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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3 목양칼럼


“인생이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더 심플하게 살아야 하겠다고 깨달았습니다.”

이번 주에 반가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양 집사님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들어와 같이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이케부꾸로에 나가서 잠시 백화점 위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제게는 양 집사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색이 다소 안돼 보였습니다. 양 집사님은 얼마 전에 어머님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갓 환갑을 지난 분이고 얼마 전까지 일을 하시며 건강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도의 암의 발견되었습니다. 수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약물 치료와 방사능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의 후유증이었는지, 갑자기 호흡 곤란의 증세를 보이시더니, 그야말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미처 1년이 되지 않아서, 가족들은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다가 너무 급히 보내드리고 만 것입니다.

치료의 과정에서 이런저런 후회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회한이 대화를 하는 중에도 치밀어 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아직도 어머니를 보낸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저도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처럼 앞의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보니,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좀 일을 손에서 놓고 쉬시려고 하셨는데, 암이 발견되고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시니 모든 것이 다 덧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좀 더 심플하게 살아야 하겠다. 가족을 더 사랑하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야 하겠다는 말을 다짐처럼 제게 들려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기를,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했는가 봅니다(전 7:2).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무심하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배웠습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 그래서 허망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 가족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야 하겠다는 것은, 양 집사님을 통해 제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친밀한 사람들을 주변에 두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가족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신앙 밖에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언젠가는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음에 새기고 항상 기억 합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다가 떠나야만 하는 시간에 주저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우리도 더 심플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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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기쁨

목회/설교 / 2012. 12. 10. 01:03


제목 : 지혜의 기쁨

성경 : 잠언 8:18~31


8: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8: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8:20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8: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8: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8: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8: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8: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8: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8: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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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목양칼럼

 

간염은 바이러스에 의하여 전파됩니다. 때문에 위생이 중요한 예방이 됩니다. 손을 깨끗이 자주 씻고 생활을 하면 대부분의 바이러스 전염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경우도 있습니다. 간염 바이러스가 몸 안에 들어와서 감염이 되었으면서도 전혀 간염을 일으키지 않고 잠복해 있는 경우입니다. 이를 ‘건강한 보유자(보균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이 감염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염 바이러스를 배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습득한 방식입니다. 무조건 숙주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얼마간 공존하는 것이 자기들을 더 많이 복제하고 전파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바이러스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더 작고 원시적인 생명입니다. 유전물질인 DNA나 RNA를 단백질이 감싸고 있는 단순한 형태이지요. 그런데 그 단순한 생명 안에 이처럼 ‘작전’의 개념이 습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 죄와 질병을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라도 단정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것은 병자에 대한 정죄와 비판이라는 그릇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이 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질병은 죄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 파괴적 속성, 내포되어 있는 흉계(凶計), 진행의 과정 등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파괴적 욕망을 항상 당장 실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과 함께 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에게는 죄를 전파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이미 점령한 사람을 파괴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현실에서는 죄인의 형통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체인 바이러스와 사람의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듯이 죄와 죄인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결과적으로 죄는 언제나 사람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죄야말로 나를 파괴하는 대적이며, 나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수입니다. 당장에 어떤 손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서 죄를 가볍게 여기다가는 마침내 아주 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작전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의 인격과 삶 안에 견고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완성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죄를 몰아내기 힘듭니다. 죄는 결과적으로 인격과 신앙을 파탄 낼 것입니다.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내 안에 죄를 찾아내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 바이러스를 예방하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양심을 씻는 것이 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방이 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보혈이 당신의 양심에 흐르게 하십시오.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을 노력하지 말고, 바로 십자가와 마주하는 시간을 더욱 노력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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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9 목양칼럼

 

교회는 불신앙과 싸워야 한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깊이 생각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에서는 의심과 회의, 믿지 못하는 온갖 영적 장애로 인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 못하는 불행이 생겨난다.

그러나 불신앙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모임에 잘 참여하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자리를 이미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다.

 

무신론자(無神論者)를 자처하는 사람에게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인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 절대자의 자리는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다. 그래서 종교심은 인간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하는 가장 대표적인 우상(偶像)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사실 신령하고 신비한 신을 가진다는 것은 특별한 영성과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나 종교인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믿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종교를 의지하지만 종교와 거리를 둔다.

 

보이지 않는 신에 비하여 ‘돈(황금)’은 대단한 위력을 현실 세계에서 보여준다. 날마다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돈은 현실이다. 돈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돈에 집착하게 되고 마침내 돈을 믿게 된다.

돈이 믿어지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파선(破船)된다. 사실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마음의 하나님을 가진 것이다. 그들은 불교도, 이슬람교도, 유교도 아니다. 그들의 신앙은 돈이다. 돈이 곧 축복의 모든 것이며, 돈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구원의 문이다.

 

성경은 모세로부터 사도들까지 이 돈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불신앙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이 돈과 싸워야 마땅하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세상의 장벽을 허물고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로 이끌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결론적으로 교회는 돈과 싸워야 한다. 돈이 행복과 불행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돈을 사소하게 만들고 돈이 가진 엄청난 위상을 그리스도께 되찾아 와야 한다. 사람들이 돈을 바라고, 믿고, 사랑하듯이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고,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 정말 기적이 상식이 되고, 교회는 막강해지지 않을까?

 

문제는 이 전선(戰線)을 교회가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조차 돈 타령만 한다. 교회에 모여서 돈 없다고 회의 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만 가지 악의 근원이 되고, 결국에는 믿음에서 멀어지며,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말씀(딤전6:10)은 얼마나 정확한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과 믿음으로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확실히 하자. 우리가 불행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가 구할 것도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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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사랑하라

목회/설교 / 2012. 12. 2. 23:11



제목 : 지혜를 사랑하라

본문 : 잠언 8:12~17

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8: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8: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은혜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주중에 준비했던 원고를 대부분 버리고 주일 아침까지 꼬박 책상에 앉아 새로 원고를 쓰기를 여러번 했습니다.
덕분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아직 원고를 다 마무리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이 설교는 원고를 넘어서는 설교입니다.
부디 이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음을 우리 안에 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방금 전까지 교제하다 늦게 교우들을 보냈지만, 다시 설교를  정리하는 중에도 이 설교의 여운이 짙에 저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 만큼이나 여러분에게도 깊은 은혜가 있으면 좋겠군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샬롬~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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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 목양칼럼 


경제는 효율을 중시한다. 들어간 것(input)이 있으면 반드시 나온 것(output)이 있어야 하며, 되도록 적게 투자하고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경우를 성공적인 모델로 삼는다.

단순히 이 원리만을 생각하면, 복권이나 도박과 같은 일이 가장 경제적인, 혹은 경제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률'이 저조하여 적은 것이지만 들어간 것에 대하여 전혀 아무 것도 안 나올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그것을 삼가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도박이나 복권의 승리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에게는 이 방법이 정당화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경제적인 큰 수익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거두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물론 이런 사람들에게 대박의 꿈은 있어도 대박의 현실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생각의 바탕, 곧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는 일이 남에게 일어나는 것은 배가 아파도,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는 깨어진 마음의 그릇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 보라. 인격적인 성숙이 없이 재물을 많이 가지는 일은 어린 아이의 손에 칼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그 재물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때문에 성공과 성장은 함께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는 것은 증권투자를 하는 방식으로는 정답(正答)일지 몰라도 인생에 대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오답(誤答)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의 주인은 맘몬(mommon, 가나안의 황금신)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려고 하니, 마치 장사를 하는 장사꾼처럼 하나님 앞에서 처신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진심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진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이 부어진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는 심는 대로 거두는, 정직한 방법 밖에는 통하지 않는다. 신앙에 지름길은 없는 것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가 크게 되면 성공을 한 것이고, 작게 되면 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는 정직하고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남으면 작아도 큰 교회요, 정직함이 사라지고 복음이 옅어지면 큰 공동체를 이루고 연보를 많이 거두어도 실패한 교회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철저하게 본질적이다. 그것은 경제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더 가지려는 욕구 자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러니 그 하나님 앞에 '협상'을 하려는 태도는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하겠는가!

우리 마음에 맘몬은 없는지, 그리고 본질은 충실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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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소원이 간절하다고 믿는다. 자기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경향은 나이와 상관없이 신자를 아이로 만든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의미에서의 아이 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간절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다 정리되지 못했지만, 최근에 간절함에 대하여 묵상한 내용을 먼저 정리한 것이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간절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이 점이 우선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먼저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쟁의식은 '선한 질투'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열심을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통과하는 열심을 찾으신다. 이러한 기준은 사람마다 사명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더 귀하고 큰 일에 쓰시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특별하고 간절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마음 졸였던 부부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신앙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남들보다 기도를 덜 했을까? 신실함이 부족했을까?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간절함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한 수준의 간절함을 원하셨다.

보다 간단히 요점을 말하면, 성경에 아기를 반드시 잉태하는 비법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의 해결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는 요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곁눈질로 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응답의 비결'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응답을 받은 것이 참고할 사항은 될 망정,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실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을 추구하는 일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 절대성을 가져야 하는 믿음의 대상은 '성경' 하나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성경을 잘 묵상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하나님께 인정 받는 간절함은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이 제일 쉽게 속는 것이 자신의 말이다. 원래 탁월한 거짓말쟁이는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속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을 내 귀가 들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매우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곧 실제적인 선택을 통해 실체가 드러난다.

삶에서 신앙은 언제나 갈등의 원인이다. 욕망과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정의와 신앙을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그런 이중성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오죽하시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거룩했다. 심지어 그들은 남다른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시장 어귀에서 옷술이 큰 옷을 입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공개적인 신앙행위가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기도는 예수님도 자주 하셨다. 오히려 더 많은 군중 앞에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적어도 외양은 아니다.

그 차이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순종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항상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맞다.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엔가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되도록 거룩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은 영악하다. 그리고 욕망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삶에서의 선택이 신앙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은, 말로만 포장된 위선일 뿐이다. 그런 신앙은 간절함과 거리가 멀다.

 

셋째, 간절함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픔의 경험 밖에 없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아픔'의 깊이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됨'을 요구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에 가슴이 찢어진다.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 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의 슬픔이며, 고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의 곳곳에서 만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나, 방탕한 고멜과 결혼하고 계속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호세아, 태어나기도 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 받았던 예수님의 경우는 모두 그 근원이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샘처럼 우러나는 슬픔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신앙적으로 간절하다는 것은, 자기 소원에만 집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슬픔이 보이게 되어 있다.

창조의 작품이 배신과 타락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하늘의 아버지. 그것이 바로 간절한 신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신앙적 현실(reality)이다.

 

고통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은 더 나쁜 상황으로의 진행을 막아준다. 만약 열이 나거나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작은 고통이 커져서 마침내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방치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간절한 신앙은 이 모순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고, 세상의 부조리가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절망의 상황이 신앙인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편 37:23~24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할수록 주의 붙드심은 더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간절한 심령은 영적으로 예민한 마음이며, 그 마음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필연적인 고통에 둘러싸이지만, 그 고통보다 큰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다.

 

 

넷째, 간절함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피면, 재미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목회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풍부하게 구약을 인용하시며 간접적으로 성경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매우 강조하신 의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하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하면, '구하라'는 말씀이 기도를 내포하는 보다 큰 범주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는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 그 근간이 '소원'이다. 소원하는 것이 없다면, 기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잘못된 기도는 잘못된 것을 소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바른 기도는 바람직한 소원을 마음에 품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소원에 대한 열망이다.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소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하여 공명이 은거했던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가 간절함으로 모셨다는 일화이다. 제갈공명은 점술가로도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 덕(德)에 감동하여 고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났다고 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자주 등장한다.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못해도 간청함을 인하여는 주리라 하신 말씀이나, 수로보니게의 가나안 여인이 자녀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다가 거절당하지만 끝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자녀의 고침을 받는 사건 등은 모두 '간절함'이 어떻게 드러나야 마침내 응답을 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것을 즐기신다. 그 이유는 자녀와 씨름을 해본 아빠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한 씨름이 아니라 져주기 위한 씨름이지만, 그 안깐힘을 통해 아빠는 아이와 친밀감을 나누고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관심이 '응답'이라면, 하나님의 관심은 '관계'이다. 때문에 이 씨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 하나님께서 굳이 주시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 응답의 과정에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의 인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간절함은, 믿음의 인내를 통해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간절함은 최선을 의미한다.

태어난 사람은 성장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다만 길고 오래 살며, 불쾌한 죽음을 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생명이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풍성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긴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채워지는 만족이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풍성한 생명이란 어떻게 실현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그 수령이 1100년이다. 세종대왕이 당상관의 벼슬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키는 얼마나 될까? 기록에 따르면, 60미터에서 40미터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의 측정으로는 41미터가 안내되어 있다.

이 나무에서 매년 은행 15가마가 열린다고 한다. 천 년의 거목이 아직도 그 키가 자라고, 매년 15가마 이상의 은행을 열매 맺는 것을 보며, 풍성한 생명을 묵상한다.

 

 

성경은 '성장'을 신앙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명령한다. 신자에게 성장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명 자체를 의미 있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풍성한 생명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성장은 언제나 한계를 갱신하는 자기 극복에서 일어난다. 누워있던 아이가 기고, 기던 아이가 물건을 잡고 일어서고, 일어선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걷고, 간신히 걷던 아이가 걸음을 빨리 하여 달리고, 달리던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를 타고, 스키를 타고… 그 한계의 극복, 자기의 실현이 곧 성장이며, 이 성장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겨두신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던 일도 막상 닥치면 넉넉히 해내는 경우가 많다. 욥을 생각해 보라. 그런 고난을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욥은 감당했다. 물론 욥의 인내가 대단하다. 그러나 그 욥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욥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함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최선을 끌어낸다. 물론 최선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한 일간지에서 조사를 했다. 12~19개월의 아이들을 비디오로 계속 촬영하고, 그 24시간에 대한 통계를 만들었다. 재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평균 4킬로미터 정도를 걷고 뛰었다. 이것을 걸음으로 환산하면, 14200 걸음이다. 그리고 하루 넘어지는 횟수가 102회라고 한다. 이것은 평균 1시간에 17번, 분으로 계산하면 3~4분마다 한 번씩 넘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조사에 등장했던 어떤 아이는 하루에 142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벌떡 일어섰고, 또 다시 걸었다.

 

우리가 성장해온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점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충격이 깊어진다. 실패를 연연하지 말고 일어서 앞으로 가면 되는데, 자꾸만 실패를 곱씹고, 생각하고, 겁쟁이가 된다.

간절함은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간절함 속에서 바로 최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지체하시며, 보다 간절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성장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 부족의 자리, 결핍 속에서 우리는 더 연단되고 마침내 자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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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주일예배




제목 : 지혜의 외침, 복음

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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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잠언8장’의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보통 지혜라고 하면,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시험을 잘 보는 어린 아이를 가리켜, 혹은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전문적인 지식의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잠언, 지혜의 말

 

잠언은 본래 ‘지혜로운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상식의 수준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반쪽만 보이고, 심지어는 반쪽조차도 아주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좋은 태도는, 나의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성경적 관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위 요즘 유행어로, ‘오픈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지혜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나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싫으시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 성공, 명예, 승리는 모두 우리가 가지는 신앙과 예배의 목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위한 책

 

그렇다면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예배가 가능합니다. 만약 성경이 없다면, 기독교는 모든 이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종교심에 의지하여 막연하게 창조주를 찾는 ‘짐작의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가 제대로 믿는지 확인해 줍니다. 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인도합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무엇을 위해 쓰였습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 곧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믿으십니까?

 

어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무슨 이야기 끝에, 너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더니 찬혁이가 발끈했습니다. 엄마는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며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반은 장난이었지만, 반은 진심이 담긴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낮에 어떤 일을 하는데, 핸드폰에 있는 노래를 7~80곡 정도 들을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찬혁이가 “삼칠의 이십팔, 이백팔십 분을 한 거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노래 한 곡이 3분 정도 되니까, 7~80곡을 들으면 그 정도의 시간이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 때, 준혁이가 웃었습니다. “야, 임마 삼칠이면 이십일이지, 왜 이십팔이냐?”

순간 모두 큰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거들면서 말했습니다. “괜찮아. 아직 중학교도 졸업 못해서 그런거니까, 많이 배운 우리가 이해해야지. 찬혁아, 괜찮아!”

엄마가 7~80곡이라고 하니까 머리로는 80곡을 생각하고 입으로는 70곡을 대입하여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찬혁이 편을 들었습니다.

“찬혁아, 솔직히 나이 들면 구구단 쓸 일 별로 없다. 몰라도 괜찮아!”

 

어떻습니까? 여러분 요즘 살면서 구구단 사용하십니까?

쓰더라도 아주 가끔이지요.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몇 년을 사시는 분도 많아서, 이 시간에 구구단을 게임으로 하면 아주 많이 재미 있을 겁니다.

지식과 지혜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습니다. 주변적인 것도 없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혜는 그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그 자체를 위해 필수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구단 몰라도 살고, 영어 못해도 살고, 심지어 자기 이름을 몰라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의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근본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영어를 좀 잘 하면 지혜가 많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 비싼 학원을 보내고, 심지어 영어를 쓰는 나라로 여행이나 연수를 보내기도 합니다.

아직 자녀가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투자하지 않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합니다. 비싼 영어교재를 사고, 학원을 수강하고, 원어민 강사와 마주하여 영어를 배우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매일 지각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졸기 일쑤입니다. 소설은 손에서 놓지를 않으면서 성경은 읽는 법이 없습니다. 아내와 오붓하게 분위기를 잡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과 오붓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일은 생각도 못합니다. 취미와 접대를 위해 돈을 쓸 때에는 아낌 없는 손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릴 때에는 항상 적은 액수의 지폐를 찾습니다.

 

이런 행동을 일삼으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말씀을 드리는 바와 같이, 신앙은 취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로 바꾸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것은 부수적인 지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지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우리 인생의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8장은 처음부터 이 구원의 지혜를 의인화 시켜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절박한 지혜의 외침

 

지혜가 이처럼 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좀 더 성공하고 잘 살기 위한 수단 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선택하는 절박한 결정입니다. 때문에 지혜는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저 편에서 큰 덤프 트럭이 달려 오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 점잔을 부리며 천천히, 예의 바르게 말해야 합니까?

그 순간에는 존댓말도 필요 없습니다. “비켜! 위험해!” 있는 힘껏 배에서 나오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요? 경박한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아니죠, 지금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잠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37~39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는 이 복음의 절박함을 다시 마음에 인식해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봐야 아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 평생을 살았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이 비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영원한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경외하지도 않고 산다면,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불신에 대한 무서운 심판뿐입니다. 설사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나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비참한 후회를 하며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날마다 각성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정말 그분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가? 예배를 귀히 여기고, 성경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가? 교회를 사랑하는가? 주의 종과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반성이 없고, 회개가 없고, 날마다 성장하는 모습과 새로운 각오가 없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어떤 평판을 받고, 주변에서 무엇이라 칭찬을 듣든지 간에, 그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보다 귀하고, 진주보다 비싼 이 복음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해야 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예배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충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성경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봐야 할 때

 

오늘, 우리는 이제 2012년도를 한 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땅히 일년을 돌이켜 생각할 때입니다. 잘한 것은 격려하고, 못한 것은 반성하여 각오를 가져야 새해를 맞을 수 있습니다. 달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의 옷을 새롭게 갈아 입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자기를 돌아봅시다. 외치는 복음의 지혜 앞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되돌아 봅시다.

집사가 되고서도 오래도록,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빠지지 않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않는 일을 몰래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면서도 축복을 달라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구원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의 복음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지혜의 음성을 듣고 바로 이 거룩한 고민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 이 설교의 PDF 파일입니다.

"2012-11-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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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목양칼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과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에게 태생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사람의 세상에서 완전한 ‘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과연 국경을 통일하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통일하고, 심지어 언어를 통일한다면 어떨까? 과연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작은 반도의 나라가 반 토막이 나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반 세기를 훨씬 넘어섰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노래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그 통일이 지독하게도 강박증이 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이유도, 그 일이 틀려서가 아니라 남이 나쁘게 볼까 싶어서, 남사스러워서였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이 무의식에 쌓여, 이제는 그어진 선을 넘어 한 발을 내미는 것 자체가 극히 불안하다. 항상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그 ‘통일’의 범주 안에서만이 안도감이 찾아오고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저지선으로 삼았던 ‘안식일’의 금지선을 넘으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야말로 ‘자유’의 선포였다. 그분은 종교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 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를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이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다시 사람의 ‘굴레’로 삼아 그 기준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핍박하는 돌맹이로 오용(誤用)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름[相異]’는 ‘틀림[過誤]’이 아니다. 물론 근본을 흐리게 하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근본’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리를 판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정신을 흔히 ‘와(wa,和)’라고 한다. 이 나라는 우리처럼 반토막이 났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통일’에 목을 매고, 우리 보다 더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사회적 트라우마까지 깊이 살피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개인에게 집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이 사회적 강박증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복음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자유가 숨 쉴 틈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의 정신이 바람처럼 이 땅에 불어 넘칠 수 있을까? 불처럼 가슴마다 번져 흐를 수 있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오히려 더 이 땅에 동화(同化)되어, 앞뒤로 꽉 막힌 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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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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