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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2 교회와 이단, 그리고 그리스도인
  2. 2013.06.09 부르심
  3. 2013.06.02 갈릴리의 예수
  4. 2013.05.31 정말 좋은 보험 이야기
  5. 2013.05.26 무엇을 경배하며 살까?
  6. 2013.05.24 인생의 타이밍
  7. 2013.05.21 신앙에 비법은 없다
  8. 2013.05.19 시험의 인생2
  9. 2013.05.12 시험의 인생
  10. 2013.05.11 믿음이 궁금해요!

 

이단과는 인사도 말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다른 잘못에 대하여는 관대한 사람들조차 '이단(異端)'이라는 말에는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봅니다. 일부러라도 단호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와 같은 교훈을 교우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이서 10~11
(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아마도 이 성경구절이 이단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용기를 더하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성경구절을 강력하게 실행하도록 강단에서 목사가 자주 설교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와 이단

 

사도요한의 편지는 A.D.80~9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하지만, 90년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시기에 교회는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증거하신 것은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 복음을 증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유대교 안의 변혁적인 움직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실체가 드러났고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율법'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유대교와 결별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유대교가 기독교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유구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탈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한 것, 부흥시킨 것이 기독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회당은 초대교회에 있어 분명 선교의 장이었습니다. 유대교의 모순과 결핍을 깊이 이해한 전도자들이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뛰어든 전투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증거한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하고 위험을 겪었는지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필연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소위 '이단'의 발현입니다.
제가 필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단을 교회가 조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이미 강력한 종교적 공동체였던 당시의 회당과 이방종교의 아성을 선교했고, 그들을 대거 신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고된 성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자기가 가졌던 기존의 선입관을 지독하게 바꾸지 못합니다. 때문에 유대인 교우들은 ‘율법’에 집착했고 이방인 교우들은 ‘성적 방종’에 집착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나타난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었고 실제로 이단을 발현하게 만든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다고 모두 거듭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교회는 수구적인 성격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이단에 방어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서신이 기록되는 주후 90년경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단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가 이미 교회 안에서 마무리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단이 무엇이며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교회 내부적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단

 

이단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명칭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 명칭에서도 중요한 의도가 읽혀집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라는 뜻으로 영지주의(그노시스)와 같이 이방적인 가르침을 교회 안에 가져와 복음을 변질되게 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으로부터 그 전례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하거나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유대적 전통, 율법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명칭입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자신만 파선할 뿐이 아니라, 주변에 파당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함께 파선하게 하는 위험적 요소입니다. 때문에 이들에 대하여 선을 긋고 교회의 건강한 교리와 교우들의 신앙을 보호할 필요가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앞에서와 같은 강력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적 대처에 앞서서, 먼저 이단에 대한 많은 논의와 검토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변질된 복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단호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그처럼 간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을 연대적으로 나열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후대의 서신에 이르기 이전에는 정죄보다 교훈, 책망, 권면 등의 방법이 선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교회가 단합하고 포용하기 위하여 관용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상반되는 태도가 모두 강조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사수하려는 의지와 그릇된 사람들을 교정하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의지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지의 결과에서, 교회는 진리를 우선하게 됩니다. 즉, “좋은 게 좋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입장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러나 죄인의 죄조차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은혜를 주시지만, 의와 불의를 단호하게 가르는 ‘심판’은 필연적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그릇된 신앙, 이단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극히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계속되는 이단 시비를 겪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적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아주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교회 안에서도 입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평안이 없는데 교회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신자들이 줄어가는 상황에서 ‘이단’이라는 경고의 신호가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도전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가진 복음을 확인하고 무엇이 위험한 신앙인가에 대하여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이단을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적인(혹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단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왔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에 ‘많은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신앙을 정죄하는 일은 권장될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자제되어야 하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단의 문제 앞에서 이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무엇이 바른 복음과 그에 따르는 신앙인가를 검증하는 일에 더욱 치중하였습니다.

바른 복음을 변증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한 것의 이면에는, 잘못된 신앙을 따랐던 사람들이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타는 사랑과 복음이 진리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복음이 그 어떤 변질된 복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복음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이 교회 안에 있어 왔기에 인내와 관용의 태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가짜가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것을 알고 나면, 모든 가짜는 자연스럽게 확실해진다.”

 

교회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영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회에게 언제나 구원의 대상이며, 긍휼의 대상입니다. 비록, 이단에 넘어가 교회에 위해(爲害)를 가하고 싸움을 거는 사람이라도, 교회의 한결같은 근간은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 있습니다. 이 근간을 망각하고 ‘사람’ 자체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 과연 바른 신앙의 태도일까요?

 

이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없었던 시절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현실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영적 전투의 한 실제가 바로 ‘이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사나운 불화살 앞에서 우리는 두꺼운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담대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때문에 이단을 끊어 멸절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단의 물건을 불매운동 한다든지, 혹은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여는 가계를 교회에서 공지하여 교우들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든지, 혹은 사회적으로 소송을 거는 일은 그 실효성이 의심됩니다.

대표적으로 통일교의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해 왔지만, 하나도 망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권에 민감한 시기에 개인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공격은 오히려 부작용만 낳습니다. 그가 이단이든지, 아니든지 이런 방법은 결코 교회다운 선택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애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교회는 이 즈음에서, 교회의 위대한 유산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싸움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과거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이 싸움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왔고 또한 승리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은 발호했다가 사라졌지만, 교회는 건전하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의 생명력에 대한 확신, 진리를 수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깊이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단의 공격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질입니다. 우리가 과연 얼마나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가? 얼마나 교회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단들과 교회를 차별성이 있게 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교회다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단의 득세(得勢)를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다수결과 황금에 의하여 지배 당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보다 강력한 손이 있어서,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믿는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잠시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려움과 핍박에 처하게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교회를 망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이미 지난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까!

 

정치가들은 ‘위기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 정치에는 ‘위기’가 단골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사건을 조작하고 소문을 퍼뜨려서라도 선거에 앞서 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위기야말로 내적인 갈등을 덮고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불필요한 전쟁이 수없이 수행되어 왔습니다. 목적도 없는 전쟁의 실제적인 원인은, 탐욕과 권력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몇몇 지도자의 선동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시대를 피폐하게 하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의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무너지는 교회의 이면이 이단입니다. 교회가 단단하게 결속하고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이단은 지금처럼 힘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타깝게도 진리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유행처럼 변질되고, 교회는 세미나와 학습기관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복음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목사들부터 외치는 바와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회는 이단의 발호조차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검열을 통해 복음의 진리성을 회복하고, 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신자들을 열성으로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선동하고 공격하고 소송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에만 급급해 있다고 보입니다.

 

원수가 나의 거울이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에는 언제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움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니이체가 말한 바와 같이, 심연을 오래 바라보면 그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미워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미움의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원수’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나로부터 끊어내기 위해서는 미움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단에 대한 불타오르는 증오를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그 조직력, 금전에 대한 탐욕, 사회적인 세력의 과시, 정치적인 세력화, 사람들의 자유를 겁박하거나 조종하는 행태는 모두 ‘교회’의 그늘이 아닙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교회가 분노하고 미워하는 그 양태를, 우리가 이미 해온 것이 아닙니까? 모양은 같은데, 다만 정식 신학교를 나오고 건전한 교단에 속한 사람이 행한다고 하여서 어떤 것은 우리가 변호하고, 어떤 것은 우리가 극렬하게 미워한다면 과연 우리는 정의로운 것일까요?

 

교회가 정작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단은 고려의 대상이고,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정작 ‘진리의 보존’과 우리 자신의 변질을 두려워하는 ‘영적 싸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내가 괴물이 되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타자로 보여지는 괴물을 통해 우리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다워야 한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본래 ‘다른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통시적으로는 주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시작은 비슷하지만 그 결론이 달라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이단의 세상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세상이 큰 틀에서는 모두 이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를 믿고 투쟁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의 방법으로 수행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단을 부끄럽게 해야 하며, 인격적으로 압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통하여 차별화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맨 처음에서 사도요한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 ‘인사’조차도 금하라고 교훈한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첫째, ‘너희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부적으로 반드시 분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마치 타락한 목사를 방치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사’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간단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제한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형제와 가족의 의미로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릇된 교훈을 교회에 퍼뜨리는 사람과 형제의 교제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서로 통하지가 않으니까요…

 

요한의 서신은 세 개가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첫 번째 서신에서 형제의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강력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구절만이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의 서신에 나타나는 교훈은, 단절이 아니라 극복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교훈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일서 3:17~18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아픈 교훈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떠난 부분을 선명하게 지적하며,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 말입니다. 이런 교훈이 교회 안에 살아날 때에, 비로소 교회는 암담한 현실을 돌파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공격성이 아니라, 회개와 사랑의 위대한 능력 말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피상의 저편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천국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곳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이며, 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체감할 수 없는, 말하자면 산 자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며,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 나라는 내가 성령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에 누리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람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후보입니다.

땅속에서 금을 캐내는 사람들조차 순수한 황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돌과 섞인 금광석을 얻어 그것을 도가니에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금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각양 사연을 거쳐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타락하고, 그릇된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서 사람을 버리는 것은, 마치 금광석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도 유대교에 특심한 사람이었고,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빠져서 어머니도 몰라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부어져 마침내 그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불타는 인생을 살게 하였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런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불가능하겠습니까?

 

소망의 확신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 관계를 끊고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교회도 역사 속에서 모두 사찰이 되어 산이나 광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에 목마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마치 외과의사가 암을 도려내는 수술에서 깊이 고뇌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싸움을 싸우지만, 악한 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교회는 마지막까지 교회답게 싸워야 하고, 죽더라도 그렇게 죽어야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악한 자의 방법을 차용하는 순간, 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자는 이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의 정의는 우리들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안절부절 하고 불안에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은 부정적인 그림을 자꾸 주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강력하고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세상에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의 환상과 같이, 성전의 문지방에서 터져 나온 샘물이 강이 되어 온통 광야를 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전할 것입니다. 결코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복음 안에, 성령 안에, 믿음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할수록 교회는 강력해지고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시대의 어둠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어둠은 단지 우리가 가진 빛을 더 멀리, 더 밝게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이해 속에서 우리는 소망을 더욱 크게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대형교회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사회적인 평가도 아니고, 여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들리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바를 확신하고 그 성경대로 나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하면 사회는 언제든지 변혁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나 자신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마음에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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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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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목회/설교 / 2013. 6. 9. 21:57


2013-06-09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부르심

본문 : 마태복음 4:18~22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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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예수

목회/설교 / 2013. 6. 2. 20:21


2013-06-02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갈릴리의 예수

본문 : 마태복음 4.12~17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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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보험 이야기


불확실한 미래로 인하여 불안이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 어느 시절보다 보험이 흥행을 합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세대가 보험에 가입하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가지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장한다는 말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도 생깁니다. 결국은 금전의 보상으로 미래를 보장한다는 말인데... 정말 돈이 있으면 미래가 보장되는 것일까요?

사회보장제도가 가지는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도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생존의 조건, 곧 빵의 수준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간혹 사회보장을 통해 문화와 정서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보기는 하지만,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빵이 해결된 이후의 빈곤은 상대적 빈곤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소의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해서 충족되지 않습니다. 보다 깊이 생각할 때에, 그것은 정서의 문제이며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돈은 빵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정말 미래를 보험에 들고 싶다면 빵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하여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빵만을 준비하고 내 영혼아 평안하라 말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 보람입니다. 좀 더 인격의 품이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근본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돈이 있든지 없든지 삶의 방향이 일정하고 스스로 자기를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하게는 살 수 있어도 불행하게는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결단과 성숙의 문제입니다. 

좋습니다. 서너 가지의 보험으로 늙은 시절의 빵을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보상까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이성적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합니다. 그것은 빵을 위해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노력하는 당신이 과연 행복을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과연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빵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빵을 사소하게 여기는 특성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철학의 기초입니다. 빵만 가지고 사는 인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면 인류의 문명은 훨씬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보십시오. 빵 이외의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생각도 없이 떠밀려 살아가며, 심지어 미래를 돈으로 사 보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주문을 외우는 백치의 시간이 아닙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고, 자기 삶의 의도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하고, 복종의 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의 훈련은 우리의 세월을 잡아 줍니다. 거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성숙해져 가는 한 인간으로 세워갑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미래, 아름다운 노년을 보장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백향목 같고, 감람나무 같은 인생의 비결입니다.

보험료 꼬박꼬박 납입하시죠? 밀리면 보장이 취소되잖아요... 보험회사 무섭죠?
경건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을 느슨하고 게을리 하는 사람은, 언젠가 그 값을 비싸게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빵이 없는 노년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노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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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6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무엇을 경배하며 살까?

본문 ; 마태복음 4:8~11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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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은 어떻게 태어날까?

좋은 사진기가 있어야 하고, 사진 찍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사실 익숙한 사진기는 몸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운전에 익숙한 사람이 거의 본능적으로 운전을 하는 것처럼, 사진기 역시 그것을 담고 싶은 사람의 의도대로 작동된다.

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배운 다음에도 좋은 사진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배워야 할 것은 기다림이다.

순간을 담아내는 작업이다보니 그 '순간'의 포착이 결코 쉽지 않다. 그 순간을 사진기를 들고 만나야 하고, 또한 포착하는 것에 실수가 없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진이 얻어진다. 그래서 사진은 운명이고 예술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숲에 들어가 자연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에 인격적으로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에게 먹이는 사진을 얻으려면, 둥지를 확인하고 서너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그러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사진을 쉽게 얻기 위해 손을 댄다. 둥지를 높은 가지에서 사진 찍기 좋은 가지로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린 새끼를 둥지 밖으로 끌어내어 어미의 모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안타까워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야 한 장의 사진을 얻고 안 얻고의 문제지만, 둥지에서 끌려나온 새끼는 땅에 떨어져 죽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어미새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부자 되려고 제비 다리 부러뜨리는 현대판 놀부가 아닐 수 없다. 

장난으로 던진 돌팔매에 개구리가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의 돌팔매는 미숙함에 대한 이해로 가려줄 수나 있다. 이 어른의 몰인정과 이기심은 '욕망'이라는 정죄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이들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탐욕을 찍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진에서는 그 사람의 자화상이 나타난다. 슬픈 일이다...


인생은 타이밍으로 가득 차 있다. 

노력도 해야 한다. 좋은 사진기를 사고, 사진을 잘 찍는 기술을 익히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슨은 그 노력을 장려하기 위해 99%의 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사람의 노력이 가지는 의미는 1%일지도 모른다. 

나머지는 만나는 은혜이다. 그 타이밍에 내가 거기 있고, 내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준비되어 있고, 내가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운명을 '섭리'라고 부른다.

섭리라는 말은, 내가 만난 환경뿐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인식의 깨달음이 담긴 언어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게 급히 나타나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 새로운 이름이 '여호와 이레'이다. 물론 그 이름의 배경에는 수풀에 걸려 있었던 숫양이 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숫양에 불과할까?


창세기 22:13~14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타이밍을 잡는 사람들은 알아야 마땅하다. 그 타이밍은 내가 만든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 타이밍에 참여하고 쓰여지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게 아무리 좋은 사진기가 있고, 내게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준비되어 있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이다. 

무엇보다 나를 준비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내가 쓰임받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고개를 들고 우쭐거리면 참담한 상황이다. 때로는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성공의 빛을 급히 바래게 만든다.


아직도 자신의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리가 없다. 기다리는밖에.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도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성경을 묵상하면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부연하고자 한다. 타이밍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타이밍을 인간의 방법으로, 더 나아가 '거짓'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이런 짓은 우리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예술에서 천박한 사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니 정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도도한 자존심을 지켜라.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라. 하나님이 주실 타이밍을 잡기 위해 바짝 긴장하는, 사진가의 그 마음을 포기하지 말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의외로 타이밍은 많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군가의 타이밍을 준비하시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 결국에는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해주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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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비법은 없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There is no royal road to learning.)
그래서 학문은 평등하고 명예로운 것이다. 
현실에는 쪽집게 과외, 쪽집게 학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명성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중히 말해서,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시험에 합격을 시키는 훈련이지 배움과 앎,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학문과는 엄연히 다른 변종이다.
그래서 성공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성숙은 주지 못한다. 
결국 사회적 성공을 하더라도 스스로 행복하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과연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빛 좋은 개살구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면, 신앙에도 지름길이 없다. 쉽게 가는 법이 따로 없다. 
십자가의 길을 쉽게 가려는 모든 욕망은 결국 마귀의 시험을 부르고 신앙을 파선에 이르게 한다. 
그러니 쉬운 길로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욕구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없는 것을 우리의 욕망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목사로 신분을 공개하고 10년을 살다보니, 여기저기에서 기발한 소식들이 찾아온다.
제일 웃기는 것은 '목회의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이다. 목회의 비법이라니... 

차라리 나에게 제대로 믿는 법 좀 가르쳐 다오. 
모태신앙으로 살아왔고, 16살 이후에 회심을 경험했으며, 24년을 사역했고, 10년이 목사였는데... 나는 그래도 내 신앙의 길에 고민이 많다. 사회적 성공보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소원이 더 간절한데 이게 풀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목사가 무슨 소용인가? 진실로 목사가 되지 못하면 큰 교회가 무슨 소용인가? 결국 허망한 욕심을 부추기는 부채질 속에서, 우리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앙에 쉬운 길은 없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길이다. 때문에 비법 따위도 없다. 그저 묵묵히 매일 성실하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를 부르신 주님을 의지하여 믿음의 길을 날마다 가는 것이다. 

힘들어도 가고, 아파도 가고, 배고파도 가고, 외로워도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길 끝에서 나사렛 예수가 두 팔을 벌리고 우릴 안아 주실 것이다. 그 날까지 가고 또 가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진실로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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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인생2

목회/설교 / 2013. 5. 19. 15:46


2013-05-19 동경드림교회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시험의 인생 (2)

본문 : 마태복음 4:5~7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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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인생

목회/설교 / 2013. 5. 12. 21:41


2013-05-12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시험의 인생

본문 : 마태복음 4:5~7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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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간섭들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일반적 혹은 이교적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차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교회에 나온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할머니는, 절에 다니던 믿음에 그대로 교회의 옷을 입히려고 하셨습니다. 새벽이면 추운 계절에도 찬물로 목욕을 하고 새벽예배를 나오시고 기도를 밤새워 하시면서 한 가지 말만을 주문처럼 반복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모든 고난을 본인이 하나님께 정성을 기울이지 못해 생기는 일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복음을 믿은 것일까요? 물론 나이들면 사람이 굳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내적 변화입니다. 의외로 더 나이드신 분들도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 입문(?)하면 표정이 편안해지고 행동과 생각에서 은혜의 꽃이 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외람되지만, 그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복음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이나 신뢰, 혹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비슷하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믿음'을 그런 안경을 통해 풀이하는 것은 부적당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있어 성경적인 것을 받아들이려는 결심을 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추측을 하면, 성경과 경험 혹은 미신이 짬뽕이 되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혼돈에 빠뜨리게 됩니다.

요즘은 강단에서도 인문학의 책을 인용하여, 역으로 그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부당합니다. 인문학은 성경을 설명하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성경을 풀이하는 해석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지식이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계량할 수 있나요?


믿음은 성경 속에서 가장 유구한 주제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강물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는 믿음과 소망이 언젠가 폐하여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가볍지 않은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심플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많은 헛점을 가지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심플한 것을 좋아합니다. 복잡한 것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이고 자신들은, 아주 적당하고 간결한 진리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구는 자칫 그릇된 확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하여 치명적 오류, 혹은 오해를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한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믿음'을 사람이 계량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나누거나 분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입니다. 


삼상 16:6~7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반하였습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단지 정말로 외모만 보았을까요? 사무엘은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Surely)'이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는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감이 엘리압을 통해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외모(the outward appearance)'라고 이해하는 것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라고 언급하셨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아인'은 본래 '눈(eye)'을 의미합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지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만족은 경솔하거나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을 버리는 슬픔과 현실적인 왕을 배반하는 반역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새로운 왕을 찾아나선 사무엘이 어찌 이 일을 가벼이 여겨 경솔하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찾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의 미스(miss)는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적인 심연, 곧 '중심(the heart)'을 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그릇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사울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버림을 받고 다윗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 이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격적 결함이나 지식의 부족이나 심리적 트라우마는 모두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으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무엘도 믿음은 계량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해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적 관점에서 '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 받은 인간의 내면은 가벼이 엿보고 판단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내면의 그릇에 담긴 '믿음'이라는 가치 또한 사람의 판단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령함 속에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사무엘 선지자의 미스(miss)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사람들끼리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논하고, 판단하고,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일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신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목사가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얼마나 흔히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의 근저에 대부분,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경솔한 확신과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잘못 전달되어, 신자들은 목사가 사람들의 믿음을 계량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신뢰를 자신의 믿음 좋음의 표지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 믿음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말씀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그 실체를 발견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외적인 환경,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직분, 혹은 기능적인 업무에 의존하여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결과를 주게 됩니다. 


(3)

믿음은 정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한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좋은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흔한 구호에 그런 것이 있지요. 큰 믿음을 가져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해 쟁취하라. 등등...

심지어 '믿음'의 한 단면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씨름은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기술을 뜻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과 전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참 곤란한 무대포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귀신 들린 한 아이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씨름(전투)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이에게 들어 있는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 본문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모두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 17:17,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막 9:19, 개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눅 9:4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보통 마가의 본문이 가장 처음이고, 마태와 누가의 복음이 그 다음을 따르는 시대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담당합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기억했고, 마태와 누가는 그 본문에 '패역'이라는 단어를 삽입했습니다.

기록의 시대적 순서가 그렇다고 해서 마가의 본문만이 원문이고 나머지는 기록자의 부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거룩한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함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것이 성경입니다. 때문에 믿음 없음의 한 단면이 패역입니다. 서로 다른 본문이 아니라 서로 보완을 이루는 본문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본문에서 '패역'은 '디아스트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미 70인경(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유태인의 성경, 당연히 신약은 없다)에서부터 39회나 사용된 전례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타락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인간의 본성이 뒤틀리고 구부러져서 거기로부터 나오는 죄의 행위를 뜻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고자 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일을 했던 경험이 제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피면, 마태복음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본에 따라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누군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의 바른 독법은, 그 다름이 조화와 보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내적인 내용이라면, 기도(와 금식)는 그 형식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실패를 마태와 누가는 '패역'이라고 특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부리다, 뒤틀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됩니다. 가위가 있습니다. 날이 서서 아주 잘 자르는 가위입니다. 그런데 충격이 가해져서 뒤틀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그 날카로운 날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자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래의 용도, 유용성에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이게 패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가치 있는 것을 무가치 하게 만드는 악한 경향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신 32:5, 잠 8:13)

그러니까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간섭하면 즉시로 매우 통속적이고 저열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이 사건의 직후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와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했다기보다 서로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 입지를 견고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심적 상태가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겠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했고, 귀신은 귀신 같이 제자들의 패역한 상태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겨자 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거대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거스려 순수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깊은 자성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든 '패역'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그런 믿음은 겨자 씨 만한 것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그 믿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냐고요?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위의 질문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지에서 조금 벗어난 부연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은혜로 주셨지만, 은혜 받은 자에게는 은혜 받은 자다운 삶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믿음에 부응하는 삶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패역에 넘어간 현실을 기도(와 금식)의 부재로 진단하셨습니다. 좀 더 넓게 이야기 한다면, 경건을 상실한 믿음은 무력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은 평생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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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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