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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까리가오까의 가을이 깊었습니다.
예년보다 좀 늦은 것 같습니다. 날이 아직까지도 온화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을은 이렇게 흐드러집니다.

그리워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산책길에 장면을 좀 담아다가 올립니다.
뒤편에는 낙엽을 모아 산처럼 쌓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서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여러분도 가을과 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들고 작별하시기를 바랍니다.
2012년도의 가을은 지금 한 번 뿐입니다.
부디 무엇보다 세월이, 인생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기를 바랍니다.
인생 자체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어리석게 살지 않는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샬롬~

****

배경 음악은 Jacky Terrasson의 "Tennessee Waltz"

I was dancing with my darling
To the Tennessee Waltz
When an old friend I happened to see
I introduced her to my loved one
And while they were dancing
My friend stole my sweetheart from me

I remember the night
And the Tennessee Waltz
Now I know
just how much I have lost
Yes, I lost my little darling
The night they were playing
The beautiful Tennessee Waltz

* repeat

I was dancing with my darling
To the Tennessee Waltz
When an old friend I happened to see
I introduced her to my loved one
And while they were dancing
My friend stole my sweetheart from me

I remember the night
And the Tennessee Waltz
Now I know 
just how much I have lost
Yes, I lost my little darling
The night they were playing
The beautiful Tennessee Waltz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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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즉시 적극적으로 나서 정신대(위안부, 전쟁성노예)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울러 일본 정부 역시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촉구합니다.

얼마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 이분들을 한(恨) 속에서 죽게 할 작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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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 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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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 없는 듣는다.

그러나 이처럼 난감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좋은 교회라는 말인가?

물론 성경적인 좋은 교회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그러한 내용에 상응하는 교회를 탐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백인백색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교회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아무리 좋은 교회라도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더구나 좋은 교회를 찾아 떠도는 신앙적 유목민들은 귀만 커지고 눈만 높아진다.

이들이 찾는 좋은 교회의 조건들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이상적이다.

마치 천상에 있는 교회를 지상에서 찾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좋은 교회에는 당연히 신앙적 부담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은 그럼 부담을 피하려고 한다.

신자들을 부담 없이 만들어주는 교회야말로 가장 실력 없는 교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과 세상을 섬기고, 그 십자가의 보상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담스럽지 않은 신앙생활을 원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가?

 

나이를 먹으면서 되돌아 생각을 하니, 교회란 참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의 교회이더라.

꼭 개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때문에 세워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그 헌신이 곧 교회를 세우는 충성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헌신한 만큼 내 교회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땀을 쏟고 애정을 기울여 사랑한 만큼 교회는 남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거기는 벌레가 먹거나 녹이 쓸어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보물을 좋아한다. 보물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황금은 보도블록에 불과하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보물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그걸 아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물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는 사람, 자기 것을 아낌 없이 남에게 주는 사람 말이다.

희귀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보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금이 아닐 뿐이지, 이런 사람들도 자존심, 명예, 자식, 인기와 같은 자기들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결국 원리는 같다. 그 아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헛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제단이 교회이다.

구약적 제사제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교회를 통해 상속되었다.

대속을 위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완성될 수 없다.

그 불완전함이 고통의 이유이다.

하지만 역시 이 불완전함이 바로 은혜이다.

만약 교회가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길이 사라질 것이다. 역설적으로 완성된 교회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교회이기에 우리가 충성할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감사하라.

거기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신앙은 문제를 이겨내는 과정이지, 문제가 없는 낙원이 아니다.

문제와 열심히 싸우다 보면, 성령께서 힘과 용기도 주시고, 위로와 안식도 주실 것이다.

그 과정을 누리고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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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혁이가 검도심사에서 2단을 통과했습니다.

어제 공인증을 받아 왔네요. ^^

중학교 과정에서 딸 수 있는 최고 등급까지 통과한 것입니다.

대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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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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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목양칼럼

 

2006년 2월4일, 그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목양칼럼은 거기서부터다. 교회 홈페이지에 333번 칼럼이 걸려 있다. 그게 2012년1월8일이다. 그 후로도 매주 빠짐없이 이 글을 썼다. 더러는 주중에 몇 번 호외를 날리기도 했으니, 대충 400여편의 목양칼럼을 써온 것 같다.

분량은 워드 문서로 좀 빡빡하게 A4 한 장이다. 그것을 폰트크기와 문단간격을 조절하여 주보의 한 페이지에 앉힌다. 이전에는 글이 길어진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가독성을 생각해서 길면 잘라낸다. 그리고 잘리지 않은 원본은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다.

기쁨도 많았다. 어떤 분은 검색엔진을 통해 들어왔다가 목양칼럼의 애독자가 되었다는 분도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품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았다는 분도 있었다. 친구 목사는 이것을 묶어 책을 만들어 보라고 지금도 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이다.

이 칼럼이야말로 내가 목양하는 내 교회의 양무리들을 위한 나의 충성이었다. 그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시의적절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으며,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목양칼럼만 읽어서도 목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은 쓰는 사람의 생각으로 낳는 자식과 같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 온 400편의 글을 헌사 받은, 나의 양무리들(물론 주님의 양무리지만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내가 섬기는)은 이 목양칼럼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그들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필로스에게 헌사했다. 그 정중한 헌사로 인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데오필로스를 로마의 황족이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모든 신자가, 특별히 누가가 목회했을 양무리가 모두 데오필로스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두 권의 책은, 몇몇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무수한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교회를 전율하게 했다. 그 안에 담겨진 신앙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나 같은 말단의 목사를 울게 한다.

감히 누가의 글에 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정서는 같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양무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부디, 이 모든 글을 신문 귀퉁이의 일상적인 잔소리처럼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을 배우고,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성숙함이 자라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면 주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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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Mt. Fuji)이 잘 보이는 뷰 포인트(View Point)를 찾았다.
오늘, 날이 맑아서 아침에 후지산을 촬영할 수 있었다.
좀 용량이 되지만, 촬영한 원본 파일을 올린다… (클릭하면 새창에서 열린다)

 

 

히까리가오까에서 바라본 후지산 (4912 X 3264, 4.6MB) 55mm  f/9  1/5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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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파노라마사진 (8192 X 1856, 4.3MB) 55mm  f/14  1/4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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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모습 (4912 X 3264, 6.5MB)  18mm  f/7.1  1/5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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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敎會)’는 가르침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사실,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교회는 좀 더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니까요.
일본에 와서 보니, 교회라는 이름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부정적인 과오를 많이 저질러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교우카이, 教会)라는 이름을 온갖 종교에서 모두 공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불행이었습니다.
대신할 다른 이름도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단과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교회(기리스도 교우카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정체성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카할(kahal)’과 ‘에다(edhah)’가 있습니다.
‘카할’은 거룩을 나타내는 ‘카도쉬’와도 어근이 같은데, 부르심(call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신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에클레시아’와 쌍을 이룹니다.
새삼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의 무리’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에다’는 집회와 회중을 나타내는 단어였는데, 후에는 장소와 건물에 대하여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겪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은 ‘에다(성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 신앙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절, 유대인들은 열방에 흩어졌고, 그곳에서나마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디아스포라’라는 유대인타운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유대인과만 결혼하고 특별히 율법을 집중적으로 아이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정비된 시스템이 회당과 랍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 3~4세대는 히브리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당시의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했고, 고대어인 히브리어로 율법을 학습할 만큼 원숙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랍비들은 현실적인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라는 모국어와 율법이라는 신앙 중에서 율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 70인경이라는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70여 명의 유명한 랍비들이 모여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원숙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에다’는 ‘쉬나고게’로 번역됩니다. 쉬나고게는 회당을 의미합니다.
(이는 잃어버린 예루살렘성전을 회당으로 대치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 번역으로부터 회중이 건물로 변하고, 종교행위를 위한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본래 ‘에다’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그 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앞에 잠깐 언급을 한 것처럼, 일단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이고, ‘레시아’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불러냈다’는 의미로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교’를 의미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초대교회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과 몸과 피가 신자에게 들어와 하나가 된다고 해설했던 것이 주요합니다.
성찬예식이 예배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초대교회로서는 ‘교회’의 정체성 역시 그 ‘연합’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간의 연합입니다. 요즘은 이것만 강조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면, 다들 서로 친교를 하고 노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간의 친교는 부수적인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되고, 그 결과로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른 교회의 원리입니다.


영어에서는 교회를 처치(church)라고 부릅니다.
에클레시아도, 코이노니아도 아닌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이름은 종교개혁에서 그 유래를 찾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온갖 불법을 저지르던 당시의 카톨릭교회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개혁교회를 구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성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단어를 찾아냅니다.
’퀴리아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였지요.
결국 이 단어를 선택하여 교회를 나타내게 되고, 이 말이 독일에서는 ‘키르케(kirche)’, 스웨덴에서는 ‘쿠리카(kurika)’, 영국에서는 ‘처치(church)’가 되면서, 바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탐구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정리한다면…
1) 교회는 사람이다.
2) 선택과 부르심(은혜)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거룩함이 특징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5) 다른 신자들과도 교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퀴리아코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의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잘 감당하는 멋진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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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는 모든 장면이 극적이고 아름답다고 하여서 그 10여분의 시간을 Golden Time 이라고 부르지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담고 보면 참 풍부한 감성을 얻게 되지요.
오늘 산책길의 선물입니다. 석양을 놓치고 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보시고 감동하세요...^^
어떤 일이 오늘 하루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하루가 축복이고 아름다운 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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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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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재미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입니다.


천 년은 장구한 세월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숫자적으로 천 년의 세월도 무척 긴 시간이지만, 이를 넘어서 천 년은 그 이상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은 숫자 천(1000)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로 대치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루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하루’라고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의 단위는 무척 현실적인 실존의 시간입니다. 즉, 사람의 시간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간이 어떻게 존재했을까요?
네, 천문을 통해 존재했습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해와 달이 하루를 이루고, 여기에 별자리가 호응하며 일 년과 계절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대로 올라가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이를테면, 해와 달이 생겨나기 이전에, 별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간은 존재했을까요?


물론 우주적인 발견을 통해, 그 어떤 ‘다른 시계(other clock)’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타난 것은 반드시 그 기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그 기원의 바탕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을까요?
네, 창세기의 서술로 보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의 조화를 통해 일자와 절기를 이루도록 명령하시는 장면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창조의 시작부터 ‘시간’의 개념이 이미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러한 디자인으로부터 시간이 탄생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정오의 해를 멈추도록 기도했던 사실이나, 히스기야왕이 기도를 통해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서게(시간이 꺼꾸로 흐르게) 했다는 기록은, ‘시간’이 곧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으며 순종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습니까?
하나님께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거나 하루에도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입니다. 그의 연수는 성경에 969세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창조 과학자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주로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본래 지구의 성층권에 물이 한 겹을 덮고 있어서 대부분의 자외선과 우주광선을 차단했는데, 노아의 홍수와 함께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면서 이 모든 물이 비로 쏟아져 사라졌고, 그래서 이후로는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그대로 지구에 쏟아져 노화가 촉진되고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설득력도 있고, 과학적이어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든 이후에도,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출애굽을 시작했고, 120세가 되도록 건강해서 엄청난 공무를 수행하고 시력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갈렙 역시 80세에 전쟁을 수행할 건강과 체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세월이 빗겨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건강한 정도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층권의 물이 사라져서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지구에 들어와 수명이 단축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결정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대충 만들어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신비한 경륜과 능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시고, 마침내 그 끝에 대해서도 결정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장수’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수는 길게 산다는 뜻 보다는 의미 있게 산다는 뜻이 훨씬 강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서른 즈음의 나이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축복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력의 시간으로는 그들의 일생이 짧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룬 의미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에, 그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진들이 천 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보다 훨씬 값진 인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바탕에는, 모든 시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압축하셔서 더 치밀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더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알게 됩니다. 더디다, 빠르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느리고 빠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데, 빠르고 더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매우 심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처음 몇 개월 안에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결혼을 하면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며, 심지어 사역에 대해서도 어떤 시한 안에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지금의 시대에는 ‘시간의 노예들’이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돌아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사도는 확신합니다.
실체적 기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은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시간은 종(slave)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에 120년 동안 만들 것을 계획하고 시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를 따라, 산 위에 방주를 만들다 보니 세월이 흘러 1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노아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하루가 모여 120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0년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계획된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믿음에 있어, 이 시간에 대한 믿음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이 없다!
누가 그럽니까? 죽을 날을 알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설사 내가 다 끝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사 내가 심기만 하고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결과야 천국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조급함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죽음의 경험 이후였을 것입니다.
창조의 때에는 시간이 내 편이었는데, 죄를 짓고 추방된 이후에는 비로소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항상 초조하고, 그 초조함 속에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 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땅을 정복하며 헛된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땅을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 삶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은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신봉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면 시간이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내 아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내 아이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다면, 조금 더디 보여도 결국에는 시간이 내 아이를 섬길 것이며, 마침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나는 하루에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루를 천 년의 조각으로 맞추어 가십니다. 그 매일매일의 삶에 중요한 원칙은, 내가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급함은 내 시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은 적당합니다. 그야말로 적시(good timing)입니다.
하나님은 버릴 시간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시간을 지배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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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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