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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목양칼럼


교황의 방문으로 한국 매스컴이 뜨겁다.

부끄럽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위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나의 개신교는 무엇을 했던가?

위로의 자리에 목사님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젊은 목사님들이 지금도 유족들과 함께 금식하며 최선을 다하시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는 적어도, 교황과 같은 어른이 없었다. 오히려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유족들을 욕보이는 언행을 일삼아 논란이 일었다. 그것은 신앙의 차원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심해야 할 언행이며, 인격의 차원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무형의 폭력이었다. 


비약된 관점이지만, 나는 교황의 방문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오른다.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이 이런 방식을 취한 것에는 정치적 흑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유대인과 하나될 수 없는 입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만의 독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유대교로부터 종교적 분리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유대교와 다른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표방해야 했다.

사마리아인의 종교가 갈리면서, 유대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것은 아마도 타종교보다 '이단'에 훨씬 큰 적대감을 느끼는 우리의 정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비유(누가복음10장)에서 이 사마리아인을 '선한 이웃'으로 등장시키셨다. 

예수님의 이 설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마치 '일베(일간베스트)'에서 설교하면서 '전라도 좌빨종북'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을 '선한 이웃'으로 설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논객'이 있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이 설교를 두고두고 씹었으리라. 

이 설교가 더욱 자극적인 까닭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종교적인 부류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 그려진 것에 있다. 이 정도 설정이라면,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또한 반유대적인 공격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주의자도 아니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예수님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도 않으시며, 전제주의나 공산주의를 지향하시지도 않는다. 

정치적 신념과 제도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혁된다.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며, 좋아질 때도 있고 나빠질 때도 있다.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적절하다. 유대주의 역시 한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보편적 부르심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임시로 사용하신 포장이다. 그렇다면 알맹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것을 ‘선량함’이라고 부르셨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위하여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목사로서,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신학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지성은 개혁신학을 옳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평생 믿고,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교황의 방문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설교를 다시 듣는다. 

한국 교회에 훌륭한 신학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깨달음은 풍성한데, 실천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렇게 감동적인 책을 저술하고 많은 신자들을 뭉클하게 설교했던 사람들이 과연 예배당 밖의 사건, 상처 받은 세상, 버려진 사람들, 다 죽어가는 강도 만난 자에 대하여는 어떻게 대우했던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제단에서 다 불타기도 전에,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방관하고 자기 발걸음을 바쁘게 가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황을 통해, 어쩌면 한국의 개신교를 꾸짖고 당혹스럽게 만드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했다. 공자는 함께 길을 걷는 세 사람 중에 한 명은 반드시 나에게 스승이 된다고 하였다. 천주교의 역사에 그야말로 ‘아니올시다’ 이었던 교황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교황은 나름 훌륭하지 않은가! 그 신학과 역사의 색안경을 통해 보기 전에, 그래도 이 정도면 과연 대화하고 선한 경쟁을 해볼만한 빼어난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 후에,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 실체의 부재를 따져봐야 할 때가 아닐까? 교황이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교회가 문제다. 한국교회가 문제다. 이것이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교황의 선행을 보며, 누군가는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자기를 위장한다고 하더라.

좋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훌륭하다. 그럼, 사탄도 광명의 천사를 위장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니, 당신은 사탄을 흉내내기로 작정이라도 했단 말인가…… 코스플레이도 아니고, 할로윈 분장파티도 아닌데 뭐 하는 짓인가? 그 비방과 모욕, 그 무례함이 과연 옳은 신앙의 뿌리에서 나온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비판만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사람은, 다른 종교의 약점을 잘 물어뜯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잘 보여줄 사람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직접 몸으로 말해야 할 차례이다. 세상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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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종의 청와대 연설문 ] 



대통령님,

존경하는 정부 공직자들과 외교관 여러분,

친애하는 벗들이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오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되어서, 또 무엇보다 한국의 국민들과 그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대낮의 열기와 한밤의 어둠은,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향한 불멸의 희망을 품고 있는 아침의 고요함에 언제나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희망은 얼마나 위대한 선물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이 목표들을, 한국 국민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과 세계를 위해, 결코 좌절하지 말고 추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통령님과 정부 요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외교관 여러분에게, 국가 공직자들과 군 관계자들에게 그리고 저의 방한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덕분에 금방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은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를 계기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 대회는 이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모인 가톨릭 청년들이 그들의 공통 신앙을 경축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또한 이번 방한 중에 그리스도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품에 올릴 것입니다. 이 두 행사는 서로를 보완합니다. 한국의 문화는 연장자들의 고유한 품위와 지혜를 잘 이해하며, 사회 안에서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우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선조들을 공경합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른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혜롭고 위대한 민족은 선조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젊은이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아 현재의 도전들에 적용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청년 대회와 같이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희망과 관심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다음 세대에 얼마나 잘 전해 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세상과 사회를 그들에게 물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라는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평화라는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부재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이 땅 한국에서는, 이러한 호소가 더욱 절실하게 들릴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 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그러한 노력만이 지속적인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입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별히 여러분 중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외교 활동에 종사하여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더 큰 도전입니다. 이는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입니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며,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사 32,17 참조)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합니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 평화 건설에 헌신하며,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결의를 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여러분은 국가와 정치의 지도자로서 궁극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 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이 나라가 앞장서 주기를 바랍니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25년 전에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시면서, "한국의 미래는 이 국민들 가운데 현명하고 덕망 있고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다."(1989년 10월 8일)는 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오늘 저는 한국 가톨릭 공동체가 이 나라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계속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이바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정신이 자라나게 하여, 새로운 세대의 국민을 양성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전망으로 국가가 당면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준비를 갖출 것입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과 환대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인 연장자들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우리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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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2 목양칼럼



귀한 자식일수록 천하게 키우라는 말이 있다.

호환(虎患), 마마와 같은 천재지변의 위험으로 자식을 많이 잃었던 과거에는, 귀한 자식에 대한 미지의 질투를 두려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타락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철이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반드시 아이에게 유익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부모들에게 경계하기 위하여 이런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요즘은 모두 자녀를 적게 낳는다. 늦게 결혼한 탓도 있겠지만, 자녀 양육의 환경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되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너무 돈이 많이 들어간다.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아이를 양육한다. 아직도 꽃다운 엄마들이 낡은 옷만 입고 추리하게 생활하며 아이는 공주님이나 왕자님처럼 꾸미는 것을 보면, 가슴 한 켠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 사랑에서 나오는 욕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아이를 ‘사람’으로 키워야지 공주님과 왕자님으로 키우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긴다. 아이를 위해서도 그것은 좋은 양육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도 굴곡은 있다. 좋은 날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인생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원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는 마법의 나라에 살다가 갑자기 치열하고 냉정한 현실에 내동댕이 쳐지면 그 충격이 어떠하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부모는 한시적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날아가야 한다. 험한 세상에서도 씩씩하게 이겨내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나의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내 새끼 입에 쌀밥 들어가는 풍경이라고 하더라. 어려운 시절에 나온 이야기겠지만, 나는 아직도 이 말을 실감한다. 내 새끼 입에 맛있는 거 들어갈 때, 내 배가 아니라 가슴이 포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 입에만 모두 넣어주면 안된다. 자칫 자기 몫을 모르고 자기 입에 다 넣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이가 되면, 결국 사회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습관이 몸에 배인 아이는 사랑 받기는 틀린 셈이다.

기다릴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알고, 때로는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의 자리에서도 충분히 자기에 대한 긍지를 지킬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부모에게는 자식 사랑이 본능이지만, 그 본능으로만 사랑하면 덕스럽지 못하다. 그 본능을 잘 절제하고 지혜롭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받는 아이도 유익하고,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될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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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메시지와 함께 하나의 지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特定秘密保護法で観られなくなる前にご覧ください≫

<특정비밀보호법으로 볼 수 없게 되기 전에 봐두세요.>


트위터를 통해 공유된 지도가 화상도가 너무 낮아서 지역의 이름을 거의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좀 더 고해상도의 지도를 검색해서 입수하였습니다. 

赤は100Bq以上(原発内の放射性廃棄物基準)検出された地域

붉은색은 100 바크렐 이상이 검출된 지역입니다.


블로그에 올려 공유합니다.
일본에서 생활하시는 분은, 식료품 구입에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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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목양칼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패스(pass)의 기법'을 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모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결국 풀 수 있는 문제도 못 푸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안 풀리면, 일단은 패스다. 적절하게 패스하고 먼저는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 비결이다.

그러나 '패스'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쉬운 것은 누구에게나 쉽고,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월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쉬운 것을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어려운 것을 결국 풀어야만 한다. 

최대한의 역량을 만들어서 패스한 문제로 회귀해야 한다는 뜻이다. 풀지 못한 문제는 결국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긍정'이 시대적인 미덕이 되면서, 사람들은 강점에 집중하라고 흔히 얘기한다. 잘하는 일을 계속하고, 그래서 칭찬을 듣는 것은 달콤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인생을 그렇게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성경은 곳곳에서 '완전'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준다.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불완전을 보상하는 십자가를 대신 져 주셨으면서도 왜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하라'는 명령을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이 부담스러운 명령을...

완전함은 '회복'의 다른 이름이다. 깨어진 부분을 보수하고, 부족해진 부분을 채우는 것이다. 없는 것을 새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부분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의 명령은, 우리를 잃어버린 실존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과 허물들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상실의 아픈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은혜를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는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은, 패스해도 좋다. 누구 말대로 자기의 강점에 집중하고, 장점을 살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장년에 이른 분들은 아니다. 이제는 보수공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이다. 더이상 화려한 겉치장으로 자기의 부실한 실존을 은폐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더우기 우리는 모든 것을 한 눈에 감찰하시는 창조주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패스했던 문제로 돌아가시라. 바쁘고 여유 없어 돌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라. 성격 급했던 분은 마음의 불을 좀 순하게 다스리고, 소심했던 분은 창을 열고 넓고 크게 기지개를 펴 보시라.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안하면 못 견디던 분들은 침묵의 은사를 받으시라. 인색했던 양반들은 굽어진 손을 펴서 좀 넉넉하게 주고 나누는 것을 연습하시라.

미치도록 긍정적인 분들을 보는 것은 버겁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이 모든 약점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내가 다혈질이라도 뒤끝은 없다, 뭐 이런 식이다. 사회생활은 그런 식으로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다르다. 일단 그 '다혈질'의 구멍을 메우지 못하면 은혜는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완전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대하여 불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긍정의 경향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만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자기의 부족함에 대하여 깊이 자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매우 그럴싸했던 사람들조차, 깊은 절망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은, 그로부터 회복의 노력이 시작되고 자기와 치열하게 싸우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단점을 긍정하지 않았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나는 성경에서 무수한 증인들을 끌어내어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주는 위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긴대로 살지 마라. 바라는 대로 살아라. '나답다'라는 말이 좋아 보여도 '예수님답게'라는 말보다 좋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를 찾아야 하지만, 거기서 우리의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 모순의 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답게'라는 무거운 준거를 우리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장년들이여, 패스했던 문제로 돌아가라. 자기를 바꾸라. 고민하라. 그리고 처절하게 싸우라. 싸우다 지치거나 실패하면,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양호실이 있음을 기억하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고로,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는 반드시 바뀐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밎지 않는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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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목양칼럼


힘든 시기를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 속에 이번 고비만 넘기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희망은 좋은 것이지만, 희망이 항상 현실은 아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고개에 올라서면 내리막길이 아니라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많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영원한 형벌처럼 오르고 또 오르고, 밀고 또 미는 것이 반복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고개 너머에 대한 상상을 조금 줄이고,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을 조금 더 깊이 체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려움도 피하려고 하지 마라. 어떤 어려움이든 감당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걷어내고 보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들꽃 같은 기쁨들은 무수히 많다. 그 하나하나의 향기를 음미하고, 누리는 것도 우리를 지극히 부요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 따지고 보면 심플하다. 맛있는 음식, 달콤한 잠, 약간의 웃음 그리고 감동의 눈물 한 방울… 그거면 처참하던 현실도 단숨에 행복한 추억으로 바꿀 수 있다.

결국 불행에 묶여 살아가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인생을 조율하는 능력이 형편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지 말고, 살고자 하는 대로 만들어 보시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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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여름휴가 잘 다녀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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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를 내부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되는 울타리를 세워왔습니다.

그 울타리는 세속의 물결이 교회를 흔드는 것을 어느 정도 방어하였지만, 아울러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울타리의 보호를 받는 동안, 단기적으로 교회는 더 세상에 대하여 면역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더라도 교회 내부에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하며 '핍박'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월의 나이테 속에서 교회는 점점 귀머거리가 되어 갔습니다. 귀를 닫고 자기들끼리만 살아가는 섬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상을 잃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데, 그 말을 도대체 알아 듣지 못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핍박과 정당한 비판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든 세상의 소리를 신앙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나오는 사탄의 말로 폄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고 내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가 개척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성장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래도 목회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잘만 하더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장사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교회를 성장시켜 세상의 명성을 얻으려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일꾼으로, 영적 추수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설사 내가 감당하는 전투에서 다소 이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편이 실패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고민의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서, 인도네시아 지역의 여러 섬들은 국지적 전투가 한창이었습니다. 더러는 주민이 살지 않는 무인도까지 일본군과 미군은 죽고 죽이는 치열한 희생 속에서 공방전을 계속 했습니다. 

미국의 전면적인 공세 속에서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일본군은 자체적으로 전쟁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보급 없이도 군수품을 조달하고, 내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전투를 감당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섬을 점령하거나 원주민을 포로로 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고보니,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일본의 군대는 해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침마다 일본의 천황이 있을 곳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자기들의 계급을 유지하며 그들만의 전쟁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저는 일부의 교회가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득찬 예배당과 매주 걷어지는 연보, 돌아가는 조직, 계속되는 행사 속에서 세상을 보지도, 전체적인 교회와 자기들을 연결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매도 당하고 영적 전쟁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마치 나치의 선전영화처럼 자기들끼리 감동적인 영상을 찍고, 간증을 인쇄하고, 모임을 계속하면서 이러한 현실이 자기들의 교회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의 각 지체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몸이 수난을 겪는데 팔이 계속해서 즐겁기만 할 수 없고, 다리가 잘려 나가는데 입이 노래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시대의 변화는 각 교회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안깐힘을 써서 막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교회'라는 연대감을 가지고 이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주시하며 싸워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웠던 담장을 이제는 스스로 허물면서 말입니다. 

과거에 교회가 어리던 시절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담장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교회가 성장해서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만 한다면 교회는 소외되고 부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미래를 예고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미 울타리의 해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서 사람들의 숫자가 줄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즉각적인 결집와 해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곧 현대인의 특징이 될 것이고,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성도를 한 교회에 묶어두고 한 사람의 설교로만 양육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로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드라마를 보듯이 기독교방송을 보고, 어떤 설교자나 선교사의 팬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스스로 성경을 해독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신학을 배우고 있으며, 종종 해외에 선교지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결국 개별적인 교회의 울타리를 해체할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는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존속할지, 과연 그 복음의 건전성을 여전히 지킬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의 주권이 그리스도께 있으며, 때문에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합당한 은혜를 주셔서, 결국 교회를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가장 저항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목사'입니다.

목사들은 아직도 '담임목사'의 영향력이 자기 교우들에게 절대적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사람들을 자기 곁에만 묶어두려는 욕심도 보입니다. 

무너지는 울타리를 계속 보수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대부분 목사들입니다. 

이분들은 그것이 경건과 신앙의 보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결코 그런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자기 교회가 작다고 합시다. 그래서 보호와 특혜가 필요하다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하나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자신이 비록 열악한 환경에서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시대, 곧 지금의 시기는 이미 교회가 장성한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소수의 신자들과 작은 장소를 사용한다고 하여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자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설교를 듣고, 신앙의 길을 모색하는 것을 빗겨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목사는 더이상 어떤 개인적인 의도의 담장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담장 없는 교회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더이상 주석집에 나온 설교를 대충 짜집기해서 자기 설교로 삼는 스타일은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다운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면, 그런 목사는 점점 더 고립되거나 엄청나게 비교 당할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목사가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목사를 중심하는 하는 교회 공동체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수평이동에 대하여 말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심지어 예배당을 찾아다니는 수평이동이 아니라, 이제는 간단한 클릭과 터치로 수평 이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오프라인의 모임을 더 강화하고 지역사회와 연결된 활동을 더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교회의 노력은, 거대한 시대적 변화을 역행할 수는 없습니다.

문명은 더 빠른 교통과 더 폭넓은 정보망을 확충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독재자들조차 소셜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자기들의 고립된 세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교회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니 막을 수 없다면 그에 맞는 대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생각을 계속 써 볼 생각입니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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