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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과거는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아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비관하거나 미래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삶은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시간을 관리한다는 말의 의미는 시간을 규모 있게 사용할 뿐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잘 해석하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버릴 것은 없습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할 때에는 언제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되었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정식 재판도 없이 무기징역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시간은 그를 진정한 리더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고통’이라는 대학에서 훈련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을 만나고도 그 마음에 원한이 아닌 용서와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명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통을 통해, 오히려 가족의 중요성과 자기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지만, 지나 온 발자취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입니다. 참고하고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든 미래를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새로운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과거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성경이 가지는 의미를 존중하셨지만 사람들의 전통과 유전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도전하셨습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폄하했지만, 그분의 삶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신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을 사모해야 합니다. 습관이 아니라 진심으로, 전통이 아니라 새 노래로, 다른 사람들의 방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새해의 첫 주일입니다. 입학식을 하고 처음 등교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익숙함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무의식적인 예배가 되지 않도록, 모든 것 하나하나에 정성과 사랑을 담도록 합시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주실 은혜를 기대하도록 합시다.

새 부대가 아름답게 준비되면, 주님이 새 술을 부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전의 포도주보다 새 포도주가 훨씬 탁월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처음보다 나중의 은혜가 크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대로 살지 마십시오. 과거대로 예배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를 취하게 하실 새 술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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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8

유종(有終)의 미(美)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Happy Ending’ 정도가 될까요. 과정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결말에 이른다는 것은 그 과정을 잘 참고 견딘 모든 사람들의 보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결말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땅의 삶을 소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삶이 바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현실을 마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믿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분명 이 세상의 가치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며, 그 날에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넘치는 보상으로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분의 섭리는 살아 있어서 우리를 책임지고 인도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기대, 곧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 믿음의 삶을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그 소망의 내용이 과연 약속된 말씀과 일치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2008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일의 예배를 준비하며, 저는 과연 우리의 1년이 어떠했는가를 곰곰이 살피고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믿음의 진보가 있었다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섰다고 생각할 때가 곧 넘어질 때라는 성경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결코 자만하지 말고 더욱 신앙에 진력하는 새해를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더욱 노력할 부분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깨닫기를 바랍니다. 구멍을 때우지 않고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근본적인 자기 살핌과 회개가 없이 기울어진 신앙의 수레를 계속 미는 것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만들 뿐입니다.


교회를 생각해보면, 2008년은 아름다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적인 순례에 있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교회적으로 진보가 있었고, 비전을 향해 더욱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일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말씀과 기도를 회복하고, 신앙적 삶에 대하여 의지를 가지며, 교회 안에 성경적 가치관의 일군들을 세우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일들은 더디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올바른 일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바르게 변화된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큰 교회를 세워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는 생각을 돌려 자기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먼저 그리스도 앞에 바르게 세우도록 합시다. 주님의 은혜가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시고,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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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행복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의 날짜는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A.D. 0년이 아니라 B.C.3년 경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도의 ‘호적령’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방교회가 12월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는 것과 달리 동방교회에서는 1월4일을 성탄절로 기념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태양을 숭배하던 축제일을 그대로 이어서 예수님의 탄신일로 지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기원이 되었으니, 성탄절은 이방종교의 유산이고 지킬만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들립니다.

산타클로스나 루돌프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서 아기 예수님의 생일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부정되려고 하는 것은 근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날짜가 마치 중요한 것처럼 따지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생일을 정확히 기념해야 한다면, 성경이 그것을 유월절 절기와 같이 명백하게 기록하였거나 혹은 12명의 사도 중에 누군가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1세기 당대의 교회는 이 일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1년 중의 하루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날이 성탄절이요, 부활절이요, 감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성탄절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성탄에 있어 날짜가 아니라 그 의미성을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념’이라는 특별한 의미 속에서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X-MAS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엑스마스’가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크리스토’의 머리 글자가 영문자 X와 모양이 똑같습니다. 여기에 ‘예배’를 의미하는 ‘마스’를 붙여서 성탄절의 이름을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라고 읽고, 이 날의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잘 활용해 왔습니다. 화려한 볼거리와 예배를 준비하고, 많은 주변의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축제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함께 예배하도록 초청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마다 이루어지는 예배는 바로 새신자를 초대하는 열린예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있으나 예수가 없는 일본땅에서 4번째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교회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내년에는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주변의 일본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같이 나누고, 우리가 준비한 소박한 아마추어 발표회를 나누고, 그 가운데 소중한 복음과 예배를 같이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불신자에게도 왠지 익숙한 크리스마스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기회요, 교회의 복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꼭 그렇게 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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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전라도 화순 적벽의 은행나무 이야기를 보았다. 

은행나무는 대개 암수나무가 같이 있어야 은행이 여는데, 적벽의 은행나무는 외짝인데도 해마다 가마니로 거둘 만큼 은행 소출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에게 은행나무 혼자서 어떻게 은행이 열리느냐고 물었더니, 적벽의 물에 드리운 제 모습을 서방님 삼아 은행알을 낳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은행나무에 은행이 여는 건 그곳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건 물론 아니다. 은행나무는 수나무가 10리 밖에 있어도 바람을 타고 암나무를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상식만 중요한 건 아니다. 사물이나 자연의 이상한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그에 걸맞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인간의 고유한 장점이다. 

생땍쥐베리는 <어린왕자>를 통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아이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어른’의 의미로 표현했다. 때문에 <어린왕자>에는 과학과 이성을 뛰어넘는 상상력들이 난무한다. 그것은 풍자스럽지만, 결국에는 이면에 감추인 본질을 정확하게 조명한다. 아이들의 동화 같은 이 책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어른들의 손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생각이 굳어지면 자기의 틀에 갇히게 된다. 유리판을 덮은 그릇에 넣어 두었던 귀뚜라미 이야기를 들었는가? 온몸으로 유리판과 충돌하던 귀뚜라미는 결국 유리판을 치워도 더 이상 높이로는 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이다. 마음이 갇힌 사람은 현실도 갇힌다. 

형편에 맞는 것만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물론 사람은 처해진 상황을 직시하고 자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없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사치나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욕심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것들에는 낭비해도 괜찮다. 

형편(形便)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양을 편안히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양은 꼭 현실과 육체의 모양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신앙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마음이야말로 우리 모양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편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현실뿐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상상력이 죽지 않도록,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한 주머니로 컵라면을 사먹고, 커피는 멋진 카페에서 마시는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그건 사람만이 하는 짓이다. 비록 그 모양새가 그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아 철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의 삶에 그런 부분이 있기에 마음이 덜 굳어지고, 상상력이 살아 있으며, 눈에 호기심이 어려 날마다 총기로 빛날 수 있다면 그것도 그의 형편(形便)에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 마음이 굳어져 우리 현실이 생각의 감옥을 이루는 것이다. 갇힌 마음은 기도하는 것조차 방해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정말 딱하게 여기신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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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조국을 가졌는가?


근간에 아이들을 한국에 보낼 생각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버지로서의 고민이 담긴 결정이다. 일본에 왔을 때에, 준혁이는 5학년, 찬혁이는 3학년이었다. 당장 일본학교에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이 일본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언어적 장벽으로 인하여 부모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아이들을 앞세워야 하는 상황들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격려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긍정적으로 말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갔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 아이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것에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참 감사하다.

하지만 조금씩 아이들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특별히 준혁이와 찬혁이가 소학교와 중학교로 갈라진 이후, 각자의 학교생활에서 혼자여야 하는 한국인으로서의 어려운 입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물론 한국에는 과도한 사교육 열풍과 입시전쟁, 그리고 점점 퇴락하는 ‘학교’라는 곳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 이민을 선택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이 달라질 수는 없다. 문제 많은 사회지만, 그래도 내 나라이고 내 땅이다. 사람들의 정서도, 생각도, 체질도 비슷한 우리의 조국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리 말을 잘하고 훌륭하게 적응해도 우리는 영원히 이방인이요,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난 아이들이 점점 ‘조국’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우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어를 익히고, 수학을 잘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살던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완벽한 사회라는 말도 아니다. ‘조국’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요, 내가 헌신해야 할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한국이라는 땅이 영원히 아이들의 가슴에 그립고 향수가 있으며, 좋은 추억의 땅으로 각인되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한국에 보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위해 헌신한다.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말은 잘하지만 전혀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실상 다른 것을 더 사랑하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말려도 헌신한다. 그들의 가슴에 담긴 사랑이 헌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도록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동해바다의 일출과 설악산의 웅장함과 지리산의 고단함과 서해의 갯벌을 만나고 사랑하게 하고 싶다.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설움을 오래 겪은 후에야 ‘조국’의 가치를 가슴에 새겼다. 언제나 테러가 일어나고, 주변국가들의 침략이 끊이지 않는 땅이지만, 그 모래벌판이라도 내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사를 통해 배웠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바른 정체감이 있는가? 우리 아이들을 누구로 키우고 있는가? 우리 교육의 목표는 영어 잘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올바른 인간이요, 신앙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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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연말의 분주함에 바쁘시지요? 

2008년의 한 해가 이제 정말 달력 한 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용히 되짚어 보아야 할 때이지만, 정작 마음도 시간도 분주해서 그럴 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일들도 많았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추억의 책장에 담아놓고 두고두고 꺼내어 생각하면 지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항상 현실은 쉽지 않고, 그래서 좀처럼 행복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에 감사했던 것들에 대하여 같이 생각해볼까 합니다.

첫째로, 모든 식구들의 강건함에 감사드립니다.

건강으로 인한 소동이 많았습니다. 사모는 달팽이관의 이상에서 오는 어지러움증에 시달렸고, 장수호, 이선경 부부는 화분증에, 그리고 목사는 비염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김선연 권찰은 과로에서 오는 증상으로 회사를 한 달이나 쉬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환경은 점점 공해로 나빠지고, 식품의 안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두 오늘까지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이 기도했던 일이기에 가장 많이 감사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둘째로, 교회의 안정과 믿음의 성장에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유학생들을 받아들이고 보내는 과정이 서운하기도 하고, 아직은 장년이 부족해서 교회의 일을 나누고 책임질 사람들이 적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비로소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한 해 동안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십자가를 감당해 주었던 지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로, 비전과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비전은 공상과 다릅니다. 비전은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공상은 수고가 귀찮아서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전을 나누고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있습니다. 동경드림교회의 꿈나무들입니다. 저는 이 아이들 때문에 주일학교를 꿈꾸고, 장학사업을 꿈꾸고, 선교사 파송을 꿈꾸게 됩니다. 

최진웅 권찰이 결혼을 했습니다. 므라키상의 등장으로, 그렇게 말로만 하자고 했던 일본어 찬양이 예배에 등장했고, 일본인들을 섬기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교회가 앞으로 더욱 큰 비전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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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3 살아있는 믿음


믿음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그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이 반드시 기적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바른 믿음은 항상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탁월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면 기적이고,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면 응답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이 있는 믿음이다. 예수님도 믿음의 최소조건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겨자씨는 ‘작다’는 말의 최상급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은 것이 어찌 겨자씨만 있겠는가? 예수님은 모래알만한 믿음이나, 먼지만한 믿음이라고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를 통하여 작지만 생명이 있는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모양은 있으나 전혀 능력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역시나 이 말씀에서도 중요한 기준은 생명이다. 믿음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치명적인 부족으로 이해하고,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창세기의 2장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되었다. 흙으로 지어진 육신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지어진 사람의 영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셨던 것이다. 왜 사람만 그런 존재일까? 그것은 사람의 생명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의 생기이기 때문이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호흡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바람이다. 그리고 이 태초의 바람이 사도행전 2장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져 ‘성령의 충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성령의 충만이란, 육신은 살았으나 영은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이며, 때문에 이것은 아담에게 호흡을 넣어 주시던 바로 그 장면의 리액션(reaction)이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사람이 ‘생령’이 되는 것과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장면은 본질이 하나인 셈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믿음이란, 성령이 부어진 믿음이다. 

성령은 살리는 바람이시다. 태초에도 그러했고, 신약에서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때문에 성령의 은총 아래서 믿음은 살아난다. 성령만이 믿음에 생명을 부으신다.

이렇게 생명이 있는 믿음은 그 양이 문제가 아니다. 겨자씨만한 크기라도 결국에는 산을 옮기고야 만다. 

왜냐하면 겨자씨만한 크기로 계속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껍질을 깨고 싹이 나서는 점점 자라고 마침내는 거목(巨木)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작은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마침내는 창대한 믿음을 이루었다. 바로 그들의 믿음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성령으로 믿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의지로 믿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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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이 결국 귀를 막아서 들어야 할 많은 지혜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내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누구의 인생에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의 후회처럼, 때로는 듣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귀’라는 것은 무조건 잘 듣는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는 것도 ‘듣는 귀’의 역할이지만, 또한 듣지 말아야 하는 말에 꽁꽁 귀를 닫는 것도 바로 ‘듣는 귀’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듣는 귀’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학습법을 ‘질문법’이라고 합니다. 이는 현대의 학습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방법인데, 현명한 질문은 현명한 대답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학습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유도 속에서 제자는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성취감을 줄뿐만 아니라, 학습자에게 생각하는 방식을 훈련하게 만들어서 다른 문제에 대하여도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저 자신의 경험으로 말하겠습니다. 

어떤 결정에 대하여 기도하다보면 마음이 산만해져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기도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때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생각과 주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는 그 모든 생각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침묵이 찾아옵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멈추고 그저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예민해져서 갑자기 툭툭 가장 그럴싸한 질문들을 하나님께 던지게 됩니다. 이 질문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기도의 길(prayer's way)'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끔 질문하시거나 대답하십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의 기도에 대하여 딱 한 번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기도에 들어오는 순간, 어둠은 밝아지고 모호함은 명확하게 변합니다. 그분이 대답을 하시건, 질문을 하기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바로 지혜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나면, 현실에서도 들리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많은 부분들이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를 고치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전혀 색다른 감각이 마음에 생겨나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라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들을 소리는 듣고, 듣지 않아야 할 말에는 귀를 닫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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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게으름의 본질은 무능력함이라기 보다는 무목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맹목적인 집착에 빠져 올바른 방향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게으름의 진짜 정체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도박에 빠져 있다고 합시다. 그는 그 일에 매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그의 부지런함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네리마역 앞에 ‘오션’이라는 빠칭코 매장이 있는데, 오전 9시 정도에 문을 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전 7시 정도이면 이미 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추운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그들은 건물 구석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잡지를 보면서 2~3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찍부터 줄을 서는 이유는 당첨이 잘 되는 기계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의 있는 태도가 ‘부지런함’으로 이해되기에는 뭔가 허전한 부분이 있음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무엇입니까? 바로 목적성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역주행을 하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달리더라도 그는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열정이란 바른 목적을 향하고 있을 때에만이 미덕(美德)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말 부지런한 사람은 항상 자기의 목적을 살피고 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싯구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생애는 선물이며, 기회입니다. 매 순간마다 목적을 향하여 진보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의 신앙 가운데 요구하시는 충성됨과 부지런함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과연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고 열심을 다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또 어떤 분이 있어 아직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것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부 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여서 덩달아 ‘바쁜 것’으로 목적을 삼는 우매함을 조심하시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에 우선하여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절대로 ‘맹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연 뒤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에 부합하는 인생에 열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성경의 판단 가운데는 ‘게으르고 악한 종’으로 분류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목적 없는 삶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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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


미국으로부터 촉발된 경제불안이 전세계를 쓰나미처럼 휩쓸고 있습니다.

한국은 원하의 하락으로 고심을 하고 있지만,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신문기사를 참조하니 도요타 자동차의 경우 1엔이 평가절상 될 때마다 400억엔의 영업이익이 공중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유럽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가지고 있는 소니도, 유로화에 대하여 1엔이 평가절상 될 때마다 70억엔의 영업이익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3개월 사이에, 엔화는 30% 가량 평가절상되었습니다. 그 절대금액은 약 54엔이 평가절상된 것이라고 하니, 거시적인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공황이 당분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가 이미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거나 미미하게 지나가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산업후진국의 경우에나 어차피 마찬가지일까요…

이외수의 소설, [장외인간]에 보면 철저하게 돈과 명품에 중독된 아가씨가 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돈이 피보다 진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돈, 돈 하다가는 돌아버린다는 우스개말도 있습니다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바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불황이 주는 두려움은 더 클 것입니다.

낮과 밤으로 직장생활 해서 1억원의 여유자금을 만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셀러리맨으로 1억원을 만들려면 족히 10년 가까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펀드나 주식 등으로 투자되었다가 하루아침에 휴지가 된다면 정말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현실의 충격은 단지 나라와 나라, 기업의 문제일뿐 아니라, 많은 개인과 가정들을 절망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할 몫은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는 검소해야 하고, 이 시대를 향하여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예수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돈은 허망한 세상의 약속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 못합니다. 돈이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섬기는 맘몬주의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맘몬은 고대 가나안의 신으로 물질적 부요함을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돈이 없다고 죽음을 생각하는 이 시대를 향하여, 사람이 돈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나오미를 찾으십니다. 흉년의 시대에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비참해지지도 않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할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바로 그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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