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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큰 그릇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2003년의 3월2일 목회를 시작하며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먼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각오의 중심에는 과연 내가 실현하려고 하는 목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벌써 훌쩍 만 6년 전의 일이다.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을 했고, 자기 목표를 설정했다. 6년을 목회에 전념하고 안식년이 되는 7년에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나서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때에는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되어 있을 것을 상정하고, 작더라도 성경적인 비전에 헌신하는 교회로서의 정체감을 찾아가겠다고 포부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3년만에 개척했던 교회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 결정은 무모해 보이리 만큼 막연했다. 나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신앙의 후원자가 되시는 어머니조차 "꼭 일본에 가야만 했느냐?"는 질문을 지금도 하신다. 한국에서의 개척이 힘들었다거나, 목회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생기 넘치는 30대의 젊은 목사였고, 주변에 후원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 동역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에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일본을 향했다. 그리고 어느덧 이곳에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참 힘겨운 세월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목회적 목표들을 대부분 수정해야 했다. 성경적 원칙이야 어디인들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주어진 현실은 많이 달랐다. 양들의 상태와 성향, 신앙경력, 경험, 추구하는 바와 이해할 수 있는 수준들이 많이 달랐다. 그들은 장년이면서도 청년이었고, 청년이면서도 노인들이었다.

일본에서의 3년 동안 가장 많은 훈련을 쌓은 것은 역시 나 자신인 것 같다. 

몽골에서 섬기는 이용규 선교사가 <내려놓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영적 광야인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배울 수 밖에 없는 영성은 비움과 내려놓음이다.

가난하더라도 목사로의 자존심과 명예만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선교지에서 목사는 별반 의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명(無名)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했다. 교회를 섬기고, 교우들을 섬기는 것에 그저 하나의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 섬김의 과정은 처음에는 고달프고, 속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하는 동안 점점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성경의 새로운 일면들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은혜가 마음에 채워지면서, 요즘은 여전히 낮아지지 못하는 나의 다른 일면들에 대하여 고민한다. 비우고 또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마지막 욕심, 겉으로는 신앙을 말하지만 정작 안으로는 여전히 주님과 다른 길을 욕심 내는 나의 다른 심장에 대하여 돌칼을 든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大器晩成)' 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시야가 좁다. 가능성은 무시되고, 현실만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 미래를 잉태하고 그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어찌 인류가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을까! 

정말 좋은 것은 쉽게 얻는 법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귀하고 좋은 것을 얻는 인생을 꿈꾼다. 대박의 꿈은 잠시 즐거운 상상의 꺼리가 될 수는 있지만, 인생의 기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사람은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결국에는 빈 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아내를 보면 면목이 없다. 교회 지체들을 향해서도 비슷한 마음이다. 목사만 이곳에 오면 금새 교회는 회복되고, 신앙생활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 지루한 싸움에서 지쳐가는 표정이 역력하다. 교회의 건강한 목적도 좋고 비전도 좋은데, 당장 현실도 좀 챙기고 변했으면 좋겠다는 바램,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생각들이 얼핏 스친다.

하지만 아직은 이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의 목회를 좀 더 계속해야겠다. 이 고생이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벽돌을 쌓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충분히 숙성되어 단단하게 굳기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100년을 버티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걱정이 많은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줄로 알아라.

다시 말한다. 교회는 돈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와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변할 생각이 없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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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가장 큰 사람



꿈은 광야에서 자란다. 거칠은 광야는 인재(人材)의 산실(産室)이다.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불편과 결핍이 있는 광야로부터 인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를 검증하고 세상을 생각하며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들 무언가를 궁리한다. 

그 궁리(窮理)함의 무수한 밤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의 세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세례요한은 무수한 결핍을 안고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에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원래 그의 생업은 부모를 좇아 당연히 제사장의 직무를 잇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모를 설득하셨고, 하나뿐인 아들을  빈 들로 보내도록 하셨다.

성경은 여기까지만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하여 언급한다. 빈 들에서 자란 요한에게 딱히 부모로서 해줄 것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그 사명을 다하고 노쇠한 생을 마감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아이는 제도권의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엣세네파 라는 소수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광야에 그들의 거처를 만들고 평생을 성경을 필사하며 메시야를 고대하며 살았다. 아마도 빈 들에서 세례요한이 만나고 함께 했을 사람들은 이 칙칙한 수도사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 3:4)


요한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다.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의식주로 대변된다. 그런데 특별히 요한의 옷과 음식은 그가 살아왔던 척박한 삶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안락한 품을 잃었고, 정규교육과 안정된 생업을 잃었고, 연애와 친구와 입을 설레게 하는 맛 있는 음식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애절하게 하나를 붙들었다. 그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구하는 참 신앙이요, 그가 광야로부터 들었을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기다림이었다. 그 한 가지에 그의 삶이 집중되었을 때에, 이 모든 삶의 결핍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남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심령이 강해졌고, 드디어 그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헤롯의 반칙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학교에서 바른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바른 것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타협한다. 우리는 물러서고,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은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극히 불편하고 척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으로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일생과 설교에는 숨기지 않는 정직함과 알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성실함과 참된 신앙의 매력들이 가득 차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예수님도 그를 아름답다고 하셨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사람으로서 최정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역과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 사역으로 명성을 얻으셨을 때에, 더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녀의 인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기독교 강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에 물들었는지, 설교하며 축복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이 '성공'인지, '순교'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곤 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블루(우울함)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기쁨과 만족, 행복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거나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부터의 열매이지, 결코 그저 예배당 안에 들어온 자의 형통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는 광야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탄압과 심각한 가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교회를 세워 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막절을 잊었다. 우리는 그 고난의 과정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광야로 보내기를 주저했다. 

아버지 목사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상속하고, 성도들은 세금을 탈세하며 십일조를 드렸다. 말은 신앙적이지만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현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으로부터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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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목양칼럼

 

 

여름이 오고 있다. 습하고 더운 동경의 여름은 어려움이 많은 계절이다. 한낮의 더위를 참는 것도 힘들지만, 밤이 되어도 계속되는 열대야는 평생에 겪었던 난적(亂敵)중에서도 강적(强敵)인 것 같다. 

지금이야 에어컨을 켜두고 잠을 청하기도 하지만, 처음에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에어컨이 생긴 후에도 감히 켜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다. 그 더위를 온몸으로 겪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한밤에도 몇 번을 샤워실에 가서 물을 뒤집어 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잠을 설치고나면 다음 날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고, 더위는 더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사람은 쉼이 필요하다. 하루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쾌적하게 푹 잘 수 있는 환경만 있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다음 날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쉼이 깨어져서 고단함이 이어지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점점 약해지고 병들게 된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정신과 신앙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신감의 결핍과 의욕부진을 겪고 있다면, 제일 먼저 살피고 반성해야 할 일이 '쉼'에 대한 돌아봄이다.

그러나 의외로 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쉼도 열심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계속 달려야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워커홀릭'들이 있다는 것은 사회적 불행이다. 이들은 가족을 위하고, 자기 조직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얼마의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병이 들고, 세상을 떠나면 결국 남겨진 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상처와 부담만 안겨 준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가 정말 원하는 것은,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어주는 일이며, 책임 있는 구성원이란 언제나 건강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주는 것이 그 근간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최고(最古) 기록은 모세오경이다. 그것의 기록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입장을 달리 하지만, 대체적으로 B.C. 1400~150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의 기록이다. 

이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는데, 예수님 당대의 서기 원년이 우리나라의 시대로 환산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쯤이 되니까, 이 시기가 얼마나 오랜 옛날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역사 속에서 신석기 시대로 분류되는 시대이며, 당연히 지구상의 대부분에서 유사(有史)시대 이전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문자가 발명되고, 기록이 남겨진 문명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유서 깊은 성경의 처음 기록으로부터 하나님은 '쉬라', '안식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셨다. 

심지어 쉬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도록 명령하셔서 '안식'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으셨다. 물론 이 계명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하고 예배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라, 이 계명은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하게 만든다. 우리가 필요에 의하여 노동하지만 노동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과, 그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는 항상 자기의 방향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색이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처럼 단순해진다. 그리고 감동이 없는 인생은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의 그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첫장에서 무려 예닐곱 번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감탄을 기억해 보라. 역동적인 창조의 과정중에도 잠시 허리를 펴시고(물론 이것은 메타포이다!) 창조의 과정을 확인하며 감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려 보라. 하나님은 의외로 낭만적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사람이기에, 사람은 쉼을 필요로 하고, 감동을 필요로 하고, 반성과 희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본심을 드러내야 하겠다. 일본에 와서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고 직장생활 하는 지체들이 많다. 더러는 필요에 따라 주일에도 나가 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강제로 막거나,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벌 받는다고 겁 주는 설교 같은 것은 분명히 내 신앙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을 목사로서 찬성하거나 방관할 수도 없다. 분명히 그것은 자신을 위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쉼을 희생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대가로 얼마나 더 벌고 직장에서 인정을 받는지는 모르지만, 보다 근본적인 눈으로 멀리 본다면 그런 선택이 손해라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다.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라. 주님 안에서 제발 쉬라. 그리고 자기를 살피고 확인하라. 이것은 편안한 잠자리 만큼이나 우리 인생에 중요하다. 이 원칙을 바로 세워서 건강한 청춘 뿐만이 아니라 건강한 인생을 세워가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이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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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선과 악의 중간은 없다


선과 악에서 중간은 없다. 사람들은 회색지대를 상상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다고 할 수도 있고, 검다고도 할 수 있는 회색은 때때로 합의와 균형을 상징하는 ‘중용’의 의미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 회색은 상상이요, 현실 회피일 뿐이다.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자가 함정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었다. 그러자 사자는 즉시 나그네를 잡아 먹었다.

선이 힘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동안에 악은 함정 속의 사자처럼 눈물을 흘리고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 외양에 속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장의 형편이 변하면, 사자는 사자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나, 명예, 혹은 정의감 같은 것이 원래부터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가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길은, 순진하게 회색을 상상하고 지금쯤은 사자도 식인의 습성을 버렸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하기 보다는, 사자를 함정 속에 둔 채 사육하는 것이다.

문명의 사회 초기에 야생의 맹수는 무조건 제거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문명의 사회가 맹수들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들 또한 이 세상의 한 구성원이요, 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치도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악이든, 악한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때에는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 과정 속의 우리는 결국 악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명적 지혜를 배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악을 통제권 안에 두는 것이다. 악이 선을 잡아먹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생존은 보장하되 악의 자유는 간섭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법과 원칙의 의미이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와 사회는 ‘법치(法治)’라는 기초를 쌓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원칙은 호도된다. 법은 시민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재자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법에 의하여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신음하게 되는 역리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결국 만민에게 구원의 소식을 외치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편도, 저편도 들어와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정치적 사명도 있다. 그것은 선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키우고 후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정의를 실현하고 올곧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평생 든든한 배경과 동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선이 악을 압도하는 사회를 실현하고, 그러한 사회적 질서를 지켜가는 것이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어나 최선을 다하라. 그래서 이 세상의 선봉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 믿음이 삶이 되게 하라. 악한 사람들의 긍휼을 바라기보다, 악한 사람들에게조차 긍휼을 베푸는 위치가 되도록 분투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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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어느덧 5월의 마지막 날에 이르렀습니다. 겨울 동안 움츠렸던 날들이 가고 오랜만에 푸르름을 맛보는 5월은 기쁨과 따사로움이 있는 계절입니다. 특별히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지나며 가정의 소중함을 기리고 다시 생각하며 함께 가꾸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 푸르름의 5월이 문득 아픔과 회한의 달로 바뀌었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들려온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우리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혀 5년 동안이나 무사히 임기를 마쳤던 사람이 고향의 한 바위산 위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정치와 현실을 떠나 한 개인의 삶이 왜 그토록 비참한 결말로 치달아 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어떤 가치들도 결국에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보다 귀한 것이 세상에 없고, 그래서 정치를 하든, 경제를 살리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사람을 먼저 귀히 여기고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뜨거운 화염에 싸여 죽어갔을 때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법이 옳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의의 사건 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혹시나 우리가 다른 열정에 사로잡혀 '사람'을 귀히 여기는 본래적 바탕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 죽이고 뉴타운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적어도 그것이 과연 우리를 위해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반성과 고민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바벨의 탑을 쌓고서 온땅으로 흩어졌던 미련한 사람들의 전철을 밟아 의미없는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믿는 성경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롯의 거대한 성전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 거대한 건물이 초라한 한 사람의 영혼과도 결코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본질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진실한 신앙이란 바로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국의 교회는 정치적 선언과 구호 속에서 그러한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을 멸시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물의만을 걱정하는 편협한 주장들을 거룩한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쏟아낼 수 있습니까? 과연 그분들의 눈에는 슬픔에 초죽음이 되어버린 가족과 그를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슬픔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

교회는 생각해야 합니다.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세상이 그들을 꼬득이고 타락시켜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시대처럼 우리 자신이 그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 바른 비전과 목적을 주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욕망에 눈 멀어 스스로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다 건너 동경의 하늘에서 새로운 주일을 맞습니다. 시청 앞 광장과 봉하 마을과 절망하는 청년들의 곁에 내가 지금 서 있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내가 가르쳤던 청년들은 과연 지금의 조국에서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면 더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절대로 이해해주지 않는 강단과 목사들에 의하여 매도당하고 정죄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이 광야로부터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교회를 이루어 보라고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 아래 두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 밖으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저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로서의 의미를 고민합니다. 세상의 비판이 아니라 세상을 감동시키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또한 청년들에게 바른 비전과 열정을 찾아주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고민합니다. 저는 제가 목사로서 가진 이 고민을 여러분도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동경드림교회는 목사만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이루고 세워가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조국은 병들어 있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고나면, 더 교회는 텅 비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청년들이 기독교의 기득권에 실망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더 크고 넓다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또한 이 일로 충격 받은 많은 국민들과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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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영혼의 고통을 아는가?


신뢰를 쌓는 것은 힘들지만 허물기는 너무 쉽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신뢰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을 신앙이라고 한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도 쌓기는 어렵지만 허물기는 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한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과 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현재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큰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신앙생활에 자기의 정체성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너무나 비신앙적인 삶을 살면서도 전혀 자기를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와 함께 하시고 모든 일에서 자기의 편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부족하다고 버리시거나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우리의 태도와 상태에 따라서 '선택'을 후회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 이것을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구 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비유, 혹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결혼'의 관계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빌어 '내가 네게 장가들어'(호 2:19~20)라고 선포했고, 예수님께서도 새예루살렘에서 장차 성도들을 맞이하실 때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계 19:9)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은 쌍방의 신실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호세아와 고멜의 경우와 같이, 그 한 편이라도 신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면 결코 일방적으로 끝나지 못하는 관계가 결혼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며 우리 맘대로 살아갈지라도 한 번 마음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열심으로 우리를 추적하며 압도하는 것이다.

그 런 점에서 인생의 한 때라도 정말 순수한 열정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겨 보았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가 없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의 뜨거운 첫사랑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붙들어 주는 생명의 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 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추억'은 있으되 '신앙'은 없는 공허한 과거를 발견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바쁘게 뭔가를 했던 추억을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본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낙인이 찍히는 일은 결코 훈련이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를 졸업한다고 모두가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혹은 선교단체에서 리더가 되어 열심히 모임을 이끌고 전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과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정말 그 영혼이 거듭나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는가이다. 이 점이 스스로 설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회심과 구원은 아직도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참신앙을 경험하고도 신앙에서 무너질 수 있다. 인간은 생각처럼 강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아무리 편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품에서 누렸던 평안과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더 갈급하고, 결국에는 주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 지만 신앙의 추억만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세상의 안락한 삶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들의 영혼에는 영적 감동이 원래부터 없었기에 세상의 즐거움이 아무 저항감 없이 그들의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점령해가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라!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그리고 그 현재와 과거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만약 부족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고민하며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적신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무너짐과 비신앙적 삶에 전혀 무감각하지는 않는가? 가끔은 너무 용감해져서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쓴웃음을 짓게 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영혼은 위험하다. 그것은 당신이 그토록 믿고 있는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당신이 처음부터 전혀 무관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거룩은 없다. 그리고 거룩한 고통을 겪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성도도 없다. 

건 강하다는 것은 작은 고통들을 통해 유지된다. 배가 고프니까 먹고, 다리가 아프니까 쉬고, 눈이 피로하기에 잠을 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영혼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잘난 척을 해도 불쌍하기만 하다. 휴우~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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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부모의 조건



아이는 자란다. 그 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도 물론 필요하다. 교육도 해야 한다. 되도록 좋은 학교를 보내고, 되도록 훌륭한 교사를 만나게 하는 것은 부모가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아이를 위하여 3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고사(古事)로 전해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과연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일까? 되도록 많은 것을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최고의 미덕은 무엇일까?

성장한다는 것은 미완으로부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는 처음부터 탁월하고 잘하는 존재가 아니라, 점점 나아지는 존재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아이는 아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성장의 가능성에 있어 현실만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현실은 '지금(now)'을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유치원의 우등생이 반드시, 대학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사회에서도 유능한 인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6학년에 훌쩍 크는 아이가 있고, 고등학교에 훌쩍 크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어떤 아이는 일찍 소질이 드러나고, 어떤 아이는 늦게 소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무작정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에 별로 의미가 없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마다 고유함이 드러나고 찾아질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유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소설가 이외수 씨가 방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좀 더 절망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자살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막상 살아남고 보면 죽을 만하다고 느껴졌던 일들도 별것 아닐 때가 많은데, 그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죽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러니 절망에 좀 더 익숙해져서 살아남아 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우등'이 아닌 '열등'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보다 본인에게 속상하고 아픈 일이다. 

누군가 우등상과 표창장을 받을 때에, 그 외의 기타등등으로 서서 박수만 치다가 퇴장하는 경험은 결코 행복한 경험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는 누구나 잘하고 싶어한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싸움질이라도 잘하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일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는 것이고, 내가 반드시 모든 것에서 일등이어야 한다는 법칙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에 서서히 패배주의와 포기하는 마음이 뿌리를 내리면, 그 아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시드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앞에서 물었던 대답을 스스로 해야겠다. 부모의 제일되는 사명은 아이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너는 열등하다'고 할 때에도 부모는 '네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을 믿고,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부모는 아이가 잘할 때가 아니라, 아이가 못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아무래도 욕심이 너무 많다. 아이들이 포기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포기하거나 단정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부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함량 미달의 부모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부모를 믿고 아이를 맡기셨다. 그 아이는 내 속으로 낳았으나 나의 소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섬세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고, 매사에 희망을 뿌리는 농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내고, 조롱하고, 단점을 말해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결코 한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드러나지 못한다. 아이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은 사랑과 격려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할 줄 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부모일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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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신앙의 두 길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에서 비전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민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는 폐허가 되고, 정신마저 황폐해진 청년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모으고 유명해질까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부흥케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고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찰스 피니라는 목사님은 대학 캠퍼스에서 부흥운동을 벌여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라는 분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비전과 꿈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에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고 인생을 재정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 박사 부부 (Francis & Edith Schaeffer)는 1955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기슭 위에모(Huemoz)란 동네에서 라브리를 시작하였습니다. 라브리는 불어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이 작은 쉘터는 누구든지 신분과 사정을 따지지 않고 쉬어갈 수 있는 영적 피난처였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머무르는 동안 쉐퍼 박사와 함께 노동하고, 저녁이면 예배와 학습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어줌을 통해 정말로 위대한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으며, 용기뿐 아니라 인생을 새롭게 할 비전과 기쁨을 찾아 돌아갔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라브리'라는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양적으로는 찰스 피니의 선택이 좋았지만, 질적으로는 프란시스 쉐퍼의 인생이 더 아름다운 결과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따지고 논할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두 분 다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으시겠지요...

 

신앙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번의 설교로 5천명을 회심시키는 베드로와 같은 길입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역자들을 통하여 대중이 하나님을 만나고, 시대에 부흥이 일어나며, 교회의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평생을 내적 경건과 섬김으로 살았던 사도 요한과 같은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신약의 서두인 복음서와 마지막인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 복음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증인이었으며, 사람들에게 신앙의 핵심을 되짚어주는 영적 파숫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베드로 사도야말로 초대교회의 스타였지만 그의 이름으로 저작된 성경은 극히 짧은 두 통의 편지 뿐이고, 은둔자처럼 살았던 사도 요한은 복음서와 세 통의 서신과 묵시록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두 길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요한이 없으면 베드로식 교회는 깊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반대로 베드로가 없으면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교회의 비전을 묵상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교회를 위하여 각기 다른 길에 세우시고 각각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베드로식 교회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교회의 영광이라 여기고 그것만을 목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잘못된 풍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교회를 빙자하여 충족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목적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자기다움을 지키고, 자기에게 주신 고유한 길을 가야 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이 환호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께는 버림받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삶을 살지라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헌신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참으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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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예배를 위해 헌신합시다


제가 예민한 부분이 좀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까다롭지 않고,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도 아닙니다만, 두 가지에 대하여는 제가 생각해도 예민합니다. 

하나는 말입니다. 저는 '언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사용하는 단어를 잘 골라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절하지 못한 말에 대하여 오래 기억하고 많이 감정이 상하는 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제가 행하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것에 관계된 것에 예민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목사에게 오전은 개인적인 묵상과 경건을 위한 시간입니다. 또한 금요일부터 토요일은 주일의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숨을 고르고 마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되도록 감정을 단정히 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의 가족도 이런 특징을 압니다만, 이제는 여러분도 알고 섬겨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에게 토요일에 근심을 주는 것은 주일의 예배를 망치라는 말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그런다면 그건 더 심각한 일이구요. 너무 심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습니다. 

설교는 단순히 원고를 읽는 행위가 아닙니다. 준비한 말씀을 진심으로 동의하며 감동 속에서 전해야 하고, 그렇게 나 자신과 동화된 말씀이야말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스포츠의 프로 선수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얼마나 긴장하고 예민하게 몸을 준비합니까? 만약 목사가 이러한 마음의 각오와 준비 없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강단에 서면, 단순히 예배 시간에 졸음에 시달리는 성도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도록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스스로 은혜가 되는 말씀일수록 전할 때에는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20년을 강단에 서 왔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의 눈을 보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은혜를 받아 기뻐하며 말씀에 몰입하는 성도도 있고, 더러는 항변과 거절의 생각으로 말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설교하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온갖 반응과 생각의 혼돈 속에서 길을 찾고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강단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강단에 설 때마다 온 마음과 몸의 힘을 소진하고 내려오게 됩니다.

일주일의 삶이 있는데, 물론 목양을 제대로 받고 신앙이 건강한 성도들은 수시로 교회에 들려서 은혜를 받고 자기를 살찌웁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그 일주일의 하루, 그것도 1시간 반짜리 예배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삼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은 매일 같은 말을 듣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들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없거나 멀리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울타리 안의 99마리를 전부로 삼지 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사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은 길입니다.

목회자를 배려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 주십시오. 목사의 입이 순결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맘껏 외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 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축복입니다. 그런 목사를 통해서만,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고 깊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되도록 앞자리로 오십시오. 눈을 마주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시다. 예배 시간에 주위를 산만하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 목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모르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충 넘어가는 방식은 왕이신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정말 지금의 내 모습이 최선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집사님들에게 특별히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제 교회의 집사입니다. 예배만 드리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섬기러 나오셔야 합니다. 예배 전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의 손으로 살피고 섬기셔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목사의 조력자로 세워져 있습니다. 목사가 예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예배의 좋은 모범이 되셔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여러분을 보고,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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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2009-04-19

 

사람은 누구나 내면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인생에도 가속도라는 것이 있다. 되도록이면 하던 방식으로, 가던 길로, 익숙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스스로 살피고 돌아보지 않으면 내가 비판하던 바로 그 방식을 내가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다. 조급한 마음이 압도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과정에 대한 반성은 뒷전이 된다. 그러면 설사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때부터 길이 어그러져 이후로 계속되는 잘못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 들면 들수록 더욱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고, 목적을 확인하고, 과정에 대하여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분량의 1/3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십자가의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만큼 긴박하고 다양한 사건과 이해, 목적이 서로 실타레처럼 얽혀진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는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누구나 마지막 정리를 하려고 하면 감상적이 되기 쉽고 이런저런 회한이 들기 마련인데 역시 예수님은 뭔가 많이 다르시다. 그분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서운함과 자기 십자가에 대한 고뇌를 작지 않게 표현하셨지만, 그러나 뭔가 황급하여 당황스러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 긴박했던 인생의 속도를 서서히 줄여 가셨다. 마치 정차해야 할 선을 저 앞에 두고 미리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안전운전자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과의 동행을 마무리 하시고 있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천국을 소유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과로 영원하고 복된 시간을 약속하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생겨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여유'가 아닐까 한다.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되, 세상의 시간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고 좀 더 멀리 보고,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요즘 동경드림교회의 미래를 자주 생각한다. 내가 정년이 되었을 때, 혹은 그 이전이라도 좋은 목회 리더십의 이양이 필요한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생각해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시대까지는 적어도 교회가 이 정도의 비전을 이루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교의 불모지, 동경에서 한국인들의 손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일본과 세계를 섬기고 사역하는 역동적인 동경드림교회의 내일을 마음에 그려본다.

그래서 오늘 더 잘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과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절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겠다. 

목적을 잊어버린 과정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비판하던 바로 그 방법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항상 '모두'와 함께 노력하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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