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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소원이 간절하다고 믿는다. 자기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경향은 나이와 상관없이 신자를 아이로 만든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의미에서의 아이 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간절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다 정리되지 못했지만, 최근에 간절함에 대하여 묵상한 내용을 먼저 정리한 것이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간절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이 점이 우선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먼저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쟁의식은 '선한 질투'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열심을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통과하는 열심을 찾으신다. 이러한 기준은 사람마다 사명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더 귀하고 큰 일에 쓰시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특별하고 간절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마음 졸였던 부부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신앙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남들보다 기도를 덜 했을까? 신실함이 부족했을까?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간절함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한 수준의 간절함을 원하셨다.

보다 간단히 요점을 말하면, 성경에 아기를 반드시 잉태하는 비법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의 해결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는 요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곁눈질로 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응답의 비결'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응답을 받은 것이 참고할 사항은 될 망정,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실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을 추구하는 일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 절대성을 가져야 하는 믿음의 대상은 '성경' 하나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성경을 잘 묵상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하나님께 인정 받는 간절함은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이 제일 쉽게 속는 것이 자신의 말이다. 원래 탁월한 거짓말쟁이는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속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을 내 귀가 들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매우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곧 실제적인 선택을 통해 실체가 드러난다.

삶에서 신앙은 언제나 갈등의 원인이다. 욕망과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정의와 신앙을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그런 이중성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오죽하시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거룩했다. 심지어 그들은 남다른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시장 어귀에서 옷술이 큰 옷을 입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공개적인 신앙행위가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기도는 예수님도 자주 하셨다. 오히려 더 많은 군중 앞에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적어도 외양은 아니다.

그 차이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순종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항상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맞다.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엔가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되도록 거룩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은 영악하다. 그리고 욕망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삶에서의 선택이 신앙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은, 말로만 포장된 위선일 뿐이다. 그런 신앙은 간절함과 거리가 멀다.

 

셋째, 간절함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픔의 경험 밖에 없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아픔'의 깊이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됨'을 요구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에 가슴이 찢어진다.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 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의 슬픔이며, 고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의 곳곳에서 만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나, 방탕한 고멜과 결혼하고 계속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호세아, 태어나기도 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 받았던 예수님의 경우는 모두 그 근원이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샘처럼 우러나는 슬픔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신앙적으로 간절하다는 것은, 자기 소원에만 집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슬픔이 보이게 되어 있다.

창조의 작품이 배신과 타락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하늘의 아버지. 그것이 바로 간절한 신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신앙적 현실(reality)이다.

 

고통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은 더 나쁜 상황으로의 진행을 막아준다. 만약 열이 나거나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작은 고통이 커져서 마침내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방치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간절한 신앙은 이 모순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고, 세상의 부조리가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절망의 상황이 신앙인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편 37:23~24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할수록 주의 붙드심은 더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간절한 심령은 영적으로 예민한 마음이며, 그 마음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필연적인 고통에 둘러싸이지만, 그 고통보다 큰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다.

 

 

넷째, 간절함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피면, 재미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목회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풍부하게 구약을 인용하시며 간접적으로 성경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매우 강조하신 의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하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하면, '구하라'는 말씀이 기도를 내포하는 보다 큰 범주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는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 그 근간이 '소원'이다. 소원하는 것이 없다면, 기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잘못된 기도는 잘못된 것을 소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바른 기도는 바람직한 소원을 마음에 품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소원에 대한 열망이다.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소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하여 공명이 은거했던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가 간절함으로 모셨다는 일화이다. 제갈공명은 점술가로도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 덕(德)에 감동하여 고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났다고 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자주 등장한다.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못해도 간청함을 인하여는 주리라 하신 말씀이나, 수로보니게의 가나안 여인이 자녀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다가 거절당하지만 끝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자녀의 고침을 받는 사건 등은 모두 '간절함'이 어떻게 드러나야 마침내 응답을 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것을 즐기신다. 그 이유는 자녀와 씨름을 해본 아빠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한 씨름이 아니라 져주기 위한 씨름이지만, 그 안깐힘을 통해 아빠는 아이와 친밀감을 나누고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관심이 '응답'이라면, 하나님의 관심은 '관계'이다. 때문에 이 씨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 하나님께서 굳이 주시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 응답의 과정에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의 인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간절함은, 믿음의 인내를 통해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간절함은 최선을 의미한다.

태어난 사람은 성장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다만 길고 오래 살며, 불쾌한 죽음을 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생명이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풍성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긴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채워지는 만족이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풍성한 생명이란 어떻게 실현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그 수령이 1100년이다. 세종대왕이 당상관의 벼슬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키는 얼마나 될까? 기록에 따르면, 60미터에서 40미터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의 측정으로는 41미터가 안내되어 있다.

이 나무에서 매년 은행 15가마가 열린다고 한다. 천 년의 거목이 아직도 그 키가 자라고, 매년 15가마 이상의 은행을 열매 맺는 것을 보며, 풍성한 생명을 묵상한다.

 

 

성경은 '성장'을 신앙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명령한다. 신자에게 성장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명 자체를 의미 있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풍성한 생명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성장은 언제나 한계를 갱신하는 자기 극복에서 일어난다. 누워있던 아이가 기고, 기던 아이가 물건을 잡고 일어서고, 일어선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걷고, 간신히 걷던 아이가 걸음을 빨리 하여 달리고, 달리던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를 타고, 스키를 타고… 그 한계의 극복, 자기의 실현이 곧 성장이며, 이 성장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겨두신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던 일도 막상 닥치면 넉넉히 해내는 경우가 많다. 욥을 생각해 보라. 그런 고난을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욥은 감당했다. 물론 욥의 인내가 대단하다. 그러나 그 욥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욥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함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최선을 끌어낸다. 물론 최선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한 일간지에서 조사를 했다. 12~19개월의 아이들을 비디오로 계속 촬영하고, 그 24시간에 대한 통계를 만들었다. 재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평균 4킬로미터 정도를 걷고 뛰었다. 이것을 걸음으로 환산하면, 14200 걸음이다. 그리고 하루 넘어지는 횟수가 102회라고 한다. 이것은 평균 1시간에 17번, 분으로 계산하면 3~4분마다 한 번씩 넘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조사에 등장했던 어떤 아이는 하루에 142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벌떡 일어섰고, 또 다시 걸었다.

 

우리가 성장해온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점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충격이 깊어진다. 실패를 연연하지 말고 일어서 앞으로 가면 되는데, 자꾸만 실패를 곱씹고, 생각하고, 겁쟁이가 된다.

간절함은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간절함 속에서 바로 최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지체하시며, 보다 간절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성장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 부족의 자리, 결핍 속에서 우리는 더 연단되고 마침내 자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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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주일예배




제목 : 지혜의 외침, 복음

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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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1~11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잠언8장’의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보통 지혜라고 하면,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시험을 잘 보는 어린 아이를 가리켜, 혹은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전문적인 지식의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잠언, 지혜의 말

 

잠언은 본래 ‘지혜로운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상식의 수준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반쪽만 보이고, 심지어는 반쪽조차도 아주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좋은 태도는, 나의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성경적 관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위 요즘 유행어로, ‘오픈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지혜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나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싫으시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 성공, 명예, 승리는 모두 우리가 가지는 신앙과 예배의 목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위한 책

 

그렇다면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예배가 가능합니다. 만약 성경이 없다면, 기독교는 모든 이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종교심에 의지하여 막연하게 창조주를 찾는 ‘짐작의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가 제대로 믿는지 확인해 줍니다. 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인도합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무엇을 위해 쓰였습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 곧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믿으십니까?

 

어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무슨 이야기 끝에, 너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더니 찬혁이가 발끈했습니다. 엄마는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며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반은 장난이었지만, 반은 진심이 담긴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낮에 어떤 일을 하는데, 핸드폰에 있는 노래를 7~80곡 정도 들을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찬혁이가 “삼칠의 이십팔, 이백팔십 분을 한 거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노래 한 곡이 3분 정도 되니까, 7~80곡을 들으면 그 정도의 시간이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 때, 준혁이가 웃었습니다. “야, 임마 삼칠이면 이십일이지, 왜 이십팔이냐?”

순간 모두 큰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거들면서 말했습니다. “괜찮아. 아직 중학교도 졸업 못해서 그런거니까, 많이 배운 우리가 이해해야지. 찬혁아, 괜찮아!”

엄마가 7~80곡이라고 하니까 머리로는 80곡을 생각하고 입으로는 70곡을 대입하여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찬혁이 편을 들었습니다.

“찬혁아, 솔직히 나이 들면 구구단 쓸 일 별로 없다. 몰라도 괜찮아!”

 

어떻습니까? 여러분 요즘 살면서 구구단 사용하십니까?

쓰더라도 아주 가끔이지요.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몇 년을 사시는 분도 많아서, 이 시간에 구구단을 게임으로 하면 아주 많이 재미 있을 겁니다.

지식과 지혜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습니다. 주변적인 것도 없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혜는 그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그 자체를 위해 필수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구단 몰라도 살고, 영어 못해도 살고, 심지어 자기 이름을 몰라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의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근본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영어를 좀 잘 하면 지혜가 많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 비싼 학원을 보내고, 심지어 영어를 쓰는 나라로 여행이나 연수를 보내기도 합니다.

아직 자녀가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투자하지 않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합니다. 비싼 영어교재를 사고, 학원을 수강하고, 원어민 강사와 마주하여 영어를 배우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매일 지각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졸기 일쑤입니다. 소설은 손에서 놓지를 않으면서 성경은 읽는 법이 없습니다. 아내와 오붓하게 분위기를 잡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과 오붓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일은 생각도 못합니다. 취미와 접대를 위해 돈을 쓸 때에는 아낌 없는 손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릴 때에는 항상 적은 액수의 지폐를 찾습니다.

 

이런 행동을 일삼으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말씀을 드리는 바와 같이, 신앙은 취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로 바꾸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것은 부수적인 지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지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우리 인생의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8장은 처음부터 이 구원의 지혜를 의인화 시켜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절박한 지혜의 외침

 

지혜가 이처럼 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좀 더 성공하고 잘 살기 위한 수단 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선택하는 절박한 결정입니다. 때문에 지혜는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저 편에서 큰 덤프 트럭이 달려 오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 점잔을 부리며 천천히, 예의 바르게 말해야 합니까?

그 순간에는 존댓말도 필요 없습니다. “비켜! 위험해!” 있는 힘껏 배에서 나오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요? 경박한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아니죠, 지금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잠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37~39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는 이 복음의 절박함을 다시 마음에 인식해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봐야 아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 평생을 살았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이 비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영원한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경외하지도 않고 산다면,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불신에 대한 무서운 심판뿐입니다. 설사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나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비참한 후회를 하며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날마다 각성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정말 그분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가? 예배를 귀히 여기고, 성경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는가? 교회를 사랑하는가? 주의 종과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반성이 없고, 회개가 없고, 날마다 성장하는 모습과 새로운 각오가 없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어떤 평판을 받고, 주변에서 무엇이라 칭찬을 듣든지 간에, 그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보다 귀하고, 진주보다 비싼 이 복음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해야 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예배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충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성경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봐야 할 때

 

오늘, 우리는 이제 2012년도를 한 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땅히 일년을 돌이켜 생각할 때입니다. 잘한 것은 격려하고, 못한 것은 반성하여 각오를 가져야 새해를 맞을 수 있습니다. 달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의 옷을 새롭게 갈아 입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자기를 돌아봅시다. 외치는 복음의 지혜 앞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되돌아 봅시다.

집사가 되고서도 오래도록,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빠지지 않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않는 일을 몰래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면서도 축복을 달라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구원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의 복음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지혜의 음성을 듣고 바로 이 거룩한 고민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 이 설교의 PDF 파일입니다.

"2012-11-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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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목양칼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과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에게 태생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사람의 세상에서 완전한 ‘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과연 국경을 통일하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통일하고, 심지어 언어를 통일한다면 어떨까? 과연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작은 반도의 나라가 반 토막이 나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반 세기를 훨씬 넘어섰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노래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그 통일이 지독하게도 강박증이 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이유도, 그 일이 틀려서가 아니라 남이 나쁘게 볼까 싶어서, 남사스러워서였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이 무의식에 쌓여, 이제는 그어진 선을 넘어 한 발을 내미는 것 자체가 극히 불안하다. 항상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그 ‘통일’의 범주 안에서만이 안도감이 찾아오고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저지선으로 삼았던 ‘안식일’의 금지선을 넘으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야말로 ‘자유’의 선포였다. 그분은 종교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 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를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이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다시 사람의 ‘굴레’로 삼아 그 기준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핍박하는 돌맹이로 오용(誤用)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름[相異]’는 ‘틀림[過誤]’이 아니다. 물론 근본을 흐리게 하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근본’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리를 판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정신을 흔히 ‘와(wa,和)’라고 한다. 이 나라는 우리처럼 반토막이 났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통일’에 목을 매고, 우리 보다 더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사회적 트라우마까지 깊이 살피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개인에게 집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이 사회적 강박증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복음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자유가 숨 쉴 틈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의 정신이 바람처럼 이 땅에 불어 넘칠 수 있을까? 불처럼 가슴마다 번져 흐를 수 있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오히려 더 이 땅에 동화(同化)되어, 앞뒤로 꽉 막힌 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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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soft Windows 8 이 출시되었다.

나름 오랜 경험으로, 출시 이후 서비스팩이 나올 때까지는 참고용으로만 사용한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반드시 ‘버그’라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서 스텝이 꼬였다.

 

아키(AHCI) 모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냐!

 

하드디스크의 성능을 올려주는 achi 모드라는 것이 있다.

메인보드가 지원을 하면 그 성능을 켜주는 것이 좋다는 글을 읽고, 아무 생각 없이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갑자기 재부팅이 되더니, 하드 디스크에 파일 에러가 무지 생겼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 보았더니, 이것이 하드 디스크의 파일 시스템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모드를 변환한 다음에는 하드 디스크를 새로 포맷하고 사용해야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일복구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Windows 7 이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비우고 새로 시스템을 구성하기로 했다.

어차피 얼마 전에 저렴하게 Windows 8 Pro 버전을 구매했기 때문에, 업그레이드를 결심했다.

 

스크린샷(4)

 

화려하다, 윈도우 8

 

빠른 부팅, 타블렛에 최적화된 타일 메뉴, 애니메이션 등은 유혹적이다.

수 십 년 동안 익숙했던 ‘아이콘’이라는 개념에서 ‘타일’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분명히 적절한 발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모바일에서도 이쁜 아이콘 대신에 ‘타일’이 새로운 인터페이스에 미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그 동안 윈도우즈 하면 상대적으로 맥(Mac)에 비하여 디자인성이 떨어지고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너무 다양해서 불편하며 통일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실 애플이 ‘고품질’을 표방할 때에 윈도우즈는 ‘용량’으로 승부했다. 더 많은 하드와 더 많은 메모리, 더 다양한 액세서리가 윈도우즈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번 윈도우 8 에서는 좀 달라 보인다. 일단 모든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메뉴 구성과 사용이 통일 되었고, 디자인성이 매우 많이 달라졌다. 사용자가 하나씩 색을 골라 자기 화면을 구성해야 했던 ‘노동’의 방식에서 다양한 ‘세트’를 제공하고, 간단한 선택과 조정으로 더 예쁜 인터페이스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예로, 바탕화면을 하늘이 찍힌 사진으로 선택하면 자동적으로 모든 윈도우즈 레이아웃이 푸른 계열로 세팅된다. 노란 단풍 사진으로 배경화면을 바꾸면 레이아웃이 옐로  계열로 자동적으로 따라간다.

또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거나 인터넷 주소를 연결하는 위의 타일에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입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윈도우의 처음 화면이 다른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위한 정거장 개념에서, 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낼 수 있는 ‘책상(desktop)’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불안하다

 

얼리 어답터들을 중심으로 베타판부터 윈도우 8 에 대한 평가는 뜨겁다.

좋다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싫다는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뭐냐고 한다. 이를테면, 비스타(Vista)처럼 사용자들에게 외면을 받는 운영체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존 윈도우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인터페이스의 개념의 전환을 시도하는 이번 윈도우 8 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은 드라이버 지원이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호환성에 잡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애플의 뒤에서만 좇아왔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번에는 확실히 애플 보다 나은 혁신을 보여 주었다는 생각이다.

잡스가 없어서 그렇지, 늘 다른 회사의 제품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었던 그가 윈도우 8 에 대하여는 뭐라고 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하지만 이번의 변화는 분명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몇 가지 유의미한 사실을 찾았다. 일단 나의 구형 웹캠이 거부 당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일에 나오는 윈도우즈 앱 중에서 Skype 앱이 있다. 그런데 나의 구형 웹캠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윈도우즈용 Skype 를 다운받아 설치하면, 그 안에서는 잘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하드웨어에 대한 지원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입력기 버그

 

또한, 일본어 입력기를 설치했는데, 버그가 나타났다.

일본어 입력은 로마자 입력방식과 일본어 직접 입력방식이 있는데, 도무지 마우스 클릭을 통해서는 로마자 입력방식으로 전환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좀 당혹스러웠다. 일본에 사는데, 일본어 입력이 불가능하다면, 이 컴퓨터를 어떻게 쓰란 말인가?

다행히도 키보드 단축키는 작동을 했다.

침착하게 Ctrl + Shift + Caps Lock 키를 누르면 된다. 세 키를 동시에 눌러주는 것이다.

일본어 입력모드에서 이렇게 단축키를 누르면, 로마자 입력방식이 된다.

참고로,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는 왼편의 Ctrl + Caps Lock 과 Alt + Caps Lock 으로 바꿀 수 있다.

숫자는 Shift + Caps Lock 이다.

 

스크린샷(8)

 

블로그 포스팅이 안돼! (Windows Live Writer 2012)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서 주로 라이브 라이터를 사용한다. 설치까지는 무난히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버그가 나왔다.

본문을 입력하려고 하니, 영어에서 한글로 바뀌지를 않는 것이다.

일본어 입력은 되는데, 한글만 입력이 되지를 않는다. 심지어 화면 오른쪽 아래에 한글 입력기를 나타내는 [한]이라는 단추는 [X]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하는가 망설였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버그로 보인다. 왜냐하면 해법 자체가 아주 우습기 때문이다.

 

라이브 라이터에서 본문을 직접 입력하지 말고, 일단 제목 부분을 클릭한다.

그 부분에서 입력모드를 한글로 바꾸면 전환된다. 그 이후에는 본문을 쓰는 부분을 클릭해도 역시 한글로 입력이 가능하다.

예전에 익스플로러에서 흔히 나타났던 버그가 생각났다. 갑자기 한글 입력이 되지 않을 때에, 주소 입력창에서 한글로 전환하면 역시나 풀리는 버그가 있었는데, 이번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나는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이미 불태웠다!

 

대부분의 경우, 안정화에 들어서기까지 “구관이 명관이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하여 남들보다 먼저 새놈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고, 그 만큼 불편하고 불안한 점도 있다.

일단, 부팅부터 라이브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좀 감시 당하는 느낌도 있는데, 그래도 아이 클라우드 서비스처럼 사용자의 대부분의 데이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카이드라이브에 백업되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최소한의 보장, 최소한의 백업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데이터가 많다. 쓴 글과 사진, 교회자료를 합하면, 내 인생의 20년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걸 담보로 위험을 감수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딱 감고 윈도우 7 이 깔려 있던 자리를 포맷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윈도우 8 과 친해보려고 노력중이다.

편하면서도 까다로운 이 놈이 앞으로 어떤 경험을 줄 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괜찮다는 첫 인상이다.

도전해 보고 싶은 분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모션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싸게 구입해서 한 번 경험해 보기를 바란다…

 

아 참, 방금 옥션에서 결재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엑티브엑스와 드디어 이별이라고 하더니, 도무지 깔리지를 않는다.

인터넷 쇼핑은 윈도우 7이 깔려 있는 노트북으로만 해야 하는가 보다.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구매하라는 뜻인지도 모르지, 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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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주일설교

제목 : 바울이 전하는 행복

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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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z01


2012-11-18.z02


2012-11-18.z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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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은 인생의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이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 자연과 경쟁을 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자연의 꼭대기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 자신이 인간의 경쟁자가 되었다.

뱀과 사자, 추위와 더위는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저 밖으로 모두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안전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자연보다 백 배, 천 배 더 무섭다.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비정형이다. 불규칙하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하나의 원리로 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너무 많은 예외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가진 하나의 방향성은 있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이 익숙한 단어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위해 움직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러는 서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좀 더 행복할 가능성이 확장되고, 기회가 많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심지어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가?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이 쉽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인간의 마음에, 항상 남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진짜 자리를 바꾸면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나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인간은 이처럼 고민이 많은 존재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하나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깨달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관조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도 한다. 원래부터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그래서 행복도 생각의 방식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을 훈련한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행복’이라는 네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야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착각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아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과 불행을 모두 마음에서 지우고 나면, 과연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느냐? 우리 인생에서 이제 행복 대신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공허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냥 비우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정말 행복은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가문이 훌륭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바울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사훌’이었다.

알다시피, 사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물론 다윗의 등장과 함께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그러나 사훌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물론 유다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훌은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훌이 당신의 조상이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분명한 사실은 베냐민 지파에게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 ‘사훌’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그에게 붙였다는 것은 기대가 컸던 자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은 가정교육부터 엄격하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신명기 암송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들은 특히 총명했다. 배우는 것에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가족은 더욱 그를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어린 그가 바리새파에 입문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리새파에 대한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외식적이고 허영에 싸인 ‘독사의 자식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읽힌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많은 학자와 종교적 지도자들이 ‘바리새파’임을 자랑스럽게 과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말리엘은, 성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걸출한 랍비이다.

그의 학문과 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제국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했다.

그리고 ‘사훌’이라는 청년은 이 가말리엘의 직전(직접 가르치는) 제자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훌이 대제사장을 상대하여, 그의 친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했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사훌이 회심한 후에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총독은 그의 학문이 많아서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로마 제국의 총독이 사훌을 알고 있을까? 그것도 그가 학문이 많은 사람임을 어떻게 알까?

빌립보 감옥에 재판 없이 투옥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인데, 만약 이것이 허풍이었다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사람마다 왕년을 자랑한다. 한 때는 자신이 출세했던 사람이라는 자랑이다.

사도 바울이 정말 그랬다. 그가 세상에 ‘사훌’로 알려졌던 푸른 날들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젊은 그를 세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과 연설에 있어 오만했고, 인맥에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에서 유대인들의 암살 대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어쩌면 그가 자신을 ‘바울’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가는 곳마다 동네에서 매를 맞고, 심지어는 집단구타를 당하고 기절한 것을 사람들이 동네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가는 헬라의 도시마다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이유 없는 부당한 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미친 들개였다. 집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자유인이면서 노예와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병을 무수하게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진 못했다.

 

그가 오늘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기 말한다.

 

 

[ 빌립보서 3:4~9 ]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는 세상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알고, 만나고, 그 예수를 위해 죽고자 했을 때에 그는 행복했다.

그래서 잘 나가던 ‘사훌’은 그에게 배설물(똥)이다. 그리고 지금 미친 들개 취급을 받는 ‘바울’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자신이다.

 

이 파라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그저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 만으로는 부족하다. 빌립보서에 실려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으로부터 우러나는 간증이다. 그것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비유하자면, 소고기맛 라면국물이 아니라 사골을 일주일 동안 우려낸 설렁탕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던진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염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도 염려하고 싶지 않은데 염려가 된다. 어쩌란 말이냐? 놀리는 거냐?”

화내지 말고 들으라.

여태까지 사훌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탈출구를 혹시라도, 모든 염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서 찾았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그래서 문제는 끝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당신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멋진 이성을 만나도, 높은 자리에 올라도, 인맥을 넓게 가져도, 최고의 명예를 얻어도 소용 없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시끄러운 일들이 당신을 좇아 다니며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건 답이 아닌 것이다.

 

내가 답을 못 찾는다고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다. 굳이 행복과 불행을 마음에서 지우고, 공허하게 비우는 것을 목표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은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있다고 말할 뿐이 아니라,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응,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기도하라는 것이구나. 그렇지 뭐. 대충 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비슷한 거 아닌가… 기도하면 된다. 되기는 뭐가 돼! 기도하면 밥이 나와?”

역시 틀렸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훌도 무수히 기도했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기도라는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관계, 그냥 그 분 앞에 앉기만 해도 감사함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계… 그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 없이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기도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거나(우상에게 드리는 기도의 경우와 같이), 다른 하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주소를 잘못 쓰면 우편물이 엉뚱한 곳으로 가듯이,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하나쯤 엉뚱한 번호를 눌렀다고 해서 옆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듯이, 어쩌면 그 기도 자체가 틀려먹은 것은 아닐까?

 

사훌로 살았던 동안, 그는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콧대 높았던 사훌을 길바닥에 꼬꾸라지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친히 물으셨다.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확신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껍데기요, 진정한 행복을 가로 막는 장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허울 좋은 바리새인의 옷을 벗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에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척도가 여기 있다. 그것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남들의 평판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의 위안이나 연민도 아니다.

그것은 감사이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강함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탁 드리는 약함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문제를 맡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믿음에서는 감사가 우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하나님은 절대로 거들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그렇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여야 만족하신다. 우리 마음의 90% 지분을 드려도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신다. 오히려 우리가 드리지 않은 10%를 조명하시고, 왜 이것은 내게 가져오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그게 하나님이시다.

결국 10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신다.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다.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의 인생이 바로 그 원리의 증거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 아주 예민하다. 모든 것을 깊이 살펴서 놓치는 것이 없다.

마치 아기의 필요를 살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예비하는 평강이다.

그 샬롬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볼 때에, 마음과 생각은 같은 대상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각을 이성의 영역으로, 마음을 보다 깊은 영혼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샬롬이 깊이 침투하고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존재, 그것이 이성이든, 영혼이든, 혹은 생각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라고 이름하든지간에 상관없이 그 평강은 우리의 전 존재에 스미고 채워진다.

그리고 우리를 강하게 하며 지켜준다.

 

바울은 이 편지를 서술하는 동안, 감옥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토록 근심과 어울리는 장소에 앉아 이토록 평안한 편지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의 해결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어떤 문제 속에 앉아서도 그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행복의 재정의(再定義)이다. 행복을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라는 안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인간을 향하여, 바로 행복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제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하루 종일 앉아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나는 행복한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밤공기가 차다. 허파를 지나면서 한기(寒氣)는 소름으로 돋는다.

처음에는 상쾌했던 느낌이 점점 추위로 변한다. 급히 문을 닫는다. 답답했던 실내의 공기가 차라리 다행스럽다. 추위가 슬그머니 퇴장한다.

행복도 이런 것일까 두려웠다. 가지고 싶은 열망으로 추구하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순간 또 다른 칼날을 드러내는 두 얼굴의 무엇… 행복의 배신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설레게 했다.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도는 곳곳에서 빛나는 언어로 행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말이 아니라, 행복 자체의 느낌이었다.

나는 사도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고 안도한다.

틀리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는다. 그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복음, 예수 그리스도, 기도, 감사… 바로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평강[샬롬]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한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갈 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당신도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비웃어도, 아직 그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용기를 가지라. 그리고 그 길에 진력(盡力)하라. 곧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넓은 품에 우리를 안아 주시기 위하여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염려 없는 세상에서 우리 만나자!

마라나타, 그리고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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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책

인생/사진이야기 / 2012. 11. 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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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모드에 의해 뒤편에서 일그러진 빛이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식수대의 수도 꼭지 안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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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길. 히까리가오까의 봄이 벚꽃과 함께 온다면 가을은 은행나무와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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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공원관리소에서 저 낙엽을 치운다. 좀 그냥 두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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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동경생활에서 필수이다. 저렇게 어린 아이부터 자전거를 탄다. 물론 안전장비도 잘 갖추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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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와 낙엽, 그리고 길.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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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낙엽. 쓸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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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날씨가 좋으면 여객기가 흔히 보인다. 이건 구도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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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과 여객기. 가로등에 비취는 풍경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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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사진이다. 역광은 피사체를 어둡게 하지만, 그래서 더 강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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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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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달려 있는 잎이 곧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도 구도가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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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잎이 불가사리처럼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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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가을 즐기기. 나도 같이 하고 싶었다. (나이를 어디로 먹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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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산처럼 쌓아 올리는 아이들. 던지는 장면이 생동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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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의 놀이를 다가가서 물끄러미 보는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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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벤치에 앉아서 가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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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목양칼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에 묶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보면 기적이 곧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차근히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지극히 칭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크게 놀라며 감동하신다. 다윗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춤추듯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찾고 찾으셨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어 드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세상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주의는 믿음을 선행(善行)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탁월해도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기적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이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에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어 드릴 때에, 하나님은 행동하셔야만 한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영광의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일이 쉬운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불신의 영이 역사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과학, 철학, 상식이 얼마나 유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만연하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서는 성경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굉장히 어렵다. 믿음이 저절로 숨이 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생활은 지속하되 믿음은 버린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목숨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변한다. 역사가 언제나 그랬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으로 뛰놀아도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을 잠잠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는가? 쉽고 간단한 일은 하나님의 손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하라. 하나님을 시시하게 만들지 말라. 거대한 것을 구하라. 감히 아무도 바랄 수 없는 것을 꿈꾸라. 믿음은 바로 그 꿈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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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드린 사랑

목회/설교 / 2012. 11. 16. 20:08



2012-11-11 주일설교


제목 : 자신을 드린 사랑

요한복음 12:1~8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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