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는 인사도 말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다른 잘못에 대하여는 관대한 사람들조차 '이단(異端)'이라는 말에는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봅니다. 일부러라도 단호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와 같은 교훈을 교우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이서 10~11
(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아마도 이 성경구절이 이단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용기를 더하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성경구절을 강력하게 실행하도록 강단에서 목사가 자주 설교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와 이단
사도요한의 편지는 A.D.80~9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하지만, 90년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시기에 교회는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증거하신 것은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 복음을 증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유대교 안의 변혁적인 움직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실체가 드러났고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율법'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유대교와 결별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유대교가 기독교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유구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탈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한 것, 부흥시킨 것이 기독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회당은 초대교회에 있어 분명 선교의 장이었습니다. 유대교의 모순과 결핍을 깊이 이해한 전도자들이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뛰어든 전투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증거한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하고 위험을 겪었는지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필연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소위 '이단'의 발현입니다.
제가 필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단을 교회가 조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이미 강력한 종교적 공동체였던 당시의 회당과 이방종교의 아성을 선교했고, 그들을 대거 신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고된 성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자기가 가졌던 기존의 선입관을 지독하게 바꾸지 못합니다. 때문에 유대인 교우들은 ‘율법’에 집착했고 이방인 교우들은 ‘성적 방종’에 집착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나타난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었고 실제로 이단을 발현하게 만든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다고 모두 거듭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교회는 수구적인 성격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이단에 방어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서신이 기록되는 주후 90년경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단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가 이미 교회 안에서 마무리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단이 무엇이며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교회 내부적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단
이단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명칭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 명칭에서도 중요한 의도가 읽혀집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라는 뜻으로 영지주의(그노시스)와 같이 이방적인 가르침을 교회 안에 가져와 복음을 변질되게 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으로부터 그 전례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하거나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유대적 전통, 율법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명칭입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자신만 파선할 뿐이 아니라, 주변에 파당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함께 파선하게 하는 위험적 요소입니다. 때문에 이들에 대하여 선을 긋고 교회의 건강한 교리와 교우들의 신앙을 보호할 필요가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앞에서와 같은 강력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적 대처에 앞서서, 먼저 이단에 대한 많은 논의와 검토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변질된 복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단호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그처럼 간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을 연대적으로 나열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후대의 서신에 이르기 이전에는 정죄보다 교훈, 책망, 권면 등의 방법이 선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교회가 단합하고 포용하기 위하여 관용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상반되는 태도가 모두 강조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사수하려는 의지와 그릇된 사람들을 교정하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의지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지의 결과에서, 교회는 진리를 우선하게 됩니다. 즉, “좋은 게 좋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입장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러나 죄인의 죄조차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은혜를 주시지만, 의와 불의를 단호하게 가르는 ‘심판’은 필연적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그릇된 신앙, 이단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극히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계속되는 이단 시비를 겪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적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아주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교회 안에서도 입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평안이 없는데 교회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신자들이 줄어가는 상황에서 ‘이단’이라는 경고의 신호가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도전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가진 복음을 확인하고 무엇이 위험한 신앙인가에 대하여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이단을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적인(혹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단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왔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에 ‘많은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신앙을 정죄하는 일은 권장될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자제되어야 하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단의 문제 앞에서 이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무엇이 바른 복음과 그에 따르는 신앙인가를 검증하는 일에 더욱 치중하였습니다.
바른 복음을 변증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한 것의 이면에는, 잘못된 신앙을 따랐던 사람들이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타는 사랑과 복음이 진리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복음이 그 어떤 변질된 복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복음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이 교회 안에 있어 왔기에 인내와 관용의 태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가짜가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것을 알고 나면, 모든 가짜는 자연스럽게 확실해진다.”
교회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영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회에게 언제나 구원의 대상이며, 긍휼의 대상입니다. 비록, 이단에 넘어가 교회에 위해(爲害)를 가하고 싸움을 거는 사람이라도, 교회의 한결같은 근간은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 있습니다. 이 근간을 망각하고 ‘사람’ 자체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 과연 바른 신앙의 태도일까요?
이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없었던 시절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현실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영적 전투의 한 실제가 바로 ‘이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사나운 불화살 앞에서 우리는 두꺼운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담대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때문에 이단을 끊어 멸절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단의 물건을 불매운동 한다든지, 혹은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여는 가계를 교회에서 공지하여 교우들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든지, 혹은 사회적으로 소송을 거는 일은 그 실효성이 의심됩니다.
대표적으로 통일교의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해 왔지만, 하나도 망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권에 민감한 시기에 개인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공격은 오히려 부작용만 낳습니다. 그가 이단이든지, 아니든지 이런 방법은 결코 교회다운 선택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애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교회는 이 즈음에서, 교회의 위대한 유산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싸움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과거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이 싸움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왔고 또한 승리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은 발호했다가 사라졌지만, 교회는 건전하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의 생명력에 대한 확신, 진리를 수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깊이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단의 공격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질입니다. 우리가 과연 얼마나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가? 얼마나 교회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단들과 교회를 차별성이 있게 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교회다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단의 득세(得勢)를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다수결과 황금에 의하여 지배 당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보다 강력한 손이 있어서,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믿는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잠시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려움과 핍박에 처하게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교회를 망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이미 지난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까!
정치가들은 ‘위기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 정치에는 ‘위기’가 단골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사건을 조작하고 소문을 퍼뜨려서라도 선거에 앞서 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위기야말로 내적인 갈등을 덮고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불필요한 전쟁이 수없이 수행되어 왔습니다. 목적도 없는 전쟁의 실제적인 원인은, 탐욕과 권력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몇몇 지도자의 선동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시대를 피폐하게 하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의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무너지는 교회의 이면이 이단입니다. 교회가 단단하게 결속하고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이단은 지금처럼 힘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타깝게도 진리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유행처럼 변질되고, 교회는 세미나와 학습기관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복음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목사들부터 외치는 바와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회는 이단의 발호조차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검열을 통해 복음의 진리성을 회복하고, 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신자들을 열성으로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선동하고 공격하고 소송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에만 급급해 있다고 보입니다.
원수가 나의 거울이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에는 언제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움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니이체가 말한 바와 같이, 심연을 오래 바라보면 그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미워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미움의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원수’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나로부터 끊어내기 위해서는 미움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단에 대한 불타오르는 증오를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그 조직력, 금전에 대한 탐욕, 사회적인 세력의 과시, 정치적인 세력화, 사람들의 자유를 겁박하거나 조종하는 행태는 모두 ‘교회’의 그늘이 아닙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교회가 분노하고 미워하는 그 양태를, 우리가 이미 해온 것이 아닙니까? 모양은 같은데, 다만 정식 신학교를 나오고 건전한 교단에 속한 사람이 행한다고 하여서 어떤 것은 우리가 변호하고, 어떤 것은 우리가 극렬하게 미워한다면 과연 우리는 정의로운 것일까요?
교회가 정작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단은 고려의 대상이고,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정작 ‘진리의 보존’과 우리 자신의 변질을 두려워하는 ‘영적 싸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내가 괴물이 되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타자로 보여지는 괴물을 통해 우리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다워야 한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본래 ‘다른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통시적으로는 주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시작은 비슷하지만 그 결론이 달라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이단의 세상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세상이 큰 틀에서는 모두 이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를 믿고 투쟁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의 방법으로 수행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단을 부끄럽게 해야 하며, 인격적으로 압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통하여 차별화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맨 처음에서 사도요한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 ‘인사’조차도 금하라고 교훈한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첫째, ‘너희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부적으로 반드시 분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마치 타락한 목사를 방치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사’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간단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제한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형제와 가족의 의미로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릇된 교훈을 교회에 퍼뜨리는 사람과 형제의 교제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서로 통하지가 않으니까요…
요한의 서신은 세 개가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첫 번째 서신에서 형제의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강력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구절만이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의 서신에 나타나는 교훈은, 단절이 아니라 극복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교훈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일서 3:17~18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아픈 교훈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떠난 부분을 선명하게 지적하며,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 말입니다. 이런 교훈이 교회 안에 살아날 때에, 비로소 교회는 암담한 현실을 돌파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공격성이 아니라, 회개와 사랑의 위대한 능력 말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피상의 저편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천국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곳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이며, 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체감할 수 없는, 말하자면 산 자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며,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 나라는 내가 성령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에 누리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람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후보입니다.
땅속에서 금을 캐내는 사람들조차 순수한 황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돌과 섞인 금광석을 얻어 그것을 도가니에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금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각양 사연을 거쳐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타락하고, 그릇된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서 사람을 버리는 것은, 마치 금광석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도 유대교에 특심한 사람이었고,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빠져서 어머니도 몰라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부어져 마침내 그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불타는 인생을 살게 하였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런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불가능하겠습니까?
소망의 확신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 관계를 끊고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교회도 역사 속에서 모두 사찰이 되어 산이나 광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에 목마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마치 외과의사가 암을 도려내는 수술에서 깊이 고뇌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싸움을 싸우지만, 악한 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교회는 마지막까지 교회답게 싸워야 하고, 죽더라도 그렇게 죽어야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악한 자의 방법을 차용하는 순간, 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자는 이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의 정의는 우리들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안절부절 하고 불안에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은 부정적인 그림을 자꾸 주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강력하고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세상에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의 환상과 같이, 성전의 문지방에서 터져 나온 샘물이 강이 되어 온통 광야를 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전할 것입니다. 결코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복음 안에, 성령 안에, 믿음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할수록 교회는 강력해지고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시대의 어둠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어둠은 단지 우리가 가진 빛을 더 멀리, 더 밝게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이해 속에서 우리는 소망을 더욱 크게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대형교회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사회적인 평가도 아니고, 여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들리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바를 확신하고 그 성경대로 나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하면 사회는 언제든지 변혁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나 자신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마음에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