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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1 목양칼럼  :: 달빛 같은 은혜

 

저녁에 산책을 나섰다가 달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아파트의 불빛 위로 달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달빛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뽀얗게 속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저 달빛을 예수님도 보셨고, 중국의 시인 소동파도 보았고, 지금 고국에 계신 나의 어머니도 보시겠지요.

달빛은 그렇게 오래도록 변함없이 외로운 사람, 고민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왔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을 보니 더욱 예뻐서 내 것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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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밝힌 조명과 하나님이 밝히신 달빛의 밞음은 느낌이 다릅니다.

조명이 자극적이라면, 달빛은 온유합니다. 달빛은 눈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빛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어울리며, 또한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의 위로가 됩니다. 조명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달빛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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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착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선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것은 달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다른 것처럼 아주 먼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힘이 들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심지어 마음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게 아닌데… 신앙생활은 달빛 같은 것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면 저절로 빛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 맡기면 쉽게 성장해가는 길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해서 혼자 일어서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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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영을 생각해 보세요. 물에 뜨는 것을 배워야 팔을 젓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물에 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빼야 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힘껏 팔을 움직이면서도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사람의 노력이 오히려 선함에 방해가 됩니다. 성령 없는 노력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 정말로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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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목양칼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열심히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물론 고결한 지식을 가르쳐 주지만, 단지 지식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고,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의 대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묵상하며,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고난이 예상될 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뻔히 보이는 결과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는 불나방 같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우선은 문제를 회피하고 문제가 없다고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잃어버립니다.

성공하는 기도에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기도를 낳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에 이르게 합니다. 둘째는 타이밍입니다. 물론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꼭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기도로 당장 효과가 나타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습니다. 그러나 무익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 기대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지만,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그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려움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도,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는, 고난 앞에서 반드시 그 문제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도해 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로, 고난 속의 기도는 특별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항상 특별하셨습니다. 그분은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새벽 어둠의 시간에 한적한 곳을 찾아 홀로 열정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땀이 핏물처럼 흘러내린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유일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 죽을 만큼 기도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는 기도생활,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예수님마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처럼 처절한 기도를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신앙은 뜨거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은 그 뜨거운 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시기입니다. 고난 앞에서도 미지근한 기도와 망설이는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가 세웠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해야 할, 그것도 특별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교회라면 성령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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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목양칼럼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도, 미래의 할 일을 미리 예단하는 것도 믿음의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겉을 화려하게 하고 허명(虛名)에 의존하는 것처럼, 믿음도 현재가 부실할 때에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거창한 일을 하겠다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당장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환경과 능력을 핑계합니다. 그러나 정작 환경과 능력이 충분해서 믿음을 실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처한 세상은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에 있어 우리의 능력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가로 막는 정확한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과 싸우는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믿음을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는 것은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선한 의도만이 아니라 믿음을 빙자하여 쉽게 성공하려는 잘못된 의도도 가졌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런 마음들은 믿음에 있어 불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향을 제거하신 후에야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주십니다.

항상, 현재를 전부라고 여기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 최선을 다하십시오. 환경의 지배를 받지 말고, 마음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심은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믿음의 도리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과연 나중이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관중(觀衆)의 입장으로 교회와 신앙을 방치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인생의 황금 같은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중’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끝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르십니까? 오늘이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헌신을 드리는 지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다른 바램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한 가지, 바로 여러분이 지금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주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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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30 목양칼럼

한국의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만, 그 시기가 미국의 절기에 맞춘 것이라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늦은 가을, 혹은 겨울의 문턱에 위치하는 추수감사절을 한국의 명절인 추석과 동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추수감사절을 조금씩 당기는 추세입니다. 

교회가 이런 절기를 기념하는 것은, 그 날에 얽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의미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날짜를 지키느냐 하는 것보다 그 날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가위는 풍성한 열매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생활을 점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열매를 얻습니다. 비록 농사를 짓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수고를 통해 곡식과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현대인은 그것을 금전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노동의 결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둔 결실이 결코 노동만의 결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농사를 지어도 이 논과 저 논의 소출이 다릅니다. 사람의 노동도 이와 같아서, 같은 수준의 수고를 하지만 얻는 소득은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심지어 수고만 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일어납니다.

물론 수고한 대로 적당히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는 그 당연한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여서 사람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억울한 원성이 쌓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거둔 것은,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땀 흘린 노동의 대가이지만 동시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선한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소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설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얻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한다면 하나님께 반드시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얻은 것을 내 것으로만 여기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하나님도 그에게 엄격한 정의를 찾으실 것입니다.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나눔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이 결코 전부 나의 것만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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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목양칼럼

 

신앙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믿음은 살아가는 것과 일치한다. 믿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이다.

살아가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선’을 경험한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惡)이다. 아무리 열렬한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위선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한 청년이 잠시 컴퓨터를 내게 맡겼다.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목사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낯선 이름의 폴더에 포르노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청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청년은 중요한 고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작정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하고, 그 사실을 목사인 내게 알려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민망한 이 사실을 그냥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충고할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교회로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자기를 인정하고 기도생활을 위해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사람은 잘못을 한다. 그것이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잘못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삶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을 품고서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열렬한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면서 삶과 믿음이 분열된다.

포르노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더 추악한 문제들도 많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당연히 양심이 찔려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대하여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거나, 그 정도는 가볍다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를 계속하는 동안, 영혼은 파선하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파야 한다. 믿음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지배하지 못하던 삶의 영역들에 믿음이 들어가 지배하려면 눈물은 필수이다. 찔리고 아프고 고민할수록 영혼은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된다.

위기는 이런 역동적인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면, 심지어 사람에게 보이려고 더 열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혹시 있다면 빨리 자기를 점검하라. 병이 깊어지면 약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희망은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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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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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조건

목회/목양칼럼 / 2012. 8. 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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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아무리 용서를 해주려고 하더라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이가 제대로 수용하지 않으면 용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용서에 앞서 용서를 구하는 사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해주겠다고 하면 그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기분 나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용서 받은 죄인이다. 복음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용서의 소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난제(難題)가 떠오른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것인가? 결국 복음의 선결과제는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백하게 하는 일이 된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기 잘못의 인정을 회피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원죄의 장면부터, 변명과 핑계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람은 대개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은 맹인(盲人)과 같이 보지 못한다. 남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이성이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겸손한 자성(自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죄인의 분명한 자기 한계이다. 그리고 이 한계 때문에 위대한 용서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거절된다. 도대체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죄인이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때때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참혹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용서’를 나타내시는가에 대하여 질문한다. 십자가는 그만큼 불편하다. 거룩하고 따뜻한 하늘의 위로를 기대했건만 참혹한 피로 얼룩진, 처절한 고통의 십자가라니… 이게 과연 전능한 하나님,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미시는 화해의 손길이란 말인가?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어 대문과 같다. 그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야 마땅하다는 고백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용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영혼의 거울이다.

 

아직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자신하는가?

십자가를 보라. 예수가 피 흘리는 자리에 그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고백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역시 파렴치한 죄인일 뿐이다. 다른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우매한 죄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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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LQ. 1.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ever.

 

대1.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담’은 고유명사이면서 일반명사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붉은 흙(아다마)’에서 왔다는 견해를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장 훌륭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창조는 목적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창조주가 맹목의 비인격적 신이 아니라, 바로 깊은 지혜와 계획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격적 하나님이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창조라는 거대한 일을 하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 중에서도 ‘사람'의 목적은 모든 세상의 창조 목적을 수렴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바로 ‘사람’을 창조의 꽃으로,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 되고(chief), 최고의(highest end) 목적이라는 언급 또한 깊이 새길 만하다.

이 말은 사람의 목적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말하는 답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필수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주변적인 목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은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물론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떡’의 존재 역시 부정되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믿음의 도리에 대하여 과도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모든 이외의 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견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견해는 대부분 세상을 망가지게 한다. 과격해진 주장은 분쟁을 만들며,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열매를 통해 확증하건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은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으며, 미움과 분노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리의 자부심은 포용적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남편 다섯을 두었으나 지금도 역시 남편이 아닌 사내와 동거하고 있는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만약 그 여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이후로 새 삶을 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불편한 입장이 되셨을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난히 ‘용서받은 죄인들’이 많았다. 삭게오도, 마태도, 죄 많은 여인도… 모두 사회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서 전혀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험이었다. 만약 그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헌 신짝처럼 여기며 살게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치명적인 모욕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모험하셨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그 어떤 편견과 굴레와도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일에 대한 확신, 진리가 반드시 자유를 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자신감이 없이 어떻게 미지의 영역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힘이었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복합적이라는 것은, 많은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결정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이익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고, 어떤 사람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고 획일적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추구하는 목적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다만 성경은 그 모든 가치의 가장 중심에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통해 하나의 기둥을 세우기를 원한다. 그 기둥이 바로 믿음의 뿌리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의 제1문의 질문은, 이미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아낸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

둘째, 사람이 모든 창조물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셋째, 사람에게 있어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이라는 것.

넷째, 사람은 이 목적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목적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답을 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두 개의 대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왜일까?

남산에서 최고로 높은 나무는 몇 그루인가? 높은 나무는 많지만 ‘최고로’(highest end)라고 한정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중심 되며 최고의 목적은 하나이다. 다만 그것이 두 개의 문장처럼 보여지는 것은, 그 양편의 날개가 서로 보완하여 서로를 설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충만한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하게,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것이다.

왜 예배가 축제여야 할까? 실제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잔치’의 이미지를 계속 천국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반드시 충만한 기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회개’라는 말이 사람 안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속에서 사람이 얻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최고의 예우요, 영광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예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유롭게 대우하셨으며, 그 결과 죄의 유혹과 타락조차 허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는 친구와 같다고 하셨고, 모세와는 얼굴을 대면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이 바로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누리던 기쁨의 관계, 하나님의 보람이 되는 사람으로서 누리던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며, 하나님과의 기쁨이다.

복음은 죄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 자체는 아니다. 죄를 해결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을 가져오고, 그러한 사람의 반응은 곧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서 눈물은 극복의 대상이다. 눈물이 최상의 은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신다고 되어 있다. 눈물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도 한시적인 과정이며 그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다.

신앙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위한 핍박을 찬양하며 받아들인 것은, 그 핍박을 참고 인내했을 때에 주어지는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기쁨이 그 고통보다 훨씬 강하고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의 신앙을 보라.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가볍다. 무겁고 침울하며 한숨의 그늘에 살아가는 자는, 입으로 어떤 거룩한 언어를 내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가 아니다. 은혜는 사람을 아이처럼 만든다. 은혜는 삶의 질서를 단순화시키며, 복잡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 것이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삶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러 의인의 고난도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고통보다 크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통에, 절망에, 어둠에 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이기지 않는 이상 그들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열정과 소망을 꺾을 힘은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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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목양칼럼



인생은 사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거창한 목표를 두고서 노력하는 삶이 아름답지만, 그런 삶의 태도가 가진 함정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내고 삶의 동력(動力)을 얻어내지 못하면, 무슨 거창한 일이든 그리 오래 집중할 수 없다. 설사 오랜 시간을 견디어 내더라도 그런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나쁜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인생관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는 한 문장으로 함축된다.

다소 경박스럽기는 하지만 현실감이 참 탁월한 표현이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서 정직과 성실의 한계를 절감하며, ‘생존이라는 절박한 목적을 위해 자기의 양심과 자존심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부모님의 세대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 없이 살았다. 서양이 두 세기에 걸쳐서 이룩한 산업화를 50년 만에 따라잡았으니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정신 없었겠는가? 아마도 4배속으로 돌리는 비디오 속의 세상처럼 세상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존은 절박했고, 정승 같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개처럼 사는 것도 불사하는 각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평생을 보내고, 적지 않은 결과를 손에 쥐었다. 집이 생기고, 차가 생기고, 금융자산과 인맥이 생기고,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천 리를 마다하지 않는 주머니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잉여의 자산들은, 여전히 마음의 여유는 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한 것도 좋고 자기를 바꾸는 노력도 좋은데, 그 일상에서 삶의 시간은 늘 모자라고 관계의 기쁨과 공감은 바싹 메말라 버린 것이다. 결국 그렇게 손에 넣고자 했던 것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 물질을 차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행복한 자기를 완성해가는 인생에서는 낙제한 것에 틀림없다.

 

소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소유가 주는 잠시의 기쁨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을 가지면 잠시는 기쁘다. 그러나 사람은 소유한 것에 금새 적응하고 빨리 싫증을 낸다.

소유한다는 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배가 터질지언정 만족함을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발견하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행복을 얻는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바로 바람 부는 저녁의 산책을, 비 오는 날의 커피 한 잔을, 뜬금없이 불러낼 수 있는 친구를, 출출한 저녁의 냄비라면을 발견하는 사람이라야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좋은 날도 있고 어려운 날도 있다. 역시나 어려운 날들을 견디게 하는 힘은, 과거의 좋은 날들에 대한 추억이며 동시에 앞으로 다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사실, 마음의 눈을 뜨면 가장 어려운 날들에도 가장 행복한 일상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누리는 마음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지혜가 아닐까?

지금을 개처럼 살지 말라. 개처럼 살다 보면, 정승 같은 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개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을 정승 같은 마음으로 살아라. 설사 정승이 못되면 어떠랴! 꼭 정승이 되야 행복한 것도 아닐진대, 정승이 되겠다고 사람이 개가 될 각오까지 해서야 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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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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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9 목양칼럼


요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씨의 경험담이다.

대학시절 가난한 동네로 의료봉사를 나갔다. 열심히 진료했지만 환자들이 잘 낫지를 않아서 아직은 미숙한 학생들이 진료를 해서 그런 줄로 알았단다. 그런데 어느 날, 진료소 앞마당에서 아이들이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의료봉사 차원에서 약을 공짜로 나누어주니 환자들이 약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니 병도 낫지를 않았던 것이다.

결국 100원이라도 약값을 받았다. 그랬더니 자기 돈으로 산 약이라고 귀히 여기고 약을 복용했다. 얼마 후에는 환자들이 다 상태가 좋아져서 진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두 세 시간씩 버스를 타고서 진료를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도 생겼다는 것이다.

공짜는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을 눌렀다. 

왜냐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라는 지독한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처방하신 생명의 약이다. 그런데 그 값이 너무 귀해서 사람이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공짜’로 나누어 주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복음을 은혜(=공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 약을 무시한다. 값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당연시 한다.

세상에 당연한 은혜는 없다. 모든 은혜는 누군가의 희생과 선의가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소홀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부당하며 무례한 사람이고, 그런 자에게서 은혜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안철수씨는 그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100원의 상징적인 가격을 정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런 설득이 불가능하다. 복음이 곧 은혜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셔서 인간적인 조작이 불허되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복음이 푸대접을 받더라도 복음을 통해 생명이 살아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싸우도록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런데 좌우를 살피면, 돌팔이 약장사들이 난장(亂場)을 벌인다.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이라는 약값, 예배당 건축이라는 약값, 심지어는 나름대로 도덕적 삶의 규범들을 복음의 약값으로 둔갑시켜 팔아먹으니 오히려 공짜(=은혜)였을 때보다 장사도 더 잘 되고, 사람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 허탈한 현실을 뭐라 말해야 좋을까? 먹고 나으니(과연?) 다행인가? 아니면 결국에는 모두 불법을 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걱정해 주어야 할까?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분명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은혜는 값이 없는 것이지 값이 싼(저렴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복음은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rule)대로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엄격하다. 때문에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치열한 고민 속에 살수밖에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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