귀를 가지라


좋은 귀를 가져라. 설교자는 대부분 말하는 입장에만 선다. 그것이 결국 자신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든다. 설교자 만큼 좋은 설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 훌륭한 설교를 개인적으로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서 더 좋은 설교를 전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은 오픈되어 있는 세상이다. 마음만 있다면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멘토로 삼을 만한 목사님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설교자 자신도 주님의 양(羊)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좋은 설교는 모방을 해도 나쁘지 않다. 책을 내는 일은 저작권의 문제가 있겠지만, 설교를 하는 일은 '복음'이라는 오픈소스를 사용하는 일이다. 때문에 어떤 설교를 모방한다고 하여서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제대로 해야 한다. 설교준비가 부족해서, 혹은 쉽게 설교를 때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도적질이다. 그러나 다른 분이 하신 한 편의 설교가 내것으로 깊이 용해되어서 설교자 자신의 목소리로 변하여 선포될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또한 꼭 자기 설교를 들어봐라. 음색, 톤, 발음 같은 것들은 물론, 자기도 모르는 언어적 습관까지 고쳐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요점을 흐리는 곁가지,  불필요한 농담, 심지어 성경을 잘못 인용하는 오류까지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나중이라도 양해를 구해 정정할 것은 정정하고, 개인적으로 고칠 습벽은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설교에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은혜 받지 못하는 말씀을 들고서 다른 사람들의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 태어나는 옥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설교에 쉬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모리배들이다.


비결4, 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단지 의미만을 전달하기 원하셨다면, 책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여, 강단에 세우시는 까닭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 본래의 감정을 실어서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다.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그 심정이 무엇인가? 단 한 번이라도, 강단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다면, 그 심정이 바로 한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 앞에 놓여 있는 하나하나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설교의 원인이고, 능력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는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하기 전에는 항상 버릇처럼 그런 기도를 한다. 교훈이든, 책망이든... 오늘 전하는 말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그 사랑 없이는, 내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어떤 비밀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를 가장한 흉기이며, 자기의 과시이고, 하나님을 빙자한 한(恨) 풀이다. 그런 설교자는 듣는 이의 영혼을 죽인다. 그런 설교자는 차라리 설교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


비결5, 농부의 마음을 가져라


내가 이해하기에, 설교는 농사다. 농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조급하면 망한다. 오늘 설교했다고 내일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면 큰 실망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식간에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 동안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나는 자주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어부 중에서 선택하셨을까? 그리고 왜 '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으로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개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차적 노동의 현장이 그러하지만, '인내'를 배경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실패하였지만 다시 말씀에 의지하여 한 번 더 내리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설교자가 품어야 하는 마음이다.  수 년 동안이나 거름을 주고 애정을 쏟아 가꾸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열매가 없어 도끼에 찍힐 위험에 처한 포도나무를 위해 간절하게 마지막 기회를 간청하는 농부의 마음이 바로 설교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농부에게는 믿음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다. 흔히 땅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 믿음의 내용이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현실에서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고 거절하는 것처럼만 보이더라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이 마침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보다 더 강하다는 신뢰를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결6, 나를 관찰하라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설교자는 말씀을 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의 옳고 그름과 얕고 깊음에 따라서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여 전하는 것이고, 다음은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사람이 무엇이며 어떠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의외로 남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는 것에 비하여, 자기 자신을 놓치는 설교자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진정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시작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자신을 위해 설교하라.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할 메시지를 찾으라.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설교를 준비하라. 그 과정이 의외로 많은 것을 얻게 한다. 


비결7, 은혜가 아니면 설교할 수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이후에도, 역시나 준비된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면 떨린다. 그리고 준비된 것도 못하고 내려오기도 하고, 준비된 것 이상을 전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컨디션의 차이일까? 그날의 운(運) 때문일까? 

설교에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사실 그것이 핵심이다. 만약 그것을 놓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제대로 설교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완성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사람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기 재주에 취해서 그만 하나님을 가려 버린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재주에 눈과 귀가 현혹될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설교는 죽었고, 그의 재주는 사람을 모으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한다. 

설교는 생명이 그 영광이다. 누군가 그 설교를 듣고 살아나야 한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언어가 변하고, 행동이 달라진다. 그런 날이 거듭되면 인격이 변한다. 그렇게 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영광이요, 보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다. 훈육의 힘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는 스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에서는 추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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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0 목양칼럼 :: 


교회 직분의 가장 근간이 되는 ‘집사’라는 말은 히랍어 ‘디아코노스’에서 왔습니다.

그 어원의 의미는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몸을 써서 누군가를 수종드는 사람으로 종을 뜻하지만, 단순한 종이 아니라 주인이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종을 뜻합니다. 때문에 그 섬김 또한 강제적인 노역이 아니라, 바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는 ‘귀 뚫린 종’이라는 특별한 종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에서는, 본래 희년이 오면 모든 종들이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주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주어진 자유의 기회를 반납하고 계속 종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럴 경우, 주인은 종을 데려다가 그 집 문이나 문설주에 세우고 귀를 뚫어 ‘귀 뚫린 종’으로 삼습니다. (출21:6. 신15:17)

아시겠지만, 히브리인들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따라 문과 문설주에 하나님의 말씀인 ‘레마’를 기록한 주머니를 달고 출입할 때마다 경배를 드렸습니다. 때문에 그 문이나 문설주에 종을 세워 ‘귀를 뚫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엄숙한 맹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름은 ‘종’이로되 주인의 아들(가족)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러한 종은 실제로 주인과 한 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땅 위에서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을 부리고 주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러한 주인의 권력은 종이라는 약자에게는 늘 버거운 멍에가 됩니다. 때문에 종은 주인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주종(主從)의 신분제도가 해소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얼마나 많이 분노하거나, 불평하거나, 미워합니까?

그런데 이 주인은 얼마나 지혜롭고 덕스러웠으면, 종이 영원히 상전으로 모시기를 원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분명히 자신의 권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 믿음으로 절제하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귀 뚫린 종’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한 재산의 증식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기쁨이요, 명예입니다. 사람들이 그 집을 드나들 때마다 문과 문설주에 생겨 있는 못자국을 보면서 이 사실을 기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던 ‘레마’의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로 그 문에, 문설주에 기념되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교회의 직분자들은, 마땅히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의무야말로, 사실은 성경에서 가장 무겁고 하나님께서 매우 가치 있게 여기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땅히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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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목양칼럼 :: 

인생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불안이다.
목사와 상담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말을 한다.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하는거죠?"
끝이 보이면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욕이 꺾인다. 한 발자국도 더 나갈 힘이 없게 된다. 낙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믿음조차 흔들린다. 불안은 참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불안은 말로 해결되지 않는다. 불안해서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골이 된다고 한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서도 약발이 며칠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들을 때에는 마음이 안정되다가도, 곧 불안이 다시 일어나서 마침내 다시 똑같은 대답을 듣기 위해 점집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은 가정(if)에서 출발한다. 그 가정이 충분한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은데 그런 것은 몽땅 무시하고 불안에 스스로 빠져든다.
성경을 통해 이해한다면, 이러한 ‘불안’의 경향성은 죄와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후 줄곧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았다. 그 하나님 임재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으로 인하여 불평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안이, 곧 믿음 없음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쓴 뿌리라고 진단하셨다. 결국 죄가 불안을 낳고, 불안이 마침내 범죄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느냐?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불안에 대한 해답은 결국 자신에게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편은 ‘너의 영혼아’라고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의 불안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단하고, 응원하고, 격려해서 불안으로부터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으로 시선을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불안은 기도할 제목이다. 안정된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샬롬’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그것은 단지 정서적인 평안을 비는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평안을 기원하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것이 열쇠이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은, 자기를 타이르고 다스리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해답은 역시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껍질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전히 샬롬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불안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성숙을 위해 달려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늘어난 셈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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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3 목양칼럼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내가 구원 받았을까? 나는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일까?
이런 질문이 나의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해 나는 나의 영적인 건강을 체크하게 되고,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전한 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 동그라미는 아주 어려운 여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의 빈 부분을 완전하게 채워줄 조각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었을 때에 오히려 그는 행복을 잃습니다. 그 부족함이 사실은 동그라미에게 유익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질병에서는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 일에 대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강함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찬양으로도 부릅니다. 설교로도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삶에서 이런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질병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이 물러가야 합니다. 실패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의심이란 불쾌한 무엇입니다. 승리와 형통만이 신앙의 정답입니다. 긍정으로, 긍정으로 신앙을 포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실은 욕심입니다. 

신앙적인 소망은 바울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그것이 거절된다고 하여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불평, 원망, 의심, 분노와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종과 평안과 감사가 거절에도 불구하고 우러납니다. 소망은 본래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다릅니다. 욕심은 거절을 견디지 못합니다. 욕심은 항상 그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우주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욕심은 바라는 것을 향해 진격할 뿐 그 어떤 타협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족하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물질도 그러하고, 인격도 그러하고, 심지어 믿음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크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커다란 믿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교만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사실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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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6 목양칼럼


누에는 누에나방의 애벌레이다. 이 곤충은 보통 알, 유충(애벌레), 번데기, 성충(나방)의 4단계를 겪는데, 그 중에서 유충의 시기를 ‘누에’라 한다. 사실, 누에는 뽕잎이 아니라 다른 식물의 잎도 먹을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는 완전한 생장을 못한다. 그러니까 뽕잎을 먹는 것은 누에에게 있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누에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누에는 통곡하는 소리, 부르짖거나 성내는 소리, 욕지거리, 음담패설을 싫어하고, 불결한 사람이 곁에 오는 것을 싫어하며, 부엌에서 칼 쓰는 소리를 싫어하고, 대문이나 창문 두드리는 소리 또한 싫어한다. 또한, 연기도 싫어하고 생선이나 고기 굽는 냄새도 싫어하며 비린내, 누린내에 사향냄새까지도 싫어한다.”

가히 누에의 결벽(潔癖)은 사람보다 심하고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이 곤충을 예부터 천충(天蟲)이라 불렀고, 양잠(養蠶)을 하는 가정은 청결과 정화(淨化)를 중시했다.

지금에도 다르지 않다. 조금이라도 누에가 먹는 뽕잎에 농약이 묻어 있으면, 누에는 즉시로 토액을 내뿜고 몸이 오그라들어 죽는다. 그 예민함이 동물보다 앞서서, 요즘은 식품이나 약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데에도 누에가 널리 사용된다고 한다.


이에 관계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목사는 누에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 이외의 것을 먹을 수는 있지만, 그러면 생장이 어그러져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목사는 상서로운 것을 지극히 싫어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 목사가 세속적으로 오염된 것을 먹고도 토하고 죽지 않으면 진짜 목사 일리 없다. 목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었고,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안전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지금의 시대를 보면, 목사가 제일 많이 죽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실상은, 목사가 뽕잎을 안 먹고 세속에 찌든 먼지와 부패한 고기를 먹어서 이상한 괴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의 총회장이 동료 목사들과 함께 단란주점을 출입했다 하고, 어느 큰 교회의 목사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하여 남의 글을 도둑질 했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성추행의 범죄가 들통 났는데도 해당 목사는 거액의 헌금을 받아 교회를 나가서 버젓이 새교회를 개척했다. 

이게 목사인가? 이게 목사가 감히 할 짓인가?

그들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유력(有力)하지만,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들이 여전히 말씀의 실크를 뽑을 리는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가슴이 몹시 아프다. 그러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말 사람의 하는 짓이 한 마리 벌레만도 못하다. 누에도 자기 먹을 잎과 먹지 말아야 할 경계를 알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이루는데, 사람이 어찌 이리도 우매하고 어리석다는 말인가!

오늘은 목사로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나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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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목양칼럼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맞는 말이다. 신앙을 인격과 삶의 일부로 생각하는 한,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을 전부로 여기고 선택할 때에, 비로소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함정도 있다. 
세상 모든 돌이 황금이라면, 과연 황금을 귀히 여기겠는가?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예배와 경건의 의무를 가벼이 하는 변명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청년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은 화장실에서도 기도를 하고, 버스를 타고도 기도를 하고, 평소에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기도를 하며 산다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예수님을 '친구'로 여기는 이런 태도에 매우 우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혹은 모세를 친구와 같이 대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친구로 여겼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신앙을 삶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이라는 기본기가 건강해야 한다.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고, 날마다의 삶에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구별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비로소 삶은 신앙의 지배 아래 서서히 변하게 된다. 
반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며, 날마다 경건의 훈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묵상하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을 정서적으로만 친구로 여긴다면, 그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의 역류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신앙의 오염이다.


사람도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회 시간마다 애통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말과 행동에서 신앙이 깊이 있는 향기로 우러날 때에, 우리는 그가 "예수님은 나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하면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도회는 태만하고, 말은 경박하며, 인격에서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할 수 없는데 "예수님은 나의 친구시다!"고 한다면... 다소의 경멸과 슬픔을 느끼게 될 뿐이다.


신앙은 가벼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먼저 변해야 한다. 단지 말투만 조금 바꾸고 나 혼자 하나님과 친한 척을 한다고 하여서 하나님도 나를 친구로 여기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분의 취향은 매우 섬세하고 까다롭다. 
그분이 우리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만만한 하나님은 절대로 아니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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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0 목양칼럼

감정은 확성기와 같습니다. 작은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큰 소리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며 만나는 현실이 감정을 통해 확대됩니다. 이것은 나쁘거나 좋거나 하는 대상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고, 감정은 현실을 확대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녹음한 소리를 편집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너무 작게 녹음되어서 그 소리를 다소 키워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소리를 크게 확대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원하는 소리만이 아니라 소음도 크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작아서 알아듣기 힘들었던 소리가 이제는 시끄러워서 안 들리는 소리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소리를 확대한 후에는 소음을 줄이는 노이즈 필터링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감정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감정이 어느 정도 증폭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작용을 통해 인간은 동물과 다른 풍부한 행복과 기쁨,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정의 증폭이 도를 넘으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발이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감정은 정상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노이즈를 확대시킵니다. 

사람마다 특색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뚝뚝하여서 전혀 감정적이 아닐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에게조차 내적으로는 감정의 폭발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오히려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폭발을 억압하는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기형적인 성격으로 발전할 위험도 있습니다.

감정은 잘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그것이 억압되는 것보다는 표현되는 것이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감정적일 때에는, 노이즈 필터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본래의 사실에서 벗어나는 억측, 상상, 부정적인 견해 등을 이성(理性)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주고, 감정의 시발점이 되는 본래의 사실을 확인하여 감정적 노이즈가 ‘사실’을 덮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감정적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체질입니다. 그 체질에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특징을 잘 살피고, 거기에 맞도록 건강한 생활의 방식을 찾아 노력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훈련입니다. 그것도 막 건너뛰는 생각이 아니라, 차근차근 조리 있게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이런 생각의 과정 없이 당장의 감정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틀림없이 후회를 낳습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하는 훈련을 익히면, 오히려 그 민감한 감정으로 인하여 더 사려 깊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혜안(慧眼)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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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3 목양칼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을 통해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언했던 것입니다. (수 24:15)

자녀에게 부와 명예를 물려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자녀에게, 또한 자녀의 하나님이 손자에게 이어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신앙의 유산이야말로 신자에게 가장 복된 유산이며, 가장 큰 명예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경박하여 신앙을 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이제는 그것을 교단에서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교회법입니다.

과연 목회자의 일이 고되고, 가난하고, 욕되어서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누리고 살 만 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평생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고 심지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짓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물은 물려줄 수 있으나 참된 신앙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순간, 그의 사역이 병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의 신앙도 망치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물려줄수록, 더 화려한 것을 물려줄수록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성전에 바쳐져서 엘리 제사장의 손에 컸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어린 시절에 광야에 나가 약대 털옷과 메뚜기, 석청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한없이 안락한 삶을 누린 자녀 중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을 부모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감싸고 피하게 하는 일이 과연 그 자녀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는 자기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타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자식의 생김새가 나와 비슷하고, 그 성장의 모습이 자기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지독한 이기심으로 나를 망치게 되는 것처럼, 자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마땅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식을 나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나의 계획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의 자녀사랑이 삐뚤어져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행사하고 그 장래를 망치게 됩니다.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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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건달들.
1920년대 미국의 뉴욕을 배경으로 뒷골목에서 도박으로 살아가는 건달들과 그들의 아가씨들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 이야기 속에는 사라라는 구세군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녀의 선교회는 '실적'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그 때에 스카이 매스터슨이라는 도박의 귀재(?)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그날 밤에 하바나(쿠바)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 다음 날까지 '순수한 죄인들' 12명을 그녀의 선교회에 제공 하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스카이는 이 저녁 식사에 이미 그의 친구, 나싼과 1,000달러의 내기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유쾌함으로 이야기는 인간적이고 모두 행복하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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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구령의 열정으로 무장한 구세군 아가씨 사라와 도박사 스카이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사실, 평범하다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소재가 되지도 못하겠지.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이 순수하지 못할 때에, 사랑은 대단히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순수함에 빠져 그야말로 '순수한 죄인들'을 구령의 열정만으로 끌어 안으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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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권한다.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하지만, 또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세상을, 특히 사람을 만만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이 내 맘대로 되었으면 고생할 부모가 없을 것이다. 배 아파서 낳은 부모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 자녀를, 나는 애인이기 때문에 맘대로 요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다소 어리석어 보인다. 사랑을 포기하라는 절대 명령은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순수한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사라 같은 여린 아가씨가 품고 책임져야 할 사명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이다.
교회는 본래 누가 보아도 죄인인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왔다. 술 주정뱅이, 노름꾼, 아내를 때리는 폭력남편, 빚쟁이, 좀도둑, 창녀, 노숙자... 누가 보아도 재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들 자신이 교회의 역동적인 힘의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가 놀라고 경외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와 교회의 수평 이동만을 염려할 상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순수한 죄인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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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길들여졌으며, 마치 인스턴트 식품만 먹다가 이빨이 빠진 맹수처럼 구령의 열정으로 도전하고 싸우는 치열한 영적 상황을 잃게 되었다.
더 이상 예배 중에 뛰어들어 아내를 끌고 가는 남편도, 며느리를 욕하는 시어머니도, 술 취한 알코올 중독자도, 사기를 치러 오는 허름한 사기꾼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구령의 열정을 느끼는 '사라' 같은 구세군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만의 교회에서 안전하게 예배하고 싶을 뿐이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 본질적인 바탕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야말로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묘사처럼, 고객이 없어 폐점해야 하는 지점일지 모른다.
상상해보라. 주방장에 서빙, 지배인까지 수 십 명이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에 고객이 달랑 하나, 둘 뿐이라면... 그 레스토랑은 곧 문 닫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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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직분자를 세우고 교인들을 훈련하는 것은, 자기들끼리 잘난 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령의 열정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는 뜻이다.
교회의 대표적인 직분을 처음부터 '집사(디아코노스)'라고 불렀던 것을 살핀다면 이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 말의 의미가 머리에 수건을 쓰다, 식사에 수종을 들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것은 목사를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라.

 

말씀도 그러하다. 죄인과 분리된 교회의 강단은, 야성(野性)이 없다.
당연하다. 별로 죄를 짓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모셔두고 어떻게 신랄한 죄에 대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죄에 대한 날 선 말씀을 계속 듣고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순수한 죄인들'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부대낌과 불편함을 영적 전쟁으로 승화시키고, 말씀과 기도로 싸워 나가는 교회야말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비율이 70:30이라고 생각한다. 80:20이면 좀 안정적이고, 60:40이면 좀 위태스럽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말을 일삼는, 혹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30% 수준이라면, 교회는 건강한 것이다.
때문에 그 문제되는 사람들을 해결하고 100%의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비율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에게 바른 인식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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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목양칼럼


살다 보면, 항상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날이 있듯이, 신앙생활에도 침체기(沈滯期)가 찾아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방치해서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도 시험에 대하여 많이 말해 줍니다. 그것은 시험이 그만큼 신자의 일생에 흔히 경험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시험에 빠지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말씀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극복하는 일을 우리 신앙생활의 한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앙적 침체기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요?

저는 목사로서, 신앙생활의 원칙을 사수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분들은, 다소 무리를 해도 별다른 지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인해 회복을 위해 운동을 하는 분들은, 운동을 잘못 하는 것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때문에 회복을 위해 운동을 할 때에는 의사의 주의사항을 듣고, 환자로서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신앙의 회복도 마찬가지라고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해 불타 오르는 동안에는, 가는 곳마다 예배당이고, 앉는 곳마다 기도의 자리가 됩니다. 마치 젊은이를 향하여 돌이라도 씹어 먹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런 신자는 모든 것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 침체기 속에서는 예전에 은혜를 받았던 것들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감동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모두 나를 떠난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멀리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내 약함과 육체적 기질로 인하여 나타나는 영적인 독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오히려 잘 이겨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며, 그것이 좋은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중요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기 속에서는 다음의 원칙을 지켜 보기를 권합니다.

첫째,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공적 예배를 빼먹지 마십시오. 둘째, 불평은 멈추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습관은 무익하며 은혜를 사라지게 합니다. 셋째, 연보를 정성 들여 하십시오.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넷째, 은혜로운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불평도 전염되고 열심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내가 변덕이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원칙을 사수하면, 반드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원칙을 무시하면, 영적 침체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어 매우 큰 영적 질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평소에 바른 신앙의 습관을 기르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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