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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주일설교

제목 : 바울이 전하는 행복

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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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은 인생의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이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 자연과 경쟁을 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자연의 꼭대기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 자신이 인간의 경쟁자가 되었다.

뱀과 사자, 추위와 더위는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저 밖으로 모두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안전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자연보다 백 배, 천 배 더 무섭다.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비정형이다. 불규칙하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하나의 원리로 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너무 많은 예외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가진 하나의 방향성은 있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이 익숙한 단어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위해 움직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러는 서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좀 더 행복할 가능성이 확장되고, 기회가 많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심지어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가?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이 쉽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인간의 마음에, 항상 남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진짜 자리를 바꾸면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나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인간은 이처럼 고민이 많은 존재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하나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깨달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관조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도 한다. 원래부터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그래서 행복도 생각의 방식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을 훈련한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행복’이라는 네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야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착각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아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과 불행을 모두 마음에서 지우고 나면, 과연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느냐? 우리 인생에서 이제 행복 대신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공허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냥 비우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정말 행복은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가문이 훌륭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바울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사훌’이었다.

알다시피, 사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물론 다윗의 등장과 함께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그러나 사훌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물론 유다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훌은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훌이 당신의 조상이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분명한 사실은 베냐민 지파에게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 ‘사훌’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그에게 붙였다는 것은 기대가 컸던 자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은 가정교육부터 엄격하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신명기 암송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들은 특히 총명했다. 배우는 것에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가족은 더욱 그를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어린 그가 바리새파에 입문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리새파에 대한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외식적이고 허영에 싸인 ‘독사의 자식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읽힌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많은 학자와 종교적 지도자들이 ‘바리새파’임을 자랑스럽게 과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말리엘은, 성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걸출한 랍비이다.

그의 학문과 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제국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했다.

그리고 ‘사훌’이라는 청년은 이 가말리엘의 직전(직접 가르치는) 제자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훌이 대제사장을 상대하여, 그의 친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했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사훌이 회심한 후에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총독은 그의 학문이 많아서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로마 제국의 총독이 사훌을 알고 있을까? 그것도 그가 학문이 많은 사람임을 어떻게 알까?

빌립보 감옥에 재판 없이 투옥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인데, 만약 이것이 허풍이었다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사람마다 왕년을 자랑한다. 한 때는 자신이 출세했던 사람이라는 자랑이다.

사도 바울이 정말 그랬다. 그가 세상에 ‘사훌’로 알려졌던 푸른 날들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젊은 그를 세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과 연설에 있어 오만했고, 인맥에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에서 유대인들의 암살 대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어쩌면 그가 자신을 ‘바울’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가는 곳마다 동네에서 매를 맞고, 심지어는 집단구타를 당하고 기절한 것을 사람들이 동네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가는 헬라의 도시마다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이유 없는 부당한 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미친 들개였다. 집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자유인이면서 노예와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병을 무수하게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진 못했다.

 

그가 오늘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기 말한다.

 

 

[ 빌립보서 3:4~9 ]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는 세상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알고, 만나고, 그 예수를 위해 죽고자 했을 때에 그는 행복했다.

그래서 잘 나가던 ‘사훌’은 그에게 배설물(똥)이다. 그리고 지금 미친 들개 취급을 받는 ‘바울’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자신이다.

 

이 파라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그저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 만으로는 부족하다. 빌립보서에 실려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으로부터 우러나는 간증이다. 그것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비유하자면, 소고기맛 라면국물이 아니라 사골을 일주일 동안 우려낸 설렁탕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던진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염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도 염려하고 싶지 않은데 염려가 된다. 어쩌란 말이냐? 놀리는 거냐?”

화내지 말고 들으라.

여태까지 사훌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탈출구를 혹시라도, 모든 염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서 찾았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그래서 문제는 끝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당신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멋진 이성을 만나도, 높은 자리에 올라도, 인맥을 넓게 가져도, 최고의 명예를 얻어도 소용 없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시끄러운 일들이 당신을 좇아 다니며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건 답이 아닌 것이다.

 

내가 답을 못 찾는다고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다. 굳이 행복과 불행을 마음에서 지우고, 공허하게 비우는 것을 목표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은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있다고 말할 뿐이 아니라,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응,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기도하라는 것이구나. 그렇지 뭐. 대충 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비슷한 거 아닌가… 기도하면 된다. 되기는 뭐가 돼! 기도하면 밥이 나와?”

역시 틀렸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훌도 무수히 기도했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기도라는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관계, 그냥 그 분 앞에 앉기만 해도 감사함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계… 그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 없이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기도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거나(우상에게 드리는 기도의 경우와 같이), 다른 하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주소를 잘못 쓰면 우편물이 엉뚱한 곳으로 가듯이,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하나쯤 엉뚱한 번호를 눌렀다고 해서 옆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듯이, 어쩌면 그 기도 자체가 틀려먹은 것은 아닐까?

 

사훌로 살았던 동안, 그는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콧대 높았던 사훌을 길바닥에 꼬꾸라지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친히 물으셨다.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확신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껍데기요, 진정한 행복을 가로 막는 장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허울 좋은 바리새인의 옷을 벗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에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척도가 여기 있다. 그것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남들의 평판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의 위안이나 연민도 아니다.

그것은 감사이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강함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탁 드리는 약함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문제를 맡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믿음에서는 감사가 우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하나님은 절대로 거들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그렇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여야 만족하신다. 우리 마음의 90% 지분을 드려도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신다. 오히려 우리가 드리지 않은 10%를 조명하시고, 왜 이것은 내게 가져오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그게 하나님이시다.

결국 10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신다.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다.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의 인생이 바로 그 원리의 증거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 아주 예민하다. 모든 것을 깊이 살펴서 놓치는 것이 없다.

마치 아기의 필요를 살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예비하는 평강이다.

그 샬롬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볼 때에, 마음과 생각은 같은 대상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각을 이성의 영역으로, 마음을 보다 깊은 영혼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샬롬이 깊이 침투하고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존재, 그것이 이성이든, 영혼이든, 혹은 생각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라고 이름하든지간에 상관없이 그 평강은 우리의 전 존재에 스미고 채워진다.

그리고 우리를 강하게 하며 지켜준다.

 

바울은 이 편지를 서술하는 동안, 감옥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토록 근심과 어울리는 장소에 앉아 이토록 평안한 편지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의 해결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어떤 문제 속에 앉아서도 그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행복의 재정의(再定義)이다. 행복을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라는 안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인간을 향하여, 바로 행복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제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하루 종일 앉아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나는 행복한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밤공기가 차다. 허파를 지나면서 한기(寒氣)는 소름으로 돋는다.

처음에는 상쾌했던 느낌이 점점 추위로 변한다. 급히 문을 닫는다. 답답했던 실내의 공기가 차라리 다행스럽다. 추위가 슬그머니 퇴장한다.

행복도 이런 것일까 두려웠다. 가지고 싶은 열망으로 추구하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순간 또 다른 칼날을 드러내는 두 얼굴의 무엇… 행복의 배신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설레게 했다.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도는 곳곳에서 빛나는 언어로 행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말이 아니라, 행복 자체의 느낌이었다.

나는 사도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고 안도한다.

틀리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는다. 그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복음, 예수 그리스도, 기도, 감사… 바로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평강[샬롬]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한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갈 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당신도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비웃어도, 아직 그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용기를 가지라. 그리고 그 길에 진력(盡力)하라. 곧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넓은 품에 우리를 안아 주시기 위하여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염려 없는 세상에서 우리 만나자!

마라나타, 그리고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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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목양칼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에 묶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보면 기적이 곧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차근히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지극히 칭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크게 놀라며 감동하신다. 다윗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춤추듯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찾고 찾으셨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어 드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세상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주의는 믿음을 선행(善行)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탁월해도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기적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이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에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어 드릴 때에, 하나님은 행동하셔야만 한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영광의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일이 쉬운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불신의 영이 역사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과학, 철학, 상식이 얼마나 유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만연하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서는 성경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굉장히 어렵다. 믿음이 저절로 숨이 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생활은 지속하되 믿음은 버린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목숨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변한다. 역사가 언제나 그랬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으로 뛰놀아도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을 잠잠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는가? 쉽고 간단한 일은 하나님의 손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하라. 하나님을 시시하게 만들지 말라. 거대한 것을 구하라. 감히 아무도 바랄 수 없는 것을 꿈꾸라. 믿음은 바로 그 꿈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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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드린 사랑

목회/설교 / 2012. 11. 16. 20:08



2012-11-11 주일설교


제목 : 자신을 드린 사랑

요한복음 12:1~8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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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 없는 듣는다.

그러나 이처럼 난감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좋은 교회라는 말인가?

물론 성경적인 좋은 교회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그러한 내용에 상응하는 교회를 탐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백인백색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교회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아무리 좋은 교회라도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더구나 좋은 교회를 찾아 떠도는 신앙적 유목민들은 귀만 커지고 눈만 높아진다.

이들이 찾는 좋은 교회의 조건들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이상적이다.

마치 천상에 있는 교회를 지상에서 찾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좋은 교회에는 당연히 신앙적 부담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은 그럼 부담을 피하려고 한다.

신자들을 부담 없이 만들어주는 교회야말로 가장 실력 없는 교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과 세상을 섬기고, 그 십자가의 보상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담스럽지 않은 신앙생활을 원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가?

 

나이를 먹으면서 되돌아 생각을 하니, 교회란 참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의 교회이더라.

꼭 개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때문에 세워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그 헌신이 곧 교회를 세우는 충성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헌신한 만큼 내 교회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땀을 쏟고 애정을 기울여 사랑한 만큼 교회는 남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거기는 벌레가 먹거나 녹이 쓸어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보물을 좋아한다. 보물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황금은 보도블록에 불과하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보물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그걸 아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물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는 사람, 자기 것을 아낌 없이 남에게 주는 사람 말이다.

희귀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보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금이 아닐 뿐이지, 이런 사람들도 자존심, 명예, 자식, 인기와 같은 자기들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결국 원리는 같다. 그 아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헛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제단이 교회이다.

구약적 제사제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교회를 통해 상속되었다.

대속을 위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완성될 수 없다.

그 불완전함이 고통의 이유이다.

하지만 역시 이 불완전함이 바로 은혜이다.

만약 교회가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길이 사라질 것이다. 역설적으로 완성된 교회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교회이기에 우리가 충성할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감사하라.

거기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신앙은 문제를 이겨내는 과정이지, 문제가 없는 낙원이 아니다.

문제와 열심히 싸우다 보면, 성령께서 힘과 용기도 주시고, 위로와 안식도 주실 것이다.

그 과정을 누리고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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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목양칼럼

 

2006년 2월4일, 그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목양칼럼은 거기서부터다. 교회 홈페이지에 333번 칼럼이 걸려 있다. 그게 2012년1월8일이다. 그 후로도 매주 빠짐없이 이 글을 썼다. 더러는 주중에 몇 번 호외를 날리기도 했으니, 대충 400여편의 목양칼럼을 써온 것 같다.

분량은 워드 문서로 좀 빡빡하게 A4 한 장이다. 그것을 폰트크기와 문단간격을 조절하여 주보의 한 페이지에 앉힌다. 이전에는 글이 길어진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가독성을 생각해서 길면 잘라낸다. 그리고 잘리지 않은 원본은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다.

기쁨도 많았다. 어떤 분은 검색엔진을 통해 들어왔다가 목양칼럼의 애독자가 되었다는 분도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품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았다는 분도 있었다. 친구 목사는 이것을 묶어 책을 만들어 보라고 지금도 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이다.

이 칼럼이야말로 내가 목양하는 내 교회의 양무리들을 위한 나의 충성이었다. 그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시의적절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으며,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목양칼럼만 읽어서도 목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은 쓰는 사람의 생각으로 낳는 자식과 같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 온 400편의 글을 헌사 받은, 나의 양무리들(물론 주님의 양무리지만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내가 섬기는)은 이 목양칼럼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그들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필로스에게 헌사했다. 그 정중한 헌사로 인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데오필로스를 로마의 황족이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모든 신자가, 특별히 누가가 목회했을 양무리가 모두 데오필로스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두 권의 책은, 몇몇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무수한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교회를 전율하게 했다. 그 안에 담겨진 신앙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나 같은 말단의 목사를 울게 한다.

감히 누가의 글에 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정서는 같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양무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부디, 이 모든 글을 신문 귀퉁이의 일상적인 잔소리처럼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을 배우고,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성숙함이 자라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면 주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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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敎會)’는 가르침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사실,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교회는 좀 더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니까요.
일본에 와서 보니, 교회라는 이름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부정적인 과오를 많이 저질러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교우카이, 教会)라는 이름을 온갖 종교에서 모두 공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불행이었습니다.
대신할 다른 이름도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단과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교회(기리스도 교우카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정체성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카할(kahal)’과 ‘에다(edhah)’가 있습니다.
‘카할’은 거룩을 나타내는 ‘카도쉬’와도 어근이 같은데, 부르심(call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신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에클레시아’와 쌍을 이룹니다.
새삼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의 무리’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에다’는 집회와 회중을 나타내는 단어였는데, 후에는 장소와 건물에 대하여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겪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은 ‘에다(성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 신앙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절, 유대인들은 열방에 흩어졌고, 그곳에서나마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디아스포라’라는 유대인타운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유대인과만 결혼하고 특별히 율법을 집중적으로 아이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정비된 시스템이 회당과 랍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 3~4세대는 히브리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당시의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했고, 고대어인 히브리어로 율법을 학습할 만큼 원숙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랍비들은 현실적인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라는 모국어와 율법이라는 신앙 중에서 율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 70인경이라는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70여 명의 유명한 랍비들이 모여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원숙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에다’는 ‘쉬나고게’로 번역됩니다. 쉬나고게는 회당을 의미합니다.
(이는 잃어버린 예루살렘성전을 회당으로 대치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 번역으로부터 회중이 건물로 변하고, 종교행위를 위한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본래 ‘에다’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그 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앞에 잠깐 언급을 한 것처럼, 일단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이고, ‘레시아’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불러냈다’는 의미로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교’를 의미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초대교회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과 몸과 피가 신자에게 들어와 하나가 된다고 해설했던 것이 주요합니다.
성찬예식이 예배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초대교회로서는 ‘교회’의 정체성 역시 그 ‘연합’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간의 연합입니다. 요즘은 이것만 강조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면, 다들 서로 친교를 하고 노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간의 친교는 부수적인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되고, 그 결과로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른 교회의 원리입니다.


영어에서는 교회를 처치(church)라고 부릅니다.
에클레시아도, 코이노니아도 아닌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이름은 종교개혁에서 그 유래를 찾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온갖 불법을 저지르던 당시의 카톨릭교회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개혁교회를 구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성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단어를 찾아냅니다.
’퀴리아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였지요.
결국 이 단어를 선택하여 교회를 나타내게 되고, 이 말이 독일에서는 ‘키르케(kirche)’, 스웨덴에서는 ‘쿠리카(kurika)’, 영국에서는 ‘처치(church)’가 되면서, 바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탐구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정리한다면…
1) 교회는 사람이다.
2) 선택과 부르심(은혜)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거룩함이 특징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5) 다른 신자들과도 교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퀴리아코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의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잘 감당하는 멋진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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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재미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입니다.


천 년은 장구한 세월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숫자적으로 천 년의 세월도 무척 긴 시간이지만, 이를 넘어서 천 년은 그 이상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은 숫자 천(1000)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로 대치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루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하루’라고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의 단위는 무척 현실적인 실존의 시간입니다. 즉, 사람의 시간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간이 어떻게 존재했을까요?
네, 천문을 통해 존재했습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해와 달이 하루를 이루고, 여기에 별자리가 호응하며 일 년과 계절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대로 올라가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이를테면, 해와 달이 생겨나기 이전에, 별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간은 존재했을까요?


물론 우주적인 발견을 통해, 그 어떤 ‘다른 시계(other clock)’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타난 것은 반드시 그 기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그 기원의 바탕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을까요?
네, 창세기의 서술로 보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의 조화를 통해 일자와 절기를 이루도록 명령하시는 장면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창조의 시작부터 ‘시간’의 개념이 이미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러한 디자인으로부터 시간이 탄생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정오의 해를 멈추도록 기도했던 사실이나, 히스기야왕이 기도를 통해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서게(시간이 꺼꾸로 흐르게) 했다는 기록은, ‘시간’이 곧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으며 순종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습니까?
하나님께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거나 하루에도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입니다. 그의 연수는 성경에 969세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창조 과학자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주로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본래 지구의 성층권에 물이 한 겹을 덮고 있어서 대부분의 자외선과 우주광선을 차단했는데, 노아의 홍수와 함께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면서 이 모든 물이 비로 쏟아져 사라졌고, 그래서 이후로는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그대로 지구에 쏟아져 노화가 촉진되고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설득력도 있고, 과학적이어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든 이후에도,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출애굽을 시작했고, 120세가 되도록 건강해서 엄청난 공무를 수행하고 시력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갈렙 역시 80세에 전쟁을 수행할 건강과 체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세월이 빗겨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건강한 정도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층권의 물이 사라져서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지구에 들어와 수명이 단축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결정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대충 만들어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신비한 경륜과 능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시고, 마침내 그 끝에 대해서도 결정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장수’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수는 길게 산다는 뜻 보다는 의미 있게 산다는 뜻이 훨씬 강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서른 즈음의 나이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축복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력의 시간으로는 그들의 일생이 짧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룬 의미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에, 그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진들이 천 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보다 훨씬 값진 인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바탕에는, 모든 시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압축하셔서 더 치밀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더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알게 됩니다. 더디다, 빠르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느리고 빠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데, 빠르고 더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매우 심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처음 몇 개월 안에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결혼을 하면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며, 심지어 사역에 대해서도 어떤 시한 안에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지금의 시대에는 ‘시간의 노예들’이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돌아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사도는 확신합니다.
실체적 기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은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시간은 종(slave)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에 120년 동안 만들 것을 계획하고 시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를 따라, 산 위에 방주를 만들다 보니 세월이 흘러 1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노아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하루가 모여 120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0년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계획된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믿음에 있어, 이 시간에 대한 믿음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이 없다!
누가 그럽니까? 죽을 날을 알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설사 내가 다 끝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사 내가 심기만 하고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결과야 천국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조급함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죽음의 경험 이후였을 것입니다.
창조의 때에는 시간이 내 편이었는데, 죄를 짓고 추방된 이후에는 비로소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항상 초조하고, 그 초조함 속에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 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땅을 정복하며 헛된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땅을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 삶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은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신봉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면 시간이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내 아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내 아이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다면, 조금 더디 보여도 결국에는 시간이 내 아이를 섬길 것이며, 마침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나는 하루에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루를 천 년의 조각으로 맞추어 가십니다. 그 매일매일의 삶에 중요한 원칙은, 내가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급함은 내 시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은 적당합니다. 그야말로 적시(good timing)입니다.
하나님은 버릴 시간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시간을 지배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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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4 :: 목양칼럼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소중한 재산은 자기 자신이다.

아무리 요란한 풍랑도 자신을 날려버리지는 못한다. 죽지 않는 이상, 자신은 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인생에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몇 번은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자기와 깊게 만난다. 만약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가장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은 자기를 버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 버림은, 쓰레기처럼 그저 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의 버림은 진정한 자기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욕망과 습성에 갇힌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분은 노예나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위해 칼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칼을 잡는 제자를 향해, 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해방자가 분명하다. 그분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우리 맘대로 섬기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되찾게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信者)는 신자(神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을 깊이 만나는 일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목마른 '나'에 대하여 깊이 허전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 같은 나를 길들여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찾지 않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자기와 묶지 못하면 신앙은 실패한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습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시끄럽기만 하다. 이제 정중하게 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대하여 말해 보라. 자기를 정직하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게 허전하고 부실하기 때문에, 늘 인생이 불안하고 신앙은 허약하며 꿈이 연기처럼 그저 흩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지금은 아니라도, 인생에는 반드시 모든 겉옷을 벗고 벌거벗은 자기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그 날에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자기만 확실하다면,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고,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련도 없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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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

목회/목양칼럼 / 2012. 10. 28. 15:31

  

2012-10-28 목양칼럼 :: 자기다움

 

사람도 악기와 비슷합니다.

너무 조이면 끊어지고, 너무 풀어주면 음색을 잃습니다.

최선과 최하의 어디쯤에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조금씩 발전해 가는 것이 건강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에는 그 ‘자기다움’이 없습니다.

모두 승자가 되려고만 하고, 모두 단번에 정상에 오르려고만 합니다.

그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가 자기의 가장 큰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꿈을 꺾고 해를 끼치기 이전에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기를 학대하여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그 경쟁에 질려 아예 삶을 포기하고 무능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 속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중한 사색과 단호한 결단력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교하지 않고, 깊이 자기를 이해하며, 항상 자기다운 길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살아낼 수 있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고유하며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와 비슷한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해답이 나의 해답이 될 리도 만무합니다.

내 인생의 해답은 내가 찾아야 합니다.

가장 나다운 선택으로만이 내 인생의 여백을 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괴로워 합니다. 조급하거나 우유부단하다고, 그것이 치명적인 단점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치명적 단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답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공장의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급한 사람도, 우유부단한 사람도 필요에 의해 만드셨습니다. 그 특성은, 죄와 연결되고 유혹에 넘어갈 때에 위험한 것이지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특성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역할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지 않은 적당한 자기를 찾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도 훌륭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그리고 그 어깨를 다독거려 격려하십시오. 자기와 화해하지 못하면 누구와도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소중하게 여기고 기대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자기답게 최선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잘 관리해 주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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