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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5 목양칼럼


오늘은 주일이고 어린이날입니다.
열 일곱에 들어선 아들이 어린이날이라고 선물을 달랍니다.
뭘 줄까? 물었더니... 웃기만 합니다.
이런 경우 제일 어렵습니다. 알아서 주어야 하는데 이미 다 주어서 더 줄 게 없거든요. 
사실, 아들에게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줄겁니다. 
그건 굳이 어린이날이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면 달래서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지. 그래서 항상,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하나님께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 기도는 감사를 곱씹고 찬양을 드리고 내 솔직한 심정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드립니다. 감정적으로 솔직해지는 것이 쉽지 않네요. 솔직함이라는 것이 자기의 본 바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인데, 나 자신의 맘을 나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 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나의 처지가 편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실 요즘처럼 막막한 때도 없습니다. 
일본에 와서 8년에 들어섰는데 교회도, 아이들도, 내 앞길도 아직까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8년 동안 배운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라는 한 가지 깨우침이기 때문에 더이상 이 문제에 빠져 죽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항상 최선으로 주시겠지요...

삶의 속도가 분주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 것들이 흔하게 지나쳐 사소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고집만 부립니다. 
하나님 난감하실 겁니다. 이미 다 주었는데, "이게 다예요? 정말 최선을 다하신 겁니까? 이게..." 하고 있으니. 버르장머리 없는 피조물 같으니라구...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하루 살아있는 이 자체가 정말 감동하고, 감사할 일인 것을. 천하의 부동산보다 하루의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건물이 아니라 몸이 귀한 것을. 옷보다 기쁨이 귀한 것을. 음식보다 편안한 마음이 귀한 것을. 돈보다 사랑할 사람이 귀한 것을. 언제쯤이면 깨달을까요...

제발 속도를 줄이세요. 그리고 자신과 주변을 향해 눈을 열어 주세요.
함께 사랑하고 격려할 사람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또 귀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른 세월을 분노와 미움으로, 허영과 무관심으로 낭비하지 말자고요.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자고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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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5일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떡으로만 사는 인생

본문 : 마태복음 4:1~4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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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

목회/목양칼럼 / 2013. 4. 16. 23:18

<충만>

성경이 말하는 '충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가르칩니다. 정확하게 그림으로 묘사하면 차고 넘쳐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동적(動的)입니다. 계속 공급되고 그래서 계속 흘러넘치는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말을 성경은 사람에게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그릇은 채워짐을 통하여 넘쳐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흘러 넘친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 후에, 남는 것을 거두어 12바구니를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버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산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화전(火田)을 주로 가꿉니다. 그러나 가끔은 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논은 계단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논은 반드시 수원(水原)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부는 일단 가장 높은 곳의 논을 가로막아 물을 채웁니다. 논에 물이 일렁거려 벼를 키울 수 있게 되면, 둑을 열어 다음 논으로 물을 흘려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이 채워지면 그 아래 논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충만은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충만의 흘러넘침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충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으사 충만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건강이든, 물질이든, 신앙이든... 자기만 채우려 하는 자에게는 충만의 물줄기가 옮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충만한 것을 다른 사람의 충만으로 이어갈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계속 흘러 넘치는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충만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만한 삶이 계속되도록 관리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충만하신 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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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같은 전범국가의 길을 걸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전후 70년, 그러나 아직도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던 독일군에 대하여 법정에 세워 죄를 묻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도 새로운 근무명단이 발견되면서, 이 명단의 사람들이 과연 모두 법정에서 죄를 받았는지 검토하고, 아직 세워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추적하여 그를 법정에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http://j.mp/ZsAoJe

일본은 전범들에 대하여 오히려 애국충렬지사로 둔갑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그러하고,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미화하는 작업들이 그러하다.
이런 일들이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못지 않게 비참한 피해를 입었던 주변의 국가들에 어떤 정신적 2차 피해를 주는 것인지 전혀 개의치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일본을 강하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는 점만을 생각하다는 점에서 군국주의 망령은 아직도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 하시고 은혜를 주셨다. 그럼에도 성경은 계속해서 '회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양보하지 않는다.
이것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더이상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회개'는 어차피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에 있어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죄를 모두 깨닫고 모두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자기를 다스리고 고쳐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거룩도 가벼이 여기고,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의 추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도원에 6개월 들어갔다 오는게 회개가 아니라, 회개는 자기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안 그렇게 생각하는가?)

누누이 말하거니와, 일본은 부흥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대국이 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불행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보라. 평화헌법을 개헌하고 세계분쟁지역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이 거론되고 있으며, 핵무기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한 국가의 군사적 자위권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왜 평화헌법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일본이 과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경찰의 역할을 감당할 만큼 주변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과거를 청산했는지 살펴 본다면... 이 모든 시도들은 격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과거 군사대국의 힘을 길러 군국주의를 일으켰던 '망령의 부활'이라는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본은 부자다. 때문에 그 위신을 내세워 '사과합니다'라는 한 마디에도 인색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돌려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과는 주변국가를 감동시키지 못하며, 때문에 과거의 상처는 매년 거듭되는 덧남의 과정을 통해 우리 곁에 다시 살아나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전후 70년이 지다도록 이웃에게 미움을 받고, 멀리 서구와 미국에서 대신 위로를 얻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버린 것 같다.
그에 비하여 독일은 매번 총리가 유감과 사과를 반복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범에 대한 재판을 계속함으로써, 불행의 불씨를 스스로 털어내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류적 범죄는 법정에 세워 그 정의를 묻겠다는 독일의 결심은, 일본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자세가 아닌가 한다.
나는 두 나라의 태도를 통해,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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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 목양칼럼


기도의 좌편에는 이성이 있고 우편에는 신비가 있다.

양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비로소 기도가 하나님을 구하는 시간이 된다. 

이성은 교만을 부르고 신비는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가 그 양편의 유혹을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깨닫게 된 사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모든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제대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은혜인 것이다. 설사 나의 기도가 응답되든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고, 열심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기도를 보장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의 열심이 개입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욱 삐뚤어질 가능성이 증가한다. 


누군가는 기도를 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정의하겠지만, 나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반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은혜이다. 이 은혜가 없을 때에, 우리가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과 시간은 종교적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들에 대하여 '이방인들의 구함(the Gentiles seek)'이라고 명명하신 적이 있다.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기도의 오솔길은 무수한 방해와 함정들의 곁을 지난다. 당연하다. 우리는 대체로 보물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길을 감수하지 않던가! 그 길 끝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용기를 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용기를 가진다고 길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우리가 오독(誤讀)할 경우를 위해 좋은 안내자가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다. ‘성경’이라는 지도와 ‘성령’이라는 안내자를 통해 우리는 위험한 길을 안심하고 지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확실하게 붙들어야만 가능하다. 지도보다 나의 감(感)을 더 믿던지, 아니면 안내자의 지시를 무시할 때 우리는 언제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하라. 맹목적으로 기도의 시간만을 늘리고, 무수한 욕망을 구하는 것으로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 잘난 척도 말고, 신비한 경험을 쌓으려 하지도 말라. 그런 위험 속을 차분하게 걸어가라. 한 손에 성경의 등불을 들고, 한 손은 안내자 되시는 성령님을 붙잡고 앞으로 가라.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라. 그것이 진짜 기도이다... 부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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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성경 : 마태복음 3:1~4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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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j.mp/ZGwQ56)


2013-04-07 목양칼럼 ::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른 중반에 목사가 되어 10년을 넘게 사역을 해오는 동안, 계속해서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행운(?)으로 아직 장례를 집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태어남이 흔한 만큼, 어디에선가는 죽음이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새들백교회 이야기>로 잘 알려진 릭 워렌 목사님의 27살난 아들, 매튜가 집에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미 1년이 넘도록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또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청년은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일을, 과연 어떻게 그 가족들이 보내고 있을지 숙연한 마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남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국에는 모두 영원한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 이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살아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신중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완성해가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사명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우호적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평소의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가난, 질병, 경제적 파산, 소외, 신앙적 혼돈… 자칫 한 순간에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은 무수한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여행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후1:8)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신앙이 있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죽음을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행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다 헤아릴 수 없고,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 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은 너무나 또렷하여 곧잘 우리의 이성을 압도합니다. 

이런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의 느낌과 생각을 함부로 판단할 성격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다만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하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결코 ‘사는(Living)’ 가장 기본적인 사명조차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연대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 우리 옆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더 사랑하고 관심과 격려를 서로에게 보여주도록 합시다.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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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뗀 아이처럼

목회/설교 / 2013. 4. 1. 23:23


2013-03-31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젖 뗀 아이처럼
본문 : 시편 131:1~3


(131: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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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목양칼럼 :: 


간디의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1895~1982)는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일으켰다.

1951년 포참팔리라는 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조그만 땅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비노바는 그들의 탄원서를 주정부에 제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한 부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땅 100에이커를 기꺼이 헌납했다. 이 사건이 비노바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노바는 그 때부터 인도의 전국을 돌며 지주들을 설득했다. 비노바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도둑질은 범죄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는 것은 도둑을 만들어내는 더 큰 도둑질입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존경까지 얻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에게 네 명의 가족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다섯 번째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소유한 땅의 1/5만 내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결국 비노바는 400만 에이커의 땅을 기증 받아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과 나누었고, 이 일은 서구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기독교가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이 '십일조'라는 연보에 성실히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약적 제사의 전통이 과연 신약의 연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느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더우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십일조의 비율은 강조되었으나 그 연보가 가지는 의미(목적)는 소홀히 여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나 되고, 그것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레위인의 삶을 보장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것에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신자는 많지 않다. 

참담하게도 교회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이 같은 연보의 정신을 왜곡했다. 연보는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더이상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미덕인 것처럼 교훈되고, 신자들은 직분을 받으며 십일조의 의무는 맹세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가 가지는 공의와 자비의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

자크 엘룰이 말한 바와 같이, 뒤틀린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이방인만도 못한 유대인들을 열매로 낳았다. 이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 행실은 무익한 돌맹이 만도 못한 신자들이 양산되고, 때문에 교회는 더이상 이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 3:9, 개정)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생각해보자. 앞에서 꺼낸 비노바의 이야기를, 잠시 우리의 교회로 옮겨와서 함께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교회마다 전국을 돌며, 성경적인 십일조 운동, 곧 모든 신자들이 그 재산의 온전한 1/10을 하나님께 드려서 이 시대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구제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과연 얼마나 호응이 일어날까?

첫째,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의 순수함을 믿어줄 수 있을까? 목사들이 돈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둘째, 신자들은 과연 소득의 십일조가 아닌 재산의 십일조를 선듯 내놓을 수 있을까?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말이다. 셋째, 과연 그렇게 모아진 재화가 또 다른 조직과 이름과 욕심을 잉태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사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 돈에 관한한 근본적으로 신뢰가 이미 깨어졌고, 교회는 뒤틀렸다. 참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연보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연보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열렬한 호응과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원하여 드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연보를 거두는 방식보다 연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뜨고 성경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교회가 실현하려면, 결코 교회가 부유해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상식으로, 사회적 인격으로 말해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노바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도둑질은 나쁜 일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도둑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더 나쁜 일이 아닌가.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를 제한하는, 이같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세울 공의와 자기부인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고난주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나름 금식과 기도로 자기를 돌아본다. 경건한 글을 보고, 말을 조심하고, 십자가를 묵상한다.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앞으로만 달리고 돌아봄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색깔을 지켜가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 개인적인 경건의 밖에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도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맘몬이 전능한 신으로 군림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빵을, 옷을,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겠다. 이번 부활절에는 다만 예쁘게 색칠된 계란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나누어 지기를 바란다. 샬롬~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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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 안의 생명

성경 : 요한복음 15장1절~6절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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