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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道)

-- 성서조선 第 113 號 (1938年 6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라고 하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대개 무슨 의미란 것을 짐작하리만치 널리 퍼진 말이다.

기독교 신자는 물론 누구라도 그 뜻을 알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잘 안다고 자처하는 이가 상당히 많다.   더 나아가 그 의미를 알 뿐 아니라 그 사상과 내용을 동경하며 막연하나마 자기도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 사람도 세간에 적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과연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세베대의 아들들 같은 야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잔이라도 받을 각오가 있다고 뽐낸다.


‘십자가의 도’라고 번역된 본문을 원어의 순서대로 배치하면 “그 말씀 그러나 그 십자가의”가 된다.   그런즉 ‘십자가의 도’라고 함은 골고다로 가는 도로라는 뜻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십자가에 관한 우리의 설명’, ‘우리의 십자가 주석’ 등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바울이 특히 많이 사용한 말이며 그 뜻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업에서 당한 모든 고난의 모양’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따라가려는 사도 바울의 설명이다.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그 철저하게 겸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애는 모든 통상적 인간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그 ‘십자가의 도’를 모든 사람들이 너나없이 사모한다, 믿는다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일대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인가 친구들끼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는 우리는 서로 놀랐다.

갑 : “오늘날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한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각각 확고한 각오를 가져야 한다.   더군다나 주부라면 신앙 때문에 가장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결심을 하고 굳세게 신앙의 길을 지켜나갈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을 : “살림살이는 있는 힘껏 어떻게든 하겠지만 믿는 가정이 그렇게 참담하게 된다면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욕되지나 않을까?   전도가 막히지나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은 ‘십자가의 도’와는 정확하게 180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신자의 사상과 관념을 대언한 고백이며 또 우리 각자의 신앙에 어느 틈엔가 자리를 잡은 신조가 되어 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을 하면 병약하던 자는 건장해지고, 없이 살던 자는 부유해지고, 실직했던 자는 취직이 되며, 지위가 낮던 자는 승진되어 신임이 두터워지며, 자녀가 없던 가정에는 옥동자가 생기며, 불화하던 식구는 화목해지는 법인 줄로 안다.   어떤 전도자는 이런 모든 조건을 전도의 미끼로 까지 이용하려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십자가의 도’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2~38)


또 ‘십자가의 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누가복음 12:49~53)



이처럼 명백한 ‘신도 모집 광고문’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누군가에게 속아서 예수를 따르면서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 살림을 바라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를 지나가신 예수의 겸비 고난의 온 생애의 원리 그대로의 생활.   이것은 거듭 나지 않은 천연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원할 수 없는 길이다.   희망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비극을 전제로 한 길이다.   인간 본연의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길이다.


보라, 유태인들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린 역사는 참으로 유구했다.   그들은 기대했다.   메시아는 반드시 수도 예루살렘 왕궁의 보좌에서 영광이 황홀한 가운데 오실 것을.

그러나 메시아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객사의 구유에 떨어졌을 때부터 인간의 도와 십자가의 도는 하늘과 땅으로 대립되었다.

예수가 택한 제자와 친구, 예수가 용납한 세리와 음녀, 예수가 힐책한 종교가와 학자 등등으로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는 신분에 상응한 대접도 받지 못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 참담한 시체를 걸기까지 아아,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예상대로, 기대대로 되었던 것이 있었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   아, 과연 알고 따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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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목양칼럼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맞는 말이다. 신앙을 인격과 삶의 일부로 생각하는 한,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을 전부로 여기고 선택할 때에, 비로소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함정도 있다. 
세상 모든 돌이 황금이라면, 과연 황금을 귀히 여기겠는가?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예배와 경건의 의무를 가벼이 하는 변명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청년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은 화장실에서도 기도를 하고, 버스를 타고도 기도를 하고, 평소에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기도를 하며 산다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예수님을 '친구'로 여기는 이런 태도에 매우 우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혹은 모세를 친구와 같이 대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친구로 여겼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신앙을 삶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이라는 기본기가 건강해야 한다.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고, 날마다의 삶에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구별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비로소 삶은 신앙의 지배 아래 서서히 변하게 된다. 
반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며, 날마다 경건의 훈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묵상하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을 정서적으로만 친구로 여긴다면, 그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의 역류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신앙의 오염이다.


사람도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회 시간마다 애통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말과 행동에서 신앙이 깊이 있는 향기로 우러날 때에, 우리는 그가 "예수님은 나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하면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도회는 태만하고, 말은 경박하며, 인격에서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할 수 없는데 "예수님은 나의 친구시다!"고 한다면... 다소의 경멸과 슬픔을 느끼게 될 뿐이다.


신앙은 가벼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먼저 변해야 한다. 단지 말투만 조금 바꾸고 나 혼자 하나님과 친한 척을 한다고 하여서 하나님도 나를 친구로 여기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분의 취향은 매우 섬세하고 까다롭다. 
그분이 우리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만만한 하나님은 절대로 아니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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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0 주일예배설교

제목 : 권력은 위기다 (하만에게서 얻는 교훈)

본문 : 에스더 3:1~6


(3: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3: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3:3)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3: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3: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3: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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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0 목양칼럼

감정은 확성기와 같습니다. 작은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큰 소리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며 만나는 현실이 감정을 통해 확대됩니다. 이것은 나쁘거나 좋거나 하는 대상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고, 감정은 현실을 확대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녹음한 소리를 편집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너무 작게 녹음되어서 그 소리를 다소 키워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소리를 크게 확대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원하는 소리만이 아니라 소음도 크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작아서 알아듣기 힘들었던 소리가 이제는 시끄러워서 안 들리는 소리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소리를 확대한 후에는 소음을 줄이는 노이즈 필터링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감정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감정이 어느 정도 증폭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작용을 통해 인간은 동물과 다른 풍부한 행복과 기쁨,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정의 증폭이 도를 넘으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발이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감정은 정상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노이즈를 확대시킵니다. 

사람마다 특색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뚝뚝하여서 전혀 감정적이 아닐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에게조차 내적으로는 감정의 폭발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오히려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폭발을 억압하는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기형적인 성격으로 발전할 위험도 있습니다.

감정은 잘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그것이 억압되는 것보다는 표현되는 것이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감정적일 때에는, 노이즈 필터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본래의 사실에서 벗어나는 억측, 상상, 부정적인 견해 등을 이성(理性)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주고, 감정의 시발점이 되는 본래의 사실을 확인하여 감정적 노이즈가 ‘사실’을 덮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감정적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체질입니다. 그 체질에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특징을 잘 살피고, 거기에 맞도록 건강한 생활의 방식을 찾아 노력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훈련입니다. 그것도 막 건너뛰는 생각이 아니라, 차근차근 조리 있게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이런 생각의 과정 없이 당장의 감정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틀림없이 후회를 낳습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하는 훈련을 익히면, 오히려 그 민감한 감정으로 인하여 더 사려 깊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혜안(慧眼)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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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히 섬기라

목회/설교 / 2013. 2. 3. 21:00


2013-02-03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진실히 섬기라

본문 : 삼상 12:22~25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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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이번 주간의 과제를 발표합니다.

가정예배,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이 되어서 예배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실천해 주시면 됩니다.


1) 주중에 하루 40분 정도의 시간을 마련하여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입니다.

2) 교회에서 마련한 예배모범을 가지고 남편이 예배를 인도합니다.

3) 교회에서 받지 못한 분은, 아래의 첨부파일(PDF)을 다운하여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4) 가정이 떨어져 있을 때는, 스카이프 등의 화상채팅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5) 반드시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다운로드] 가정예배-01.pdf


매주 한 가지씩 새로운 과제를 발표하며, 벌써 4주에 접어들었습니다.

숙제 밀리시지 말고, 열심히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중보기도의 효과(?)를 은연중에 느끼는 분이 있네요. 

네,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보의 기도에는 반드시 선한 열매가 나타납니다. 

기대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의 과제 정리 : (밀리신 분은 이제라도 숙제를!) ## 나중에 숙제검사 합니다.

1) 마태복음 성경통독 : 반드시 전체를 한 번 이상 통독할 것.

2) 에베소서 큐티 : 교재를 받지 못한 분은 블로그 지난 게시물에서 받아 하시면 됩니다.

3) 파트너 중보기도 : 자기 짝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은 목사에게 질문해 주시고, 꼭 안내드린 방법으로 실천해 주세요.

4) 가정예배주간 : 되도록 남편이 가장(家長)으로서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년 2월 3일,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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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3 목양칼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을 통해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언했던 것입니다. (수 24:15)

자녀에게 부와 명예를 물려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자녀에게, 또한 자녀의 하나님이 손자에게 이어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신앙의 유산이야말로 신자에게 가장 복된 유산이며, 가장 큰 명예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경박하여 신앙을 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이제는 그것을 교단에서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교회법입니다.

과연 목회자의 일이 고되고, 가난하고, 욕되어서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누리고 살 만 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평생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고 심지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짓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물은 물려줄 수 있으나 참된 신앙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순간, 그의 사역이 병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의 신앙도 망치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물려줄수록, 더 화려한 것을 물려줄수록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성전에 바쳐져서 엘리 제사장의 손에 컸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어린 시절에 광야에 나가 약대 털옷과 메뚜기, 석청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한없이 안락한 삶을 누린 자녀 중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을 부모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감싸고 피하게 하는 일이 과연 그 자녀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는 자기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타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자식의 생김새가 나와 비슷하고, 그 성장의 모습이 자기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지독한 이기심으로 나를 망치게 되는 것처럼, 자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마땅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식을 나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나의 계획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의 자녀사랑이 삐뚤어져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행사하고 그 장래를 망치게 됩니다.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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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Avenue-GuysAndDolls01

 

아가씨와 건달들.
1920년대 미국의 뉴욕을 배경으로 뒷골목에서 도박으로 살아가는 건달들과 그들의 아가씨들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 이야기 속에는 사라라는 구세군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녀의 선교회는 '실적'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그 때에 스카이 매스터슨이라는 도박의 귀재(?)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그날 밤에 하바나(쿠바)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 다음 날까지 '순수한 죄인들' 12명을 그녀의 선교회에 제공 하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스카이는 이 저녁 식사에 이미 그의 친구, 나싼과 1,000달러의 내기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유쾌함으로 이야기는 인간적이고 모두 행복하게 끝이 난다.

 

jazza_guys-and-dolls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구령의 열정으로 무장한 구세군 아가씨 사라와 도박사 스카이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사실, 평범하다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소재가 되지도 못하겠지.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이 순수하지 못할 때에, 사랑은 대단히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순수함에 빠져 그야말로 '순수한 죄인들'을 구령의 열정만으로 끌어 안으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Lauren_Graham_Guys_and_Dolls_by_kitsunegari16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권한다.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하지만, 또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세상을, 특히 사람을 만만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이 내 맘대로 되었으면 고생할 부모가 없을 것이다. 배 아파서 낳은 부모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 자녀를, 나는 애인이기 때문에 맘대로 요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다소 어리석어 보인다. 사랑을 포기하라는 절대 명령은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순수한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사라 같은 여린 아가씨가 품고 책임져야 할 사명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이다.
교회는 본래 누가 보아도 죄인인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왔다. 술 주정뱅이, 노름꾼, 아내를 때리는 폭력남편, 빚쟁이, 좀도둑, 창녀, 노숙자... 누가 보아도 재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들 자신이 교회의 역동적인 힘의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가 놀라고 경외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와 교회의 수평 이동만을 염려할 상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순수한 죄인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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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길들여졌으며, 마치 인스턴트 식품만 먹다가 이빨이 빠진 맹수처럼 구령의 열정으로 도전하고 싸우는 치열한 영적 상황을 잃게 되었다.
더 이상 예배 중에 뛰어들어 아내를 끌고 가는 남편도, 며느리를 욕하는 시어머니도, 술 취한 알코올 중독자도, 사기를 치러 오는 허름한 사기꾼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구령의 열정을 느끼는 '사라' 같은 구세군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만의 교회에서 안전하게 예배하고 싶을 뿐이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 본질적인 바탕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야말로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묘사처럼, 고객이 없어 폐점해야 하는 지점일지 모른다.
상상해보라. 주방장에 서빙, 지배인까지 수 십 명이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에 고객이 달랑 하나, 둘 뿐이라면... 그 레스토랑은 곧 문 닫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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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직분자를 세우고 교인들을 훈련하는 것은, 자기들끼리 잘난 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령의 열정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는 뜻이다.
교회의 대표적인 직분을 처음부터 '집사(디아코노스)'라고 불렀던 것을 살핀다면 이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 말의 의미가 머리에 수건을 쓰다, 식사에 수종을 들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것은 목사를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라.

 

말씀도 그러하다. 죄인과 분리된 교회의 강단은, 야성(野性)이 없다.
당연하다. 별로 죄를 짓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모셔두고 어떻게 신랄한 죄에 대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죄에 대한 날 선 말씀을 계속 듣고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순수한 죄인들'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부대낌과 불편함을 영적 전쟁으로 승화시키고, 말씀과 기도로 싸워 나가는 교회야말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비율이 70:30이라고 생각한다. 80:20이면 좀 안정적이고, 60:40이면 좀 위태스럽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말을 일삼는, 혹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30% 수준이라면, 교회는 건강한 것이다.
때문에 그 문제되는 사람들을 해결하고 100%의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비율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에게 바른 인식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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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큐티강의 네 번째입니다.

큐티의 각론으로 실제 큐티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구절 묵상법
- 질문법

두 가지 방법이면서 한 가지로 사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큐티 방법입니다.
잘 이해하시면, 큐티를 규모있게 하시는 것에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강의 녹화하는 프로그램이 문제를 일으켜서 같은 강의를 네 번 했습니다.
(더 잘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 
겨우 원인을 찾아내서 해결했습니다. 앞으로는 좀 쉬워지겠지요...

목사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꼭 큐티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2013.01.28.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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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오전예배설교

제목 :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신앙생활의 지식 :: RESET 2013 설교)

본문 : 에베소서 1:17~19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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