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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7 목양칼럼


튜닝이 유행이다. 이는 본래 기계에서 최선의 성능을 끌어내기 위한 조작을 뜻한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작의 중심은 성능에서 기호로 바뀌었다. 이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맘에 드는 것으로, 평범한 것에서 독특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튜닝이라 부르게 되었다.

핸드폰을 생각해 보자.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드폰을 구입하면 보호필름과 커버를 산다. 몇 년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다. 물론 핸드폰이 스마트해지면서 고가의 물건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더 애지중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고가이기 때문에 왠만한 악세사리는 패키지로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제품 자체가 다른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왜 핸드폰 회사는 처음부터 커버와 보호필름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로 제품을 만들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핸드폰의 악세사리 회사들은 영세한 업체들이다. 물론 창의적인 능력이 돈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 핸드폰을 생산하는 애플이나, 삼성에 훨씬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본래의 디자인을 다른 것으로 덮어 씌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튜닝일까?

요즘은 사람도 튜닝의 대상이 되었다. 눈과 코는 예사가 되었고, 이제는 턱관절을 조각하기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에 병자가 되거나 심지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를 튜닝하고 싶은 열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열망이 드디어 자기 몸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앞에 했던 질문을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창조주가 만드신 디자인을 우리 손으로 고치는 일이 과연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 과연 본래의 디자인보다 더 훌륭해지는 튜닝은 가능한가? 가장 자기다운 디자인은 결국 이미 만들어진 자기의 모습의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은 외모를 튜닝하지 말고 내면의 튜닝에 분발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사람은 다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달란트)를 가지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따라서 사람의 존재가 변화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면의 변화가 외모까지 변하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에 제일 민감한 것이 눈빛이고, 인격적 변화는 표정과 태도를 확실히 바꾼다. 그리고 그런 미묘한 변화에 의하여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다. 몇 년의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사람의 얼굴에서 천사와 악마를 보고서 그림을 그렸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험처럼 말이다.

가장 자기다운 디자인은 이미 자기 안에 있다. 그것을 누리며 살 것인지, 아니면 흔들리는 '기호'에 맞추어 함부로 손을 댈 것인지는 자기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인생에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핸드폰 커버와 필름은 떼고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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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목양칼럼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제가 사는 히까리가오까에는 은행나무가 많습니다.

이제 제법 노랗게 물든 나무가 나란히 줄을 서서 무수히 많은 잎사귀를 떨구는 모습은 매해 볼 때마다 감격을 자아냅니다. 그 감격은 예뻐서도 나오지만, 가여운 마음에서도 나옵니다. 모진 겨울을 목전에 두고서, 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잎사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더러는 아직도 푸른데, 더러는 아직도 생생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라는 본체를 지키기 위하여 이 녀석들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지켜본 적이 있던가요? 우리들은 이렇게 아프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용히 숨죽여 본 적이 있던가요?



저 자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늘 말이 많았고, 내가 떨어지지 않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설득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래도 떨어지는 날에는 눈을 흘기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나는 거름이 아니라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마땅히 이 세상에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주연은 무엇이고 조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착각으로 높은 탑을 쌓으며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만, 정작 인생은 떨어지는 낙엽 앞에서 겸손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부끄러운 것은 죽는 일이 아니라 사는 일입니다. 자기 답게 살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며,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 삶은 구차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게 해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때를 알고 바르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맘때면, 아이들은 낙옆 위에 뒹굴고 낙엽을 모아 파아란 하늘에 던지며 자지러지는 웃음을 뿜어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낙엽이 하나도 슬프지 않습니다. 낙엽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돌아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본래의 자리로, 아이들의 추억 속으로, 나의 사색 곁으로.



희생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 역할을 다하고 본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웃음이 남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니, 무명하다고 고개를 떨구지 마십시다. 나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들이 그래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면, 정녕 누가 헛된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겠지요. 그 때까진 그저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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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3 목양칼럼 :: 신앙으로 드리는 감사


우리에게 2013년의 감사절을 동경에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또 무사히 보내고, 우리는 이제 2달 남짓 남은 한 해를 마무리 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인생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돌아오지 않기에, 비록 우리에게 힘들었고 아직도 힘든 날들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그리울 날들이고 감사할 날들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 그 계획대로 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늘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고, 늘 짐작하지 못했던 사건에 처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나 그 감사는, 결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 합시다. 감사하는 자가 절망할 수 없고, 감사하는 자가 이웃에게 무례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분명히 오늘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주는 스스로의 격려입니다.

성경이 무수하게 감사를 말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바로 이 감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우리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는 느낌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단순한 상황의 인식에서 나오는 좋은 반응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이 상황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결단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바르게 배우고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해서 감사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감사입니다.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는 것은 어른의 감사입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감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감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러는 정말 상황이 감사해서 감사하고, 더러는 거기 우리의 소망과 신앙을 투영하여, 의지를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감사가 하나로 만날 때에, 비로소 '범사(모든 것)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선하게 갚아 주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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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 목양칼럼  :: 이것이 진정한 응답입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고 너무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의 본심에는 ‘응답’을 믿지 못하는 깊은 실망감이 자리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말이라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 보려는 은밀한 강요가 내포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떠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응답하지 않으실 수는 없을 것이라는, 꼬인 심리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믿고자 하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의지)을 믿어지는 것(은혜)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동은, 처음에는 매우 의욕이 넘쳐 보여도 결국에는 깊은 실망감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하나님께 여쭈고 싶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시지 않느냐고요. 대담하게 ‘응답’을 떠들고 다닐 때에, 조금 유치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의 손으로 나타나 주시면 그들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믿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저의 경험과 묵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목사로서 늘 주의를 환기시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응답은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응답은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응답에 대하여 깐깐하게(?) 구시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잦은 기분 변화에 술렁거리고, 말이 많은 사람은 일단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말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도 잘하지요. 그리고 그런 방식의 신앙생활은 한 번의 응답(해결)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응답(변화)으로 나아갈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말씀들 하시지요. 틀렸습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야곱의 씨름입니다. 내 욕구(해결)와 하나님의 응답(은혜) 사이의 줄다리기이지요. 그 과정을 지나, 우리의 환도뼈가 부러진 이후에야 우리는 다리를 절며 응답의 저편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옆집 아저씨에게 만원쯤 꾸어 오는 것처럼 간단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건 나를 죽이고, 다시 새롭게 살리는 심각한 과정입니다. 그 자리에 앉도록 온갖 미끼를 던지기도 하지만, 기도를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깊은 영적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오래 기도하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같은 말로 시간만 보내는 것은, 중언부언 하는 기도이고, 예수님께서 이미 금지하신 기도의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철저하게 나의 현실, 나의 실체와 마주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나의 환도뼈가 부러져야 합니다. 그게 뭔지는 저보다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아니, 아셔야만 합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축해 주십니다. 진정한 응답이 영혼에 임하는 순간이지요. 말할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로 표현을 한다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응답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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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0 목양칼럼 :: 우리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요즘 다시 주목을 받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책들이 무수히 저작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꾸준히 고전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역시나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해 아래 새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 같습니다.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열망하는 내용으로 저작된 <군주론>은 아직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조국, 이태리를 위해 저작된 책입니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 등은 이미 강력한 국왕의 등장으로 나라가 통일되어 강력한 국가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태리는 중세적인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외교관으로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조국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군주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고 사용하는 비정한 리더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안에는 피폐한 이태리 민중을 구해줄 영웅을 갈망하는 기다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의 생각이 옳은 것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회의를 남깁니다. 영웅의 탄생이 비탄에 빠진 대중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외세의 침략보다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 차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람은 '왕'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의 왕은 절대적인 부패를 낳기 마련이고, 부패한 권력은 그 권력의 크기 만큼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분담하여 아무도 왕이 되지 못하게 만든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인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날에, 세상의 모든 정치는 마땅히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할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은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맙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미 왕이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충성이 먼저이고, 그 나머지는 다음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며 살아가는 삶의 질서를 항상 마음에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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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3 목양칼럼 :: 교회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중세시대 유럽은 이미 종교적 기득권을 독차지하는 로얄 계층이 등장 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귀족’인 이들은, 교회의 권력과 엄청난 재산을 상속해 갔습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교회는 사제들의 독신제도를 강화하게 됩니다. 사제들이 본래의 계율을 지켜 독신으로 일생을 마치면 일어날 수 없는 타락에 당황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은 참담합니다. 아무리 탁월하고 합리적인 제도도 인간의 탐욕을 가두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교회의 권징은 하급사제들에 국한되고, 역시나 대부분의 ‘교회귀족’들은 음흉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들의 왕국을 계속해 갔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국왕 프랑수와 1세와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담합으로 주교와 수도원장 같은 고위층 사제들의 임명권을 왕이 가지게 됩니다. 그 결과 국왕에게 줄서기를 하는 사제들이 교회의 고위직에 오르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뇌물을 바친 만큼 최선을 다해(?) 교회를 노략질 했습니다. 또한 그 노략질한 재물과 권력을 자신들의 숨겨진 피붙이들에게 대물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락의 패턴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재산을 탐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 자손에게 넘겨서 영원히 소유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탐욕과 함께 방탕과 거짓, 음모, 술수가 미친 굿판을 벌이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를 개탄하는 것은 신앙과 양식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타락이 해일처럼 밀려와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했던 적이 과거에도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통과하고 여전히 빛나는 십자가가 우리 앞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하는 바는, 이 참담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교묘한 술수와 탐욕이 오히려 다윗 앞의 골리앗처럼 쓰러지고, 연약해 보였던 교회의 신앙이 시대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비록 주어진 현실이 참담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잠시 필요해서 허락하시는 것일 뿐, 영원한 패배가 아닙니다.

교회는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진흙탕에 함께 뒹굴며 망가지기 보다는, 여러분의 근간이 되는 신앙을 붙들고 승부하십시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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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6 목양칼럼 :: 위험한 영적 비만


사람은 아주 적게 먹고도 살고, 아주 많이 먹고도 삽니다. 

음식을 지나치게 적게 먹을 경우에는 영양실조가 나타나고, 또한 지나치게 많이 먹을 경우에는 비만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양편은 모두 건강에 해로우며, 극단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가장 좋은 생활은, 먹은 음식을 적당한 운동으로 잘 소비하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운동 하는 것의 균형을 찾는 일이 곧 건강의 비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는 ‘본능적 건강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몸이 살 길을 스스로 찾는다는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 의학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몸이 가르쳐 주는 신호대로  잘 좇아가면 병을 고치고 회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식욕은 이 본능적 건강성이 잘 작동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먹는 것이 단지 몸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바로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식욕이 음식에 대한 욕망을 지나 음식에 대한 탐욕이 될 때에 몸은 먹는 기능을 통해 망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건강하게 하는 비결은,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으면 신앙은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이 위태하고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양편(input & output)을 잘 살피고 균형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탈이 나고 부작용을 만들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듣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행하는 것에서 부실하여 영적인 비만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평가하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얼마나 부실하게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잘 반성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설교에 대한 욕망은 넘치는 반면에, 정작 그 설교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는 길이 아닙니다. 건강할 수 없는 양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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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9 목양칼럼 :: 그리스도인의 관점


바울은 세 번째 단계의 하늘에 올랐던 경험을 간접화법을 통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영적인 신비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저편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뜬금 없는 말이 될지 모르지만, 저는 이번 여행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출국을 하던 지난 16일은 일본에 태풍이 상륙하던 날이었습니다. 일찍 도착한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취소되었고, 사람들은 비바람이 불어대는 창을 보면서 공항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누웠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비행기는 취소되지 않고 오후 4시 반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일생 처음으로 공항에서 6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안부를 전하는 전화를 하고 책을 보며 지루한 시간을 견디었습니다.

드디어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작은 비행기였기 때문에 과연 태풍을 뚫고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륙과 상승의 과정에서 동체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비행기는 캄캄한 구름을 뚫고 위로 위로 올라가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둡던 구름의 색깔이 점점 하얗게 변하더니, 드디어 비행기는 구름 위의 하늘로 솟아 올랐고, 마치 구름의 바다 위를 항해 하는 배와 같이 멋진 장면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불안이 금새 감탄으로 변했습니다. 태풍이 만들어 놓은 흔적은 마치 구름을 붓으로 휘저어 놓은 것 같아서, 더욱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둡고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아래에서 보는 관점이 아닐까 하는. 그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시간도 훨씬 아름답고 멋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찬찬히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것이 어느 시대입니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광야를 지나던 시절입니다. 그 고단했던 행진의 삶에서 세상적인 환경은 지난(至難)했지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계셨고 그들과 직접 소통하셨습니다. 

같은 구름이 아래에서는 캄캄하게 보이고, 위에서는 햇빛을 머금은 찬란한 구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양편 중에서 어느 것을 보고 사느냐가 인생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는 현실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뚫고 솟아 오르는 저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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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큰 아들과 같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올린 것이라 더 관심이 갔습니다. 드디어 이번에 아버지의 선물로 아이폰5를 가지게 되었다고, 사진과 함께 자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아이폰에는 테두리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2014년도 서울대 신입생 OOO’ 


아마도 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꼭 들어가라고 그렇게 글자를 새겨서 아들에게 선물을 한 것 같았습니다. 좋기도 하겠지만, 부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꼭 가거라.”


우리가 흔히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나도 우리 아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소망보다 탐욕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학생에게 합당한 덕담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히 공부하는 것의 목표가 ‘대학’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듭니다. 좋은 대학과 덜 좋은 대학, 혹은 나쁜 대학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말하는 것도 복잡하겠지만, 무엇보다 대학에 꼭 가야 한다는 강요가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걱정이 됩니다.


한 동안 생각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에, 나는 아이 보다 아이에 대한 나의 태도와 마음, 소망에 대하여 더 많이 기도 합니다. 내가 바른 생각과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곁에 있어주는 부모로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름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서 큰 아들에게 공부하라는 당부와 함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스스로 실망하거나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지 꼭 일류 대학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마음에 소망이 심어지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그런 꿈이 나타나기를 기도 한단다...... 아빠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는 말아라. 오늘 주어진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오늘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기 탓이란다.”


소망은 사랑을 말리지 않습니다. 아이를 향한 소망이 강요와 간섭이 된다면,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 확인하는 바와 같이, 사람의 욕심은 때때로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더 큰 불행을 낳습니다. 소망이나 사랑과 같은 이름으로 포장된 욕심이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난 욕심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말을 자녀에게 하기 전에, 그 말이 과연 소망인지 욕심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 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살펴가는 동안, 우리는 자녀가 우리를 되비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나를 아름답게 바꾸어야 비로소 거울 안의 자녀도 아름답게 변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지극한 그 사랑이 자녀의 소망에 물을 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은 더 많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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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좋고 나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성품을 들어 마치 최고의 미덕(美德)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은 편협한 관점일 때가 많습니다. 성품이 인격 속에서 조화로울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조화가 깨뜨려지면 어떤 것이든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조화로운 인격 안에서 '소망'이 됩니다. 그러나 절제를 벗어나 지나치게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탐심'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둘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탐심은 파괴적인 소망입니다. 그것 하나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가나안의 풍속 가운데, 어린 아이를 불에 바쳐서 풍요를 빌었던 것과 같은 일이 '소원'을 이유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져버리고, 가족을 희생하고, 심지어 자기를 망치면서도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이것을 '소망'이라고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소망이 아니라 '탐심'입니다.


탐심은 절제를 모릅니다. 절제의 간섭을 허용한다면 당연히 탐심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열렬하게 타오르고, 이성적인 비판을 회피합니다. 

사람들은 예배당을 짓는 일에,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선교에, 구제에, 애국에, 봉사에 '탐심'이 끼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당연히 그 거룩한 이름들 속에는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의외로 인간의 일은 대부분 탐심에 지배를 받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단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며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이성을 사용하여 신앙과 성품을 늘 순화(純化)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도 눈 먼 장님과 같아서 소망과 탐심이 헷갈리고, 조화롭지 못한 성품의 부조화를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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