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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목양칼럼



자유와 평등. 그것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추구한 가치이며, 동시에 성경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다. 성경이 그토록 를 미워하는 이유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불행한 사슬에 묶는 굴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그 죄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모든 억압에 항거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만인제사장이라는 교리를 강조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적인 중재를 담당하고 대신하여 수고하는 헌신적인 직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제사장이 하나님의 권위를 사칭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결국 만인제사장은 근본적으로 제사장이라는 역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남용하여 벌어지는 일체의 억압과 부조리에 항거한 교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5년만 있으면 500주년을 맞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목사라는 이름의 제사장에 눌려 정신적 억압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목사는 명예로운 직분이다. 목사의 명예는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성경을 실천하며, 신앙적 삶의 모델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목사는 그러한 삶의 궤적 속에서 한 교회를 대표하고, 신자들을 양육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강요된 권위가 아니라,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동행 속에서 얻어지는 신뢰의 권위이다.

때문에 목사가 신뢰를 깨뜨리면 당연히 그 권위도 회수되어야 한다. 목사는 별종(別種)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평등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직분이 특별한 것이다. 직분은 그것을 감당할 때에 명예로운 것이지, 감당하지 못하는 자의 방패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온다. 그는 불행하게도 돈에 신앙과 양심을 팔았다. 모압의 왕을 위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시도했다. 하나님은 그가 가는 길을 막으셨다. 더 놀라운 것은 당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에게 교훈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가르침이다. 선지자의 직분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나귀라도 대신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예롭게 여겼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귀한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반대로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명예로운 권위를 내어줄 필요는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매우 단호하며, 이것이 성경적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교회에서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여겨야 한다. 억압의 굴레를 다시는 쓰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와 평등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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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목양칼럼


 

영웅의 시대는 갔다. 전장의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용감하게 선두를 달리는 용장(勇將)의 기백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일수록 비겁한 시대가 되었다.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돌격'을 외치는 그런 사람들의 시대 말이다.


작년3월, 후쿠시마의 원전이 쓰나미의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졌다. 처음에 그것은 수많은 피해지의 무너진 건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원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다가 폭발하는 장면을 생중계로 방송했고, 그것은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었다. 연이어 방사능 누출이 매일 신기록을 쏟아냈다. 인근지역의 소개(疏開)가 시작되었고, 소방헬기가 바닷물을 퍼서 원전 위에 쏟아 붓는 사상 최악의 대응이 전세계에 중계되었다.

가슴이 떨렸다. 원전사고가 빨리 수습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던 것이다. 동경전력의 안일한 태도가 매일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그것은 원전정책을 결정하고 그 혜택으로 막대한 부를 누렸던 사람들의 몫이지 당시 그곳에서 반강제로 발이 묶여 있는 사원들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나라의 위기를 위해 가족과 눈물로 이별을 하고 동경에서 후쿠시마까지 달려갔던 소방특공대원들의 모습은 실로 장엄했다. 그들이 목숨을 이 위기를 모면하는 값으로 내놓아야 한다면, 과연 그것이 감동만 해도 되는 일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목숨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게 될까 봐 다른 이의 위기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외면은 결국 자기의 위기를 앞당긴다.


한 때 나치의 지지자였던 마르틴 니묄러라는 목사가 있다. 그는 나중에 나치의 반대운동에 나섰고 <그들이 왔다>는 아주 유명한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그들'은 나치이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의 '그들'이기도 하다.

"맨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항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왕이, 귀족이, 그리고 심지어 종교의 사제가 불의(不義)로 하나님을 사칭할 때에, 오직 손에 성경을 들고 진리를 위해 항의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항의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을 거룩한 희생으로 받고 하늘의 보상을 믿으며 죽어갔기에 시대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일본의 원전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설사 다시 후쿠시마의 원전과 같은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결코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도장을 찍고, 누군가를 그곳에 보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이름이 다음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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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목양칼럼


남의 떡은 거대하다. 단순히 '크다'는 단어를 바꾸어 '거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떡의 크기에 대한 재고(再考)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실로 이 막무가내의 몬스터(monster)가 한 마리씩 도사리고 있다.

기회를 보아서 우리 마음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몬스터의 존재는 누구나 버겁고 껄끄러운 현실이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 괴물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마치 자기의 마음에는 전혀 괴물이 살지 않는 것처럼, 남의 '욕망'에 대하여만 비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욕망은 위험하다. 욕망에게 '비전'이니 '긍정'이니 하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준다고 하여서 안전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사나운 불독에게 우스꽝스러운 애완견의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하여서 성격이 온순해지거나 이빨이 덜 날카롭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 '마흔'의 해가 걸린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것은,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내 또래와 혹은 연배가 더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자기 마음의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놈을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하여서 이 괴물을 다루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은 사소하게 보고 상대적으로 남의 것은 크게 보게 만든다. 욕망은 꽃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꺾어야 직성이 풀린다. 욕망은 간절함을 주지만, 그와 함께 시기의 마음도 준다. 욕망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도 마치 모든 것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을 끓어오르게 한다. 욕망은 책임감이 없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한다. 욕망은 자기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밖에 있다고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욕망 안에서는 결코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욕망은 먹어도 배가 고프며 얻어도 가난하고 입어도 추우며 올라가도 비천하다. 욕망은 아귀(餓鬼)와 같아서 언제나 허허롭다.

욕망은 의식보다 무의식을 좋아한다. 때문에 의식을 거치지 않는 습성(習性)은 욕망이 활약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자기 마음을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욕망은 작아지지만, 바쁘고 산만하며 즉흥적인 사람에게서 욕망은 태산(泰山)처럼 압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욕망 앞에서 두 가지로 갈린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께 주권을 온전히 위임하는 기도는 욕망을 죽이지만, 십자가 없는 기도는 욕망의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오히려 욕망이 강성해지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지는 신자들이 생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를 거듭하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鬪爭)이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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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8 목양칼럼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담장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투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9회말의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경기는 맥없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전광판의 숫자는3:0이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난 8회의 이닝 동안 상대팀은 단 하나의 안타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투수는 완봉승을 노리고 있었다.

절묘하게도 마침 타순은 3번부터 시작되었다. 타자는 투수의 첫 공을 노렸다. 투수 옆을 스치는 직선의 타구가 원 바운드로 날아갔다. 잘 하면 빠질 수도 있는 공이었지만 유격수는 노련했다. 몸을 날려 그 공을 잡은 것도 모자라 거의 동시에 역동작으로 1루에 송구했고, 공은 정확하게 첫 타자를 아웃 시켰다. 투수의 눈이 승리의 확신으로 빛났다.

감독은 4번 타자를 거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라는 싸인을 냈고, 배터리는 캐치볼처럼 4개의 볼을 주고 받으며 감독의 명령을 수행했다. 불안감은 전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타자가 들어섰다. 그는 5번이지만 오늘은 그의 방망이가 볼에 스치지도 못했다. 투수는 자신감이 넘쳤고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마저 감돌았다. 역시나 2개의 연속 스트라이크가 들어왔다. 타자는 타석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바튼 기침을 했다. 영리한 투수는 바깥으로 깊게 빠지는 유인구를 던졌다. 어이 없게도 타자의 손이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끌려나갔다. 타자는 속았다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눈 감은 방망이에 볼이 걸렸다. 어설프게 맞은 공은 내야에서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켰다. 내야수들이 재빠르게 공을 처리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가 되고 말았다.

6번 타자가 들어섰다.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까? 운동장은 숨죽여 타자와 투수에게 집중했다. 투수는 주의 깊게 공을 던졌고 타자 역시 몇 개의 볼을 파울로 커트하며 투수와 겨루었다. 어느새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이제 승부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투수는 최대한으로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했다. 타자가 움찔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심판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포볼이었다. 타자가 1루로 걸어가는 동안 투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응시했다.

화가 났던 것일까? 투수는 7번 타자를 강속구로 몰아 부쳤다. 4개의 공이 지나도록 방망이를 흔들지 못하던 타자는 5번째 공을 향해 힘껏 스윙을 했다. 그러나 공은 높이 내야 위로 뜨고 말았다. 3루수가 약간 자리를 움직여 공을 잡았다. 마침내 9회말 투 아웃이 된 것이다.

감독은 이상하게도 대타를 세우지 않았다. 8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오늘 경기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10여 경기에서 전혀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5번이었던 그의 타석이 8번까지 밀린 것은, 부진에 부진을 거듭한 결과였다. 관중은 야유했다. 투수와 포수 역시 가벼운 웃음을 교환하며 빨리 경기를 끝내자는 모종의 싸인을 주고 받았다.

투수는 처음부터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낙차가 크면서도 빠른 스플리터(Splitter)였다. 공은 살아있는 뱀처럼 파고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타자의 허리가 부드럽게 돌았다. 팔과 다리의 근육들이 힘줄을 돋으며 제대로 힘을 실어낸 한 방이었다. 공은 직선으로 정확하게 운동장의 한 가운데를 뻗어나가 전광판의 상단을 때렸다. 홈런이었다… 9회말 투 아웃, 그리고 그 시즌에 가장 부진했던 선수의 팔에서 나온, 역전의 홈런이 운동장을 뒤집어 버렸다…

야구는 바로 이런 맛으로 즐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9회말 투 아웃,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언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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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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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4 목양칼럼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주 아프셨다.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며 그 머리에 젖은 물수건을 갈아드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철부지 간호가 아마도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풍파를 견디게 하는 큰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결혼 한 이후로 줄곧, 아내는 좌골신경통에 시달렸다. 오른편과 달리 왼편의 몸이 늘 저리고, 쑤시고, 결리고, 아파했다. 그 아픈 부위를 두드리고 주무르며 십구 년을 살았다.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이 나의 운명일까? 그러고보니 내게는 항상 아픈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왔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와 격려로 희망을 주면서 정작 내게 있는 아픔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런 일이 좋지만은 않다. 궁시렁거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대단히 소모적인 일이다.

때로는 나도 정서적으로 바닥이 날 때가 있고 내 몸이 아플 때도 있으니 불평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즘 내 몸이 아프다. 어깨, 특히 오른 쪽 어깨가 심하게 근육이 뭉치면서 묵직한 느낌과 두통, 어깨 결림, 팔의 저림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때에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이 거슬려서 잠을 설치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무르는 사람이 주무름을 당하는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을. 주무르는 사람도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겠지만, 정작 아픈 사람은 낮도 밤도 편할 날이 없더라. 그래서 병(病)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나.

남의 하소연을 귀찮아 하지 말아라. 고통하는 사람을 위해 손을 내어주는 것을 힘들다고 하지 말아라. 오죽하면 그러겠냐? 오죽하면 말이라도 그렇게 실컷 하려고 하고, 손이라도 그렇게 빌려달라 청하겠냐...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병을 간혹 본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너무 건강해도 오히려 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삶에 도무지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을 때에 사람은 오히려 고립되는 경우가 많더라.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통로를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 갇혀서 남이 아프다고 울 때에, "왜 아픈데? 어디가 아픈데? 아프면 약 먹어!" 같은 쓸모 없는 말만 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약함이 곧 강함이라.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자'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르치신다. 고통은 겸손함을 배우는 기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고통을 통해 내 안의 이기적인 담이 허물어지고 비로소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게 되며,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픔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의 자아가 문제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를 불평만 하다가 날려버리는 미련함이 우리를 정말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만나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흔한 신유의 은사가 왜 신앙의 거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왜 바울 같은 사람은 평생을 육체의 가시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냥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주신 은혜니까. 우리도 그걸 깨닫고 살았으면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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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20:34

2012-06-17 목양칼럼

 

개그콘서트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코너가 있다. 일상 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언어를 날카롭게 꼬집어서 사람들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코미디이다. 당장에는 웃지만 뒷맛이 씁쓸한 내용이 많다. 일종의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진실이 왜 불편해야 할까? 그것은 거짓이 그만큼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을 꼬집지 않는 동안 거짓은 일상에 집을 지었고, 반대로 진실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코미디언의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담담한 멘트가 우리를 뒤집어지게 한다.

교회를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는 이미 진리를 부담스러워 한다. 진리가 주는 건전한 자극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저 잘했다는 칭찬과 잘 될 것이라는 격려만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성령의 음성? 그 딴 거는 부흥 못하는 지하실 교회나 신비적인 이단에게 주어 버리고, 민주적인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부담 없이 듣고 호응할 수 있는 긍정의 설교, 기쁨의 설교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많이 웃기는 강사가 인기가 많다. 정말 블랙코미디다.

신자들부터가 세뇌 당했다. '부흥'이라는 이상한 흥행주의가 사람들의 가슴 깊이 스며서 항상 죄의식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일 년에 전도 한 명 못하는 신자는 사람도 아니라는 죄의식, 형편이 어려워 십일조를 못 내면 도둑놈이라는 죄의식,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자기 교회에서 자기 목사와만 지켜야 제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죄의식... 그 울타리 안에 갇혀서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한 마디로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편안해진 것이다. 자기들이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고, 반대로 그렇게 살기 때문에 스스로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자만을 키우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다. 진리의 확신으로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에 속한 것으로 안도한다.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그들에게는 성공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고난은 저주이고 황금은 곧 축복이다.

기독교의 근간이 이루어진 곳은 카타콤이다. 그 시절에 성경의 사본이 필사되고 교회와 예배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우연일까? 그럴리 없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의 장소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요람으로 카타콤을 선택하신 것이다.

아무리 불량한 복음이 판을 쳐도 어쩔 수 없다. 족보를 속일 수는 있어도 족보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 기독교는 성공과 야망의 종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이며, 핍박의 종교이다. 이것이 당신에게도 불편한 진실인가!

불편해도 들으라. 들어야 산다. 귀에 익숙한 말을 듣다가는 망하기 딱 좋은 시대이다. 진정으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아파도 듣고, 어려워도 듣고, 힘들어도 듣고, 불편해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살기 위해서 듣는 것이라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불편함 정도는 이겨낼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설교는 어려워서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불편해서 안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비지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몰라서가 아니라 싫은 것이다. 변명과 핑계로 초점을 흐리고,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은 것이다.

오늘 설교 시간에는 부디 이 자아와 치열하게 싸우기를 축복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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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0  목양칼럼

 

오늘날에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 만큼이나 비만에서 오는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정말 치명적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결심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천하는 사람은 적고, 정작 실천을 통해 얼마간 다이어트에 성공을 하더라도 방심하면 금새 '요요 현상'을 통하여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도 됩니다.

다이어트에 제일 좋은 방법은 절식과 운동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줄여야 합니다. 또한 운동을 해서 근육을 붙이고 대사량을 늘려야 합니다. 필요에 지나치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독(毒)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육을 무력하게 만드는 안락함 역시 평안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이며 나중에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삶은 성실함을 필요로 합니다. 운동과 절식의 습관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 당장은 어렵지만, 이를 통하여 더 건강하게 오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처한 영적 상황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면, 지금 시대에는 영혼에 해로운 복음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고 따르면 영적 건강이 위협을 받습니다. 달콤할수록 치명적이며, 안락할수록 영혼에는 해(害)가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스스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또한 편하고 안락한 자리만을 찾다가 영적으로 무력해지는 비만에 걸리는 사람들도 흔히 보게 됩니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에도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한 끼 식사로 일주일을 버티는 사람이 건강할 수 없는 것처럼, 썬데이 크리스천의 영적 건강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말로는 저항하면서도 비만에 빠져가는 많은 현대인들처럼, 영적인 무력감과 그릇된 신앙에 쉽게 넘어갑니다.

무엇이 원인인지 이미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만 먹자, 오늘만 쉬자... 내일부터 시작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타협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건강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불필요한 영양소들을 몸 밖으로 완벽하게 배출하는 소화시스템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의 의지와 책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창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다 보면 결국에는 스스로가 자기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적(敵)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내일부터 시작하라고 속삭이고, 성령은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음성을 따를 것인지는 각자의 결정이며, 그 결과 또한 각자가 달게 받아야 합니다.

부디,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고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영혼에서만이 건강한 삶이 열매 맺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영혼에 무관심한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항상 자기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 보고, 영혼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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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목양칼럼

 

한 마을에 아주 고집이 센 사람과 아주 똑똑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서로 거래를 하게 되었는데 돈 거래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일곱 냥 짜리 옷감을 네 개 팔았으니 28냥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고집 센 사람은 28냥이 아니라 27냥이 맞는다고 우겼습니다.

아무리 실랑이를 하고 설명을 해도 해결이 나지 않아서 결국에는 마을의 원님에게 가서 송사를 했습니다.

원님이 두 사람을 부르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일곱냥 짜리 옷감을 네 개 팔았다 이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요.”

“그런데 너는 28냥을 받겠다고 하고 너는 27냥을 주겠다고 한단 말이지?”

“예, 그렇습죠.”

“아니, 분명히 27냥이 맞지 않습니까요? 이렇게 당연한 계산을 저 미련한 사람이 우겨서 원님께 판결을 받으려고 오게 되었습니다요... 말씀해 주십시오, 원님!”

두 사람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원님은 드디어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 녀석에게 곤장 3대를 쳐라!”

뜻밖에도 원님은 똑똑한 사람에게 곤장형을 내렸습니다. 형틀에 묶이며 똑똑한 사람이 하소연을 했습니다.

“원님, 아니 28냥이 맞다는 것을 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요? 왜 저를 때리십니까?”

그러자 원님이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맞다. 계산은 네가 맞지만 네가 잘못한 것이 있다. 어떻게 일곱 냥 짜리 네 개면 28냥이 된다는 것도 모르는 미련하고 또 고집이 센 놈이랑 싸움을 한다는 말이냐? 내가 오늘 너를 벌 주어서 무엇이 진짜 지혜인지 반드시 깨우치게 하겠다.”

손자병법에도 이르기를, 최상의 전략은 싸우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해서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는 것은 절대로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최선의 방법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잠 9: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과는 싸움이 최선이 아닙니다. 싸운다고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런 사람과는 거래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주라는 것입니다.. 시간에 묻어두면 혹시 압니까?

언젠가는 그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내가 상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욕이 넘쳐서 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원수가 되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뒤로 물러서는 것을 배우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지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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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0 목양칼럼

 

조선시대의 탁월했던 임금으로 정조가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기도 했던 정조는 어려움의 유년시절을 통하여 마음이 단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도 대신들을 압도하였고 무예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정조에게는 매일 아침마다 특별한 수련이 있었는데, 그것은 활쏘기였다고 합니다.

모두 50발의 화살을 날렸는데, 40발은 제자리에 서서 쏘고 10발은 걸으면서 쏘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거의 과녁에 명중하는 정도의 실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항상 49발 까지만 명중시켰습니다. 마지막 한 발은 손을 거두어 쏘지 않거나, 혹은 쏘아도 허공에 날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임금으로서 자기의 본분은 활쏘기가 아니니 모두 명중시키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 불필요하게 경쟁의식을 느껴서 활쏘기로 겨루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제일 큰 이유는, 과도한 자신감을 얻어 마음이 교만해질까 스스로 삼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재주를 뽐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을 드러내고 남에게 칭찬을 들으면 우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섰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넘어짐을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알면서도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훈은 한 번 마음에 새겨 충분한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해서 마음에 새기고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조의 활쏘기는 그 나름대로의 기도요, 묵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이 있었기에 정조는 당파싸움의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조선의 중흥기를 만들고 역사에 이름이 남는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가를 마땅히 치러야 합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역시 시간입니다. 일주일의 하루를 주님의 날로 구별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의 하루를 무엇으로 시작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꼭 아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지는 오후로부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해가 지면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강한 사람은 아침에, 아침에 약한 사람은 저녁에 하루를 여는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자기의 약점을 깊이 반성하고,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으면 사람은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바쁘다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욱 '의미'를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와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름만 가졌을 뿐 정작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살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권합니다.

매일 묵상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한 실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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