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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7


거대한 통나무는 강물을 따라 흐르기만 하지만, 작은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이 있는 신자는 시대를 ‘좇아’ 살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보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는 양심의 목소리로 자리하던 교회가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들끼리 싸우는 진흙탕이 되고 있으니 주님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프실지 헤아림이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조국의 교회는 그냥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미신으로 얼룩졌던 조국의 강산 방방곡곡에 십자가의 첨탑이 들어서기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을 걷는 누군가의 피눈물이 있었습니다. 눈비를 마다하지 않고 밤새워 들과 산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을 갈망했던 우리 선배들의 발자취가 이룬 거대한 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가나안의 열매를 따 먹는 세대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망각해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평수와 성도의 숫자만 헤아리고 정작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깊이 묵상하지 못하는 일천함이 조국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2007년도는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聖都)가 되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던 그 해의 영광을 다시 기억하고 사모하게 되는 해입니다.

비록 몸은 현해탄을 건너 이 일본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우리 동경드림교회의 지체들이 자기 믿음의 뿌리를 알고 또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뜻을 깨달아 함께 기도하는 용사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새롭게 열려야만 하는 통일의 시대는 정치와 경제적 힘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능력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때문에 교회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조국은 다른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지금의 조국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갑절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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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하원의원은 분주한 자신의 삶으로 인하여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피곤함과 짜증이 가득하여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길을 청소하고 있는 청소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 하원의원이 청소부를 향하여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 일이 지겹지도 않습니까? 당신이 청소해도 금새 다시 더러워질 텐데요...”

그러자 그 청소부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모퉁이를 빛나게 청소하는 중인걸요!”

존귀한 일을 하면서도 비전이 없으면 맹목적이 되고, 하찮게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비전이 있으면 그 일은 숭고한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요즘, 저의 집은 기이한 풍경이 아침마다 있습니다.

아내는 서둘러 출근을 하고, 집안의 청소와 빨래 너는 일을 제가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귀찮고, 창피하고, 그래서 짜증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나가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신경을 쓰면서 부끄럽게 빨래를 널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는 중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내가 지금 겪는 이 과정이 훈련이라는 것, 일본이라는 황무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치루는 영적인 대가라는 것을 주님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침마다 와이셔츠를 다림질 해주는 아내의 수고가 없이 어떻게 말끔한 차림으로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도 거룩하지만, 그 설교를 위하여 다림질로 수고하는 아내의 헌신도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work)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학교는 거룩하고 일반 대학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대학을 다니는 사람의 목적이며 신앙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바른 목적이 서 있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거룩한 사명이요, 영적인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2006년도의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목적을 한 시라도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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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함께 놀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다시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놀라며 대답합니다. “내일? 그게 무슨 말이니? 내일이라니……. 너는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믿니?”

어느 늦은 가을에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따뜻한 햇볕을 쏘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이제 날이 너무 쌀쌀하구나. 우리 금년에는 그만 만나자. 내년 봄에 다시 보자, 메뚜기야!” 그러자 메뚜기가 놀라며 대답합니다. “내년? 그게 무슨 말이니? 내년이라니……. 너는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믿니?”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왠지 숙연한 생각이 찾아듭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져간 내 인생의 1년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은 영원에 대한 삶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영혼이 없고, 그저 소멸되는 존재라면 우리가 신앙의 도리대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영원한 영혼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심(誠心)을 다해 삽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사람들아,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이제 불에 타 없어질 이 세상이 끝나면 하늘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주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자!” 그러자 사람들이 말합니다. “내세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더러 그것을 믿으라고?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것을 믿을 수 있지…….”

우리가 세상의 평가와는 다른 평가를 위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현실주의자의 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삶이 비추는 영원한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에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영원을 향해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진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의 모범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의 믿음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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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편지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통하여 세상은 신앙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부모를 잃은 어느 소녀가 한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라 신앙이란 낡아빠진 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농장의 주인내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소녀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함께 열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성경이 너무 어려워요.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내게는 주인아주머니가 있으니까요. 그분이 하는 대로만 좇아가면 다 잘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이성과 논리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한 신앙의 원리를 사람의 논리로 혼돈케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보면 체험하게 될 것을, 그렇게 하지는 않으면서 말로만 설명하려고 하니 버겁고 무거운 것이 되고 맙니다.

벌써 12월의 중반이 지났습니다. 다음 주일이 크리스마스 주간입니다. 그리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 또 1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화려한 논리가 아니라 실제로 변화된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 곧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말을 부드럽게 하고 먼저 섬길 뿐 아니라, 항상 영적으로 살기를 갈망하십시오. 자신의 삶으로부터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자기를 개혁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증거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동경드림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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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0


많은 관광객들이 아테네 시 언덕 위에 있는 유명한 고대의 신전 아크로폴리스 성채를 방문합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대리석 조각을 기념으로 주워가곤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 대리석 조각들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몇 달에 한 번씩 한 트럭분의 대리석 조각들이 수마일 떨어진 채석장으로부터 실려 와서 아크로폴리스 전역에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관광객들은 그것을 고대 역사의 진짜 조각이라고 믿으면서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언어나 음악, 또 물건들을 통해서 혹은 예배의식이나, 공허한 행사들을 치르면서 신자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지 성전에 드나들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한 의식들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요체는 한 번, 혹은 잠시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심(信心)을 끝까지 지켜가는 것입니다. 인내, 오래참음, 충성, 신실함 등은 결국 한 가지 열매에 대한 다양한 이름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흩트리지 않고 거짓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양이나 직분,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매 주일 예배에 참여한다는 사실이나 혹은 정해진 헌금을 드리고 있다는 사실로 핑계하지도 말고 우리는 좀 더 신중하게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좇아가려는 노력이 오늘의 현실에 있습니까? 있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마음과 태도를 평생 변하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그러나 만약 그런 삶과 마음이 오늘 없다면,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평판을 듣던지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예배와 신앙은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횟수와 금액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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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3


강철왕 카네기가 철강업에 종사할 때입니다. 그가 공장을 순시할 때마다 늘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공장장 자리가 비어있던 터라 카네기는 그에게 공장장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성실함을 보았소. 그 성실성으로 공장장 일을 한 번 해보지 않겠소?” 그러나 그는 “사장님, 저는 단순한 철공입니다. 철공 일에는 대통령이죠. 그러나 다른 일은 잘 하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카네기는 “당신 말이 옳소. 당신이 철공 일에는 대통령이니, 이달부터 대통령의 봉급을 주겠소. 계속 기쁨으로 철공 일을 해 주시오.”라고 했답니다.

솔로몬은 모든 부귀와 영화를 차지한 이후에 비로소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았고, 카네기는 세계의 대부호가 된 다음에 비로소 한 사람의 존귀함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는 ‘봉급’이라는 봉투의 두께 만큼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지요? 하지만 그것은 저급한 삶의 현장에서 악바리 근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가일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부요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작은 재산이나 재능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나누어준 1달란트가 황금 34킬로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당시 다른 계량법으로 따져도 최소한 1달란트는 24킬로입니다.

지금으로 봐도 어마어마하지요? 하지만 채굴능력이 부족했던 당시로 따지면 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1달란트는 물론 10달란트(황금 340킬로)조차 가볍게 여기는 통 큰 주인이랍니다. 그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시죠! ^^

하나님은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자기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해도 날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안다면, 여러분은 정말 복된 성도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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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6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매니아에서 예전에 무려 5만5천명이 참사를 당하는 대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 때에 9층 짜리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스잔나라는 엄마와 4살 짜리 딸아이 가이아니가 철근과 콘크리트의 잿더미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구조를 기다리며 탈진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배고픔은 목마름보다는 나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부터 아이는 울면서 “엄마, 목말라! 엄마 목말라!”를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보았던 TV 프로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이 서로의 피를 나누어 마시며 구조를 기다렸다는 경험담이었습니다.

엄마는 즉시 팔을 뻗어 유리조각을 찾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아이의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스잔나의 결단으로 그들은 잿더미 속에서 두 주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고, 나중에는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혹여나 일본의 정서에 동화되어 너무 무감각하거나, 혹은 세상적인 기분에 들뜨는 날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에서 흐른 피가 온 세상을 적시는 생명의 강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성탄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자기를 내어주는 헌신의 절기여야 하며,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과 사랑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아직도 마음이 마구간처럼 불결하다면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마음의 정리를 좀 하십시오. 근심의 먼지를 털어내고, 불평의 쓰레기를 치우고, 세속적인 오물들은 성령의 불로 살라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리의 등불 하나 켜십시오.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성탄은 연인의 절기가 아니라 낮고 약한 사람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이렇게 선명하게 서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무엇으로 더 증명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온 땅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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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9


1921년에 세상을 떠난 벤자민 워필드 박사는 무려 34년 동안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목회자들을 가르치며 훌륭한 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저서인 ‘성경의 영감과 권위’는 지금까지도 많음 목회자들에게 읽혀지는 중요한 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아픔과 사랑의 헌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1876년에 애니와 결혼을 했습니다. 행복의 꿈을 안고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났던 곳은 독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혼여행에서 아내인 애니는 그만 번개에 맞아 영구적인 불구자가 되고 맙니다. 워필드 박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9년 동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간호했습니다. 심지어 학기 중에도 그녀의 곁을 2시간 이상 비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39년 동안 헌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인내와 사랑은 그가 강의했던 모든 강의와 그가 남긴 모든 신학적 업적보다도 숭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 주님을 닮은 삶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내게 가장 감사한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고 섬길만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앙은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경에서 자주 확인하면서도 말로 신앙을 다하려는 우리의 부족함을 보곤 합니다. 사랑받을 만한 존재, 우리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은 될지언정 상 받을 일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항상 되갚을 수 없는 존재들을 향하여 ‘낭비’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에 대한 ‘상’을 하나님께 바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물이 많은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갚을 길이 없는 사람을 섬기십시오. 아무도 기도해주지 않을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결국 무례함이니 사랑이 없기에 감사도 없는 것이겠군요. 오늘은 서로 서로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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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2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받아내면서 좋은 성품과 인격을 가지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기도, 찬양, 예배와 관계된 것에서만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상을 살피시며 그에 합당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삶에서의 변화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다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면서도 더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가지 못하는 많은 신자들이 바로 이러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까닭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결국은 부활의 영광이 되었던 것처럼, 신자의 고난도 은혜를 통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만을 추구하는 신자들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인격이 되어야 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마음껏 쏟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받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인하여 부여되는 새로운 신분과 책임에 대하여는 너무 무지한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일반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전혀 그것이 자기의 양심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은 이러한 무모함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십시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특별히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서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지도록 합시다.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조차 없는 일본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버겁고 힘든 일인지 목사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태도는 결국 우리의 은혜 없음이 될 것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힘빠지게 할 것입니다.

힘들어도 힘을 내어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항상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이 황무한 땅에서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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