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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6


가을은 책을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특히, 야외의 벤치나 잔디 위에 앉아서 말입니다. 볕이 따뜻해서 그 아래 앉아 책을 읽다보면 슬며시 잠이 오기도 하지만,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선잠을 깨우고 다시 책읽기에 몰두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합니다. 항상 곁에 두고, 보고, 또한 책의 내용을 설교에도 많이 인용하는 편입니다. 책을 통해 사색하고, 이해하며, 음미하는 것은 정말 유용한 취미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를 ‘독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의 어린 시절에는 특활반에서 할 만한 자기 종목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독서반’으로 모집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서’라는 취미는 왠지 시시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나이의 사람들은 취미를 독서라고 써낼 경우, 특별히 즐기는 취미생활이 없습니다, 라는 암묵적인 고백을 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독서’가 결코 시시한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도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다는 것은 정말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 독서의 과정을 심화하고 나면, 닥치는 대로의 독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찾게 되는데, 이때에는 더욱 독서가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출판물의 홍수 속에서 책을 가려 선택해야 하고, 또한 선택한 책을 균형 있게 읽어야 하며, 그 책을 실제의 삶과 인생에 연결하여 음미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우리의 삶에 안정감을 주고, 모든 것을 보다 깊이 생각하고 멀리 바라보게 합니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사람이 만권의 책을 읽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책을 몇 권 권할까 합니다. 구하기 힘든 책은 말고 여러분에게 손쉽게 드릴 수 있는 책을 권해 보겠습니다. 한 번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칼의 노래 (김훈)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자전거여행’의 작가 김훈이 소설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1,2권으로 나왔지만, 후에 합본도 출간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孤將’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2. 람세스 (크리스티앙 자크) : 작가는 모세와 람세스의 시대를 하나로 묶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소수학설에 불과합니다. 고대 이집트를 치밀하게 묘사했고, 탁월한 문장과 구성력을 가진 책입니다. 성경적 배경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무게감이 있지만 재미있어서 한 번 잡으면 계속 읽게 됩니다.

3. 최악(Saiaku) (奧田英朗, Okuda Hideo : 최근에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구성력도 뛰어나고 글이 맛이 있네요. <공중그네>라는 소설도 유명하던데, 근간에 한 번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4. 십자가를 경험하라 (김남준) : 이번 여름에 아웃리치를 왔던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님 책입니다. 복음의 정수를 담았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같은 내용으로 저작했던 <구속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5. 순전한 기독교 (C.S.루이스) : 루이스가 들려주는 종파를 떠난 기독교 본질에 관한 탐구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사유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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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9


재일 축구선수 정대세(鄭大世·가와사키 프론타레). 

아이치(愛知)현 출신의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올해에 들어 유명해졌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동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대표로 출전하여 일본전과 한국전에서 연이어 꼴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플레이는 저돌적인 힘과 지능이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축구 선수로서의 능력만큼이나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그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스물 네 살의 젊은이면서도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현재 ‘북조선’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대세는 일본 내에서 한국국적을 가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을 북조선으로 선택하여 ‘북조선’ 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 현실이 재일한국인의 근대사를 함축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오히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분단의 상황이 낯설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달려 2시간 안쪽이면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한땅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시야일 뿐 모든 접촉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니, 접촉뿐 아니라 북한을 생각하는 것조차 몹시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땅은 동토의 땅이요, 나와는 상관없는 피안의 저편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사는 동안 그 땅이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에 수많은 민족학교들이 있어 아이들을 한글과 한국말로 가르쳐 키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 중에 정대세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토록 두려웠던 ‘조총련’이라는 말이 그렇게 험한 이미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나 이념과 같은 것은 일본에 끌려와 정착해야 했던 민초(民草)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버거운 현대사의 현실을 넘어 지금도 낯선 이 일본 땅에서 어떻게 자기를 지키고 자식들을 키울 것인가가 중요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그런 재일동포들의 고민을 외면했다. 그 무책임 속에서 차별과 학대를 참고 견디면서 민족교육을 지켜온 결과가 바로 ‘정대세’라는 젊은이로 열매 맺은 것이다.

그가 북조선을 ‘조국’이라 칭하고 대한민국을 ‘역시 조국’이라 칭하며 일본으로의 귀화를 당당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애국가의 가사 한 줄이 생각났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조국의 교회는 아픔을 품고 있다. 나는 그 아픔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조국교회의 가시라고 생각한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 한반도의 반쪽에는 골목마다 십자가가 세워졌지만, 그러나 나머지 반쪽에는 신앙의 씨가 마르고 성도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진달래처럼 흐드러졌다. 하나님은 그 반쪽의 가시를 통해 조국의 교회를 겸손하게 하신다.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마음으로 연단되게 하신다.

그래서 나는 이 일본에서의 선교가 21세기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정대세 같은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조국을 하나 되게 하고, 닫힌 북한의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품었다. 이제는 길을 찾을 차례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목회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것이 내 사역의 화두(話頭)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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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9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를 두 잔 탔다.

아내와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두 아들이 커피 맛을 보겠다고 서로 아우성을 쳤다.

준혁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종종 커피 먹는 것을 허락했다. 더운 여름철 집에서 냉커피를 타 먹으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찬혁이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보류였다. 그러나 기다릴 찬혁이가 아니었다. 기회만 있으면 엄마와 형의 커피잔을 노렸고, 그 때마다 충돌이 일어났다.

역시나 이번에도 엄마의 커피잔을 잡고 홀짝거리는 찬혁이를 향하여 준혁이의 텃새가 시작됐다.

"야, 초딩... 니가 왜 커피를 마셔? 내가 니 나이에는 커피마실 생각도 못했다."

"아이고 중학생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 학생증 쪼가리 하나 있는 거 밖에는 다른 것도 없으면서..."

"야 사복! 왜 차이가 없냐? 하늘과 땅 차이지..."

"그래, 그 잘난 교복. 비싸기만 하지 품질도 별로 좋지 않은 교복 입는다고 되게 잘난 척을 하네..."

그 때 곁에 있던 내가 갑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얘네들 12살하고 14살이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박장대소를 했다. 몸집은 준혁이가 훨씬 크지만, 그도 계속 장담할 것은 못된다. 2년이면 남자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이제 마흔의 고개에 들어서고 있는 아내와 나의 눈에는 12살과 14살의 초딩vs중딩 다툼이 참으로 가소로웠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생사가 그렇지 않을까? 잘난 사람은 얼마나 잘났고, 못난 사람은 얼마나 못났을까?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한없이 커 보이기만 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치고 삿대질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다투고 화낼 많은 이유들을 가진다. 우리는 스스로 잘났고, 남을 무시하며, 때로는 남에 대하여 심하게 행동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관점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이 보이고, 여유로와지며, 긍휼이 생겨나고, 상대를 존중하고 포용함으로써 평강을 얻는다.

지금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가소로운 우월감으로 충돌만 일이크고 있지는 않는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지니기를 기도하라.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성령충만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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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8


인생은 불투명한 창문을 가지고 있다. 얼핏 저편이 보이는 것도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확실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알지 못하는 저편을 향하여 창을 열고 대면하는 용기.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로 결심하셨을 때에,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가지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약함을 친히 경험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의 불투명한 창문 이편에 스스로 서신 것이다. 우리처럼 내일의 불안, 선택에 대한 갈등, 심리적인 고통들을 그분도 겪으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태복음 26:38)


예수님이 인생의 고민에 맞서 잠을 이루실 수 없었다면, 우리 중의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빗겨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밤을 경험한다. 심지어 예수님처럼 누군가 함께만 있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밤에 우리는 혼자 남을 때가 많다. 

고민과 고독이 그 어감도 비슷하듯이, 우리 인생에 가장 고민스러운 순간에는 언제나 고독하게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6시간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록으로 볼 때에,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가 비록 십자가형의 기간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일생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십자가의 그림자 안에 놓여 있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혹은 암으로, 혹은 사고에 대한 불안으로, 혹은 파산에 대한 걱정으로, 혹은 깨어진 부부관계로 자신의 인생이 파경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생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고민일 것이다.

그리고 그 끝 모를 불안은 어느 정도 우리 인생의 바탕이기고 하다. 우리가 ‘고민’으로부터 해방되어 편히 잘 수 있는 날이 일생에 며칠이나 될까?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우리 인생의 버거운 짐을 함께 감당하기로 약속하셨다는 말이다. 인생의 고독을 아시기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가까이 찾아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항상 제일 힘든 순간에 제일 은혜가 넘치게 된다. 이것이 곧 십자가 약속의 실현이다. 

불안한 밤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불투명한 창문을 기도로 열라. 내일이라는 현실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나면, 현실의 불안은 대부분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십자가는 약속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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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1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네번째 요소는 '자기사랑'이다. 

신학교 시절에 구원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면, 항상 도달하는 종점이 있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느냐는 것이었다. 인간의 경외 없이도 충분히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굳이 사람을 만들어 골머리를 썩을 필요가 있었느냐? 그냥 하나님 스스로 행복하시면 그만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사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실망과 슬픔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창세기 1장에서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바로 그 하나님의 환한 미소만이 우주에 가득하지 않았을까?...

목사가 되어 목양의 심정을 경험하고 내 자신이 아빠가 되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되었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사랑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사랑의 방향은 자기 안으로부터 흘러나와 밖으로 향한다. 진실한 사랑은 그렇게 자기 이외의 존재에 부어질 때까지 만족되지 않는다.

사람이 창조된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 백성, 내 자녀라고 부르시는 이유이다.

적당한 범주의 자기 사랑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하여 타인의 소중함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근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사랑은 사랑의 가치를 타락하게 한다. 마치 끝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지 못하는 사해가 죽음의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흘려보내는 역할에 부실하면, 결국에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 자체가 파괴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 소유, 갈취, 학대가 이루어지는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스스로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이 사랑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이지 죽음이 아니요, 사랑은 빛이지 어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유한한 우리 자신 안에 담을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우리 안에 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을 우리 밖으로 흘려보낼 때에 기뻐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 더 모으고, 더 움켜쥐고, 더 갈망한다. 채우려는 의지만 있지 받은 것을 헤아려 흘려보내려는 의지가 없다. 자기를 우선으로 사랑하다가 일생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영원히 지속하는 비결이 여기 있다. 미숙한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라.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지혜라는 것을 배우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사랑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갚으라. ‘자기’라는 틀을 깨고 하나님의 넓은 우주로 나아가라...

결국에는 자기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배우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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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번째 요소는 '실망'이다. 의심이 믿음에 끼어든 불순물이라면, 실망이란 기대와 소망의 반대편에 드리우는 그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보상을 기대한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시고, 그 능력으로 나를 위해 봉사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이 찾아든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삶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과 이런저런 문제들은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 왜 하나님은 그 엄청난 능력의 조금 만이라도 나를 위해 써 주시지 않을까? 

필립 얀시의 인상적인 책이름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실망(Disapointed with God)'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영적인 순례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런 실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그분의 능력인지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조차 여전히 그분을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그분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보아도 이러한 하나님의 기다림은 놀랍다. 더욱이 인류의 역사를 두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경이적인 기다림이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그분의 방식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랑도 이런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실망을 극복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바로 그런 모습과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망'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실망'이라는 고개를 다 오르지 못한다. 그들은 중턱에서 포기한다. 그들의 가슴에는 다 이런 말이 담겨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만 이러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실망을 그분께 드렸으며,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살아왔는지... 그분의 실망에 대한 보상이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실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실망을 넘어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실체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구분하고, 영광스러운 신비가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법을 새롭게 배운다. 

참 사랑은 이유가 없다. 때문에 실망도 없어야 한다!

실망했다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찬양하라. 다윗처럼 그렇게 하라. 실망의 고개만 넘어서면 찬란한 은혜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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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7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두번째 요소는 의심이다. 

의심이란 금광석에 섞인 불순물과 같다. 의심은 전혀 믿지 않는 불신앙과는 다르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황금을 포함하지만, 그렇다고 황금과 같은 영광은 없다. 

아무도 돌과 황금이 섞인 금광석을 그대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수한 황금을 얻기까지 그것은 가치는 있지만 유용하지 못하다. 

의심은 믿음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한 것들을 받는 탁월한 방법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증진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우리는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며 사랑한다.

그런데 의심은 믿음의 순도를 떨어뜨려서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지 못하게 만든다. 

더 나쁜 것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며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다. 결국 의심은 원망하는 마음의 원인이 되곤 한다.

맞다. 의심한다는 자체가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믿음일 뿐이지 참 믿음은 아니다. 참 믿음은 의심을 극복하고 전적인 순종과 신뢰를 드릴 때에만 완성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의심에 대하여도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 척을 하는 것에 분노하신다. 그것은 영적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마음의 의심을 거짓 없이 드러낼 때에 그러한 우리의 약함을 치유하시고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의심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정직이다. 의심한다고 하여서 그 사실을 감추거나, 그것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손에 흙이 묻은 아이가 아빠를 향해 걸어가듯 담담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두 손을 아빠에게 내밀면 다음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우리들의 아빠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닦을 것을 닦고, 멋진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가 손을 뒤로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빠에게 간다. 그리고 손을 내밀라는 아빠의 요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등 뒤로 감춘 손을 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연 아빠가 모르실까? 하나님이 우리의 의심하는 마음을 모르실까?

의심한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송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의심 받는 것에 익숙하시다. 그분은 우리의 의심을 언제나 극복해 오셨다. 마치 아이의 손을 잡고 산에 오르는 아빠처럼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의심'이라는 장벽을 넘어 참 믿음에 이르는 여행을 수없이 반복해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도움을 청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은혜는 언제나 가능하다.

정직함을 통해 의심을 털어내라. 그래야 응답받는다. 

믿음의 응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비로소 느껴진다. 그분의 음성에 우리의 영혼이 집중하게 된다. 포기와 헌신에 대한 말씀조차 순종할 수 있는 용기가 자라나는 과정은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의심 없는 믿음이 정말 중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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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31 



성경의 모든 교훈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것은 방향을 잃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에 성경이 해주는 최종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질문을 다르게 던지면 대답도 달라진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꼭 알아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이렇게 대답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발 믿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하여 쓰였다. 제일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패와 배신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의 사랑보다 죄의 힘이 더 크진 못하다. 

십자가는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싸워 승리했음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에 많은 방해들을 받고 있다. 

첫 번째 방해꾼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종종 엄한 얼굴로 우리의 죄를 하나씩 들추어 심문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한다. 그분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들려있다. 우리는 두려워 입이 얼어붙는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때문에 죄인도 미워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미움보다 언제나 사랑의 마음이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며, 은혜와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회개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신다. 우리는 횟수를 세면서 그분의 용서를 빌지만, 그분은 세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신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부모는 매를 든다. 그러나 대부분 매를 드는 잘못은 큰 잘못이 아니다. 큰 잘못, 이를테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잘못을 했을 때에는 미처 부모가 매를 들 기회도 없다. 다만 큰 잘못이 될법한 가능성을 향해 매를 드는 것이다. 아직은 바로잡아 건강하고 바르게 키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향하여 매를 들고 훈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버리시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 하시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산책하며 즐겁게 대화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나무 그늘로 숨어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그 장면에서 아담이 그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만한 지혜가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무엇을 증명하셨는가? 그것은 자기를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니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에게 나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인 것이다. 

아직도 자존심, 체면, 혹은 이유 없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저하는가? 예수님께서 슬퍼하신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남은 문제는 당신뿐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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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4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딤전 6:10) 그럼에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더욱 돈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딤후 3:2) 

돈(money)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 일에 요긴한 도구가 되기도 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헌신의 내용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과 부요함을 무조건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필요의 대상에서 격상시켜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의 정서는 통일성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지금까지 사귀던 이성에게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새롭게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청년의 이야기에 수긍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다 진실하게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소위 양 다리는 어떻습니까? 

분명히 이 청년도 처음에는 양편을 향한 자기의 마음을 저울질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귀던 이성도 정들어 있고, 새롭게 나타난 이성도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을 열렬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반대편을 향해서는 마음이 식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결심을 세우고 한 편을 정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섬긴다’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한다’라는 의미와 한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약해지고, 돈을 섬기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약해집니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을 누구보다 주님께서 잘 아시기에, 우리를 향하여 돈을 사랑하는 정서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문명, 곧 맘몬(황금과 부요함의 가나안 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점점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돈을 향한 사랑이 싹트고 자라갑니다.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모든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에 대한 지나친 낙심이나, 부유함에 대한 지나친 자랑도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현상입니다. 심지어 우리 기도의 내용에 거룩한 본성의 변화와 은혜를 갈망함이 약해지고, 돈에 대한 소원이 강화되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내면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성(自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기도에는 냉담하거나 시큰둥하던 마음이 돈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는 열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의 내면의 질서는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을 제어하고 적당하고 아담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망치는 돈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족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샬롬~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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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7


전 세계 화합의 체전으로 불려지는 올림픽이 북경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았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감동을 받고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물론 한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비록 올림픽에서 꼴찌를 하는 선수라 할지라도 뛰어난 재능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을 감수하며 극한 훈련의 과정을 참았기에 세계인의 으뜸으로 자기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여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의지와 결단이 없으면 신앙은 결코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자라는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은혜를 낭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신자들은 교회와 목사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잘 되지 않아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에는 교묘한 자기 포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갈망하는 절실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교회 공동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목회자와 건강한 목양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2시간, 아니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가서라도 ‘좋은 교회’를 찾고 거기에 몸을 담아 신앙생활 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 다음 심판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마음의 잔가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라내고 단순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직 우리 삶의 목적이 신앙 한 가지로 집중되도록 삶을 정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이런 과정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의 즐거움에 관심이 많으며, 세상의 행복을 향한 미련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언제나 청년 유두고와 같이 예배당 창문의 문턱입니다. 한 편으로는 신앙의 위로와 격려에 귀를 기울이고, 한 편으로는 세상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가슴 부풀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사실 가장 불쌍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자기 인생의 날들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적당한 귀 기울임으로는 결코 우리 내면의 죄가 죽고 거룩한 성화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신앙생활은 수십 년을 해도 제자리일 뿐입니다.

좋은 교회를 찾고 또 찾으십시오. 그리고 찾았다면, 이제는 핑계하지 말고 그 안에서 자기를 돌보십시오. 이미 완성된 자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성실하게 자라가야 할 목표를 정하여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치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처럼 자기를 여기십시오. 

영적인 성장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것 없이 다른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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