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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목양칼럼


Dream's Freedom! :: 너는 크게 자유를 외치라! (사61:1~3)

복음이란 무엇이고, 전도란 무엇인가? 가장 고귀한 가치들이 세속적인 가치들로 인하여 퇴색하고 혼란에 빠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귀한 것을 너저분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전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일면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전도를 일종의 종교적 강요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밥을 사고 선물을 주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선동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서 '전도'에 대한 불쾌감 혹은 두려움을 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전도의 본질은 아니다. 전도(傳道)란 '도를 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터미널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도(道)를 아십니까?'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도란 '복음'의 한자적 차용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전도라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복음을 영어로 '가스펠'이라고 하는데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을 번역한 것으로 '기쁜 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1차적으로, 전하는 사람도 기쁨으로 전하고 받는 사람도 기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를 겪으면서, 우리는 대중을 찾아가는 서비스가 돈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광고를 해야 하는 기업은 구매자들을 지겹도록 좇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러한 매판적 전략이 묘하게도 전도의 방식과 맞물려 돌아갔다. 

물론 전도에도 훌륭한 전략이 필요하다. 상업적인 방식이라고 하여서 무조건 잘못된 것이고, 옛날 방식으로만 전도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잃고 방법의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교회마다 전도를 강조하고 시행하는데 거기 전략과 방법은 있는되, '전도' 본래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본질이 유앙겔리온, 곧  '기쁨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하겠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은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 그 즐거움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주변과 이웃, 사회로 흘러가는 것이 성경적 전도의 방법이다. 때문에 성경에는 전도에 대한 과도한 무게감이 없다. 오히려 전도를 하기 위하여 자기를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들의 자유가 보인다. 

사람들은 핍박을 받아 흩어져도 자연스럽게 전도했다. 그것은 전도가 특별한 훈련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변화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부터 Dream's Freedom! 이라는 이름으로 전도행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에는 별 호응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자기에게 은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뭘 전할 것이 있을까? 그런 전도에서 어떻게 유앙겔리온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3년을 목회하고 새로운 현실을 보고 있다. 토요일마다 모이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절박한 현실에 이끌려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근심과 억지로 끌려가는 그늘짐은 발견할 수 없다. 

성도의 모임은 언제나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전도를 하는 동안에도 서툴지만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의 기도와 소원들을 볼 수 있다. 사람마다 이쁘고 대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에서 능률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서 더디게 보이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성급하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것은 이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평생을 예배자요, 전도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먼 길을 가는 것이기에 조급하기 보다는 성실하고 건강한 과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일단 7부 능선은 올랐다. 전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먼저 축하할 사실은 우리 안에 작은 열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열정이 자라고 능숙해지고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양만 흉내내는 어떤 이들의 그것 보다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주에도 전도하기 위해 동경의 각지로 흩어질 지체들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누군가가 교회로 오기 전에 바로 당신들의 그 모습이 목사의 눈에는 이미 응답이라는 것을. 힘들겠지만 끝까지 복음을 '기쁨의 소식'으로 붙들고 전하는 삶을 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 예배당이 가득 차고 비좁아 지는 날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바라는 것은 교회가 항상 복음, 곧 '유앙겔리온'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내게는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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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9



말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새롭게 된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의 원인(the Origin)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의 종착점(the Finale)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과정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피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다.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퇴락이 생겨났고, 사람이 구원을 받음으로 세상도 함께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의 구주인가? 곰과 호랑이의 구주인가? 남극의 펭귄과 아프리카 물소들의 구주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 칭하셨는데, 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아들로 스스로를 부르신 까닭은 분명하다. 그분의 관심과 목적이 바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기독교가 바라는 구원과 섬김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구원과 섬김이어야 한다. 

이것이 요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이 요점에서 많이 빗겨가는 느낌이다.

건물이 사람보다 우선된다. 이유를 물으면 건물이 크고 훌륭하면 사람들은 저절로 모인다는 것이다.

방법이 사람보다 우선된다. 이유를 물으면 방법이 결국 사람을 이끌고 인도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도 좋고, 비전도 좋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말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면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의 동경에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누구의 교회인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셨던 예수의 교회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 교회를 통해 무엇을 가장 하시고 싶어 하실까? 예수가 지금 이 동경땅에 서 계신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는 종교적 무지와 미신과 싸우셨을 것이다. 예수는 한국인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전통과도 싸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싸움보다 먼저, 예수는 누군가를 찾아 부르시고, 친구가 되시고, 그들에게 바른 신앙의 삶과 모범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사람이다.

건물은 형편에 맞게 옮기고 다시 지을 수 있다. 방법은 현실을 반영하고 경험을 통해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안 맞으면 뱉어내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작은 구멍가계조차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교회가 어떠하겠는가?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격려할 줄 알아야 하고, 믿고 사랑할 줄 배워야 한다. 아무리 비능률적이고, 무능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롱하거나 무례하게 대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도 위해서  피흘려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Dream's Freedom! 행사를 위하여 토요일마다 전도지를 들고 나간다. 참 귀한 일이다. 20명 이상 초청에, 10명 이상 정착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전도하고, 좋은 신앙으로 세우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그분의 결정을 완전히 신뢰하고 바른 목적을 향해 성실하게 걸어가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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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2009-03-22



서울 종로구 적선동 금천교 시장. 지난 20년간 이곳에서 떡볶이로 장사해온 김정연 할머니가 오늘도 가계를 열고 있다. 올해 93세인 할머니는,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 시장의 골목에서 아이들과 사람들을 상대로 떡볶이를 판다.

할머니는 원래 개성 분이다. 고향에서는 어려서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자랐을 정도로 집이 꽤 유력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중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고, 결혼을 해서도 남편과 함께 사업을 했다. 그러다가 6.25 동란으로 인해 남편이 실종되고, 할머니는 자식 셋과 함께 살기 위하여 남편을 대신하여 서울의 동대문에 대금을 받으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혼자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 서른 셋이고 이때부터 할머니는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사람에게 잘해주면 누군가는 내 자식에게 잘해줄 것이라 믿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가 최근에 2300만원 전재산을 복지재단에 기부했다. 전세금 800만원과 예금으로 모은 돈 1500만원을 고스란히 '아름다운 유산 남기기' 본부에 기부금으로 위탁한 것이다. 물론 할머니 생전에는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지만, 돌아가신 후에는 그 돈이 복지재단에 기부된다.

연탄 아궁이에 하루종일 떡볶이를 팔아도 요즘은 사람들이 줄어서 하루 매상이 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가 쌀떡과 국산 고추가루를 고집하기에 장사에서 남는 이익은 겨우 2천원 정도이다. 그렇게 어렵게 지난 20년을 벌어서 1500만원을 예금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것이다.


가난이라는 것이 현실보다 심정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남편과 자식을, 가족을 모두 잃으면서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동경드림교회의 말로 바꾸면, 사람 귀한 것을 알게 되셨던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힘들다. 섬기는 일은 분명히 섬김을 받는 것보다 힘들고, 고단하다. 폼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섬기는 일을 천대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구질구질한 일을 해야만 하냐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 귀한 것을 깨달았을 때에, 섬긴다는 것은 귀하고 즐거운 일이다. 섬길 수 있는 누군가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주는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타인을 위해서 소중한 나의 인생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꿈이 있다. 내 인생의 말년을 소외된 이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음식과 물, 그리고 교육이 부족한 지역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 인생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사랑을 베풀며 섬기다가 주님의 품에 가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정말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나눌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식에게 물질을 주는 것보다 자부심과 좋은 모범을 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눔과 섬김은 절대로 돈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 누구와 나누고 있는가? 무엇으로 섬기고 있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미루기만 하다가 끝이 날 수도 있다. 소중한 기회를 버리지 말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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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때가 이르다

 

며칠이나 비가 오는 날씨가 계속되면 집안에 빨래가 쌓인다. 우리 집에 수건이 꽤 많다. 한 상자가 좀 넘는데 숫자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았지만 한 30~40장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3일만 비가 오면 그 수건이 모두 세탁기에 들어가 있다. 별 의식이 없이 하루에도 서너 장이 넘는 수건을 사람마다 사용하는데, 식구가 네 명이니 3~4일이면 그 많은 수건이 모두 물기를 머금고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빨래가 어찌 수건만 있겠는가? 속옷, 양말, 셔츠에 기타 등등까지 줄줄이 밀려드는 빨래가 마침내 포화상태에 이르면 할 수 없어 세탁기를 일단 돌리기는 돌린다. 하지만 이제 그 많은 빨래를 집안에서 어떻게 말려야 할지 대책이 막막하다.

개인적으로는 눈에 거슬리게 어지러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가 계속되는 날이면 다른 선택의 도리가 없다. 벽마다, 공간마다 빨래를 널어두고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에 날이 갠다. 찬란한 햇살이 베란다에 들어서면, 그날은 집안에서 아직도 축축한 빨래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상쾌한 바람이 간간이 분다. 하루 종일을 집안에서 씨름해도 충분히 마르지 않던 빨래들이 고작 2~3시간 사이에 바싹 마르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볕이 좋은 날에는 세탁기를 두 번, 세 번 돌려도 충분하다. 심지어 밤에 널어둔 빨래라도 아침이면 이미 개운하게 준비되어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억지로 되지 않는다. 솔로몬은 만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 (전 3:1~8)

사람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않고 노력만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그것은 비오는 날에 모든 빨래를 집안에 널어두는 일과 같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능률은 없다. 결과도 신통치 못하고, 과정도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과정이 흥겹고, 결과가 보람되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것이 절묘하게 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느껴지고, 사람들은 일의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

목회도 때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사람이 무엇을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기획을 하고, 행사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이 때를 대신할 수는 없다.

2009년도에는 동경드림교회에서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뿌리는 때였다면, 이제는 거두는 때가 된 것이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하겠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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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


이번 주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하셨습니다. 그것이 천주교 용어인지 모르겠지만 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종, 선한 결말... 마침 내 이름을 뒤집으면 선종이 됩니다. 그래서 나도 '선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69년 4월인가에 아시아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되었더군요. 그 후로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을 겪으며 격정의 근대사를 끌어안아 왔습니다. 그분이 일제 시대에 학도병에 복무했다거나, 혹은 최근의 파견근로자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기독교의 진영은 비판과 비난의 경계가 모호해서 일단은 흠잡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정의로움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런 태도가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 시절에 몇 권의 책을 보고, 천주교는 심각한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의 교리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는 연륜이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용감하게 한 평생을 살았던 김수환 형제의 삶을 존경합니다. 그분이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젊은이들과 소통하려고 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던 것에 감동을 느낍니다.

성경을 보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매우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누군가의 학벌이나, 파벌, 혹은 종파에 미혹당할 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영혼의 실체를 보십니다. 믿음에 대한 말이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고 살았던 삶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러해야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마지막 유언으로 '서로를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교황의 빛나는 금관이 아니라, 바로 이런 마음과 태도로 주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추모객들의 발걸음을 뉴스로 보면서, 과연 우리 기독교에서는 누가 사회적으로 이러한 '선한 결말'의 모범을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가난한 자, 쫓기는 자, 억울한 자, 슬픔을 가진 자의 친구가 되어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에서는 누구도 그런 삶을 바라지 않으며, 부를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 유명한 사람들의 친구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정말 내 인생에 선한 결말이 있기를 원합니다. 단절이 아니라 소통 속에서, 되도록 많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는 권력과 부의 허울을 쓰고 살아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진가는 남겨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떠난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게 될까요?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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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목양칼럼


사람은 변한다. 긍정적인 변화를 '성장'이라고 하고, 부정적인 변화를 '퇴보' 혹은 '변질'이라고 한다. 사람의 인생에는 양편의 가능성이 모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은 비단 혼자만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정체감의 고정화'라는 것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정체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가는 과정 속에서 습득하고 생겨나는 것이다. 이 정체감은 '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아이들의 정체감에는 부모의 그늘이 짙다.

부모가 아이를 '너는 아주 나쁜 아이다'라고 말해주면, 그것이 아이의 무의식에 고스란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감을 '나쁜 아이'라는 상처 속에서 고정시킬 수 있다. 이 의식은 두고두고 그 아이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파괴력을 나타낸다.

물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모두 부정적인 정체감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불우한 정체감도 극복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긍정하고 좋은 평가를 통해 기대하면, 그 기대가 서서히 어린 시절의 상처 받은 정체감을 치유하고 스스로 '유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정체감을 생산한다.

세월은 뒤로 돌릴 수 없다. 유년시절의 불우함만을 탓해야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부모라고 의도적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고 모순적인 것이 인간이다. 때문에 상처 없는 아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상처 받은 사람들을 긍정의 빛으로 끌어내고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교회는 왜 공동체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예배의 찬미를 기뻐하시는가? 난 기독교 예배야말로 가장 극적인 '긍정'의 최상급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조차 잠(sleeping)으로 이해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하여 칭찬하는 것이 예배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찬미는 긍정을 낳고, 부정을 파괴한다. 우리는 이 예배의 은혜 속에서 죄인을 '죄인'으로 고정하지 않고 '형제'와 '자매'로 긍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유년을 치료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도가니와 같이 '우리'를 녹여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 치료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적인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전한 기대와 미소로 격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모두 차별받고 있다. 그들의 현재만이 세상적인 평가의 기준이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든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지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나에게 방해가 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결과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가치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소망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더 긍정적으로) 여기고, 우리의 소망을 이루실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

이러한 소망이 과거의 사슬을 끊고 죄인을 구원한다. 그들의 상처받은 정체감을 치료하고, 세상에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무익하던 사람에게 세상을 유익하게 살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제공한다.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변화시킬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믿어라.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곁의 사람들을 그런 눈으로 보아야 한다. 아내를, 남편을, 같은 교회의 교우들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은혜받은 사람의 표지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누군가를 '몹쓸 사람'으로 단정짓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당신은 그의 '퇴보'에 분명히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파괴하도록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하고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일을 행하라. 그 일을 위해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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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목양칼럼 :  봄의 목전(目前)에서


재미있는 속담이 있다. 서당개가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단다. 물론 반대의 속담으로는 소 귀에 경읽기라는 말도 있다. 이 속담들을 통해 개가 소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이다. 둘 다 짐승의 이름을 빌려왔지만, 미련한 사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련함이 종국에는 다른 결과로 갈라섰다. 한 편은 삼년을 견디더니 풍월을 읊는 수준이 되었고, 다른 한 편은 여전히 경(經)을 들어도 반응이 없는 것이다. 전자는 희망의 경우이고, 후자는 절망의 경우이다.

목회를 하면 양편을 다 겪는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한데, 변하기 어렵다는 뜻도 담고 있지만,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소 귀에 경 읽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지만, 언젠가는 그 소가 개가 되어서 공자님 말씀을 읊어대는 기이한 날을 보기 위하여 목회자는 참고 또 참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다.

(비유가 좀 이상한가? 그래도 의미는 비슷하다...)

개는 인간보다 40배의 후각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인간은 전혀 맡을 수 없는 냄새를 개는 예민하게 구별할 수 있다. 최근에 연구진들은 이러한 개의 후각을 이용하여, 방광암이나 폐암, 유방암 등의 진단을 시도했는데, 암에 걸린 환자가 내뿜는 특별한 냄새를 찾아내도록 훈련한 것이다. 그 결과 폐암과 유방암의 진단에 있어서는 거의 90%의 성공율을 보였다고 한다.

목사에게도 특별한 후각이 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비록 지금의 현실이 춥고 힘들지만, 한낮의 한 줌 햇볕에 봄을 예감하고 노란 꽃을 피어대는 개나리처럼, 목사는 요즘의 동경드림교회를 보면서 봄을 예감하고 마음이 들뜨고 있다.

세월을 거스릴 수 없는 것처럼, 변화도 그러하다. 씨앗이 싹이 트기까지야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여지지만, 일단 싹이 터지고나면 나날이 줄기가 자라고 새잎이 달리기 마련이다. 그 때에는 기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우리가 준비한 그릇들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기회이다.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매일이 오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오늘은 한 번 뿐이고, 내일은 내일의 몫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신앙도 그러해서 오늘 해야만 할 것을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땅을 치는 후회가 남는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은혜로 함께 하기를 바란다. 같이 늙어가며 우리가 함께 뿌렸던 씨앗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목(巨木)이 되고, 풍성한 열매의 산실이 되는 것을 바라보며 일생의 보람을 교회 안에서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러면 이제는 변해야 한다. 더이상은 별로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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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1


오바마 대통령이 공무를 시작한 이후에 가장 시급하게 처리한 일중의 하나가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를 폐쇄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오바마 대통령은 모든 정보기관과 군에서 고문을 금지시키는 명령에도 서명했다. 이 자리에는 퇴역한 미군 장성들이 초대되어 함께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에 대하여 ‘미국의 수치’라며 그것을 없앨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에서는 엄동설한에 철거민을 향하여 물대포를 쏘며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다가 화마(火魔)에 인명이 많이 상하고 6명의 고귀한 목숨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이 일은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경찰과 철거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같이 한다. 하지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 투영된 사건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삼가 고인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공화당이 원래가 보수적이고, 또한 기독교 인물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은 교회가 공화당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반면에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교회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독실한 크리스천 대통령이 고문을 허용하고, 인권을 위협하는 무법적인 수용소를 만들고, 남의 나라를 침공했었다. 이라크 침공은 명백하게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가정하고 저질렀던 일인데, 제대로 사과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결국에는 퇴임했다.

한국도 그러하다. 교회의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마다 성경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사용하고 국민의 종복(從僕)을 자처했다. 하지만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자유는 축소되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 모순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로 일관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시대로부터도 태어난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 시대의 정신과 무관할 수 없으며, 특별히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미국과 한국의 시대 정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중요하게 여겨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오늘의 현실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교회다운 성경의 길을 버리고 대중과 영합하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세속적으로 형통하는 길을 택해왔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성경을 전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눈이 멀었다. 어느 신자에게 '부흥'이 뭐냐고 물었더니 목사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것이 우리의 과거이고 현실이다.

때문에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자를 버리며, 욕망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전혀 그것을 신앙적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받는 사회적 지탄을 '핍박'과 '순교'로 주장하기까지 한다.


회복의 기회는 있다. 그러나 나는 '선거'가 그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는 현실이고 수단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만, 나무를 든든히 하려면 뿌리를 살펴야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려면 사람들의 정신을 정의로 젖먹여야 한다. 그 과정이 축적되어 한 시대를 꽃피우고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건강한 교회가 희망이다. 교회부터 십자가 아래의 신자들을 바른 대통령 감으로, 장관 감으로 키워야 한다. 시대가 순응하고, 사람들이 흠 잡을 수 없는 준비된 일꾼들을 배출하여 사회의 물을 맑게 해야 한다.


우찌므라 간조로부터 성경공부를 했던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국인 조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그들의 곁가지가 후일 <무교회주의>를 낳아 이단의 시비를 받았지만, 따지고보면 그것 또한 망국의 현실에서도 교권에만 집착했던 정치적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낳은 결과였다. 아무튼 그들의 심정은 순수했고 신앙 또한 깊었다.

그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역사적 기독교 잡지가 바로 <성서조선>이다. 이 유학생들의 간단한 신앙잡지는 두고두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 창간사를 여기 옮겨 본다.




성서조선 第 1 號 (1927年 7月)


하루 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해진 것을 알아차렸던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루 저녁에 "아무리 해봐야 조선인이로구나!" 하고 연락선 갑판을 발로 구른 자는 둔한 자였다.


나는 학창시절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면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 하며 스스로 위로했었다. 장엄한 회당 안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들을 때에도 수없이 감사했다. ‘온 세상이 형제 동포’ 라는 말을 순진하게도 믿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애국자 몇몇이 ‘제 2 국민’ 이었던 우리 조선인을 가르치려고 식사도 잊고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계획은 원대함에 이르렀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를 하랴?" 

과연 학문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으로는 온 세상이 가슴 속에 있었다.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나의 앞 길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이 뜻을 깨우치니 모든 것이 헛되었다. 또한 이 헛됨을 이해하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 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웃을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요즈음 우리 동포들 사이에 평소의 사상과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자기를 굽히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기뻐할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효성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 같은 불효자들이야 두 말해서 무엇 하랴? 상황이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아무리 같은 사랑이라도 그 표현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를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서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성서를 주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열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니, 그들의 탁월한 이성 앞에서 우리의 수준 낮은 욕망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에도,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먹여서 신앙적 가정을 일으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저속한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만민'을 위한 보편적 기독교를 교회로부터 부활시키는 것만이 이 시대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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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5


목사는 말하는 직업이면서도 말을 듣는 직업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문학을 통해 남의 인생을 엿보고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극적인 소설도 사람들의 진짜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오히려 가소롭다.

말을 많이 듣다보니, 말이 곧 사람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 배경이 어떠하든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 사람의 실존이 서서히 드러난다. 숨은 생각과 성품의 편린들이 드문드문 입에서 떨어져 사람을 다시 보게 한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길들일 수 있어도 혀는 길들이기 힘들다고 하였고, 심지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하는 것의 덕스러움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말이 곧 우리의 성품과 신앙을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이 미우면 아무리 잘 생겨도 미워 보이고, 말이 고우면 아무리 못난 사람도 곱게 보게 된다. 물론 잠시야 누구나 탈을 쓰고 고운 말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게 잠시만 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좋은 사람들은 항상 곁에 두고 1년을, 10년을 지켜보게 되니, 누가 그 긴 세월 동안에 자기다운 말을 감출 수 있겠는가? 때문에 사람은 결국 진실을 입으로 토한다. 

말을 변화시키려면 내면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역사할 때에, 우선은 기존의 습관과 싸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은 은혜의 지배를 받고, 행동과 말은 습관의 지배를 받는 모순이 과도기적으로 생겨난다. 

신자에게는 이 시기가 중요하다. 이 시기에 습관에 지면 결국 은혜의 변화(change)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를 은혜로 승리하면 서서히 말과 행동이 변화한다. 이전의 자기와는 다른 새로운 자기를 성취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다. 항상 비꼬는 화법이나 직설적인 화법만을 사용하던 사람이 남을 칭찬하고 관용하는 말을 하는 것은 낯이 간지럽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사실이 아니다. 옛습관이 주는 일종의 저항감일 뿐이다.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받고, 그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말하는 습관을 쌓아가면 서서히 이러한 이질감이 사라지고 곧 새로운 성품에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해지면 새로운 성품도 하나의 건강한 습관이 되어서 우리 삶을 채우게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의도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의 성품이란 여리고성과 같다. 하나씩 차례대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변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래서 은혜의 승리는 극악한 죄인도 성자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자신에게 적용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정진해야 한다. 노력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뜻을 정하고 집중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말에 주의하라. 그것은 내 영혼을 보는 창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가를 살피라. 그것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라. 말을 통해 은혜를 높이고 덕을 끼치려고 힘쓰라. 당신은 당신처럼 말할 것이며, 또한 말하는 대로 당신이 변화될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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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18 사람은 사람이다!


오사카의 한 아파트에서 40대의 독신남이 죽은지 한 달 만에 발견되었다. 파견 근로자로 일하던 그는 작년에 예고 없던 해직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다가 이 겨울에 굶어죽은 것이다. 부검을 담당한 경찰은 그의 위장에는 아무런 음식물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증언했고, 그의 주검을 발견한 아파트 관리인은 그의 냉장고에도 역시 음식물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언론은 시끄럽게 무심한 시대를 한탄했고, 앞으로 긴 경제적 겨울이 이어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맞물려 사람들의 눈빛을 더욱 침울하게 했다.

기사를 읽으며 우선은 답답했다. 사십이나 된 사람이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부유한 나라 일본에서 그가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살 길이 있지 않았을까? 

왜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끄럽거나 게을러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가 그를 살고 싶은 의욕으로부터 갈라놓은 것은 아닐까... 한 달의 약칭이 39,000엔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석달이나 약칭을 못내고 있었다. 이제 곧 강제로 집을 비운다면, 그는 이 겨울에 어디로 가야할까? 나이 사십에 말이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희망에 가난하다. 성공과 사치에 대한 갈증이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비참하게 하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매도되기도 한다. 소위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식의 말들이 사람들의 정신 속에 강박증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하기사 엄청난 스트레스의 사회생활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의 배수진이라도 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세뇌적 방법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직장에서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과 상담한다. 맑은샘교회에서도 그랬고, 동경드림교회를 담임하면서도 그랬다. 직장생활의 과중한 업무가 건강을 악화시키고, 부부관계를 금가게 하고, 신앙을 무력하게 하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가져 보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한 발 물러서 있는 우리들은 "왜 그러면서까지 그 직장을 다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자기 이야기가 되고나면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한다.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당분간 견디는 것이 곧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서적 공백(패닉)이 찾아오고, 크게 무너진다.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이러한 무너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신경증적인 감정의 충동에 휩싸인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것은 중요한 명제이다. 그가 나쁜 일을 해도 사람이고,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못해도 사람이고, 심지어 사회에 악을 행해도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까지 '사람'의 범주에 넣고 존중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사람의 사람됨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람의 기계화, 혹은 부속화의 위험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의 사람되는 결정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판단하고 폄훼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인간의 사형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을 보고, 격려하며, 희망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인생의 한 시점이 전부가 아니라 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함께 돕고 사랑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 더 간절한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복음의 핵심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나는 복음 안에 이러한 희망이 이미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먹고 마시며 고생하셨다. 그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고생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보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모범을 배웠다.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그분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인생을 깊이 변화시켜 사도가 되게 했고, 전도자가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나 전도자가 아니라도 자기의 자리에서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그분이 가르쳐 주셨다.

일본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결코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의 문제이며, 희망의 문제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나약한 짐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는가? 그러면 사람을 세우고, 섬겨라!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사람에게 있다. 모든 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 그러면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복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교활한 사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로 움추리는 지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하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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