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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르치노 /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왕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성령의 감동이 일시적일 때에, 그것은 전혀 신앙의 성숙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삼상 10:12) 사울 왕이 한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 차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만함을 순종과 경건으로 지속하지 못했고, 결국 과거의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는, '나도 한 때는 그랬었지'라는 추억의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경이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심지어 그는 악신(惡神)이 들려 고뇌하며 정상을 벗어나는 반미치광이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제 정신이었을 때는 너무나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신실한 것 같았던 그는, 악신의 충동과 지배 하에서는 폭력적이고, 비열하며, 교만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본문을 가지고, 귀신론에 입각하여 귀신의 성품을 논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본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5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악한 세대'의 결론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기서 세대는 곧 '사람'입니다.


밥을 하다 실패하면 삼층밥이 됩니다. 밑에는 타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익거나 생쌀이 그대로 있는 것이 삼층밥입니다. 쌀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것은, 먹자니 탈이 나고 버리자니 아까운 '무엇'입니다. 소위 계륵(鷄肋)이라고나 할까요...


신앙도 삼층밥 신자, 혹은 계륵신자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그는 믿었으나 믿다가 말았습니다. 성령을 경험했지만, 악신도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죄를 멀리하며, 신랑을 위해 준비하는 신부처럼 살아야 할 신자가 악한 충동에 넘어져서 자기의 포악한 성질을 내지르고 욕망을 좇았을 때에, 악한 사탄은 그 기회를 틈타 그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릇된 신앙생활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가책은 있으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날들이 더 오래 지속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양심마저 굳어져서 그 '가책'마저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산헤드린 회의이고, 대제사장이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외양 속에 가장 추악한 죄가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거장이 아니라 집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보헤사(위로자, 돕는 분)'을 보내신 것은, 사울 왕처럼 잠시 신비로운 경험을 가지게 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중심은 역시, 방언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아니고, 경건의 지식도 아니고, 오랜 경륜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은 냉혹하게도 '현실'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르는 신앙인이 너무 많습니다. 큰일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활어(活魚)처럼 퍼득거리면서, 심지어 자신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까지 합니다.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은 예수님의 말씀 쯤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화내는 것은 '정의'이며, 당연한 것이며,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런 신자의 모습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호와 축복을 빨아 먹으려는 '진딧물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기생(寄生)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항상 하나님이 불편하고,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병든 신앙에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분노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시키십시오. 사랑을 좇아 행하고, 자기를 돌아보아 겸손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가난한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신앙은 자기에 대한 연민과 갈망이 없어지면 쉽게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른 신자는 건강한 신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자기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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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9 :: 목양칼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복음서가 예수님의 일생을 다 기록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복음서는 철저하게 변증적인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유’가 숨어있고 그 이유에 대한 설명과 변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바르게 해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의 복음서에는 공통적인 핵심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다. 대체적으로 복음서의 분량에서 절반 정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마치, 예수님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처럼 사셨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니라, 준비하고 성취해야 하는 고귀한 사명으로 이해 되었다. 이런 ‘복음’을 기록하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고귀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결코 죽음을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늘 우리에게는,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아울러 죽음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 것 같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그 마지막 처리(?)조차 깔끔해진 요즘에는 좀처럼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먼 미래의 일, 자기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손님처럼 막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은 반드시 잘 죽는 것으로 완성되어야 하고, 죽음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일이 먼 미래의 일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오늘을 제대로 사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 너머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하루는 그냥 또 하루가 아니라, 내 인생을 완성해가는 벽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나중에는 마지막 한 장이 아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아낄 수 있다면 아껴 사용하라.


오늘이 마지막 주일이다. 2013년이 추억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 마지막을 예배와 함께 말씀 속에서 마무리 짓고 있다면 좋은 마무리이다. 수고 많으셨다. 그리고 함께 걸어와서 기쁘고 감사했다. 

하지만 일년의 끝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끝도 묵상해야 한다. 언젠가는 우리 인생 자체에서 유종지미(有終之美)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에도 여전히 신앙 안에서, 말씀 안에서 굳건히 서 있는 여러분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그럴 자신이 없다면 부디 다시 시작하시라... 

새로 맞이하는 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꼭 의미 있는 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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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목양칼럼 :: 사랑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으니 너희도 서로 이렇게 사랑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 없는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배반과 멸시와 조롱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실망을 줍니다. 배반을 합니다. 사랑한 것에 대하여 가장 보람이 없는 대상이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꽃도 나무도 서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결과가 있고, 동물도 수 년을 키우면 반드시 주인을 아는데, 사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좋은 것으로 주고 못된 것으로 거두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속담에 ‘머리털 검은 짐승은 키울 것이 못 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하면서도 주고, 배반 당하면서도 사랑하고, 보람이 없음에도 섬기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때에,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사랑해주는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못합니까? 진실하고, 매너 좋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서는 상(賞)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사랑이 원수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약속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그것은 특별한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가까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탄절이 목전에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회개부터 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사랑 없음을 회개합시다. 당연한 사랑만 하고, 특별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우고도, 우리에게 사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고집 부리고 외면하며 내 계산과 생각으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사랑합시다. 내 감정과 의지가 부족할 때는 기도 하면서 사랑합시다. 보통 기도로 버거우면, 금식 하면서라도 사랑합시다. 나를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서 사랑합시다. 

사랑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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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 목양칼럼 


성탄을 통하여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것은, 동방박사나 목자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가, 따뜻한 여관방에 앉아 가난한 나그네와 임산부를 말구유간으로 보낸 무정한 사람들이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남의 아픔은 늘 관념의 무엇이 되기 쉽습니다. 생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과 내가 가진 기득권을 버려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생각만으로 스스로 선량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가지셨다”고 묘사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은 모든 영광을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얼만큼 남기고 타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무력하고 작은 ‘아기’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성탄절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모든 약함을 대신 지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구주가 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과 삶을 본받아 우리의 인생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왜 오셨고, 어떻게 오셨고, 무엇으로 사셨는지 알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야흐로 시대는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센 바람 앞에 촛불처럼, 그리스도인의 희생적인 삶은 점점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비웃음을 사기까지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셔도 역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며 다시 또 십자가에 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유태인 제사장이 아니라 교회 목사들의 손에 의하여 그리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시대만 탓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신앙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성탄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내 삶에 실천할 것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다 내려놓고 오신 아기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보배합을 열어 경배하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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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 목양칼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고, 거두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실제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곧 성탄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습니다.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캐롤을 듣고 카드를 사고 선물을 준비하는 일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탄절이 루돌프와 산타 클로스에게 점령 당했다고 분개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탄절을 예수님께 다시 찾아 드려야 한다며, 모든 루돌프와 산타의 장식을 버리고 말구유간의 아기를 기념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림이 바뀌고 장식이 달라졌을 뿐이지, 과연 우리들의 성탄절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성탄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는 절기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둘째, 인간에게 오셨으니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은 막힌 관계를 열고, 내가 먼저 낮아져서 상대방을 섬기는 평화가 이루어져야 할 절기입니다. 나뿐 아니라 바로 ‘저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으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고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현실을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뜻을 순종할 때에, 바로 그 자리가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진정한 성탄절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의 문제는 노래 가사나 장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내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은혜로운 성탄절을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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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목양칼럼 :: 


마침내 오고야 말았습니다.

2013년의 마지막 달력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우리 인생의 역사로 흘러갈 것입니다. 먼 훗날에 이 시간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그리워도 하겠지요. 적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분명히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이 시간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남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건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한 시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회한이 복잡하게 엇갈립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은 필요합니다. 삶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아픔이 없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어떻게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라는 황금을 땅에 묻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산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를 먹어가며, 자식을 보며, 흰 머리가 생기며,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가고 있습니까? 남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식에게 잘 살라고 말하기 전에, 과연 당신의 인생은 안전합니까? 행복합니까?

12월은 일년의 끝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끝을 연습하기에 좋은 한 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을까? 이렇게 지나가도 좋은 것인가? 곰곰이, 달리는 차창에 기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해에서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정말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부수적인 조건들과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십시오. 내가 과연 믿는지? 믿는 대로 생각하고 사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서 자유롭다면 그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문제를 발견한다면, 그는 지금 이 시기를 잘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달력도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음에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믿음 앞에서 정리해 보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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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4 목양칼럼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간단하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일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 수가 없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 묶인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때까지 늘 비판과 불평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만 옳고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너무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친구가 아니라 그의 친구일 뿐입니다. 그가 포용력이 있고 친화력이 깊어 나와 친구가 된 것이지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묶인 사람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항상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제일 중요한 역량은 ‘공감’입니다. 

공감이 있어야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 되어야 비로소 사귀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란, 상대방의 기분과 느낌, 더 나아가서는 그 가치관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텔레파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관찰이 근간이 되고, 그 위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동안, 상대방의 눈빛을 살피고 그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는 눈치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배려심도 없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실례가 되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대범한 것이 아니라 사려 깊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들이 지나친 고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들을 다 불편하게 해놓고 자기 뱃속만 편한 ‘아이’가 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적당한 선을 배워가게 되고, 그 배움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사귀는 자기만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을 조심해서 다루십시오. 자기가 괜찮다고 그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언제나 되도록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노력 만큼 바로 여러분의 능력이 자라날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복된 이유입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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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7 목양칼럼


튜닝이 유행이다. 이는 본래 기계에서 최선의 성능을 끌어내기 위한 조작을 뜻한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작의 중심은 성능에서 기호로 바뀌었다. 이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맘에 드는 것으로, 평범한 것에서 독특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튜닝이라 부르게 되었다.

핸드폰을 생각해 보자.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드폰을 구입하면 보호필름과 커버를 산다. 몇 년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다. 물론 핸드폰이 스마트해지면서 고가의 물건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더 애지중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고가이기 때문에 왠만한 악세사리는 패키지로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제품 자체가 다른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왜 핸드폰 회사는 처음부터 커버와 보호필름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로 제품을 만들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핸드폰의 악세사리 회사들은 영세한 업체들이다. 물론 창의적인 능력이 돈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 핸드폰을 생산하는 애플이나, 삼성에 훨씬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본래의 디자인을 다른 것으로 덮어 씌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튜닝일까?

요즘은 사람도 튜닝의 대상이 되었다. 눈과 코는 예사가 되었고, 이제는 턱관절을 조각하기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에 병자가 되거나 심지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를 튜닝하고 싶은 열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열망이 드디어 자기 몸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앞에 했던 질문을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창조주가 만드신 디자인을 우리 손으로 고치는 일이 과연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 과연 본래의 디자인보다 더 훌륭해지는 튜닝은 가능한가? 가장 자기다운 디자인은 결국 이미 만들어진 자기의 모습의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은 외모를 튜닝하지 말고 내면의 튜닝에 분발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사람은 다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달란트)를 가지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따라서 사람의 존재가 변화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면의 변화가 외모까지 변하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에 제일 민감한 것이 눈빛이고, 인격적 변화는 표정과 태도를 확실히 바꾼다. 그리고 그런 미묘한 변화에 의하여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다. 몇 년의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사람의 얼굴에서 천사와 악마를 보고서 그림을 그렸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험처럼 말이다.

가장 자기다운 디자인은 이미 자기 안에 있다. 그것을 누리며 살 것인지, 아니면 흔들리는 '기호'에 맞추어 함부로 손을 댈 것인지는 자기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인생에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핸드폰 커버와 필름은 떼고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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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목양칼럼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제가 사는 히까리가오까에는 은행나무가 많습니다.

이제 제법 노랗게 물든 나무가 나란히 줄을 서서 무수히 많은 잎사귀를 떨구는 모습은 매해 볼 때마다 감격을 자아냅니다. 그 감격은 예뻐서도 나오지만, 가여운 마음에서도 나옵니다. 모진 겨울을 목전에 두고서, 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잎사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더러는 아직도 푸른데, 더러는 아직도 생생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라는 본체를 지키기 위하여 이 녀석들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지켜본 적이 있던가요? 우리들은 이렇게 아프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용히 숨죽여 본 적이 있던가요?



저 자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늘 말이 많았고, 내가 떨어지지 않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설득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래도 떨어지는 날에는 눈을 흘기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나는 거름이 아니라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마땅히 이 세상에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주연은 무엇이고 조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착각으로 높은 탑을 쌓으며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만, 정작 인생은 떨어지는 낙엽 앞에서 겸손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부끄러운 것은 죽는 일이 아니라 사는 일입니다. 자기 답게 살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며,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 삶은 구차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게 해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때를 알고 바르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맘때면, 아이들은 낙옆 위에 뒹굴고 낙엽을 모아 파아란 하늘에 던지며 자지러지는 웃음을 뿜어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낙엽이 하나도 슬프지 않습니다. 낙엽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돌아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본래의 자리로, 아이들의 추억 속으로, 나의 사색 곁으로.



희생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 역할을 다하고 본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웃음이 남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니, 무명하다고 고개를 떨구지 마십시다. 나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들이 그래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면, 정녕 누가 헛된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겠지요. 그 때까진 그저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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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3 추수감사절 주일오전예배

동경드림교회 (http://TokyoDream.ORG)


제목 :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본문 : 시편 136편23~26절


(136:2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4)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5)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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