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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프란시스대학 인문과정,

인간에게 올바른 지식을 주면 그 삶은 변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네 자신을 알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 지식의 선량함이 의심 받고 있다.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악랄하고 교활해진 시대... 어쩌면 지식의 순화는, 높은 지능의 집단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선생님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 찾아가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by mAkaRios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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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유래는 삼국지이다.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화용도(華容道)에 포위되었다. 이 때에 제갈량은 조조를 죽이도록 관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관우는 지난 날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게 퇴각할 길을 열어 주었다. 결국 조조를 놓친 제갈량은 관우를 참수하려고 할 정도로 격노하였지만, 유비가 중재를 나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하는 말 중에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사람의 일을 열심히 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진(盡)으로 바꾸어진 것은, 사람의 노력을 한층 강조하는 변화라 하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참 드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는 한 건가?


우리들의 함정은, ‘대천명’은 잘하지만 ‘진인사’는 소홀히 하는데 있다.

묵상과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쉽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시내산 자락에서 계속 기도하며 출애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다. 팔순의 노인이었던 모세가 지팡이를 짚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니, 단순히 찾아갈 뿐만 아니라 모세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했다. 먼저는 이집트와 싸워야 했고, 나중에는 노예근성에 물든 이스라엘과 싸워야 했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쉽지 않다. 순탄하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진심을 시험하시는 것 같다. 

늘 내가 원하는 것의 대척점에 있어 팽팽하게 긴장감을 주고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곤란하다. 그리고 아프다. 힘들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버겁다. 어느 정도까지는 곧잘 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것이 나의 최선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과연 나의 한계까지 왔을까?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도 좋은걸까?

진인사(盡人事). 

그 경지는 항상 팽팽한 긴장과 갈등의 저편에 있다. 이것은 편안한 자리에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벌거벗은 우리의 민낯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나오는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후에야, 비로소 대천명(待天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옥동자를 낳는 어미가 있던가? 힘들지 않고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있던가? 

하물며 우리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쉽고 간단할 수 있겠는가? 

그 과정의 눈물과 땀을 감내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신앙이 병드는 것은, 날로 먹으려는 병폐 때문이다. 

왕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초대된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왕은 파격을 결심했다.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다가 잔치의 자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몰려나가 그야말로 사람들을 쓸어 담았다.

평소에는 왕궁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던 걸인, 장애인, 창부,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모두 왕의 잔치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다. 왕은 성대한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가 감히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전개이다. 

술주정뱅이와 건달도 손님으로 영접하는 마당에 예복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예복을 입었으면 얼마나 변변한 예복을 입었겠는가? 

그러나 왕은 단호했다. 그를 끌어내어 잔치에서 내어 좇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데려올 때는 언제고, 옷이 맞지 않는다고 끌어내어 버리는 것은 또 뭔가?


왕이 요구한 ‘예복’은 최소한의 성의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실함에 대한 자각이 곧 왕의 자비를 더 돋보이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왕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염치조차 없었다. 그는 어차피 파격적으로 받아줄 것이라면, 이 따위 예복도 필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왕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섬길 각오가 먼저 서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미안하지만 사절이다. 왕은 내가 아니라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 뜻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가? 그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있는가?

그런 내면의 변화와 결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아낸 사람을 나는 성경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는가?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인가? 삽비라처럼 반은 숨겨 놓고, 반만 바치면서 경건을 사기 치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진인사(盡人事). 사람의 일을 먼저 다하라. 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서 대천명(待天命).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시켜라. 무척이나 어렵고 무거운 신앙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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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대응이 아닐 수 없다.


해외직구시 주의!!! 고객을 호구로 보는 외환카드

해외결제 취소시 외환카드가 수수료 먹튀

"신청하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는다"

 

다년간 해외직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이렇게 얼척없기는 처음임.

 

결론부터 말해서, 외환카드 고객상담센터 김성은 대리/주임에 의하면

 

외환카드는 해외 승인 건에 대한 취소처리는 무.조.건.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고객 통장으로 해당금액을 환급 후 카드사에서 청구하는 시스템

당일취소건 뭐건 얄짤 없음.

 

해외 결제시 1~1.5%의 카드 이용 수수료가 발생하는데,

카드사에서 통장으로 환급해 주는 금액은 수수료를 제외한 원금뿐

 

 

  

글쓴이의 경우 수수료에 환율 차액해서 대략 1만5000원 정도를 외환카드에 떼임.

 

3 그렇다면 수수료 차익 발생분은?

이의신청하는 고객에 한해서만 되돌려주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외환카드에서 이득으로 취함

 

 

※동일한 건에서 삼성카드의 처리

- 해당 해외 승인 내역은 익월 청구 건이었으므로 전표 취소 처리,

수수료/환율에 따른 차액 발생 없음

(단, 당월 청구 건이라면 통장 환급 후 청구. 이게 누가봐도 상식적인 프로세스 아님?)

 

 


 

사건의 발단은 7월17일 저녁 해외 사이트에서 결제한 2건의 결제 취소였음.

갖고 싶던 제품이 세일가에 떠서 친구와 하나씩 사게 되었음.

글쓴이가 미리 다 결제하기로 했고 1건은 삼성으로 1건은 외환으로 처리함.

18일 새벽 2시22분 경, 재고가 없어 주문 및 결제 취소 처리가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음.

잘 처리될 걸로 생각하고 있었음. 얼마나 간단함? 그냥 결제 취소일 뿐인데.

 

그.런.데. 24일 목요일 체크카드 결제문자의 통장잔액이 이상하게 늘어나 있는 거임.

계좌 거래 내역을 조회해봄. '외환환급대금' 명목으로 140여 만원이 들어와 있었음.

무슨 환급인가 하여 외환카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카드이용내역을 조회해봄.

 

 

 

나에게 청구할 금액과 환금한 금액이 10.76달러 차이가 남을 발견.

기분이 요상해서 같은 건을 결제하고 똑같이 취소처리된 삼성카드도 조회를 해봄.

깔끔 떨어지게, 상식적으로 전표취소 처리가 되어 있었음.

업무시간이 끝난 뒤였으므로 익일에 상담원과 통화해보기로 하고 일단 퇴근.

 

25일 오전 9시40분 경 외환카드 상담원과 연결 시도.

 

<1번 상담원과의 통화 대강>

나: 17일 해외결제취소 건에 문의사항이 있다. 왜 통장으로 환급처리가 되었는가?

상담원1: 해외결제취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a전표 취소 b통장환급 후 청구. 고객님의 경우 통장환급 후 청구로 진행되었다.

나: a, b의 방법을 누가 선택해 결정하는 거냐?

상담원: 잘 모르겠다. 확인해보겠다.

나: 좋다, 그럼 환급금과 청구액의 금액차이는 왜 나느냐?

상담원1: 잘 모르겠다. 청구금액에 이의가 있을 경우 이의신청을 하면 된다. 이의신청 원하느냐?

나: 일단 이의신청해달라. 그리고 결제취소방법에 대한 건은 알아보고 연락달라.

 

오전 10시20분 경 다른 상담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옴.

 

<2번 상담원과의 통화 대강>

상담원2: 해외결제취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a전표 취소 b통장환급 후 청구. 고객님의 경우 통장환급 후 청구로 진행되었다.

나: 그럼 a, b의 방법 중 외환카드에서 임의로 결정해서 환급처리한 거냐?

상담원2: 맞다

나: 사이트 확인해보니 전표 미매입 상태인데, 전표취소가 가능한데 왜 통장환급했나?

상담원2: 사이트 상에는 그렇게 나와있지만, 고객님의 경우 '별건매입'으로 가맹점(파페치) 측에서 매입처리를 빠르게 진행하여

카드 한도액에 잡히게 되었고 할 수 없이 통장환급하게 된 것이다.

나: 그럼 금액차이는 왜 나느냐?

상담원2: 날짜에 따른 환율변동 때문인데... 이의신청을 하면 되고...

나: 내가 왜 카드취소 하나 가지고 아침내내 전화통 붙들고 이의신청하고 번거롭게 이래야 하나?

외환카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다. 상담원 당신은 해외결제취소 업무 담당자도 아니고 권한도 없으니 본사 담당자 연결해라.

상담원2: 그럼 다른 상담원을 연결...

나: 됐고 본사 직원 바꿔라.

상담원2: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다.

 

글쓴이는 2번 상담원과의 통화 후 사실 확인을 위해 삼성카드 상담원에게 전화를 검.

 

<삼성카드 상담원과 통화 대강>

나: 17일 해외결제취소 건에 문의사항이 있다. 이 건이 '별건매입' 처리되었다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전표취소 처리가 되었는가?

삼성상담원: 고객님의 카드대금 결제일자가 내일(25일)이므로 7월 청구 건이면 통장환급 후 청구 방식으로 진행이 되지만

8월 청구 건이기 때문에 전표취소 처리가 되었다.

나: 그렇다면 카드 결제 취소에 어떤 제약사항이 있는가? 얼마의 시일이 지난 후에는 전표취소가 안 되고 통장환급 방식으로만 해야한다거나..

삼성상담원: 그런 제약은 없다. 가맹점측에서 요청하면 카드사는 언제든지 전표취소 처리할 수 있다.

 

오전 11시28분 경 3번 상담원(김성은 대리/주임) 전화 옴.

 

<외환카드 고객상담센터 김성은 대리/주임과 통화 대강>

김성은 주임: 안녕하십니까. 외환카드 고객상담센터 김성은 대리 블라블라블라.

고객님이 문의하신 부분에 대하여 안내드리자면 블라블라블라.

나:  해외결제취소 a, b의 방법 중 외환카드에서 임의로 결정해서 환급처리한 거라는데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느냐?

나는 전표취소 방법으로 진행하길 원한다.

김성은 주임: 그건 우리 직원이 잘못 이야기한 거다.

담당자와 통화하여 확인했는데 외환카드에서는 해외결제 건에 관하여 전표취소처리는 하지 않고 있다.

고객님이 원하는 사항은 반영이 어렵다.

나: 말이 되냐?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무조건 통장환급이냐?

김성은 주임: 확인했다. 맞다.

나: 그렇다면 그런 사항이 카드 약관에 나타나 있느냐?

김성은 주임: 없다.

나: 홈페이지에 따로 공고된 사항은 있느냐?

김성은 주임: 없다.

나: 그럼 내가 뭘 근거로 수긍할 수 있느냐? 업무 프로세스나 메뉴얼이 있을 거 아니냐? 이해가 안 간다. 7월 청구 건도 아니고 8월 청구 건을 왜 이런식으로 처리하나?

내가 카드깡하는 것도 아니고 매우 불쾌하고 짜증스럽다.

김성은 주임: 있으나 '내부용'이라 확인시켜줄 수 없다.

나: 그럼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믿고 수긍하느냐? 다른 카드로 같은 가맹점에서 같은 금액으로 같은 날짜에 똑같이 취소했는데 전표취소처리 되었다.

김성은 주임: 그건 다른 카드사고, 고객님은 외환카드 고객이니까 외환카드의 시스템을 따라주셔야한다.

나: 됐다, 상담원 말고 본사 담당자 연결해라. 해외결제 건 취소한 직원이 있을 거 아니냐?

김성은 주임: 시스템으로 전산상 처리되는 거기 때문에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담당자랑 통화로 확인했다더니? 앞뒤가 맞지 않는 주먹구구식 고객 응대)

 

나: 그럼 금액차이는 왜 나냐?

김성은 주임: 환율변동에 따라서 일부 금액 차이가 날 수 있다. 고객님의 경우 매출전표는 7/18에, 취소전표는 7/21에 접수되었다.

나: 웃기지 마라. 청구 금액이랑 환급금액이 10달러가 넘게 나는데, 이건 뭐냐?

김성은 주임: 그건 카드사 이용 수수료고 이의신청을 통해서 환급받을 수 있다.

나: 그럼 이의신청 안 하는 사람은 못 돌려 받는 거냐?

김성은 주임: 그렇다.

나: 외환카드는 그런 식으로 수수료 장사하려고 일괄적으로 통장환급처리 하나?

김성은 주임: ...

나: 그럼, 외환카드는 해외결제 건에 대한 취소는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무조건 통장환급 방식으로 처리되고

환급시 발생하는 수수료 차액은 고객이 이의신청하지 않는 한 지급하지 않으며

지급되지 않은 수수료 차액은 외환카드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맞느냐?

김성은 주임: 맞다.

나: 이름이랑 소속 부서 다시 확인하겠다.

김성은 주임: 외환카드 고객상담센터 김성은 대리다.

 

 해외결제취소 방법에 대한 안내도 직원마다 답변이 다 다름. 뭐가 이따위임? 

1번 상담원 / a전표취소 b통장환급의 두 가지가 있는데 누가 결정하는지 모름

2번 상담원 / a, b 중 선택인데 외환카드가 임의로 처리함

3번 상담원-김성은 대리 / 앞에 직원들이 잘못 말한 거임. b밖에 없음

 

외환카드를 매우 불신하게 된 글쓴이는 김성은 대리와의 통화종료 후 삼성카드에 매출전표와 취소전표 매입 날짜 확인을 요청함.

 

 

 

 

매출전표 취소전표 모두 21일에 접수되었다는 답변을 받음.

 

참고로 글쓴이가 가맹점(파페치)로부터 취소 메일을 받은 시간은 아래와 같음.

두 건의 주문 취소와 환불 처리가 동시에 진행되었음.

그런데 어찌하여 카드사마다 이렇게 취소 처리에 큰 차이가 나는지 의문임. 

 

 

 

일반인이 생각했을 때 '외환'은 '삼성''국민''신한''현대' 카드보다 외국환의 환율에 더 민감하고 전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

'한국외환은행법을 기초로 세워진 외환관리 전문 금융업체'인 '외환外換'은행 산하 외환카드 아니겠음? (분사가 진행 중이지만) 직원들이 외국환 시세에 더 전문적일 거라는 기대감을 갖는 게 지나친 거임?

그런 기대감을 이용하여 해외결제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이따위 환차익 및 수수료 장사나 해먹으려는 심보라니 너무 괘씸함.

 

심지어 1978년 국내 은행으로는 최초로 신용카드(비자카드) 업무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카드 업무 처리가 이따위임? 회사가 체계도 없고 업무 매뉴얼도 없고 해당 업무 담당자도 없대고 외환카드 쓰니까 외환카드를 따르라며 될대로 되라식으로 뻗대고.

 

글쓴이가 같은 날짜에 같은 금액으로 같은 가맹점에서 다른 카드로 결제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갔을 거고, 그러면 외환은행은 가만히 앉아서 환급되지 않은 수수료를 떼어 먹는 거임.

심지어 저 금액에 대한 이의 신청은, 약관을 확인해보니 14일 이내에 한 것만 유효함.

본래 글쓴이가 7월17일에 결제한 건은 8월25일에 청구되는 것이었고, 그때 가서 청구서 확인해봐야 내 돈은 이미 외환카드가 먹고 게임 끝.

 

연회비 받아 쳐먹으면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은 안 하고, 고객 돈 떼어먹을 궁리나 하는 외환카드는 각성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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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pann.nate.com/talk/323606133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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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백신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퀴우360 은 이미 36테라의 클라우드 서비스로 이미 많이 소개가 되었다.
그런데 이 회사가 본래 클라우드 회사가 아니라 컴퓨터 보안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이며, 때문에 백신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성능이 괜찮다...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능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아래는 2014년4월의 백신 테스트 결과이다. 


역시 러시아 백신인 카스퍼스카이가 최고의 정점을 자랑하고, 그 다음으로 중국산 백신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IT 발전은 무서울 정도이다. 


Qihoo 360 Internet Security 는 상용이 아니라 무료백신이다. 보통 개인사용자에게 1년 정도 무료사용기간을 주는데, 이것은 그것도 아니고 계속 무료를 주창하고 있다. 

무료는 뭔가 단점이 있겠지? 성능이 저렇게 좋으면 무겁지 않을까? 뭔가 컴퓨터를 버벅거리게 만들지 않을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설치했던 백신들 중에서 생각하면 가볍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마이크로소프트 디펜더를 사용해 왔다. 윈도우8의 기본 포함이라 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V3와 Avira, AVG, COMODO, AVAST를 사용해 보았다. 대부분 무겁다. 메모리 점유율이 많아서 램이 여유롭지 않으면, 백신은 계륵이다. 없으면 꺼림직하고 있으면 컴퓨터의 성능을 크게 떨어뜨린다.

그런 점에서 퀴우의 360 백신은 상용백신과 비교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낫다. 


특징,

1. 비트디펜더 엔진, QVM II엔진(자체), 클라우드 엔진 기반의 백신
2. 중국어가 메인이고 영문 UI를 제공한다. (한글은 없다)
3. 인터페이스가 간략해서 사용이 어렵지는 않다. 백신을 한 번이라도 사용해본 사용자라면 문제 없다.
4. 광고가 없다. 그래서 권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그램은 여기서 다운할 수 있다. :: http://360safe.com/

화면 오른쪽 하단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리뷰도 소개한다. :: http://netrunner.blog.me/40210164593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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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의사(醫師, doctor)


흔히 히포크라테스를 의사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약 460~370년에 그리스에 살았던 히포크라테스에 대하여 많이 알려진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철학과 마술에서 의학을 분류하여 자신의 학파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도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남겼다는 사실이 유명하다.


그는 의사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가지는 의미는, 의사가 의료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단순한 장사꾼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조력자라고 그 정체성을 정의 내린 것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의사는 아무리 환자가 원하더라도, 아무리 큰 보상이 약속되었더라도 환자의 심신에 독이 되는 것을 주지 않으며, 상해를 입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의사들은, 이 선서 앞에 부끄러웠다. 얼마나 많은 권력자들이 의사의 손에 의하여 독살 되었는지 역사책을 살펴보라. 

그리고 지금도 의사들은 싸우고 있다. 더 유명하고, 더 부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했던 선서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될 것인지... 이 시대와 사회는 의사들에게 싸움을 강요하고 있으며, 때문에 의사들이 자신들의 선서를 계승하고 지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환자가 원해도 환자에게 독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 그렇다면 의사는 무엇을 돕고 조력하는 것인가? 

의사가 독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분명 가볍지 않은 의미가 숨어 있다.

물론 환자가 병을 낫기 원할 때, 의사는 환자를 돕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병이 불가항력적이라거나, 혹은 너무 고통이 크다거나, 혹은 심각한 장애를 주어서 환자에게 더이상 그런 장애를 가지고 살고 싶지 않게 만든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요즘 사회적 고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락사'의 문제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근본적으로 이런 의사의 역할, 곧 '죽음'의 편안한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환자'의 조력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이런 경우도 있다. 우울증이나 조울증의 경우, 이 정신적 고통은 끝없이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환자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시도한다. 정말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이런 정신적 질병에 고통하는 환자의 의지는 존중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무시되어야 하는가? 의사는 환자를 돕는 사람인가? 환자의 의지에 반하는 의사의 행위가 정말 환자를 돕는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 의사는 환자의 의지가 아니라, 환자의 생명을 돕는 사람이다. 

스스로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것은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의사는 '생명' 자체를 숭고하게 여기고 그 생명이 존속하려는 의지를 돕는 것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조차, 몸은 살려고 한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라고 하여서, 몸에 벤 상처가 방치되는 것이 아니다. 몸은 필사적으로 피를 멈추게 하고, 찢어진 상처를 회복하려고 한다. 전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말이다. 

의사는 이런 몸의 기능, 그 본질적인 생명의 의지를 알고, 믿고, 조력하는 것이다. 때문에 의사는 때로 환자의 의지와 충돌을 하면서까지, 심지어 사회적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생명 자체를 지키려고 한다.

연쇄살인마도 응급실에 실려오면 의사는 최선을 다해 그를 치료한다. 아무리 불법한 사람이라도, 의사는 환자의 신상과 관련된 비밀을 유지하고 누설하지 않는다. 내적 갈등이 수반되겠지만, 그것은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숙명이다.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그것을 위해 자기를 던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기술자일 뿐이지 '의사'는 아닌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의사'는 특별하다. 존경 받아 마땅하다. 굳이 직업 소명설을 불러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직업이 '성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있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은총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 어찌 성직이 아니겠는가!

다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시대에 과연 '의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건강한 전통이 세워지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우려가 많다. 많은 자들이 각기 제 길로 갔다. 과도한 명성과 지나친 부를 좇아, 심지어는 권력을 얻기 위해 '생명'에 대한 본래의 각오를 버렸다.

흰 가운은 작업복이 아니다. 그것은 무균의 각오이다. 환자를 위해 결백한 자기를 유지하고 관리하겠다는 다짐이 그 복식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어찌 현미경에 보이는 세균만 무섭겠는가?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탐욕의 세균과 바이러스는 더 끔찍한 재앙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의사가 금력의 앞잡이가 되고 권력의 시종이 될 때에, 그야말로 시대는 암담하다. 그것은 약한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것이며 근본적인 신뢰가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다운 의사들을 존경한다. 더불어 변절하는 의사들에게 부탁한다. 그러지 마시라. 제발 '생명'의 수호자와 조력자로 남아 주시라. 그대들의 성역을 배반하지 마시라. 배 고프다고 환자의 등을 치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양아치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그대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의사가 아니던가!



P.S. 

의료민영화 반대 100만 서명운동 [서명하기] : http://goo.gl/weu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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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하 700미터,

고립된 33명의 생존자,

69일만의 구조

... 

세월호가 더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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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베이징의 후통(胡同,hú tóng, 골목)

후퉁(胡同,호동)은 주로 수도 베이징의 옛 성내를 중심으로 산재한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베이징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후퉁과 쓰허위엔(四合院)은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 가옥 건축인 쓰허위엔이 이 후퉁에 많이 접하고 있어, 베이징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후통'이란 쉽게 말해, 베이징의 중심부에 있는 구(舊)시가지 거주지로, 주로 벽돌로 만든 단층집 밀집지역의 골목을 가리킨다. 후통은 영어로 번역해도 ‘HuTong’이다. 한국말로 하면 ‘골목’ 혹은 ‘동네 거리’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후통’의 뜻은 원래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몽고어 ‘Hottog’의 발음에서 기원한 고유명사이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우물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되었고, 그래서 원래의 뜻은 ‘거주지’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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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9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목회를 성역(聖役, 거룩한 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목사는 늘 서재에 앉아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생각만 하면서 살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목사도 사람이고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비약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아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가끔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목사들, 혹은 목사 후보생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너무 신령하고 거룩해서 감히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가 발산되는데, 마치 십계명을 받을 때의 시내산과 같아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역자로 25년, 목사로 10년을 지내면서 돈 걱정을 내려놓은 적이 별로 없다.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혼하고 처음 받은 월급이 전도사로서 40만원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받던 용돈보다 적은 나의 월급을 손에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때부터 시작된 '돈'과의 싸움은 지금까지 내 삶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내게는, 매달 생활비는 물론 이국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야칭(임대료)과 공과금도 쉬운 적이 없었다.


돈은 만만하지 않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자연의 생산물은 태어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고 썩어서 순환하는데,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 '돈'의 등장이다. 결국 돈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경제적 불평등을 극대화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라는 것은, 몰염치의 결실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미안함을 갖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게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부요함을 계속 늘려가려 하는 경향성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돈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때문에 돈과 관련해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는 문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자기 점검과 노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목사'라고 봐주겠는가!  

목사는 쌀이 떨어지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나? 목사는 교회 야칭(임대료)를 몇 달 밀려도 기도의 힘으로 간과(passover)되는가? 

좋다, 목사야 운명처럼 그런 가난을 받아들이며 산다고 치자. 그 가족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교회 중에서, 돈의 고민을 완전히 벗어던진 교회는 아직 보지 못했다. 

작은 교회는 나처럼 '생활'과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더 '큰 돈'의 무게에 눌려 목사와 교우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 현실이더라.

돈은 결국 싸움의 대상인 것 같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혹은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하기까지는, 그저 그 돈과 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경쟁하며 부침(浮寖)을 반복하는 과정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이상 돈에 대한 갈망, 염려, 애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 나름 귀한 것이다. 그리고 돈의 세상에서 돈을 이기는 법을 듣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교우들의 마음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하나를 연보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 동전이 그 여자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난한 형편이며, 얼마나 큰 믿음인가!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라. 가난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수입이 없는 것이다. 돈 벌기가 힘든 부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동전은 어디서 나왔을까? 길에서 주웠을까? 그래도 좋았겠지만, 예수님의 감탄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그 동전 속에서 상상하게 한다.

동전 하나를 벌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과부는 무엇을 했을까? 그 동전에 스며 있는 눈물과 한숨과 설움과 아픔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돈을 색깔과 숫자로만 본다면, 돈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돈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도풀갱어와 같은 자기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돈이 걱정이다. 돈에 돌아버릴까 걱정이다. 나의 교우들이 양심을 팔아 돈을 벌까 걱정이다. 내가 양손에 받아 봉헌하는 헌금주머니에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이 섞여 들어올까봐 걱정이다. 돈이 교회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할까봐 걱정이다. 돈이 사람을 핍박할까봐 걱정이다. 목회를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돈에 의존하여 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 때문에는 우는데 사람 때문에는 울지 못하는 목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의 전염병에 걸려 만족을 모르는 우리가 될까봐 걱정이다...


돈과 무관한 목회는 이상이다. 결국 교회도 돈과 겨루지 않을 수 없다. 돈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의 배후에는 죄가 있다. 신앙은 이 본질을 캐고 끊어내야 한다.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점점 극단적인 자본주의에 물들어, 내가 번 돈은 완전히 나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괴물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교회는 돈과 돈을 버는 방법과 돈에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 고민해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돈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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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목양칼럼 2014-07-15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질서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 말했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 하여서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하나님의 사랑이 덮은 사건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가 깨뜨려졌는가?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어떤 죄라도 이보다 더 큰 형벌을 구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의가 충족되었다. 심지어 정의를 충족시키고도 사랑이 넘쳤으니 사랑이 정의를 덮은 셈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만 유일무이한 복음이다. 이 역설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는 '인과응보'의 보편적 질서를 넘어서지 못하는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술을 끊지 못해서, 사업에 바빠서, 심지어는 가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죄송하단다. 그 마음이야 정말 이해한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복음은 본래 선물이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어차피 그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이어야 하고, 둘째는 그 값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값을 치룰 능력이 없으니 선물이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누구나 '부끄럽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들어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의 모든 약함을 대신 져 주시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를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당당함은, 은혜를 깊이 자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발적 응답의 모습이지, 고개를 쳐들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어떤 부끄러움도 상관할 필요가 없다. 많이 부족해도 괜찮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 자비를 깨닫는다면, '지금'이 바로 회개할 기회이며, 하나님을 만날 때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불쾌한 반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땅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은 많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한다. 그러나 창조주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다. 그것이 복음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금언은, 오히려 부족하다. 복음은 내일이 아니라 몇 시간 후로도 미루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지금이어야 한다.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당장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무릎을 꿇어라. 알량한 죄의식은 십자가에 못 박아라. 부족하다고 고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라. 

부끄럽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기도를 헛소리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빌라. 무엇을 도와달라고 할지 모른다면,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덮으셨으니, 이제 나를 정의보다 사랑의 눈으로 봐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을 경험하면, 사람은 바뀐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맛 본 사람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깊은 곳을 만진다. 알지 못했던 나를 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꿈꾸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을 자라게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맛을 본 사람은 알고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지니... 이것을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은 하나다.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라. 미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 만나고자 결심을 하고 당장 실천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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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목양칼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한 해가 훌쩍 지나고 10년이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상은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매일매일이 거의 같은 패턴의 반복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지루해져야 하고, 지루하면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느껴져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자체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경계가 뚜렷했습니다. 언제까지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입학, 졸업 등)가 있었습니다. 그 결승점 앞에서 시간은 압축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앞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고 자기를 독려하며 시간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나이부터는 더 이상 그런 긴장감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다음 주에 하면 됩니다. 그 막연함에 익숙해지면서, 시간 자체를 매우 허술하게 보내는 무감각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결국 ‘졸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무한정한 자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없을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교훈합니다. 시간 앞에 옷깃을 여미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시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합당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되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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