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er Sonnet France라는 모델인데, 아주 고가품은 아닙니다. 그래도 금도금의 닙(nib,펜촉)에 고전스러운 스타일로 대략 10만원이 넘는 제품입니다. 제가 구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저의 외조부님께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보통 초고를 씁니다. 요즘은 어깨 통증이 생겨서 자판 사용을 되도록 삼가다 보니, 이 녀석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 같은 펜입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에 잉크를 묻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대상처럼 순순히 반응하다가도, 갑자기 토라져서 잉크를 내놓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참 글을 쓰다가도 펜촉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오래 방치한 죄가 있습니다. 매일 써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만년필의 특징입니다. 관리를 잘해주고 좋은 잉크를 사용하면 덜하지만, 혹여 질 나쁜 잉크를 먹이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심통을 부립니다.
어떻게 관리를 하냐고요? 대략 한 달에 한 번은 미지근한 물로 만년필의 모든 묵은 잉크를 씻어내야 합니다. 익숙하면 간단하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무지 번거로운 필기구를 비싼 돈 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를 신봉하는 세상에서 잉크를 계속 넣어줘야 하고, 찌꺼기를 청소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 녀석을 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녀석의 매력이 있습니다. 서걱거리는 필기감이 주는 손맛은 물론이고, 그렇게 까탈을 부리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를 못합니다. 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글에 정성이 베이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펜이 그려내는 자신의 글씨를 보면서, 성급함을 자제하고 생각의 꼬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쉽고 깔끔한 것만이 미덕(美德)은 아닐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덜 깔끔해도 그 위에 스며드는 한숨과 땀이, 눈물이 더 인간적인 무엇을 탄생하게 만듭니다. 그 미완의 불편함이 좋아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오래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이놈이 나를 닮고, 내가 또 이놈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감정적인 글을 토해내려고 할 때 이 녀석이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좋은 글을 쓸 때에는 술술거리며 저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펜과 사람 모두에게 성장하고 길들여지는 과정 같습니다.
펜이 사람에게 그러하듯, 사람 또한 펜에게 그러합니다.
만년필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우며, 고단하고, 냉철합니다. 그래서 펜은 마음을 강하게 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면, 이 녀석은 저와 평생을 갈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을 지금까지도 묵묵히 받아 적어 주었던 이 녀석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특별하듯, 저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이 펜과의 동행에 이미 담겼으니, 제가 펜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펜은 언제나 저에게 대화의 상대이며, 설득의 처음대상입니다…
추위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겨울 날씨를 흔히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고 합니다. 냉막한 추위도 사흘이면 사그라들고 다시 나흘은 따뜻한 날씨가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확하게 지켜지는 규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연을 통해 얻어진 인생의 통찰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간 역시 지나갈 것이며 결국에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저는 ‘삼한사온’이라는 말 속에서 긍정과 소망의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상에는 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물론 있습니다. 극지방이나 적도에서는 실재로 그런 날씨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순환의 주기는 약간 다르다 할지라도 추위와 따뜻함의 반복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여정 역시 비슷하다고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추위가 찾아왔다고 너무 두려움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소망의 불씨를 인내의 입김으로 북돋으며 기다리면 됩니다. 반드시 따뜻한 날은 우리 곁에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옛날 이야기를 하듯 지금의 어려움을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손길 속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삼한사온(三寒四溫)을 기억하십시오. 많이 힘들다는 것은 거의 지났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물론, 지금까지 따뜻한 날들을 보내신 분들은 추위도 각오하셔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모험이니까요… 그것은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샬롬~
목회생활을 해오면서, 경험으로 깨닫게 된 오의(悟意) 중의 하나는 ‘대단히 신앙적인 모습에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못지 않게, 교회와 신앙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그들에게도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앙은 자신의 신념과 일체화되어 있어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는 전형적인 장애가 됩니다.
물론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들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수호신(守護神)이 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사익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하나님(private-god)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자기부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오직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는 길을 찾아내는, 이를테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던 ‘점 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과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버리면, 이야기는 끝이 난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가시나무새의 핏빛 울음이 아니라 혈기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엘리야가 와도, 바울이 와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듣기 원하는 목소리만 듣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하고 근본적인 목회의 사역이지만, 이 경우의 기도는 전혀 교통하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숙제가 됩니다.
그래도 영혼은 귀하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은 시기상조(時機尙早)입니다. 오히려 시도할수록 더 깊은 상처의 기억을 남길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 외식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보통은 교만한 자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는데, 이 이상한 신앙은 이기적이면서도 연대를 잘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전한 영혼을 보상하기 위해서일지 모르지만, 매우 든든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그 연대의 자기편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 목사와 그런 성도들이 연대하는 교회는 최악입니다. 이것은 교회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배당을 장식하는 장식품일 뿐이며, 전혀 십자가의 도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 송아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 그들이 부르는 찬양, 그들이 선전하는 은혜는 모두 ‘황금’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배교(背敎)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함정이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설하는 그들의 어법이 너무 초보적이고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욕망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영적인 진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그들이 찾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과연 하나님의 주머니를 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술’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들도 교회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하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사역자로서 내가 갖추어야 할 미덕(美德)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기름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그런 사람들과 내 신앙이 한 배를 탈 수 없고 멀리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들의 성경에 대한 난독(難讀)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의 자기 부정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도구화 해버리는 강력한 자아를 건드리는 메시지는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충돌은 양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의 치열함 속에서, 그리고 저열한 사람의 바닥을 보는 경험들을 통해, 결국 이런 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증거의 강력한 훼방자는 분명히 교회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안방을 다 내어준지도 모릅니다. 가는 곳곳에서 경험하고 듣게 되는 이야기가 이런 심증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십시오. 시대가 악합니다. 우리는 변질된 복음과 황금 송아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 안에서 듣고 경험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믿었던 것에서 가장 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갈 수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대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성경 자체뿐입니다. 묵상이 없는 사람은 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의 진리를 갈고 닦지 않으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사방이 어두워 자기 손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 앞길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실험 방법은 타임머를 스타트 한 후에 똑같은 순서로 똑같은 어플을 실행하고 타이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중 실행(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핸드폰이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가를 보여주는거죠.
압도적으로 아이폰의 승리입니다. 갤럭시S5보다 무려 1분이나 빠른 것을 생각하면 치욕스러울 지경입니다.
더구나 갤럭시는 기기의 램이 2~3기가입니다. 월드와이드의 스탠다드모델은 2기가이지만, 한국에 발매한 프라임 모델은 3기가 램이 장착되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아이폰6는 1기가의 램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기기에서는 저가폰만 1기가 램을 사용합니다. 고급 모델은 모두 2기가 이상이지요. 그런데 아이폰은 더 적은 하드웨어 사양에서 오히려 훨씬 훌륭한 퍼포먼스를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플이 괜히 애플이 아닙니다.
이 영상을 보고 당장 드는 생각이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의 경쟁입니다.
애플은 처음부터 완성된 컴퓨터를 지향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좀 완성도가 떨어져도 사용자가 계속 대응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을 지향했습니다.
때문에 애플 사용자에게 있어 윈도우는 뭔가 허접한 느낌이었지요. 잘 먹통이 되거나 툭하면 블루 스크린을 뱉어내는 멍청이 말입니다.
애플은 하드웨어를 거의 봉인해서 출시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뭔가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델을 구입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반대로 윈도우는 허접하지만 사용자가 바꾸고 만지는 맛이 있지요.
하지만 이런 특성이 윈도우의 성공을 보장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유명한 '황의 법칙'과 같이 하드웨어의 발전이 눈부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컴퓨터 관계자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하드웨어의 발전 속도가 빨랐던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와 맞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최적화된 애플이라 하더라도, 신기술과 새로운 하드웨어를 적용하는 것에 늦어지자 결국에는 메이저 컴퓨터의 자리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애플이 1기가의 램과 250기가의 하드디스크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에 몰두할 때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피씨는 저렴한 가격으로 램을 4기가로 늘리고 하드디스크는 500기가를 달아 출시하는 식이었습니다.
스펙은 현저하게 차이 나지만, 실제 퍼포먼스는 거의 비슷한 것도 미스터리였지요. 바로 오늘 동영상의 갤럭시와 아이폰처럼 말입니다.
마이크로 소프트가 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변화에 더 적합했던 것 뿐이지요.
마이크로 소프트의 램에 대한 설계미스는 유명합니다. 기본 메모리를 너무 적게 설계하는 바람에 메모리 추가방법과 관리에 애를 먹어야 했지요.
이것은 윈도우 XP까지도 이어져서, 32비트 버전의 경우 4기가 이상의 메모리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패치를 통해 그 이상의 메모리도 사용할 수 있도록 방법이 나왔지만, 그 즈음에는 이미 XP가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정식 대응을 할 필요가 없었지요.
윈도우 7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계속되다가 윈도우 8에서는 아예 메이저 컴퓨터 환경이 64비트로 넘어왔기 때문에 결국 저절로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물론 32비트 버전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패치로 그 한계를 풀 수 있었다면 진작 설계에 반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그렇게 많은 램을 일반적으로 장착하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직접, 간접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이쪽에는 열려 있었습니다. 애플의 업그레이드는 애플에게만 이득이 되지만, 윈도우 피씨의 업그레이드는 모든 하드웨어 업체에게 장날과 같았습니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는 것을 아마 다른 하드웨어 회사들도 눈빠지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금 애플은 과거의 애플은 아닙니다.
이번 아이폰도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폰6에는 애플이 직접 설계한 칩이 장착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은 하드웨어 사양을 고수하면서도 이렇게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애플은 과거처럼 대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스티븐 잡스가 남겨준 유산과 같이, 기발한 신기술을 번쩍번쩍하는 디자인으로 포장하여 계속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그것은 애플의 폐쇄성입니다. 애플의 성장은 결과적으로 중국에 있는 협력공장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이익이 애플에 독점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연대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약점은, 그들의 베이스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회사였던 애플은 아이팟을 통해 MP3시장에 진출했고 다시 아이폰을 통해 모바일 회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컴퓨터도 만들고, MP3도 생산합니다. 그 제품들도 훌륭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변신에 성공한 애플의 혁신은 더 훌륭한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그 혁신이 애플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폰 다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한 압박감이 아이워치에서 보이는 것은 저만의 관점일까요?
얼마전에 세계 최고의 부자로 빌 게이츠가 다시 등극했습니다.
윈도우가 새로 출시될 때마다 시장에선 불만이 폭주합니다. 새로운 버전에 혁신이 없다, 아직도 이런저런 기능을 고치지 못했다, 별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 별 말이 다 나옵니다. 그 결과 윈도우 8은 아직도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무도 개인용 컴퓨터의 OS로 윈도우의 존재감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강력하게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PC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겠지만, 그 때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안전할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만의 시장과 사용자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한국의 속담은 이런 경우에도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에 반하여 애플은 유목민과 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컴퓨터 회사에서 MP3로, 그리고 다시 핸드폰 회사로 변신했습니다. 그 모든 변신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에서 애플의 대단함은 드러납니다. 이 회사를 다니는 구성원들은 그야말로 천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애플은 혁신을 멈출 수 없고, 안정적이 아닙니다. 그 혁신을 멈추는 순간, 실망은 곧 현실과 주식시장의 반응으로 뜨겁게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회사에 비하여 조금은 안스러워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등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바일 회사로 정상을 달리던 노키아의 몰락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대박을 치는 것도 좋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생명력이 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판단으로 승패를 가늠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갤럭시가 더 느리고 아이폰이 더 빠를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환호하겠지요. 그러나 느리면 약간 가격을 낮추고 이익을 덜 남기는 것으로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항상 최고의 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얼마든지 속도를 양보하고 저렴하고 꽤 괜찮은 성능을 선택할 사용자도 있을 것입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승패는, 사람들의 수준과 니즈(needs)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루 한 번이 정상이며, 또한 가장 좋다: 미 육군은 한 때 사병들에게 매일 3S, 곧 샤워(Shower), 면도(Shave), 대변(Shit) 을 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변이 너무 무르거나 딱딱하지 않는 한, 하루 세 번에서 일주일에 세 번까지는 모두 정상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변비는 좋지 않습니다. 변비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습니다. 나쁜 식습관, 탈수, 운동부족, 여행으로 인한 시차 및 식생활 변화, 임신, 특정 약의 효과 등이 그 원인입니다. 이는 충분한 휴식, 물 많이 마시기, 운동, 섬유질과 곡물, 과일, 야채 섭취 등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쁜 냄새가 정상이다: 대변에서 장미향기는 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썩은 장미향기가 나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날 경우, 감염이나 크론 병, 셀리악 병, 대장의 궤양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지아르디아 기생충은 고약한 냄새를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결장은 깨끗해야 한다: 숙변 제거(Colon cleansing)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건강에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기껏해야 시간과 돈의 낭비로 끝나게 됩니다. 최근 한 연구는 숙변제거가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씻어낼 때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실제로 씻어내야할 나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독소와 오래된 변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거되는 것은 유익한 박테리아와 전해질입니다. 결장에는 1000종 이상의 박테리아들이 소화와 수분흡수, 섬유질의 발효, 비타민 흡수를 돕고 있습니다. 병원의 응급실에는 숙변제거로 인해 탈수, 직장천공, 감염 등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오래 앉아 있어도 좋다: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건강에 나쁘지 않다는 것 역시 오해입니다. 헨리 밀러는 1952년 발표한 “내 인생의 책(The Books in My Life)”에서 한 장을 화장실 독서용으로 썼습니다. 시트콤 “사인펠드(Seinfeld)”의 등장인물 조지는 서점의 화장실에서 읽기 위해 값비싼 그림책을 사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화장실에 배치한 잡지가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은 화장실 독서가 치질과 관련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1974년 발표된 한 연구는 변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항문을 장시간 이완시키게 되고, 그 결과 직장 주변의 조직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1989년 란셋에 발표된 연구 역시 치질 환자들은 일반인 보다 화장실 독서 습관이 두배에 달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물론, 치질과 화장실 독서습관 중 어느 것이 다른 하나의 원인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식이섬유를 더 많이 먹고,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기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읽은 책이나 사용한 스마트폰이 대변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있습니다.
많이 배설할 수록 체중은 줄어든다: 이것은 물리적으로는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설사약을 복용하거나 ‘다이어트용 차(tea)’를 마시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음식이 소화되고 흡수되는 것은 소장에서 이루어지지만, 설사약은 대장이나 직장에서 작용합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아시아인들은 서양인들보다 더 많은 양의 변을 봅니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의 비만 비율은 서양인들보다 낮기 때문에 누군가는 여기에서 어떤 연관성을 찾으려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시아인들의 고섬유질(high fiber) 식습관이 낮은 칼로리로도 포만감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시아인들이 먹는 통밀, 콩, 야채, 씨앗, 땅콩류 등이 고기나 가공식품보다 더 낮은 칼로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원세훈 전(前) 국정원장에 대하여 선거법위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났다. 대한민국 사법부에게는 수치스러운 판결이다. 판결문은 법의 적용에 대한 논리가 그 생명인데,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확실하지만 선거개입은 입증될 수 없기에 무죄라는 것은 그야말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법원 내부의 비판이 당연히 나왔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는 12일 오전 7시께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이를 '지록위마'라고 꼬집었다.
개인적으로 보관하기 위하여 이 글을 블로그에 담아 놓는다.
법치주의는 죽었다
수원지법 성남지법
부장판사 김 동 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