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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2 내 인생의 나비(네비게이션)



수련회 답사를 가던 날, 최동현 집사님네 차의 네비게이션이 고장났다.

얼마 전에 자동차 메이커에서 최종점검을 해준다고 해서 받았는데, 아마도 그 점검 중에 실수로 네비게이션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문명의 기계가 다 그렇지만, 사용할 때에는 몹시 편리하다가도 막상 그것이 고장나면 사람을 막막하게 만든다. 

그 날 나는 렌트카를 빌렸기에 할 수 없이 네비게이션이 있는 내가 앞장을 섰다.

아마도 일본에 와서 최동현 집사님과 동행하며 내가 앞장을 서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위성 수신장치에 이상이 생겼단다. 덕분에 자동차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리를 나까무라바시(中村橋) 어딘가쯤으로 표시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도상에 표시하는 자기의 위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드라이브를 한다는 것은 뭔가 어색할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해주었던 금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은 건강한 삶에 있어 필수적인 지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철없는 짓을 하고 뒤늦게 후회하곤 하는 것이다.

최집사님네 '나비'(일본에서는 네비게이션을 줄여서 '나비'라 부른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태어나고 살아왔다면, 반드시 걸어야 하는 내 몫의 길이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 길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소프트웨어로 탑재된 지도 데이타는 하나도 이상이 없었다. 그것은 일본 어디를 가든지 훌륭하게 골목골목까지 인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위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기위치의 정보'만이 없었다. 그러자 그 많고 세세한 정보들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아무 것도 제대로 안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대학까지 공부하고 나름의 식견과 경험을 쌓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나름 생각을 하고, 인생을 전망한다. 그러한 전망들은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전망들을 제대로 확신할 수 없다.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지금 얼만큼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확신할 무언가가 부족하다.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알아야 하겠지만, 정작 나를 제대로 아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인도함이 없이, 우리는 인생에서 고장난 '나비'를 가진 차에 불과하다. 매 순간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을 참으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가? 

우리는 간혹 누가 돈을 벌었다거나, 누가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 길을 배워볼 수 없을까 해서 기웃거린다. 그러나 인생은 각각이고, 그 사람의 길이 내 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독특하다. 각자가 고유한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의 비법을 그 누구로부터도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그런 비법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없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불안할까? 

보험도 없고, 연금도 없고, 노후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준비도 없는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의 걸음은 정녕 미련한 그것이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주님으로부터 수신되는 '나비'가 있다.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을 해야할지, 우회전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그 자상한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신뢰를 준다. 그분은 굳이 30킬로미터 앞의 사거리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거리도 목전에 다가서면 그분이 알아서 다시 길을 인도해줄 것을 알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도 좋은 '나비'가 있는가? 물론 먼 미래의 비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애써 숨겨두신 선물을 서둘러 알아내려고 가슴을 졸여서는 안 된다.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 그 모든 것은 어차피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 기독교인에게 미래는 그런 것이다.

다만, 듣는 능력이 참 중요하다. 수신이 잘 되야 한다. 나 혼자 어림 짐작으로 추측하며 길을 갈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내 안에 들려야 한다.

사실 인생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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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6 이런 양식을 가졌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의 말미에는 그런 기도가 들어 있다. 이 기도는 소박하지만 우리의 본성과는 잘 맞지 않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루살이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되도록 넉넉한 삶을 원하는데, 그것은 평생을 먹을 수 있는 양식이며, 심지어 아들과 손자들에게 남겨줄 무언가를 포함하는 양식이다. 그렇게 배가 큰 우리들의 입으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을 날마다 암송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생에서 몇 번인가 삶의 궁핍이 절박하게 다가온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참 힘들게 살았지만, 또한 참 소중한 무언가를 배우고 얻었던 시절이 아닌가 한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조금은 담대하고,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좀 더 멀리 보고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이미 내게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가난은 고독을 동반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식구에게도 짐이 되게 만든다. 결국 신뢰했던 인간관계가 다 깨지고, 골방에 틀어박혀 인생이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런 날에, 우리는 사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독하기 때문에 절망한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아무도 나 같은 존재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느낌은 정말 끔찍하다.

그런 날에 우리는 밥을 먹지 못한다. 그것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밥을 먹을 의지조차 무너지기 때문이다. 육신은 쇠약하고, 점점 더 추운 그늘은 깊어간다.

그래서 밥은 희망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 소박한 자리만이라도 지켜진다면, 우리는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


언제인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내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이,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내 눈에 항상 '일용할' 이라는 말로 제한된 '양식'만이 보였었는데, 이 두 단어의 이전에 숨겨진 은총으로 주님은 '우리'를 말씀하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비록 하루의 양식만 허락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라면 희망은 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보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 때에 더 용감하다. 이기심은 항상 자신이 상처받을까 소심하게 만들지만, 이타심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어 던지고 불사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모가 왜 절망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이다. 내가 죽더라도 이 아이들만은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부모들을 강하게 한다. 

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성도도 그러하다. 우리가 만약 기대 이상으로 용기를 가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이다. 그 관계와 사랑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장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돈이란 부질 없더라. 모을 때는 수 십년이 걸리던 재산도 날아갈 때에는 순식간이더라.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게 된다. 내가 더이상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에, 아니 오히려 부담을 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 그 때에도 내 곁에 함께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루 먹을 양식 뿐이라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함께 할 '우리'가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이다. 그의 양식은 나만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양식 가운데 하나님은 역사 하시고,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신다.

당신의 삶에는 진정 이런 양식이 있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먹어도 모자른 양식이 있고,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양식이 있다. 이런 양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다. 그는 부자라도 가난하고, 주변에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사실은 외롭기 때문이다. 

진정한 축복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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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누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믿음이 있고 없음의 차이도 있고, 믿음이 적고 많음의 차이도 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없는 상태 즉 불신(不信) 혹은 무신(無信)의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기의 믿음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로부터는 믿음 생활에 대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문제는 믿음이 적은 사람과 많은 사람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누가 많고 적은지에 대하여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 믿음의 진가를 판별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 두 사람의 믿음이 각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믿음이 클 것이고,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믿음이 작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림길을 만난다. 믿음이 적은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의 결정을 좇을 때에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을 확장하고 성숙되게 한다. 반대로 믿음이 큰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작은 사람을 좇으면 서로의 믿음은 위축되고, 성장이 방해된다.

성경은 전자와 후자를 보여주는 많은 예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날 때에 롯은 아브라함을 따랐다. 두 사람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공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롯을 따른 것이 아니라, 롯이 아브라함을 따랐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도 마찬가지이다. 룻이 좇은 것은 하나님 이전에 나오미였다. 그러나 나오미가 좋은 믿음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룻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되었다.

반대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예를 보자. 두 부부가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삽비라는 남편인 아나니아가 교회를 속이고 인색한 마음을 먹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방문했던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11~13에 따르면, 이 당시 부적절한 베드로의 행동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신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였던 바나바까지 흔들리게 했다. 바울은 베드로를 존경했지만, 믿음에 대해서 만큼은 타협하지 않았고, 그런 바울의 결단이 안디옥교회를 지켰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믿음의 크고 작음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 믿음이 좋게 말하고 행동하던 사람도 갑자기 위축되고 약해질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항상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충돌할 때에, 그 중에서 무엇이 더 믿음에 의한 것인지를 안다. 다만 믿음의 결정이란 항상 육신적으로 손해처럼 보이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힘들고, 타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타협이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친다. 나만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상대가 되는 그 사람까지 함께 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타협들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흐리고, 우리를 점점 타성적인 신자로 만들어간다.

믿음에서 자라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타협하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 나 스스로에 대한 타협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의 타협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좇아야 할 때와 내가 이끌어야 할 때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관계 속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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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힘이 없고, 금새 타성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 세상에 변화를 불러 오고, 우리의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믿음은 경험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저녁마다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바로 그 옛 길을 걸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조차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믿음을 생각하지만, 전혀 믿음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로 믿음에 대하여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찬양은 자신의 기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되며, 성경의 문자들은 너무 옛스러워 골동품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저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찬양은 영혼에서 울려나는 환희의 울림이 되고, 기도는 우리의 내면을 정직하게 쏟아내며, 말씀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누고 부서지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인 것들을 부둥켜 안고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고 살아갑니까?

왜 목사가 건물에 그리 안달하고, 왜 교인들이 그토록 돈을 사모합니까? 왜 청년들은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왜 교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고 경험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그런 누추한 겉옷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그거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슬프고 애통할 일입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하면 반드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눈을 감고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의 내면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무언가를 사모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십시오. 예배마다, 기도마다, 찬양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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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예수님은 행복하셨다!



문명은 삶을 편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핸드폰을 바꾸었습니다. '옴니아'라는 삼성의 새 기종은 이전에 사용했던 핸드폰에 비하여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디지탈 카메라를 대신할 만한 카메라 화질과 음악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음질, 그리고 급할 때 필기와 녹음을 병행하여 저장할 수 있는 점, 또 싱크 프로그램을 통해 컴퓨터의 아웃룩과 데이터 싱크를 할 수 있는 점이 편리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시판된 옴니아는 아예 OS 프로그램을 탑재하여 사용자가 자기 마음대로 세팅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의 제 기종에도 핸드폰을 통해 사용할 만한 주요 기능들이 거의 갖추어져 있어 지금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가방에 들고 다니던 디지탈 카메라와 MP3가 더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첩과 다이어리도 사실 거의 사용이 되지 않는데, 아직은 미련이 남아 가지고 다닙니다. 가끔은 밧데리 방전으로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도 펜과 수첩은 오래 지참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핸드폰의 사용 이후로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즘은 특히나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녹음'이나 '사진'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곧 머리를 비우게 됩니다. 심지어 만나는 사람의 이름까지도 핸드폰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기억을 못하는 맹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인은 너무 많은 정보에 머리가 아픕니다. 되도록 머리를 비우고, 쉬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우다가 정작, 정말 소중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까지 비워서 아무 생각이 없는 '공백'의 머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일은 그런 것에 의지하더라도 정말 꼭 필요한 것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새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행복이란 좀 불편하더라도 복고적인 방법을 통해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온 이후로 전자책을 많이 읽는데, 요즘은 종이책의 그 냄새가 그립습니다. 가끔은 옛날에 끼워두고 잊었던 지폐를 찾아내거나, 혹은 잘 말라서 살아 있는듯 보관된 들꽃 한 송이를 책 사이에서 발견하는 기쁨도 그립습니다. 

<자전거 여행>의 작가인 김훈 씨가 그러더군요. 자동차는 출발점과 도착점만 존재하지만, 자전거는 그 과정이 다 존재한다고요.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으면 길이 내 안으로 서서히 밀려 온다고요. 그래서 자동차로 갔던 길과 자전거로 갔던 길은 많이 다른가 봅니다.

너무 빨리, 너무 편리하게 살다가 삶을 음미하는 법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의 행복이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꼭 편리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조금 불편함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큰 텔레비전을 켜두고 식사하는 집보다 텔레비전을 잠시 끄고 오손도손 대화하며 식사하는 가정이 더욱 행복합니다. 핸드폰에 무슨 기능이 담겼느냐 보다, 그 핸드폰으로 누구와 통화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의자에 앉아 있느냐 보다는 어디에 누구와 앉아 있느냐가 진정한 쉼을 줍니다. 

좀 즐기며 삽시다! 세상이 말하는 더 많은 돈으로의 즐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근본적인 것을 볼 수 있다면,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유를 가지십시오.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고 행복하십시오. 

제가 믿는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거닐던 그분의 해맑은 미소와 웃음이 눈에 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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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큰 그릇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2003년의 3월2일 목회를 시작하며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먼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각오의 중심에는 과연 내가 실현하려고 하는 목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벌써 훌쩍 만 6년 전의 일이다.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을 했고, 자기 목표를 설정했다. 6년을 목회에 전념하고 안식년이 되는 7년에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나서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때에는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되어 있을 것을 상정하고, 작더라도 성경적인 비전에 헌신하는 교회로서의 정체감을 찾아가겠다고 포부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3년만에 개척했던 교회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 결정은 무모해 보이리 만큼 막연했다. 나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신앙의 후원자가 되시는 어머니조차 "꼭 일본에 가야만 했느냐?"는 질문을 지금도 하신다. 한국에서의 개척이 힘들었다거나, 목회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생기 넘치는 30대의 젊은 목사였고, 주변에 후원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 동역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에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일본을 향했다. 그리고 어느덧 이곳에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참 힘겨운 세월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목회적 목표들을 대부분 수정해야 했다. 성경적 원칙이야 어디인들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주어진 현실은 많이 달랐다. 양들의 상태와 성향, 신앙경력, 경험, 추구하는 바와 이해할 수 있는 수준들이 많이 달랐다. 그들은 장년이면서도 청년이었고, 청년이면서도 노인들이었다.

일본에서의 3년 동안 가장 많은 훈련을 쌓은 것은 역시 나 자신인 것 같다. 

몽골에서 섬기는 이용규 선교사가 <내려놓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영적 광야인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배울 수 밖에 없는 영성은 비움과 내려놓음이다.

가난하더라도 목사로의 자존심과 명예만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선교지에서 목사는 별반 의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명(無名)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했다. 교회를 섬기고, 교우들을 섬기는 것에 그저 하나의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 섬김의 과정은 처음에는 고달프고, 속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하는 동안 점점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성경의 새로운 일면들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은혜가 마음에 채워지면서, 요즘은 여전히 낮아지지 못하는 나의 다른 일면들에 대하여 고민한다. 비우고 또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마지막 욕심, 겉으로는 신앙을 말하지만 정작 안으로는 여전히 주님과 다른 길을 욕심 내는 나의 다른 심장에 대하여 돌칼을 든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大器晩成)' 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시야가 좁다. 가능성은 무시되고, 현실만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 미래를 잉태하고 그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어찌 인류가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을까! 

정말 좋은 것은 쉽게 얻는 법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귀하고 좋은 것을 얻는 인생을 꿈꾼다. 대박의 꿈은 잠시 즐거운 상상의 꺼리가 될 수는 있지만, 인생의 기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사람은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결국에는 빈 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아내를 보면 면목이 없다. 교회 지체들을 향해서도 비슷한 마음이다. 목사만 이곳에 오면 금새 교회는 회복되고, 신앙생활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 지루한 싸움에서 지쳐가는 표정이 역력하다. 교회의 건강한 목적도 좋고 비전도 좋은데, 당장 현실도 좀 챙기고 변했으면 좋겠다는 바램,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생각들이 얼핏 스친다.

하지만 아직은 이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의 목회를 좀 더 계속해야겠다. 이 고생이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벽돌을 쌓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충분히 숙성되어 단단하게 굳기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100년을 버티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걱정이 많은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줄로 알아라.

다시 말한다. 교회는 돈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와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변할 생각이 없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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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가장 큰 사람



꿈은 광야에서 자란다. 거칠은 광야는 인재(人材)의 산실(産室)이다.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불편과 결핍이 있는 광야로부터 인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를 검증하고 세상을 생각하며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들 무언가를 궁리한다. 

그 궁리(窮理)함의 무수한 밤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의 세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세례요한은 무수한 결핍을 안고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에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원래 그의 생업은 부모를 좇아 당연히 제사장의 직무를 잇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모를 설득하셨고, 하나뿐인 아들을  빈 들로 보내도록 하셨다.

성경은 여기까지만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하여 언급한다. 빈 들에서 자란 요한에게 딱히 부모로서 해줄 것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그 사명을 다하고 노쇠한 생을 마감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아이는 제도권의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엣세네파 라는 소수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광야에 그들의 거처를 만들고 평생을 성경을 필사하며 메시야를 고대하며 살았다. 아마도 빈 들에서 세례요한이 만나고 함께 했을 사람들은 이 칙칙한 수도사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 3:4)


요한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다.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의식주로 대변된다. 그런데 특별히 요한의 옷과 음식은 그가 살아왔던 척박한 삶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안락한 품을 잃었고, 정규교육과 안정된 생업을 잃었고, 연애와 친구와 입을 설레게 하는 맛 있는 음식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애절하게 하나를 붙들었다. 그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구하는 참 신앙이요, 그가 광야로부터 들었을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기다림이었다. 그 한 가지에 그의 삶이 집중되었을 때에, 이 모든 삶의 결핍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남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심령이 강해졌고, 드디어 그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헤롯의 반칙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학교에서 바른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바른 것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타협한다. 우리는 물러서고,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은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극히 불편하고 척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으로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일생과 설교에는 숨기지 않는 정직함과 알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성실함과 참된 신앙의 매력들이 가득 차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예수님도 그를 아름답다고 하셨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사람으로서 최정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역과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 사역으로 명성을 얻으셨을 때에, 더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녀의 인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기독교 강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에 물들었는지, 설교하며 축복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이 '성공'인지, '순교'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곤 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블루(우울함)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기쁨과 만족, 행복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거나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부터의 열매이지, 결코 그저 예배당 안에 들어온 자의 형통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는 광야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탄압과 심각한 가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교회를 세워 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막절을 잊었다. 우리는 그 고난의 과정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광야로 보내기를 주저했다. 

아버지 목사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상속하고, 성도들은 세금을 탈세하며 십일조를 드렸다. 말은 신앙적이지만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현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으로부터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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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목양칼럼

 

 

여름이 오고 있다. 습하고 더운 동경의 여름은 어려움이 많은 계절이다. 한낮의 더위를 참는 것도 힘들지만, 밤이 되어도 계속되는 열대야는 평생에 겪었던 난적(亂敵)중에서도 강적(强敵)인 것 같다. 

지금이야 에어컨을 켜두고 잠을 청하기도 하지만, 처음에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에어컨이 생긴 후에도 감히 켜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다. 그 더위를 온몸으로 겪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한밤에도 몇 번을 샤워실에 가서 물을 뒤집어 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잠을 설치고나면 다음 날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고, 더위는 더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사람은 쉼이 필요하다. 하루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쾌적하게 푹 잘 수 있는 환경만 있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다음 날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쉼이 깨어져서 고단함이 이어지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점점 약해지고 병들게 된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정신과 신앙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신감의 결핍과 의욕부진을 겪고 있다면, 제일 먼저 살피고 반성해야 할 일이 '쉼'에 대한 돌아봄이다.

그러나 의외로 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쉼도 열심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계속 달려야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워커홀릭'들이 있다는 것은 사회적 불행이다. 이들은 가족을 위하고, 자기 조직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얼마의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병이 들고, 세상을 떠나면 결국 남겨진 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상처와 부담만 안겨 준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가 정말 원하는 것은,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어주는 일이며, 책임 있는 구성원이란 언제나 건강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주는 것이 그 근간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최고(最古) 기록은 모세오경이다. 그것의 기록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입장을 달리 하지만, 대체적으로 B.C. 1400~150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의 기록이다. 

이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는데, 예수님 당대의 서기 원년이 우리나라의 시대로 환산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쯤이 되니까, 이 시기가 얼마나 오랜 옛날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역사 속에서 신석기 시대로 분류되는 시대이며, 당연히 지구상의 대부분에서 유사(有史)시대 이전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문자가 발명되고, 기록이 남겨진 문명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유서 깊은 성경의 처음 기록으로부터 하나님은 '쉬라', '안식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셨다. 

심지어 쉬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도록 명령하셔서 '안식'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으셨다. 물론 이 계명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하고 예배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라, 이 계명은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하게 만든다. 우리가 필요에 의하여 노동하지만 노동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과, 그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는 항상 자기의 방향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색이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처럼 단순해진다. 그리고 감동이 없는 인생은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의 그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첫장에서 무려 예닐곱 번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감탄을 기억해 보라. 역동적인 창조의 과정중에도 잠시 허리를 펴시고(물론 이것은 메타포이다!) 창조의 과정을 확인하며 감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려 보라. 하나님은 의외로 낭만적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사람이기에, 사람은 쉼을 필요로 하고, 감동을 필요로 하고, 반성과 희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본심을 드러내야 하겠다. 일본에 와서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고 직장생활 하는 지체들이 많다. 더러는 필요에 따라 주일에도 나가 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강제로 막거나,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벌 받는다고 겁 주는 설교 같은 것은 분명히 내 신앙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을 목사로서 찬성하거나 방관할 수도 없다. 분명히 그것은 자신을 위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쉼을 희생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대가로 얼마나 더 벌고 직장에서 인정을 받는지는 모르지만, 보다 근본적인 눈으로 멀리 본다면 그런 선택이 손해라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다.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라. 주님 안에서 제발 쉬라. 그리고 자기를 살피고 확인하라. 이것은 편안한 잠자리 만큼이나 우리 인생에 중요하다. 이 원칙을 바로 세워서 건강한 청춘 뿐만이 아니라 건강한 인생을 세워가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이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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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선과 악의 중간은 없다


선과 악에서 중간은 없다. 사람들은 회색지대를 상상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다고 할 수도 있고, 검다고도 할 수 있는 회색은 때때로 합의와 균형을 상징하는 ‘중용’의 의미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 회색은 상상이요, 현실 회피일 뿐이다.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자가 함정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었다. 그러자 사자는 즉시 나그네를 잡아 먹었다.

선이 힘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동안에 악은 함정 속의 사자처럼 눈물을 흘리고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 외양에 속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장의 형편이 변하면, 사자는 사자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나, 명예, 혹은 정의감 같은 것이 원래부터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가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길은, 순진하게 회색을 상상하고 지금쯤은 사자도 식인의 습성을 버렸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하기 보다는, 사자를 함정 속에 둔 채 사육하는 것이다.

문명의 사회 초기에 야생의 맹수는 무조건 제거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문명의 사회가 맹수들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들 또한 이 세상의 한 구성원이요, 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치도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악이든, 악한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때에는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 과정 속의 우리는 결국 악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명적 지혜를 배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악을 통제권 안에 두는 것이다. 악이 선을 잡아먹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생존은 보장하되 악의 자유는 간섭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법과 원칙의 의미이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와 사회는 ‘법치(法治)’라는 기초를 쌓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원칙은 호도된다. 법은 시민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재자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법에 의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신음하게 되는 역리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결국 만민에게 구원의 소식을 외치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편도, 저편도 들어와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정치적 사명도 있다. 그것은 선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키우고 후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정의를 실현하고 올곧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평생 든든한 배경과 동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선이 악을 압도하는 사회를 실현하고, 그러한 사회적 질서를 지켜가는 것이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어나 최선을 다하라. 그래서 이 세상의 선봉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 믿음이 삶이 되게 하라. 악한 사람들의 긍휼을 바라기보다, 악한 사람들에게조차 긍휼을 베푸는 위치가 되도록 분투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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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어느덧 5월의 마지막 날에 이르렀습니다. 겨울 동안 움츠렸던 날들이 가고 오랜만에 푸르름을 맛보는 5월은 기쁨과 따사로움이 있는 계절입니다. 특별히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지나며 가정의 소중함을 기리고 다시 생각하며 함께 가꾸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 푸르름의 5월이 문득 아픔과 회한의 달로 바뀌었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들려온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우리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혀 5년 동안이나 무사히 임기를 마쳤던 사람이 고향의 한 바위산 위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정치와 현실을 떠나 한 개인의 삶이 왜 그토록 비참한 결말로 치달아 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어떤 가치들도 결국에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보다 귀한 것이 세상에 없고, 그래서 정치를 하든, 경제를 살리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사람을 먼저 귀히 여기고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뜨거운 화염에 싸여 죽어갔을 때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법이 옳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의의 사건 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혹시나 우리가 다른 열정에 사로잡혀 '사람'을 귀히 여기는 본래적 바탕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 죽이고 뉴타운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적어도 그것이 과연 우리를 위해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반성과 고민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바벨의 탑을 쌓고서 온땅으로 흩어졌던 미련한 사람들의 전철을 밟아 의미없는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믿는 성경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롯의 거대한 성전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 거대한 건물이 초라한 한 사람의 영혼과도 결코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본질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진실한 신앙이란 바로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국의 교회는 정치적 선언과 구호 속에서 그러한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을 멸시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물의만을 걱정하는 편협한 주장들을 거룩한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쏟아낼 수 있습니까? 과연 그분들의 눈에는 슬픔에 초죽음이 되어버린 가족과 그를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슬픔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

교회는 생각해야 합니다.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세상이 그들을 꼬득이고 타락시켜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시대처럼 우리 자신이 그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 바른 비전과 목적을 주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욕망에 눈 멀어 스스로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다 건너 동경의 하늘에서 새로운 주일을 맞습니다. 시청 앞 광장과 봉하 마을과 절망하는 청년들의 곁에 내가 지금 서 있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내가 가르쳤던 청년들은 과연 지금의 조국에서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면 더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절대로 이해해주지 않는 강단과 목사들에 의하여 매도당하고 정죄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이 광야로부터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교회를 이루어 보라고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 아래 두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 밖으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저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로서의 의미를 고민합니다. 세상의 비판이 아니라 세상을 감동시키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또한 청년들에게 바른 비전과 열정을 찾아주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고민합니다. 저는 제가 목사로서 가진 이 고민을 여러분도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동경드림교회는 목사만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이루고 세워가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조국은 병들어 있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고나면, 더 교회는 텅 비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청년들이 기독교의 기득권에 실망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더 크고 넓다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또한 이 일로 충격 받은 많은 국민들과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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