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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그리스도인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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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목양칼럼 ::
간디의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1895~1982)는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일으켰다.
1951년 포참팔리라는 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조그만 땅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비노바는 그들의 탄원서를 주정부에 제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한 부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땅 100에이커를 기꺼이 헌납했다. 이 사건이 비노바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노바는 그 때부터 인도의 전국을 돌며 지주들을 설득했다. 비노바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도둑질은 범죄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는 것은 도둑을 만들어내는 더 큰 도둑질입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존경까지 얻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에게 네 명의 가족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다섯 번째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소유한 땅의 1/5만 내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결국 비노바는 400만 에이커의 땅을 기증 받아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과 나누었고, 이 일은 서구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기독교가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이 '십일조'라는 연보에 성실히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약적 제사의 전통이 과연 신약의 연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느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더우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십일조의 비율은 강조되었으나 그 연보가 가지는 의미(목적)는 소홀히 여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나 되고, 그것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레위인의 삶을 보장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것에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신자는 많지 않다.
참담하게도 교회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이 같은 연보의 정신을 왜곡했다. 연보는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더이상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미덕인 것처럼 교훈되고, 신자들은 직분을 받으며 십일조의 의무는 맹세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가 가지는 공의와 자비의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
자크 엘룰이 말한 바와 같이, 뒤틀린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이방인만도 못한 유대인들을 열매로 낳았다. 이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 행실은 무익한 돌맹이 만도 못한 신자들이 양산되고, 때문에 교회는 더이상 이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 3:9, 개정)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생각해보자. 앞에서 꺼낸 비노바의 이야기를, 잠시 우리의 교회로 옮겨와서 함께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교회마다 전국을 돌며, 성경적인 십일조 운동, 곧 모든 신자들이 그 재산의 온전한 1/10을 하나님께 드려서 이 시대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구제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과연 얼마나 호응이 일어날까?
첫째,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의 순수함을 믿어줄 수 있을까? 목사들이 돈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둘째, 신자들은 과연 소득의 십일조가 아닌 재산의 십일조를 선듯 내놓을 수 있을까?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말이다. 셋째, 과연 그렇게 모아진 재화가 또 다른 조직과 이름과 욕심을 잉태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사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 돈에 관한한 근본적으로 신뢰가 이미 깨어졌고, 교회는 뒤틀렸다. 참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연보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연보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열렬한 호응과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원하여 드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연보를 거두는 방식보다 연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뜨고 성경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교회가 실현하려면, 결코 교회가 부유해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상식으로, 사회적 인격으로 말해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노바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도둑질은 나쁜 일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도둑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더 나쁜 일이 아닌가.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를 제한하는, 이같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세울 공의와 자기부인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고난주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나름 금식과 기도로 자기를 돌아본다. 경건한 글을 보고, 말을 조심하고, 십자가를 묵상한다.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앞으로만 달리고 돌아봄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색깔을 지켜가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 개인적인 경건의 밖에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도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맘몬이 전능한 신으로 군림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빵을, 옷을,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겠다. 이번 부활절에는 다만 예쁘게 색칠된 계란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나누어 지기를 바란다. 샬롬~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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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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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 안의 생명
성경 : 요한복음 15장1절~6절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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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4 목양칼럼 ::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은 역사상 오직 하나였다.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율법’의 심판 아래에서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은혜가 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행함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 의롭게 된다. 옷 입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뜻이다. 믿음이 곧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다. 세례가 바로 이 두 가지의 경험이다. 율법의 심판 아래서 죽는 것과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 안에 압축된 경험이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영원한 규범으로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찬과 세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식의 바탕은 바로 십자가이다.
성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라면 세례는 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세례를 통해 자기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진정한 십자가는 이 두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에 완성된다.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위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정확하게 알아야 할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를 이미 가진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다시 모아서 기본적인 교통규범을 재교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매해 돌아오는 사순절의 의미이다. 아니, 심지어 매일이라도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묵상되어야 마땅하다.
아직도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는가? 당신은 죄인이다. 부정하지 마라. 율법 아래 ‘죄인’이라는 굴레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가장 간단한 계명이라도 그것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모든 계명을 항상 지켜야 한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제 그만 받아들여라. 희망은 없다. 전혀. 조금 선한 것도 쓸모 없다. 무기징역을 받은 죄인에게 식당에서 줄을 잘 선다고 보석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나의 선함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자유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제는 가능성 없는 나를 버리고 예수를 바라보자.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찔림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다.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전혀. 이것은 완전한 구속이다.
조금은 맥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통해 뭔가를 치열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 따위는 없다. 우리는 이미 얻었고, 완성되었으며, 허락되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과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고, 십자가의 도가 공격 받을 것이며, 십자가는 점점 잊혀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싸움이다. 우리는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해방군의 싸움이다.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의 해방을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선포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니 넘어짐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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