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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5


조지 뮬러가 우리에게는 기도응답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를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의 기도가 우리와는 다른 그 어떤 탁월한 비결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더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의 삶이 바로 ‘고아들의 아버지’로 자기를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이었고, 또한 그 길을 걸으며 그만큼 절박했기에 그런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5만 번의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역설적으로 그가 5만 번이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직 기도의 힘으로 많은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도 있었습니다.

‘기금이 바닥났다. 예비로 남겨두었던 것들까지 모두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는 이 문제를 붙들고 동역자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후에, 갑자기 고아원을 방문한 한 여인이 많은 기부금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나흘 전에 이 근처에 도착하였지만, 먼저 여행을 조금 하다가 늦었다고 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다시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돈이 나흘 전부터 이미 고아원 근처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도우실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조지 뮬러는 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난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고난을 기도의 손으로 받으면 고난은 향기가 나고, 감사가 되며,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깊이 있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라는 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기도하지 않는 맨손으로 받을 때에는 절망이 되고, 불평이 나며, 사람을 그늘지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에는 ‘수렁’이라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어렵게 이어지는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원하시고 이미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도움은 단지 우리를 빵의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기도의 적절한 배합을 사용하십니다. 

응답의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면 먼저 문제가 하나쯤 필요하겠군요... 다행히도 우리에겐 모두 문제가 하나 이상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하면 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자라고, 영혼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실천만 한다면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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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8


우리는 흔히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보’라는 말은 그의 입장에 스스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도 진정한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의 한계가, 사랑의 한계가, 능력의 한계가 우리 기도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보는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또한 좋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처럼 남을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 지체의 아픔을 나의 가슴 깊이로 느끼고, 그를 위하여 내가 눈물로 탄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영성에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도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중보의 기도를 받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기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기도의 부탁을 참 많이 받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어떤 의미에서는 설교보다 기도에 더 많은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체들은 그렇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서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본인에게 소원은 있으나 그 소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기도할 믿음은 없는가 봅니다.

이런 지체를 위한 중보의 기도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많이 기도해 주고 그를 위하여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결정적인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강제로 은혜를 주시고, 강제로 구원을 주시고, 강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하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연약함은 성실한 기도생활을 방해합니다. 언제나 마지막 고비에서 2%를 채우지 못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중보는 그 결정적인 2%를 채우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였으나 믿음과 인내가 조금 부족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저에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하지 마십시오. 하지도 않을 기도 약속은 피차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인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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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모든 진흙덩이가 그렇듯이 질그릇으로 최고의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것이 내가 가진 최고의 꿈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들의 토기장이가 이 나라 최고의 장인(匠人)이란 것이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잣집으로 팔려나갔다.

어느 날. 토기장이가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토기장이가 빚는 나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에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

나를 지켜보는 다른 진흙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빚은 토기장이의 손길이 밉고 또 미웠다.

마지막으로 불가마에서 나온 내 모습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토기장이가 날 왜 이런 모습으로 빚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내가 완성되자마자 나를 품에 앉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다.

아무리 나를, 이렇게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고 했어도 이런 모양으로 만든 토기장이가 나는 생각할수록 미웠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내가 깨져 없어지기를 바랄뿐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라고 말았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기장이는 이 사실을 알고 이 농부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는 나처럼 생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가 말했다.

“더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 나라는 사실을 난 그 때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빚던 토기장이의 그 따스한 손길을 그제야 새로이 느낄 수가 있었다...


당신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상처, 약점, 아픔도 영원히 당신을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한 자존감을 가지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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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5


겨울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 봄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기온을 보면, 마치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하지만 계절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바뀌는 것이라 아무리 추위가 발버둥을 쳐도 기어코 봄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마지막 추위를 한국에서는 ‘꽃샘추위’라고 합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겨울을 보냈던 나무들이 봄을 맞아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을 시샘해서 겨울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추위라는 뜻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추위만 넘어서면 곧바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생기며, 개나리와 벚꽃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계절이 있음을 아십니까?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겨울이 있으면 봄도 있습니다. 항상 좋은 날만 계속되는 인생도 없고, 항상 힘든 날만 계속되는 인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흐름 가운데 자취를 남깁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사람들의 인생을 보는 안목이 조금씩 철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편안한 지체를 보면 바람 부는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고, 모진 시련 속에 힘겨워 하는 지체를 보면, 조금만 참으면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격려하게 됩니다. 

그분의 섭리는 항상 신실해서 이 모든 날들을 통하여 우리가 그분을 알고 겸손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체들의 모진 날들이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힘들지만, 그러나 지내고나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는 중에도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면 그것을 여러분의 삶에 찾아온 ‘꽃샘추위’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죽이기 위한 바람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강건하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의 인격은 성숙되고, 신앙은 깊어지며, 삶은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용기를 가지고 기도와 말씀으로 인내하십시오.

이선경 권찰이 직장을 구했습니다. 목사에게는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오랜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합시다. 모두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도록 합시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주셔야만 하는 봄소식은 우리에게 아직 많습니다. 지혜의 건강도, 김선연 권찰의 직장도(차라리 이참에 시집을 보내 버릴까요^^), 교회의 빈자리가 가득 차는 것도, 예배의 부흥도... 하지만 그간에 참고 견뎌온 모진 추위가 많았기에 이번 봄에는 분명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찬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인생에 봄이 온다고 하여도 결코 자만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는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번 봄에는 함께 감탄할 벚꽃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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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8


올해는 아무래도 눈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눈길에 목숨을 걸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예배를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서면 밤사이 내린 눈이 온통 얼어서 길이 스케이트장처럼 됐었거든요. 보통의 출근길이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눈 왔다고 새벽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엉금엉금 기어서 교회로 가던 길이 생각이 납니다.

집을 나서면 몰아치는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눈길에서는 가끔 넘어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지요. 밤사이 차가 얼어서 핸들을 잡으면 손이 시려와 입김을 불어가며 운전을 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이 모든 것이 힘든 일상이었지만, 이제 일본에 와서 되돌아보니 모두가 소중한 추억처럼 느껴집니다. 폭설, 칼날 같은 바람, 빙판길, 눈싸움, 겨울산행... 이런 것들이 말입니다.

저는 아들을 보면서 혼자 웃을 때가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너무도 빨리 자라버린 아이들이 야속하기까지 하거든요. 밤새워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병에 우유를 먹이던 그 때는 밤잠을 설치게 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힘겨웠는데, 이제는 간혹 너무 징그럽게(?) 커버린 아들들을 보면서 예전의 그 아담하던 때를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전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들, 심지어 내가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그 모든 것까지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바탕 위에 있는 것임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고통이 없는 날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희망, 고통 중의 위로가 소중하다면, 그 모든 것을 돋보이게 하는 고통 또한 소중한 은혜의 방편은 아닐까요?

언젠가는 지금 이 시절을 그리워하겠지요. 한 달 한 달을 간신히 버티던 지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용감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날을 언젠가는 분명히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손자들을 향하여 내가 했던 고생을 말해 주겠지요. 대부분의 할아버지처럼, 내가 했던 고생을 곱씹고 또 곱씹어 아이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숨이 아니라, 그 모진 세월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뿌듯함으로 아이에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엄청난 발자국을 찍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사는 것이 모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화목 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직장에서 버티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생명을 즐기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날들을 기쁨과 감동으로 채우도록 합시다. 향락이 아니라 소중한 일상에서 즐깁시다. 세금도 없는 말 한 마디로 격려하고, 눈길 한 번에도 웃음을 싣고, 내게 주어진 환경이 결국은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우리는 잘 될 수밖에 없는 크리스찬이 아닙니까? 우리는 잘 될 수밖에 없는 동경드림교회가 아닙니까? 믿으십니까? ^^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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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1


미국 시카고에는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라고 하는 명문 기독교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브랭카드 홀(Blanchard Hall)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를 하였다는 표시입니다. 

그 학교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순교한 선교사 중에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에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부인은 "말씀을 삼가해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던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남편이 휘튼 대학에 다닐 때 썼던 큐티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도,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후에 그 부인은 남편인 짐 엘리엇과 그와 함께 순교한 네 사람의 이야기를 <영광의 문>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감동으로 후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헌신하였고, 그들을 순교하게 했던 이오카 인디언들에게는 결국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척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의 말처럼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있으려는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서 결국 놓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것은 결코 비극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해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결국은 비극이 될 것입니다. 헌신 할 수 있을 때에 잘 합시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행동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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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4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일컬어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청합니다. 이것은 결코 회심한 직후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많은 핍박을 감수하며 목숨을 내어놓는 헌신을 다한 이후, 곧 그의 죽음이 임박하여 했던 고백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처럼 작은 ‘바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나도 육체를 자랑할 만하다’고 말합니다(3장). 또한 그의 사도됨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자신이 주님의 사도됨에 대한 강한 주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얼굴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흐름 속에서 조화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은혜 안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섬겨 말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고자 했으며, 반대로 세상을 향하여는 그 무엇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는 사자(獅子)같지만, 하나님을 향하여는 어린 아이처럼 연약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는 항상 목마른 사슴이 되고, 세상을 향하여는 항상 골리앗을 압도하는 영적 거인(spiritual giant)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무가치한 존재를 향하여 거룩하게 낭비되는 사랑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조건 없이 사랑이 부어질 때에, 그것을 우리가 은혜라고 합니다. 하지만 은혜가 부어지면, 그 대상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어진 ‘은혜’만큼의 가치가 그 존재를 덮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꼭 반대로 행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는 사자처럼 용맹한데, 막상 세상의 돈과 명예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눈물을 흘리려거든 기도의 골방에서 흘리십시오. 거기서는 온갖 신음을 다 쏟아도 됩니다. 걱정도 좋고, 푸념도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잠잠하십시오. 그분의 전능하심 앞에, 초라한 자기를 충분히 내어놓고 거룩한 학대로 한없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더 아름답게 재탄생하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열등감’일 뿐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시지 않는 것은 타이밍의 문제이거나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가슴을 활짝 여십시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외에 우리는 무엇으로도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밖에서 얻어터지고 우는 아이보다 부모를 더 속상하게 하는 아이는 없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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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이(李)집사님은 성격이 차분하고 사려 깊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전도사를 하던 시절에 학생부의 부장을 맡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수고하며 조력해 주시던 좋은 파트너였습니다. 작은 학원을 운영하셨는데, 전도에 열심을 다하셨고 또한 학생부의 활동을 위하여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조력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뭔가 그늘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무어라 딱 말을 하기는 힘들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사역에 대한 생각 등에서 불쑥 집사님답지 않은 생각과 말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사귐을 가지면서 저는 그 분이 청년 시절에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분이 다녔던 교회의 분위기는 몹시 뜨거웠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청년들은 너도 나도 목회자의 길을 서원했고, 마치 그런 서원을 하지 않으면 충분히 은혜를 받지 못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분도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주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은 이후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늘 마음속의 한편에 그늘을 드리우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학원을 운영하며 그렇게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지만, 그 일은 늘상 ‘서원’을 배신하고 도망한 도피처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었고, 세상과 주님의 일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가치 속에서 그분은 언제나 ‘요나’에 시달리는 불쌍한 영혼이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자기 삶의 보따리를 모두 싸서 교회 안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 성도들을 그늘지게 하고 죄의식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는 사명에 실패하고 살인자의 죄를 짓고 이곳으로 도망 와 40년의 세월을 허송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이 말에 담긴 함축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나 애굽뿐 아니라 이곳 미디안 땅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허송했다고 생각했던 40년의 세월도 사실은 하나님의 기다림 속에 사용되었던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역의 대상은 실제로 교회보다 세상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 집사님과 같은 분들이 많아져서 온 땅에 복음으로 역사하는 학원, 가계, 회사, 정부가 생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종이며, 동역자입니다. 그러니 목사인 것처럼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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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1


넘어진 아이가 깨어진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놀라서 다가온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이미 넘어졌고, 무릎에는 피가 나고 있는데...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엄마는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적대세력은 기세등등했다. 이제 다시는 예수님의 꿈이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의 곁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을!”

어떻게 평강을 누리란 말인가? 예수님은 이제 그들 곁을 떠나실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문제는 고스란히 다 제자들의 몫이다. 이런 입장에서 과연 ‘평강’이 가능한가?

…….

지혜로운 엄마는 아이가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걷고 뛰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안다. 무릎에 딱지가 좀 생기더라도 이것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배우는 것이 안 배우는 것보다 아이에게 훨씬 이로움을 준다. 또한 그런 상처가 결코 결정적인 위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이를 생각하는 큰 틀에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차원으로의 성장을 의미했다. 

비록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밀밭을 함께 걷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더 이상 이전처럼 예수님을 보며 안도감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떠난 것이 아니며, 떠나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이것은 정말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신나는 축복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넘어지고 실망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행하실 것이며, 결국에는 더 귀한 축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를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평강’의 미소를 보이시는 것이다.

주님의 품에서 투정을 부려도 좋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말라. 무릎이 아프기 싫어서 걷기를 포기하고 계속하여 기기만 하겠다는 아이는 결국 엄마의 화난 얼굴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파도 일어나야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사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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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4


자동차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헨리 포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그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생활에 골몰하는 셀러리맨이었습니다.

특별한 점이라면, 매일 퇴근 후에 헛간에 들어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하여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대하여 ‘바보 같은 생각이다!’라고 조롱하였지만, 그의 아내만은 그의 남편을 신뢰하고 도왔습니다.

매일 헛간에서 밤을 새우는 남편으로 인해, 추위에 떨면서 등잔불을 들고 쫓아다니며 같이 밤을 새운 날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결국 부인의 희생적인 내조 속에서 포드는 자동차를 발명했고 훗날에는 명성과 부를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포드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지금의 부인과 꼭 결혼하고 싶다...”

사랑은 헌신 속에서 증진됩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내어줌이 없이는 사랑이 자라지도 않을뿐더러 점차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신뢰이며 또한 헌신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평범해진 21세기를 살면서도, 우리는 도무지 사랑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한류의 열풍이 부는 이유도, 어떤 사회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의 열정과 떨림을 한국 드라마가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뒤집어 생각하면 일본의 영혼들도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말이 됩니다.

헌신하지 않는 공허한 사랑의 고백은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합니까? 말로는 부드럽고 좋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사랑의 허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있습니까?

아내의 헌신, 남편의 순애보, 성도의 섬김, 목자의 희생과 같은 고귀한 가치들은 어떤 면에서 ‘골동품’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새것이 줄 수 없는 감동, 깊은 맛, 영혼의 떨림을 주는 골동품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아픔을 감수하며 자기를 내어주십시오. 당장은 그것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인내를 통하여 사랑이 증진되고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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