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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국내도서>소설
저자 :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 강명순역
출판 : 열린책들 200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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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도 프랑스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쥐스킨트는 독일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 점이 놀라웠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지었을 때, 독일어의 특성상 나올 수 없는 문학작품이 나왔다는 평론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 작가로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무식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독일 작가의 훌륭한 작품이 드문 것이 사실이다.
쥐스킨트의 이 책은 놀랍다. 치밀한 구성, 사실적 표현, 심리의 묘사, 발군의 상상력까지... 하나의 작품이 뛰어난 수작이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대부분의 것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더우기 그것을 자기만의 역사 속에서, 자기만의 인물을 통해 창조해내는 능력은 읽는 독자를 황홀하게 한다.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무척 오래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91년이라고 하니 당연하다. 아마도 2000년 정도에 한국어판이 나온 것 같다. 서재와 서점에서 흔히 눈에 띄면서도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다. 표지를 보면 추리수설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부제가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고 붙어 있다. 추리소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어서 늘 손이 다른 책에 먼저 갔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더스킨 호프만이 출연하는 영호고 개봉했다. 역시 이 영화조차 보지 못했다. 일상에 밀려 감상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책을 잡았다. 그것도 책이 없어서 컴퓨터 화면의 e-BOOK으로 읽었다. 하지만 흡인력이 발군이다. 눈을 옮길 수 없었고, 만 하루만에 다 읽어야 했다. 쥐스킨트의 글은 거의 파괴적이다. 정말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르누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이다. 감정적 동요가 전혀 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간단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괴물... 더구나 냄새에 대한 그의 특이한 기질은 그를 향수의 오타쿠로, 그리고 다시 마스터로 발전시켜 간다. 사람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양날의 칼과 같다. 좋은 사람의 능력은 아름답다. 그러나 나쁜 사람의 능력은 공포스럽다. 그르누이는 파리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난 곰팡이 같은 존재이다. 그가 더 열망하고 성취해 갈수록 누군가는 불행에 빠진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다소 억지스럽고, 야만스럽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쥐스킨트가 묘사하는 현실감에 푹 빠졌다가 이것이 픽션이며, 상상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찾아 볼 생각이다. 그리고 책도 새로 구입했다. 가끔 이 매력적인 책을 꺼내서 다시 읽으며 냄새에 취할 것이다. 점점 전자책을 중심으로 세상이 변해 가겠지만, 아직은 종이냄새와 잉크 냄새가 나는 책이 나는 좋다. 그래도 책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내가 읽었던 그르누이의 음험한 눈빛이 어느 그늘에선가 지켜보며 슬그머니 웃어줄 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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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소설
저자 : 히라노 게이치로 / 양윤옥역
출판 : 문학동네 199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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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이 독자를 빨아들인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전형적이라는 느낌이다. 번역된 책이라 그런지 고급 무협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구성과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이를테면 문학적인 내공을 읽을 수는 없다.
유럽의 작가들은 글에서 자유로움과 상상력의 힘이 느껴지고, 한국의 작가들에게서는 현실감과 감성이 여운을 남긴다.
일본의 작가들은 조밀함과 조금은 우울함, 내성적인 감성이 나름 그 특성이라고 읽는다.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마치 하나의 애니메이션이나, 기묘한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의 내용은 되도록 배제한다. 읽을 사람을 위한 배려라고 할까...

그래도 일단 손에 잡으면 단숨에 읽혀지는 흡인력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가볍다고 해야할까... 뭔가를 깊이 생각하며 음미해야 하기 보다는 그저 빨리 결말에 이르고 싶은 이야기... 그러나 막상 결말을 만나면 허전한 이야기... 그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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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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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주(古今注; 진(晉)나라 최표)에,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백수광부;白首狂夫)이 머리를 풀고 술병을 든 채 어지럽게 물을 건너려 하고, 아내는 뒤따라가며 말렸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 물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에 그 아내는 공후를 뜯으면서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너무나 애절했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도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麗玉)에게 그가 본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여옥이 슬퍼하며 공후(箜篌)를 안고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사람이 모두 슬퍼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가르쳐 주고 널리 퍼지게 하였으니, 이를 일컬어 ‘공후인’이라 하였다.

-해동역사-

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공경도하)    임이 그래도 물을 건너시다,
墮河而死 (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당내공하)    앞으로 임을 어이할거나.

공무도하가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서정시이다. 아마도 고조선 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수광부(白首狂夫)가 강을 향해 달려간다. 그의 아내는 물가에서 그 장면을 보며 구슬프게 만류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남편은 곧 물결에 휘말려 사라진다. 그리고, 아내의 노래는 강변에서 애처로운 통곡이 된다... 그리고 아내도 강에 뛰어들어 하나가 된다.
단조로운 것조차 오랜 세월은 상상과 창작의 동기를 이룬다. 백수광부는 왜 강의 건너편으로 가려고 했을까? 머리가 희도록 나이를 먹은 그에게 안전한 이편이 아니라, 위험한 저편의 무엇이 그리도 절실했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문정수라는 사회부 신문기자이다. 소설가 김훈이 젊은 시절을 신문기자로 살았기 때문에, 더없이 작가 자신을 잘 투영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고향처럼, 어머니처럼 그를 품어주는 노목희라는 여인이 있다. 이 둘이 결국에는 공무도하의 남편과 아내의 구도를 이룬다. 
그리고 소설의 시작부터 이어지는 물난리, 폭우 속의 사건들과 갯벌을 간척하여 육지를 만들면서 하나의 어촌이 분해되고, 진화하는 것으로 묘사된 고향, 해망은 모두 물의 이미지로 본래의 시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지금을 묘사한다. 소설의 모든 사건들은 허구이면서도 현실이다. 그런데 묘하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던지는 언어들이 너무도 높고 깊다. 특별히 지적으로 묘사된 누구만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인물들이 진중하게 입을 열고 닫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말이 결국 작가의 말이고, 작가의 말은 백수광부의 말이다.
공무도하가의 강 건너편이 피상의 세계라면, 어쩌면 작가는 소설을 통해 너무도 현실적이지만 그곳에서 치열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창작함으로써 바로 그 피상의 세계를 그려내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작가 김훈이 그리는 피상의 세계는 완전한 무균실의 세계가 아니라, 무좀이 꾸물거리고, 발냄새와 몸냄새가 세상의 냄새와 섞이는 곳이며, 그 고통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아내는 곳이다.
언어가 조밀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감에 치여 결말은 조금 허전하다. 글을 읽고나니 어떤 느낌이 향기처럼 오래 남았다. 

소설가 또한 사람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보는 세상을 향한 시선도 변해간다. 이 소설은 그래서 미완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문학이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강 건너의 무엇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신문기사와 다를 바가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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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로맹 가리(Romain Gary) / 이주희역
출판 : 문학동네 201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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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가리의 책은 처음인것 같다. 세상은 넓고 책은 많은가?

책의 제목은 '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주인공의 애완동물인 비단뱀이다. 이미터 이십센티짜리 이 뱀을 주인공은 아프리카여행에서 데려왔다. 이 뱀은 주인공이 맺어지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고리이며, 동시에 파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외로운 이들을 만족할 만큼 끌어안아 줄 수 있는 상징적 존재이다. 주인공의 심리는 병적일 정도로 고독하며, 그의 관점은 산만하면서도 독특하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작가는 그 산만함을 비단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뱀이 그리는 흔적처럼 뱀의 이야기는 지그재그여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쿠쟁은 소심하며, 비겁하고, 그러면서도 열렬하다. 그가 존중하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여 사용하는 '창녀'라는 단어가 마침내 그의 '사랑'과 일치되는 것은 이 산만한 이야기가 그려내는 가장 그로칼랭다운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지독했다. 책장과 책장, 심지어 말의 장난들 속에서도 외로움은 풍겨났다. 책을 빨리 읽어내고 덮고 싶을 만큼...
가뜩이나 외로움을 느끼던 때에 왜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느새 그 지독한 외로움이 위안이 되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었을까... 쿠쟁의 외로움을 읽으며 그래도 나는 이 동경의 대도시 속에서 덜 외로운 쪽에 서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경험이었다...
책을 덮고 저자에 대하여 살피니, 로맹가리는 파리에서 권총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멈칫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절된 세상의 외로움이 주는 고통에 의한 타살... 비단뱀이라도 목에 칭칭 감고 잠들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허전함의 통증...
책 속에서 주인공 쿠쟁은 사람들로부터 '그로칼랭'이라고 불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그로칼랭(비단뱀)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김춘수의 시처럼,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우리는 결국 그것의 존재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결국 진짜 내가 누군인지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내가 나에 대하여 가지는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산 비단뱀에게 처음부터 이름이 있었을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로칼랭'은 비단뱀의 이름이며 동시에 쿠쟁의 이름이다.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이름 말이다. 대도시 파리, 천만 명의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에 떨었던 쿠쟁은 결국 '열렬한 포옹'을 갈망했고, 아무리 소심하고 나약해도 결코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한 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쟁은 결국 작가 로맹가리의 그림자이다... 

이 책이 나처럼 당신에게도 외로움의 탈출구, 혹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혹은 로맹가리의 마지막처럼 권총이라도 자기 머리에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가져올지도 역시 모르겠다. 이 책은 외로움처럼 허전하다. 그러나 가끔은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불량식품을 먹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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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목양칼럼


남의 떡은 거대하다. 단순히 '크다'는 단어를 바꾸어 '거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떡의 크기에 대한 재고(再考)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실로 이 막무가내의 몬스터(monster)가 한 마리씩 도사리고 있다.

기회를 보아서 우리 마음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몬스터의 존재는 누구나 버겁고 껄끄러운 현실이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 괴물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마치 자기의 마음에는 전혀 괴물이 살지 않는 것처럼, 남의 '욕망'에 대하여만 비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욕망은 위험하다. 욕망에게 '비전'이니 '긍정'이니 하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준다고 하여서 안전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사나운 불독에게 우스꽝스러운 애완견의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하여서 성격이 온순해지거나 이빨이 덜 날카롭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 '마흔'의 해가 걸린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것은,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내 또래와 혹은 연배가 더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자기 마음의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놈을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하여서 이 괴물을 다루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은 사소하게 보고 상대적으로 남의 것은 크게 보게 만든다. 욕망은 꽃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꺾어야 직성이 풀린다. 욕망은 간절함을 주지만, 그와 함께 시기의 마음도 준다. 욕망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도 마치 모든 것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을 끓어오르게 한다. 욕망은 책임감이 없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한다. 욕망은 자기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밖에 있다고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욕망 안에서는 결코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욕망은 먹어도 배가 고프며 얻어도 가난하고 입어도 추우며 올라가도 비천하다. 욕망은 아귀(餓鬼)와 같아서 언제나 허허롭다.

욕망은 의식보다 무의식을 좋아한다. 때문에 의식을 거치지 않는 습성(習性)은 욕망이 활약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자기 마음을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욕망은 작아지지만, 바쁘고 산만하며 즉흥적인 사람에게서 욕망은 태산(泰山)처럼 압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욕망 앞에서 두 가지로 갈린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께 주권을 온전히 위임하는 기도는 욕망을 죽이지만, 십자가 없는 기도는 욕망의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오히려 욕망이 강성해지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지는 신자들이 생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를 거듭하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鬪爭)이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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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8 목양칼럼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담장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투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9회말의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경기는 맥없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전광판의 숫자는3:0이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난 8회의 이닝 동안 상대팀은 단 하나의 안타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투수는 완봉승을 노리고 있었다.

절묘하게도 마침 타순은 3번부터 시작되었다. 타자는 투수의 첫 공을 노렸다. 투수 옆을 스치는 직선의 타구가 원 바운드로 날아갔다. 잘 하면 빠질 수도 있는 공이었지만 유격수는 노련했다. 몸을 날려 그 공을 잡은 것도 모자라 거의 동시에 역동작으로 1루에 송구했고, 공은 정확하게 첫 타자를 아웃 시켰다. 투수의 눈이 승리의 확신으로 빛났다.

감독은 4번 타자를 거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라는 싸인을 냈고, 배터리는 캐치볼처럼 4개의 볼을 주고 받으며 감독의 명령을 수행했다. 불안감은 전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타자가 들어섰다. 그는 5번이지만 오늘은 그의 방망이가 볼에 스치지도 못했다. 투수는 자신감이 넘쳤고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마저 감돌았다. 역시나 2개의 연속 스트라이크가 들어왔다. 타자는 타석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바튼 기침을 했다. 영리한 투수는 바깥으로 깊게 빠지는 유인구를 던졌다. 어이 없게도 타자의 손이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끌려나갔다. 타자는 속았다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눈 감은 방망이에 볼이 걸렸다. 어설프게 맞은 공은 내야에서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켰다. 내야수들이 재빠르게 공을 처리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가 되고 말았다.

6번 타자가 들어섰다.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까? 운동장은 숨죽여 타자와 투수에게 집중했다. 투수는 주의 깊게 공을 던졌고 타자 역시 몇 개의 볼을 파울로 커트하며 투수와 겨루었다. 어느새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이제 승부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투수는 최대한으로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했다. 타자가 움찔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심판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포볼이었다. 타자가 1루로 걸어가는 동안 투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응시했다.

화가 났던 것일까? 투수는 7번 타자를 강속구로 몰아 부쳤다. 4개의 공이 지나도록 방망이를 흔들지 못하던 타자는 5번째 공을 향해 힘껏 스윙을 했다. 그러나 공은 높이 내야 위로 뜨고 말았다. 3루수가 약간 자리를 움직여 공을 잡았다. 마침내 9회말 투 아웃이 된 것이다.

감독은 이상하게도 대타를 세우지 않았다. 8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오늘 경기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10여 경기에서 전혀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5번이었던 그의 타석이 8번까지 밀린 것은, 부진에 부진을 거듭한 결과였다. 관중은 야유했다. 투수와 포수 역시 가벼운 웃음을 교환하며 빨리 경기를 끝내자는 모종의 싸인을 주고 받았다.

투수는 처음부터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낙차가 크면서도 빠른 스플리터(Splitter)였다. 공은 살아있는 뱀처럼 파고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타자의 허리가 부드럽게 돌았다. 팔과 다리의 근육들이 힘줄을 돋으며 제대로 힘을 실어낸 한 방이었다. 공은 직선으로 정확하게 운동장의 한 가운데를 뻗어나가 전광판의 상단을 때렸다. 홈런이었다… 9회말 투 아웃, 그리고 그 시즌에 가장 부진했던 선수의 팔에서 나온, 역전의 홈런이 운동장을 뒤집어 버렸다…

야구는 바로 이런 맛으로 즐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9회말 투 아웃,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언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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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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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4 목양칼럼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주 아프셨다.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며 그 머리에 젖은 물수건을 갈아드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철부지 간호가 아마도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풍파를 견디게 하는 큰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결혼 한 이후로 줄곧, 아내는 좌골신경통에 시달렸다. 오른편과 달리 왼편의 몸이 늘 저리고, 쑤시고, 결리고, 아파했다. 그 아픈 부위를 두드리고 주무르며 십구 년을 살았다.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이 나의 운명일까? 그러고보니 내게는 항상 아픈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왔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와 격려로 희망을 주면서 정작 내게 있는 아픔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런 일이 좋지만은 않다. 궁시렁거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대단히 소모적인 일이다.

때로는 나도 정서적으로 바닥이 날 때가 있고 내 몸이 아플 때도 있으니 불평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즘 내 몸이 아프다. 어깨, 특히 오른 쪽 어깨가 심하게 근육이 뭉치면서 묵직한 느낌과 두통, 어깨 결림, 팔의 저림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때에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이 거슬려서 잠을 설치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무르는 사람이 주무름을 당하는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을. 주무르는 사람도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겠지만, 정작 아픈 사람은 낮도 밤도 편할 날이 없더라. 그래서 병(病)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나.

남의 하소연을 귀찮아 하지 말아라. 고통하는 사람을 위해 손을 내어주는 것을 힘들다고 하지 말아라. 오죽하면 그러겠냐? 오죽하면 말이라도 그렇게 실컷 하려고 하고, 손이라도 그렇게 빌려달라 청하겠냐...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병을 간혹 본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너무 건강해도 오히려 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삶에 도무지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을 때에 사람은 오히려 고립되는 경우가 많더라.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통로를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 갇혀서 남이 아프다고 울 때에, "왜 아픈데? 어디가 아픈데? 아프면 약 먹어!" 같은 쓸모 없는 말만 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약함이 곧 강함이라.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자'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르치신다. 고통은 겸손함을 배우는 기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고통을 통해 내 안의 이기적인 담이 허물어지고 비로소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게 되며,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픔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의 자아가 문제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를 불평만 하다가 날려버리는 미련함이 우리를 정말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만나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흔한 신유의 은사가 왜 신앙의 거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왜 바울 같은 사람은 평생을 육체의 가시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냥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주신 은혜니까. 우리도 그걸 깨닫고 살았으면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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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20:34

2012-06-17 목양칼럼

 

개그콘서트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코너가 있다. 일상 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언어를 날카롭게 꼬집어서 사람들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코미디이다. 당장에는 웃지만 뒷맛이 씁쓸한 내용이 많다. 일종의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진실이 왜 불편해야 할까? 그것은 거짓이 그만큼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을 꼬집지 않는 동안 거짓은 일상에 집을 지었고, 반대로 진실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코미디언의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담담한 멘트가 우리를 뒤집어지게 한다.

교회를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는 이미 진리를 부담스러워 한다. 진리가 주는 건전한 자극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저 잘했다는 칭찬과 잘 될 것이라는 격려만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성령의 음성? 그 딴 거는 부흥 못하는 지하실 교회나 신비적인 이단에게 주어 버리고, 민주적인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부담 없이 듣고 호응할 수 있는 긍정의 설교, 기쁨의 설교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많이 웃기는 강사가 인기가 많다. 정말 블랙코미디다.

신자들부터가 세뇌 당했다. '부흥'이라는 이상한 흥행주의가 사람들의 가슴 깊이 스며서 항상 죄의식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일 년에 전도 한 명 못하는 신자는 사람도 아니라는 죄의식, 형편이 어려워 십일조를 못 내면 도둑놈이라는 죄의식,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자기 교회에서 자기 목사와만 지켜야 제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죄의식... 그 울타리 안에 갇혀서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한 마디로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편안해진 것이다. 자기들이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고, 반대로 그렇게 살기 때문에 스스로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자만을 키우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다. 진리의 확신으로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에 속한 것으로 안도한다.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그들에게는 성공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고난은 저주이고 황금은 곧 축복이다.

기독교의 근간이 이루어진 곳은 카타콤이다. 그 시절에 성경의 사본이 필사되고 교회와 예배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우연일까? 그럴리 없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의 장소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요람으로 카타콤을 선택하신 것이다.

아무리 불량한 복음이 판을 쳐도 어쩔 수 없다. 족보를 속일 수는 있어도 족보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 기독교는 성공과 야망의 종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이며, 핍박의 종교이다. 이것이 당신에게도 불편한 진실인가!

불편해도 들으라. 들어야 산다. 귀에 익숙한 말을 듣다가는 망하기 딱 좋은 시대이다. 진정으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아파도 듣고, 어려워도 듣고, 힘들어도 듣고, 불편해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살기 위해서 듣는 것이라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불편함 정도는 이겨낼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설교는 어려워서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불편해서 안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비지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몰라서가 아니라 싫은 것이다. 변명과 핑계로 초점을 흐리고,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은 것이다.

오늘 설교 시간에는 부디 이 자아와 치열하게 싸우기를 축복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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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0  목양칼럼

 

오늘날에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 만큼이나 비만에서 오는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정말 치명적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결심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천하는 사람은 적고, 정작 실천을 통해 얼마간 다이어트에 성공을 하더라도 방심하면 금새 '요요 현상'을 통하여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도 됩니다.

다이어트에 제일 좋은 방법은 절식과 운동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줄여야 합니다. 또한 운동을 해서 근육을 붙이고 대사량을 늘려야 합니다. 필요에 지나치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독(毒)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육을 무력하게 만드는 안락함 역시 평안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이며 나중에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삶은 성실함을 필요로 합니다. 운동과 절식의 습관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 당장은 어렵지만, 이를 통하여 더 건강하게 오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처한 영적 상황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면, 지금 시대에는 영혼에 해로운 복음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고 따르면 영적 건강이 위협을 받습니다. 달콤할수록 치명적이며, 안락할수록 영혼에는 해(害)가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스스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또한 편하고 안락한 자리만을 찾다가 영적으로 무력해지는 비만에 걸리는 사람들도 흔히 보게 됩니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에도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한 끼 식사로 일주일을 버티는 사람이 건강할 수 없는 것처럼, 썬데이 크리스천의 영적 건강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말로는 저항하면서도 비만에 빠져가는 많은 현대인들처럼, 영적인 무력감과 그릇된 신앙에 쉽게 넘어갑니다.

무엇이 원인인지 이미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만 먹자, 오늘만 쉬자... 내일부터 시작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타협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건강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불필요한 영양소들을 몸 밖으로 완벽하게 배출하는 소화시스템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의 의지와 책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창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다 보면 결국에는 스스로가 자기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적(敵)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내일부터 시작하라고 속삭이고, 성령은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음성을 따를 것인지는 각자의 결정이며, 그 결과 또한 각자가 달게 받아야 합니다.

부디,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고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영혼에서만이 건강한 삶이 열매 맺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영혼에 무관심한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항상 자기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 보고, 영혼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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