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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30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의 여름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했다. 당시의 교회에서는 열풍처럼 성령체험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경험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령을 경험했다는 그 사실이 뭔가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 후로 학생회의 임원이 되어서 교회 일을 하기 시작했고, 철야 기도회와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나름 열심을 다했다. 점점 교회의 일은 내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될 즈음,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해야 하겠다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나를 혼란에 빠뜨린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와 함께 성령을 경험하고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던 나의 선배들이 고3 입시생이 되면서 거의 교회에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방언으로 2~3시간을 기도하고, 영어성경을 들고 다니며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큐티를 하던 그들이었는데, 막상 입시생이라는 고비에 이르자 모두 독서실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나에게 배반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좀 더 공부에 전념해야 하겠다는 결심과 충돌하며 나를 혼돈에 빠뜨렸다.

그 당시 나는 정말 심각하게 기도했다. 내가 교회에 계속 남아 있더라도 오히려 성적이 오르는 학생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를 떠나갔던 선배들의 배신에 대해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가정의 사건들로 인하여 나는 풍랑에 던져지는 요나와 같았다. 절망과 회의의 밤이 계속되었다.

나는 요즘도 그 즈음의 밤들을 기억한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결정들에 대하여 주먹을 움켜 쥐고 항의하던 고등학생의 나를 기억한다.

교회를 외면했던 선배들은 대학에 합격하여 다시 좋은 크리스천으로 귀환하고, 교회에서 밤을 새우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기들은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재수생 혹은 지방대의 설움을 감수해야 했던 모순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너무 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정말 고리대금을 하는 업자처럼 줄 때와 가져갈 때의 얼굴이 전혀 다른 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이 사십이 되어 그 날의 고민들을 다시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던 선배들의 소식은 가물가물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더 이상 없다. 그들이 결국에는 그리 행복하지 못하게 되어서 내가 선택한 길이 훨씬 옳았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도 이제는 없다.

다만 몇몇 들리는 동기들의 이야기가 나를 철들게 한다. 기도 많이 했던 한 자매는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장애아들을 가르친다. 평생 보람이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 젊은 날의 기도를 밑천 삼아 아직도 그 보람 없는 일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또 한 친구는 복지센터 소장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복지학과는 거의 미달에 관심도 없는 학과였다. 그러나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며 돕는 일을 해보겠다고 복지학과에 들어갔던 그 친구는 지금까지 그 일을 하며 나름 자리를 잡았다.

더 들리는 동기들의 소식에는 회사원도 있고, 목사도 있다. 당시의 기억으로는 절대로 목사가 된 그를 상상도 할 수 없지만, 20년의 세월은 그렇게 많이 사람을 변화시켰는가 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을 하나님께 강요한다. 정답을 우리가 알고 있고 하나님은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고함을 치고 고집을 부려도 하나님은 잠잠 하시다. 그저 묵묵히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 이끄신다. 나는 이 점이 너무 감사하다.

명문대와 행복의 역학관계를 누군가 따져 본다면, 그 둘 사이에 비례도, 반비례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돈과 행복, 명예와 행복에 있어서도 사실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이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학과 직장과 돈과 명예를 주지 않으시는 것이 곧 행복을 주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지 않으시고도 행복하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다.

기도가 거절되는 것처럼 보이고, 자기의 의도대로 인생의 진로가 풀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다만 그분의 선한 뜻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

우리는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분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괜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지 말라. 인생은 모두 각자의 길이 있다. 모두가 부자가 되거나, 모두가 천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우리는 누구라도 행복으로 자기 인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응답이 없는 기도란 없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있고, 매일매일의 삶에서 그 응답은 기적처럼 스며 있다. 다만 우리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할 뿐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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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목양칼럼

 

"우리 인생의 찬장"

 

여자들의 살림 솜씨를 알아보려면 찬장을 열어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씽크대가 그 역할을 대신하겠지만, 예전에는 부엌마다 그릇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찬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시집가는 딸에게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그리고 놋그릇을 혼수로 마련하던 그 시절에, 찬장에는 처음 살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살림이라는 것이 모두 그렇지만, 처음에는 널널하던 찬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좁기 시작한다. 그러면 안주인은 찬장에 담아 보관해야 하는 것과 팔거나 버려야 하는 것들을 구분하게 된다. 그 선택과 결정의 과정이 결국에는 안주인으로서의 살림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가늠자가 되었던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해 보아도, 어머니의 찬장에는 새그릇이 가득했다. 그 그릇 중에는 한 번 꺼내서 사용하지도 못한 것들도 많았다. 고급스러운 크리스탈 유리잔부터, 자기로 된 다기(茶器) 세트, 그리고 아주 비싼 본 차이나 등이 첩첩이 쌓여 어머니의 뿌듯함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유행은 변하고, 그릇은 그 본래의 빛과 품위를 지나 점점 초라하게 된다. 그렇게 빛이 바랠 때까지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찬장에만 그릇을 보관하는 것은 아깝고 슬픈 일이다. 

결국 아까와도 써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이 쌓이기 전에 적절하게 바꾸고 소모해야 한다는 것은 안주인이 '찬장'을 통해 배우는 삶의 원리였을 것이다.

 

성경은 과도하게 모으고 인색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빈궁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씀한다. (잠 11:24)

인색하다는 것 부터가 마음의 문제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빈궁' 또한 결코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굳은 땅에는 빗물도 고이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끼고 아끼면 물질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고, 나름 많은 재산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도한 인색함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많이 모으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는 빈궁한 것이다. 그가 아무리 많은 저축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많은 부동산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을 향해 인색할 때에, 그는 더이상 부자가 아니라 가난뱅이 중에 가난뱅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찬장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물질이 원래부터 정처 없는 것이라, 우리 곁에 있다가도 쉬이 떠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내게 있을 때에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삶을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지혜가 아니겠는가?

 

최근 들어 한국에서는 소중한 분들이 많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그러했고, 노무현 대통령님이 그러했고,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님이 떠나셨다. 그분들의 삶에서 공로와 허물을 논하기 이전에, 참 소중한 교훈 하나를 공통적으로 발견한다. 

그것은 그분들이 참 작은 찬장으로 지혜롭게 살다가 떠나셨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이지만, 그분들이 이루셨던 업적에 비하여 그분들이 가지셨던 찬장은 너무나 작고 소박했다. 그러나 어찌 그분들의 찬장을 작다고만 하겠는가? 그 찬장에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섬겼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가?

사실 인생에 있어 많이 가진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몸으로 태어나고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입는 옷은 결코 삼베의 수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았던 삶을 입는 것이다. 작은 찬장을 소박하게 가지고, 퍼주고 나누며 살았던 분의 선함은 훌륭한 수의가 될 것이지만, 큰 찬장을 자랑하며 모으고 가지려고만 하던 사람의 인색함은 가장 부끄러운 수의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그런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욕심 내지 말자. 아끼다가 버리지 말고, 가장 귀하고 좋을 때에 좀 더 나누자. 내 찬장이 축복의 샘근원이 되게 하여서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섬기자. 예수님처럼 살자. 이것이 말세의 말세를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지혜가 아닐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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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9 10년 후



히까리가오까(光が丘) 공원에서 사흘 동안 마쯔리를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회가 마쯔리에 참가했다. 

제법 장사를 하였지만, 마지막 날에 비가 오는 바람에 소득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모두들 수고가 참 많았기에, 괜찮은 수입으로 조금은 보상을 받고자 했는데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생에 비하여 이익이 적었지만, 그래도 손해를 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다. 만약 비가 왔던 날이 토요일이었다면, 아마 거의 제로섬이 되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손이 많이 가는 행사이기에 다들 피하고 싶어 하였는데, 목사가 고집을 부려서 반은 억지로 시작한 마쯔리였다. 만약 그렇게 참가했던 행사가 이익은 고사하고 손해를 입었다면 아마도 입장이 참 난처했을 것 같다.


교회가 마쯔리에 참가하는 이유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이다.

더러는 당장 교회를 알리고 전도의 기회로 삼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리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억지를 무릎쓰고 강행하면 어느 정도 되기야 하겠지만, 만약 그런 방식으로 돌진한다면 적어도 지역사회의 일본인들과 앞으로의 오랜 동행은 힘들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선교하는 분들은 직접적인 핍박에 직면해 있다. 예배당을 향하여 돌을 던지거나, 법적으로 선교를 금지하고 감시하는 현실이다. 그에 비하여 일본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그 어떤 폭력적인 핍박도 가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이슬람 문화권에 비하여 쉬운 선교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사회적으로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배금(拜金)주의와 함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민족적 특성이 가장 주요하다. 

일본을 알아갈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이, 절대로 한국적 특성을 앞세워 급하게 행동해서는 이곳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칙을 가지고 끈기 있게 행동하는 방식만이 일본에서 여러 가지 장애들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한다.

마쯔리는 그런 고민 속에서 씨뿌리는 텃밭이다. 4~5년 쯤이 넘어가면, 아마도 마쯔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상인들에게 <동경드림교회>에 대한 인식이 나름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 즈음에 교회가 지금보다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지금은 하나만 빌리는 텐트를 3~4개 임대할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 음식을 제대로 갖추어서 마쯔리에 온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을 이용하여 다양한 볼거리의 공연들을 기획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끈다면 분명히 지역사회의 명물이 될 것이라고 본다.

히까리가오까 마쯔리는 사흘 동안 10만명의 인파를 예상한다고 한다. 만약 지금의 구석에서 시작한 우리가 마쯔리에 중심에 설 수만 있다면, 바로 그 10만명에게 은연 중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역사회에서 든든한 평판을 얻는 교회로 세워지는 것에도 많은 도움을 입을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결코 세상을 닮아가서는 안 되며, 오직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이 말은 세상이 복음을 핍박하고 거절하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반드시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유효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쯔리 내내 좁은 천막 안에 서서 "이랏사이마세!"를 외쳤다. 평생 처음으로 장사꾼 노릇을 한 것이다. 찬양과 기도, 설교하는 것 이외에는 아끼고 사용하지 않던 목소리를 높여 손님들을 불렀다. 

그러나 내가 팔고 싶은 것은 음식이 아니다. 더불어 내가 벌고 싶은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복음을 팔고 영혼을 얻고 싶다. 다만 그 기회를 얻기 위하여 지금 판을 짜고 있는 것 뿐이다. 10년 후가 되어보라. 분명히 동경드림교회는 지역의 명물이 될 것이다. 지역 신문에도 나오고, 지역 방송에서도 찾아오는 '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세상 속의 교회'라는 건강한 정체성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가야할 길이 멀다. 세상이 우리를 주목할 때에, 우리가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맘껏 보여줄 수 있도록, 그래서 보는 사람 스스로 감동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꿈이 있기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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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2 내 인생의 나비(네비게이션)



수련회 답사를 가던 날, 최동현 집사님네 차의 네비게이션이 고장났다.

얼마 전에 자동차 메이커에서 최종점검을 해준다고 해서 받았는데, 아마도 그 점검 중에 실수로 네비게이션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문명의 기계가 다 그렇지만, 사용할 때에는 몹시 편리하다가도 막상 그것이 고장나면 사람을 막막하게 만든다. 

그 날 나는 렌트카를 빌렸기에 할 수 없이 네비게이션이 있는 내가 앞장을 섰다.

아마도 일본에 와서 최동현 집사님과 동행하며 내가 앞장을 서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위성 수신장치에 이상이 생겼단다. 덕분에 자동차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리를 나까무라바시(中村橋) 어딘가쯤으로 표시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도상에 표시하는 자기의 위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드라이브를 한다는 것은 뭔가 어색할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해주었던 금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은 건강한 삶에 있어 필수적인 지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철없는 짓을 하고 뒤늦게 후회하곤 하는 것이다.

최집사님네 '나비'(일본에서는 네비게이션을 줄여서 '나비'라 부른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태어나고 살아왔다면, 반드시 걸어야 하는 내 몫의 길이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 길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소프트웨어로 탑재된 지도 데이타는 하나도 이상이 없었다. 그것은 일본 어디를 가든지 훌륭하게 골목골목까지 인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위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기위치의 정보'만이 없었다. 그러자 그 많고 세세한 정보들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아무 것도 제대로 안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대학까지 공부하고 나름의 식견과 경험을 쌓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나름 생각을 하고, 인생을 전망한다. 그러한 전망들은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전망들을 제대로 확신할 수 없다.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지금 얼만큼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확신할 무언가가 부족하다.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알아야 하겠지만, 정작 나를 제대로 아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인도함이 없이, 우리는 인생에서 고장난 '나비'를 가진 차에 불과하다. 매 순간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을 참으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가? 

우리는 간혹 누가 돈을 벌었다거나, 누가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 길을 배워볼 수 없을까 해서 기웃거린다. 그러나 인생은 각각이고, 그 사람의 길이 내 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독특하다. 각자가 고유한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의 비법을 그 누구로부터도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그런 비법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없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불안할까? 

보험도 없고, 연금도 없고, 노후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준비도 없는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의 걸음은 정녕 미련한 그것이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주님으로부터 수신되는 '나비'가 있다.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을 해야할지, 우회전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그 자상한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신뢰를 준다. 그분은 굳이 30킬로미터 앞의 사거리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거리도 목전에 다가서면 그분이 알아서 다시 길을 인도해줄 것을 알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도 좋은 '나비'가 있는가? 물론 먼 미래의 비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애써 숨겨두신 선물을 서둘러 알아내려고 가슴을 졸여서는 안 된다.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 그 모든 것은 어차피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 기독교인에게 미래는 그런 것이다.

다만, 듣는 능력이 참 중요하다. 수신이 잘 되야 한다. 나 혼자 어림 짐작으로 추측하며 길을 갈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내 안에 들려야 한다.

사실 인생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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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6 이런 양식을 가졌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의 말미에는 그런 기도가 들어 있다. 이 기도는 소박하지만 우리의 본성과는 잘 맞지 않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루살이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되도록 넉넉한 삶을 원하는데, 그것은 평생을 먹을 수 있는 양식이며, 심지어 아들과 손자들에게 남겨줄 무언가를 포함하는 양식이다. 그렇게 배가 큰 우리들의 입으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을 날마다 암송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생에서 몇 번인가 삶의 궁핍이 절박하게 다가온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참 힘들게 살았지만, 또한 참 소중한 무언가를 배우고 얻었던 시절이 아닌가 한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조금은 담대하고,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좀 더 멀리 보고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이미 내게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가난은 고독을 동반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식구에게도 짐이 되게 만든다. 결국 신뢰했던 인간관계가 다 깨지고, 골방에 틀어박혀 인생이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런 날에, 우리는 사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독하기 때문에 절망한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아무도 나 같은 존재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느낌은 정말 끔찍하다.

그런 날에 우리는 밥을 먹지 못한다. 그것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밥을 먹을 의지조차 무너지기 때문이다. 육신은 쇠약하고, 점점 더 추운 그늘은 깊어간다.

그래서 밥은 희망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 소박한 자리만이라도 지켜진다면, 우리는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


언제인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내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이,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내 눈에 항상 '일용할' 이라는 말로 제한된 '양식'만이 보였었는데, 이 두 단어의 이전에 숨겨진 은총으로 주님은 '우리'를 말씀하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비록 하루의 양식만 허락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라면 희망은 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보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 때에 더 용감하다. 이기심은 항상 자신이 상처받을까 소심하게 만들지만, 이타심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어 던지고 불사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모가 왜 절망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이다. 내가 죽더라도 이 아이들만은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부모들을 강하게 한다. 

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성도도 그러하다. 우리가 만약 기대 이상으로 용기를 가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이다. 그 관계와 사랑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장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돈이란 부질 없더라. 모을 때는 수 십년이 걸리던 재산도 날아갈 때에는 순식간이더라.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우리는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게 된다. 내가 더이상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에, 아니 오히려 부담을 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 그 때에도 내 곁에 함께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루 먹을 양식 뿐이라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함께 할 '우리'가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이다. 그의 양식은 나만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양식 가운데 하나님은 역사 하시고, 우리를 소망으로 이끄신다.

당신의 삶에는 진정 이런 양식이 있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먹어도 모자른 양식이 있고,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양식이 있다. 이런 양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다. 그는 부자라도 가난하고, 주변에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사실은 외롭기 때문이다. 

진정한 축복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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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누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믿음이 있고 없음의 차이도 있고, 믿음이 적고 많음의 차이도 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없는 상태 즉 불신(不信) 혹은 무신(無信)의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기의 믿음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로부터는 믿음 생활에 대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문제는 믿음이 적은 사람과 많은 사람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누가 많고 적은지에 대하여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 믿음의 진가를 판별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 두 사람의 믿음이 각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분명히 믿음이 클 것이고,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믿음이 작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림길을 만난다. 믿음이 적은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의 결정을 좇을 때에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을 확장하고 성숙되게 한다. 반대로 믿음이 큰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작은 사람을 좇으면 서로의 믿음은 위축되고, 성장이 방해된다.

성경은 전자와 후자를 보여주는 많은 예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날 때에 롯은 아브라함을 따랐다. 두 사람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공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롯을 따른 것이 아니라, 롯이 아브라함을 따랐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도 마찬가지이다. 룻이 좇은 것은 하나님 이전에 나오미였다. 그러나 나오미가 좋은 믿음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룻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되었다.

반대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예를 보자. 두 부부가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삽비라는 남편인 아나니아가 교회를 속이고 인색한 마음을 먹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방문했던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11~13에 따르면, 이 당시 부적절한 베드로의 행동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신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였던 바나바까지 흔들리게 했다. 바울은 베드로를 존경했지만, 믿음에 대해서 만큼은 타협하지 않았고, 그런 바울의 결단이 안디옥교회를 지켰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믿음의 크고 작음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 믿음이 좋게 말하고 행동하던 사람도 갑자기 위축되고 약해질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항상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충돌할 때에, 그 중에서 무엇이 더 믿음에 의한 것인지를 안다. 다만 믿음의 결정이란 항상 육신적으로 손해처럼 보이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힘들고, 타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타협이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친다. 나만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상대가 되는 그 사람까지 함께 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타협들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흐리고, 우리를 점점 타성적인 신자로 만들어간다.

믿음에서 자라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타협하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 나 스스로에 대한 타협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의 타협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좇아야 할 때와 내가 이끌어야 할 때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관계 속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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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힘이 없고, 금새 타성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 세상에 변화를 불러 오고, 우리의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믿음은 경험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저녁마다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바로 그 옛 길을 걸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조차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믿음을 생각하지만, 전혀 믿음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로 믿음에 대하여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찬양은 자신의 기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되며, 성경의 문자들은 너무 옛스러워 골동품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저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찬양은 영혼에서 울려나는 환희의 울림이 되고, 기도는 우리의 내면을 정직하게 쏟아내며, 말씀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누고 부서지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인 것들을 부둥켜 안고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고 살아갑니까?

왜 목사가 건물에 그리 안달하고, 왜 교인들이 그토록 돈을 사모합니까? 왜 청년들은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왜 교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고 경험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그런 누추한 겉옷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그거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슬프고 애통할 일입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하면 반드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눈을 감고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의 내면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무언가를 사모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십시오. 예배마다, 기도마다, 찬양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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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예수님은 행복하셨다!



문명은 삶을 편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핸드폰을 바꾸었습니다. '옴니아'라는 삼성의 새 기종은 이전에 사용했던 핸드폰에 비하여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디지탈 카메라를 대신할 만한 카메라 화질과 음악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음질, 그리고 급할 때 필기와 녹음을 병행하여 저장할 수 있는 점, 또 싱크 프로그램을 통해 컴퓨터의 아웃룩과 데이터 싱크를 할 수 있는 점이 편리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시판된 옴니아는 아예 OS 프로그램을 탑재하여 사용자가 자기 마음대로 세팅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의 제 기종에도 핸드폰을 통해 사용할 만한 주요 기능들이 거의 갖추어져 있어 지금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가방에 들고 다니던 디지탈 카메라와 MP3가 더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첩과 다이어리도 사실 거의 사용이 되지 않는데, 아직은 미련이 남아 가지고 다닙니다. 가끔은 밧데리 방전으로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도 펜과 수첩은 오래 지참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핸드폰의 사용 이후로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즘은 특히나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녹음'이나 '사진'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곧 머리를 비우게 됩니다. 심지어 만나는 사람의 이름까지도 핸드폰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기억을 못하는 맹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인은 너무 많은 정보에 머리가 아픕니다. 되도록 머리를 비우고, 쉬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우다가 정작, 정말 소중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까지 비워서 아무 생각이 없는 '공백'의 머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일은 그런 것에 의지하더라도 정말 꼭 필요한 것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새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행복이란 좀 불편하더라도 복고적인 방법을 통해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온 이후로 전자책을 많이 읽는데, 요즘은 종이책의 그 냄새가 그립습니다. 가끔은 옛날에 끼워두고 잊었던 지폐를 찾아내거나, 혹은 잘 말라서 살아 있는듯 보관된 들꽃 한 송이를 책 사이에서 발견하는 기쁨도 그립습니다. 

<자전거 여행>의 작가인 김훈 씨가 그러더군요. 자동차는 출발점과 도착점만 존재하지만, 자전거는 그 과정이 다 존재한다고요.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으면 길이 내 안으로 서서히 밀려 온다고요. 그래서 자동차로 갔던 길과 자전거로 갔던 길은 많이 다른가 봅니다.

너무 빨리, 너무 편리하게 살다가 삶을 음미하는 법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의 행복이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꼭 편리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조금 불편함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큰 텔레비전을 켜두고 식사하는 집보다 텔레비전을 잠시 끄고 오손도손 대화하며 식사하는 가정이 더욱 행복합니다. 핸드폰에 무슨 기능이 담겼느냐 보다, 그 핸드폰으로 누구와 통화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의자에 앉아 있느냐 보다는 어디에 누구와 앉아 있느냐가 진정한 쉼을 줍니다. 

좀 즐기며 삽시다! 세상이 말하는 더 많은 돈으로의 즐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근본적인 것을 볼 수 있다면,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유를 가지십시오.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고 행복하십시오. 

제가 믿는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거닐던 그분의 해맑은 미소와 웃음이 눈에 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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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큰 그릇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2003년의 3월2일 목회를 시작하며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먼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각오의 중심에는 과연 내가 실현하려고 하는 목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벌써 훌쩍 만 6년 전의 일이다.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을 했고, 자기 목표를 설정했다. 6년을 목회에 전념하고 안식년이 되는 7년에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나서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 때에는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되어 있을 것을 상정하고, 작더라도 성경적인 비전에 헌신하는 교회로서의 정체감을 찾아가겠다고 포부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3년만에 개척했던 교회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 결정은 무모해 보이리 만큼 막연했다. 나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신앙의 후원자가 되시는 어머니조차 "꼭 일본에 가야만 했느냐?"는 질문을 지금도 하신다. 한국에서의 개척이 힘들었다거나, 목회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생기 넘치는 30대의 젊은 목사였고, 주변에 후원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 동역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에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일본을 향했다. 그리고 어느덧 이곳에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참 힘겨운 세월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목회적 목표들을 대부분 수정해야 했다. 성경적 원칙이야 어디인들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주어진 현실은 많이 달랐다. 양들의 상태와 성향, 신앙경력, 경험, 추구하는 바와 이해할 수 있는 수준들이 많이 달랐다. 그들은 장년이면서도 청년이었고, 청년이면서도 노인들이었다.

일본에서의 3년 동안 가장 많은 훈련을 쌓은 것은 역시 나 자신인 것 같다. 

몽골에서 섬기는 이용규 선교사가 <내려놓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영적 광야인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배울 수 밖에 없는 영성은 비움과 내려놓음이다.

가난하더라도 목사로의 자존심과 명예만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선교지에서 목사는 별반 의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명(無名)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했다. 교회를 섬기고, 교우들을 섬기는 것에 그저 하나의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 섬김의 과정은 처음에는 고달프고, 속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하는 동안 점점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성경의 새로운 일면들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은혜가 마음에 채워지면서, 요즘은 여전히 낮아지지 못하는 나의 다른 일면들에 대하여 고민한다. 비우고 또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마지막 욕심, 겉으로는 신앙을 말하지만 정작 안으로는 여전히 주님과 다른 길을 욕심 내는 나의 다른 심장에 대하여 돌칼을 든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大器晩成)' 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시야가 좁다. 가능성은 무시되고, 현실만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 미래를 잉태하고 그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어찌 인류가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을까! 

정말 좋은 것은 쉽게 얻는 법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귀하고 좋은 것을 얻는 인생을 꿈꾼다. 대박의 꿈은 잠시 즐거운 상상의 꺼리가 될 수는 있지만, 인생의 기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사람은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결국에는 빈 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아내를 보면 면목이 없다. 교회 지체들을 향해서도 비슷한 마음이다. 목사만 이곳에 오면 금새 교회는 회복되고, 신앙생활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 지루한 싸움에서 지쳐가는 표정이 역력하다. 교회의 건강한 목적도 좋고 비전도 좋은데, 당장 현실도 좀 챙기고 변했으면 좋겠다는 바램,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생각들이 얼핏 스친다.

하지만 아직은 이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의 목회를 좀 더 계속해야겠다. 이 고생이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벽돌을 쌓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충분히 숙성되어 단단하게 굳기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100년을 버티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걱정이 많은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줄로 알아라.

다시 말한다. 교회는 돈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와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변할 생각이 없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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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가장 큰 사람



꿈은 광야에서 자란다. 거칠은 광야는 인재(人材)의 산실(産室)이다.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불편과 결핍이 있는 광야로부터 인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를 검증하고 세상을 생각하며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들 무언가를 궁리한다. 

그 궁리(窮理)함의 무수한 밤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의 세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세례요한은 무수한 결핍을 안고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에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원래 그의 생업은 부모를 좇아 당연히 제사장의 직무를 잇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모를 설득하셨고, 하나뿐인 아들을  빈 들로 보내도록 하셨다.

성경은 여기까지만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하여 언급한다. 빈 들에서 자란 요한에게 딱히 부모로서 해줄 것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그 사명을 다하고 노쇠한 생을 마감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아이는 제도권의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엣세네파 라는 소수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광야에 그들의 거처를 만들고 평생을 성경을 필사하며 메시야를 고대하며 살았다. 아마도 빈 들에서 세례요한이 만나고 함께 했을 사람들은 이 칙칙한 수도사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 3:4)


요한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다.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의식주로 대변된다. 그런데 특별히 요한의 옷과 음식은 그가 살아왔던 척박한 삶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안락한 품을 잃었고, 정규교육과 안정된 생업을 잃었고, 연애와 친구와 입을 설레게 하는 맛 있는 음식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애절하게 하나를 붙들었다. 그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구하는 참 신앙이요, 그가 광야로부터 들었을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기다림이었다. 그 한 가지에 그의 삶이 집중되었을 때에, 이 모든 삶의 결핍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남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심령이 강해졌고, 드디어 그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헤롯의 반칙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학교에서 바른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바른 것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타협한다. 우리는 물러서고,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은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극히 불편하고 척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으로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일생과 설교에는 숨기지 않는 정직함과 알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성실함과 참된 신앙의 매력들이 가득 차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예수님도 그를 아름답다고 하셨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사람으로서 최정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역과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 사역으로 명성을 얻으셨을 때에, 더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녀의 인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기독교 강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에 물들었는지, 설교하며 축복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이 '성공'인지, '순교'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곤 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블루(우울함)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기쁨과 만족, 행복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거나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부터의 열매이지, 결코 그저 예배당 안에 들어온 자의 형통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는 광야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탄압과 심각한 가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교회를 세워 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막절을 잊었다. 우리는 그 고난의 과정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광야로 보내기를 주저했다. 

아버지 목사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상속하고, 성도들은 세금을 탈세하며 십일조를 드렸다. 말은 신앙적이지만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현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으로부터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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