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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이제 다시 시작이다



목사의 하는 일이 꿈을 꾸는 것이다. 그 꿈을 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시고 이루게 하신다. 처음 꿈을 말할 때에는 정말 꿈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하고 기도하면 점점 꿈은 소망이 되고, 현실이 되어간다.

야이로 기도회를 하면서 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지혜가 건강한 소녀로 자라가는 꿈이며, 동시에 동경드림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가는 꿈이다.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강해지고 건강해지는 꿈, 주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여물어가는 꿈이다.

내년에는 주일학교를 시작할 것이다. 지혜가 그 주일학교에서 자랄 것이다. 누가 동경드림교회 첫 번째 선생님이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 분은 아마 한 10년쯤은 해주면 좋겠다. 명예로운 근속으로 동경드림교회의 주일학교를 동경에서 제일 훌륭한 주일학교로 만들면 좋겠다. 꿈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꿈을 아이들의 가슴에 심는 교회가 되면 참 좋겠다!

내년에는 강단에 집사님들을 세울 생각이다. 사도행전을 읽으며,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님들은 모두 훌륭한 설교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동적으로 목사의 설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증거하는 진짜 집사를 세우고 싶다.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그래서 목사가 있지 않는가! 지난 20년을 신학에 게으르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아직도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성경에 대하여는 남부끄럽지 않게 연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부축하며 집사님들을 세우는 일은 그리 과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신나고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동경드림교회의 집사는 보통 말하는 그런 집사가 아니라, 정말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집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집사님들에게 계속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이루고 성취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꿈은 도전의 원인이 되고, 도전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와는 다르다. 실패는 거듭될수록 꿈을 작아지게 만들지만, 시행착오는 거듭될수록 꿈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동경드림교회가 이미 3년의 시간을 사용했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위해 헌신할 마음을 준비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고, 우리가 사역할 바로 이 자리의 정서를 습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지만 잘 이기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얻었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유한 색깔이다.

말하자면, 성공하는 교회의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서의 교회가 가져야 하는 철학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동경드림교회에 와서 분위기가 가족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위기 이상을 원했다. 우리는 분위기만 가족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가족인 교회를 원했다.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어도 끝까지 함께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사랑을 원했다.

각자 개성은 다르고, 신앙의 차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험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우리’의 공동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고,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자기를 낮추어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색깔과 의미를 찾아내는 교회를 원했다.

마음 아픈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힘겨운 신앙적 싸움도 있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섬겨 믿고, 카인의 길이 아니라 아벨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지금 우리가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워져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교성이 좋고 서로 호감을 가질 정도로 유사한 기질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동경드림교회는 오직 하나의 신앙적 색깔로 인하여 하나가 되어 왔다. 그 하나의 신앙적 노선을 목사로서 일관성 있게 나름 잘 가꾸어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우리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적 신앙 안에서 건강한 자극을 주었고, 교회에 대한 선한 이미지를 심었으며, 각자의 비전과 소명을 위해 기도했고, 사람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 왔다. 손해를 감수했고, 억울함을 참았으며, 신앙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그런 교회를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교회에 대한 염증과 싸우며, 의미 없는 공허함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동경드림교회는 참 소중한 교회이다.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그렇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오늘 아침, 마음은 비장한 각오와 꿈으로 다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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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9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쏘 혹은 무소는 코뿔소(犀:서)를 의미한다. 야생의 소가 대부분 군집 생활을 하는 것에 비하여 코뿔소는 혼자서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그 뿔은 ‘고독’과 ‘굳셈’을 의미한다. 

이 강력한 상징을 통하여, 부처는 구도자의 길이 어떠함을 제자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부처의 말이라고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가 확신하는 바에 의지하여 진리만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은 고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타인의 견해와 주변적인 영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굳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고린도후서 3:12~15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말세의 시대적 특징으로 속고 속이는 혼돈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서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확신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독교 믿음의 근간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려서부터 가까이 했던 바로 그 성경에 근거하여 확신하는 바에 든든하게 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악하고 혼돈스러운 세상 가운데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다.

확신을 잃어버린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귀가 얇다.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과학의 이론들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거듭되는 현실에서, 오히려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적과 같다. 

그런 세상에서 목회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더구나 일본에서의 사역은 더욱 고립감을 크게 한다. 정말 손에 남은 것은 성경책 하나뿐인 느낌이다.

강해져야 한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도 더욱 단단해지지 않으면 나는 나의 사명을 성취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살아남아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절박감이 나를 재촉하고 있다. 

강한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은 더 많이 연단되어야 할 무른 쇠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마음으로 다시 무장하고 있다. 

광야에서 자란 세례요한처럼, 이 고독은 결국 나를 강하게 할 것이다. 그것을 믿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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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2 진정 응답을 기대하는가?



<투명인간>으로 유명한 작가, H.G. 웰스의 단편소설 중에 <어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다.

어느 성당에 기도를 잘 한다는 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젊은 날에 사제로 성당에 부임한 이후로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만큼의 기도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결코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음식을 먹고 체해서 자리에 누웠을 때에는, 사람들이 오늘이야말로 이 기록이 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 아픈 몸을 이끌고 기도의 자리에 나타난 대주교를 보면서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 대주교의 30년 기록은 아무도 깨지 못할,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사람들은 대주교를 존경하며, 부러워하고, 칭찬했다.

또한 대주교의 기도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가 두 손을 들고, 애절한 목소리로 기도할 때에 듣는 사람들은 감동했고, 그 깊이에 놀랐다. 대주교의 기도하는 모습은 마치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의 그것과 같았다. 그런 기도를 구경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대주교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것도 기도 시간에 죽었다.

그날도 거룩한 복장을 하고 예배당의 기도자리에서 “오, 거룩하신 하나님!”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오냐, 왜 그러느냐?”라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던 것이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놀라서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험문제 중에서 서로 상관 있는 것끼리 줄로 이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문제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이 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아주 쉽게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을 찾는다. 그냥 따로 떼어놓고 볼 때에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것들이 서로 선을 긋고 함께 생각하면 분명한 의도와 함께 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도하며 산다. 그것을 쉽게 설명하면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을 줄로 잇는 과정이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환경이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대부분은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의 충돌 속에서, 우리가 바른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기도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예민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우리에게 해답을 주시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환경과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해답으로 인도하시는 경우는 아주 많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중에 일어나는 사고, 기도하는 중에 생겨나는 다툼, 기도하는 중에 겪게 되는 어려움은 모두 응답의 과정이다. 그 안에 깊이 음미하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종종 너무 무디고 미련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기도하고는 그 사실을 모두 잊어 버린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그저 억울해하고, 흥분하고, 낙심하는 것을 보면, 과연 하나님을 믿고 응답을 구하는 사람인가 의구심이 생기곤 한다.

믿음이 없으면 30년을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기도가 사람들에게 자랑은 될지언정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그의 기도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능력이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기대하라. 응답을 기대한다면, 삶의 순간순간을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디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놀라지 말고 순종할 수 있도록, 온 맘과 귀를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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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5 기도하는 자의 하나님



야이로 기도회를 11월 한 달로 잡은 이유는,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실은 지난 여름부터 이 기도회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밖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혜에 대한 기도에 개인적으로 헌신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것이다. 

다만 목양을 하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가진 영적 수준을 가늠했다. 

한결같은 기도는 지구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일상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실망, 분주하게 만드는 문제들, 육체적 피로,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까지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며 싸워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영적 성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절대로 못하는 일이다. 

당번을 정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매일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럴 만큼 절실한 문제요, 또한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주가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을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는 말이 있다.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훌륭한 약방문이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기도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물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실천할 만큼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때를 분별하고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약점을 조금은 커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야이로 기도회’는 소중한 기회이다. 평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에게 마지막 찬스를 주고 있는 셈이다. 

부탁이다! 제발 기도하라. 빠지지 말고 기도하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도하라. 기도만이 우리의 딸을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모두 잘 되는 길이다.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이 기도를 중심으로 재편 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때와 똑같이 산다는 것은 자기 기도를 훼손하는 일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도미노를 쌓는 과정을 본 적이 있는가? 10개를 세웠을 때에는 별로 부담감이 없다. 그러나 100개가 세워지고, 1000개가 세워져서 완성에 가까울수록 얼마나 많은 부담을 느끼며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가? 

사소한 문제로 은혜를 쏟으면 기도가 막힌다.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그간에 쌓아왔던 기도의 제단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이를 잉태한 여인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돌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경드림교회가 자라기를 원하신다. 

빈 자리가 가득 차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지난 주에 처음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앞으로는 흘러 넘쳐서 이 동경을 비옥하게 하는 교회가 되야 한다. 에스겔의 환상처럼 성전의 문지방에서 샘이 흘러 나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길은 기도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한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10년이 되고, 마침내 평생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의 뒤를 좇을 때에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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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1

 

사람에게 있어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소홀히 여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육체가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위한 삶은 결과적으로 허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근본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입에 달콤한 음식을 즐기면 이가 썩는다. 건강에도 이로울 리가 없다. 하물며 인생 자체에서 육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육체는 관리해야 한다. 몸무게만이 아니라 모든 소욕에 대하여 적절한 제한과 조절이 필요하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過猶不及]. 모든 것에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고 우리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3D 직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꺼리는 직업을 분류하니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직업군을 3D 직종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나는 목사야말로 3D 중의 3D 직종이라고 생각한다.

목사가 사명이지 직업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엄연한 현실이 그 일로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살아가니 직업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생을 하되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옷은 더러워지지 않아도 기분을 더럽힐 때가 많으며, 때로는 몸뿐 아니라 그 정신까지 걸고 위험한 승부를 해야 하니 분명히 3D 직종이 맞다.

자기를 혹사하는 것에 비하여 말도 되지 않는 이익을 취하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것은 그것이 직업만이 아니라 사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목사는 목사만이 아는 뭔가가 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목사도 가끔은 피곤하다. 푸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짜 피곤함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몸의 피곤함이 아니다. 영혼의 피곤함이다. 몸의 피곤함은 아무리 피곤해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피곤함은 그 끝과 깊이를 모르겠다.

한 주일을, 한 달을, 3년을 위하여 기도하며 복음을 뿌렸다. 그 기다림의 세월이 쉽지 않았다. 피붙이도 아니지만 형제보다 더 가까이 품고 기다렸다. 그런데도 묵묵부답(黙黙不答)이다. 도무지 기대했던 믿음의 싹이 보이지를 않는다.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에만 빠져 있고, 살아가는 것은 게으름의 전형이다.

이제는 맘을 접어야 할까? 솔직히 그러고 싶다. 하지만 아직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는가 보다. 다른 양을 붙여주시지 않고 계속 그 양을 내 앞에 두시니 말이다.

그래도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을 모르는가? 은혜 받을 때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참담한 말이지만 그것이 성경이다.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만하면 언젠가는 자기가 그 대가를 치른다. 정말 조심할 일이다.

목회자를 영적으로 피곤하게 하지 말라. 내 말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주의 깊게 새겨 들으라.

 

히 13: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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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5 믿음은 그런 것이다


믿음은 미래를 선취(先取)하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가뭄이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비를 구하는 연합 기도회를 드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였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예배당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 때, 한 아이가 장화를 신고, 우산을 쓰고 즐겁게 현관을 나섰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뭔가 머쓱함을 느껴야 했다.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스티븐 잡스와 오프리 윈프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비전을 격려했다. 그랬더니 그의 말이,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요!”였다.

물론 그것은 현재에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스티븐 잡스나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명사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던가? 오히려 우리보다 더 불운한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긍정하며 비전을 품었기에 오늘날의 그들이 된 것이 아닌가?

결국 인생은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도 믿지 못하고, 자기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나오겠는가? 어떻게 가치 있고 감동적인 인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특히나 유감인 부분이 그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가난해도 아이는 꿈이 컸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운명처럼 지긋지긋한 가난을 극복해 보겠다는 강단(剛斷) 있는 아이들,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코피를 쏟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물로 배를 채우고도 하늘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요즘은 너무 쉽게 운명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요즘이 더 미신(迷信)적인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무당과 점쟁이가 아니라, 학벌과 재산에 대한 과도한 맹신(盲信)이 시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기도를 하다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목회는 힘들고,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입으로 토하며, 나 자신에 대하여 연민에 가득 찼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했다!

한참을 그렇게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조용히 마음에 들려왔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에 고생을 해도 긍정적인 미래가 보이면 불행하지는 않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약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절망스럽게만 보는 것은 약함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악함이다.

무지는 약함(弱)이지 악함(惡)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지가 반드시 불행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찰 필요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악함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그 대답을 듣고 염려를 하고, 걱정을 해도 늦지 않는다. 너무 빨리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나머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다 결정하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열 가지 못하는 무능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하는 한 가지가 중요하다. 그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것에 미쳐서 10년만 살아보라!

실패보다 나쁜 것은 실패만 생각하는 정신이고,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처럼 나약한가? 왜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폄하하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가?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런 우리의 태도로 인하여 가장 많이 슬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모든 말은 내가 혼자 했다. 그 말을 믿고 사는 내가 불쌍할 뿐이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그 안에서 우리는 꿈을 품고, 자기를 기대하게 된다. 현실은 평범하지만, 나도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살게 한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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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교회마다 청년의 가뭄이다. 몇몇 교회들은 청년사역이라는 특성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귀해졌다.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면서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사회의 노령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노령화보다 더 급하게 교회의 노령화가 진척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별로 자각이 없는 것 같다.

교회는 왜 청년들을 잃게 되었을까? 사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 지난 반 평생, 20여 년을 사역했다. 교육부서를 맡아 주일학교와 청년들을 담당했던 시간만도 십 수년은 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나는 참 많이 감동했고 또 절망했다.

사람들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특징을 찬양과 훈련으로 요약한다. 물론 이 점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기존의 조직과 틀을 가지고서는 새술과 같은 청년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청년목회의 가장 중요한 색깔은 ‘감성’이다. 청년들은 감동을 찾고, 감동을 통해 힘을 얻으며, 감동할 때 헌신한다. 장년과 같이 의무감이나, 직분,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보다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기성세대의 장년들에게는 무책임하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교회적 특성을 가다듬으면 청년들은 지금이라도 교회 안에서 정착하고 자라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성을 일깨우는 감동이 다만 ‘헐리웃 액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늘 하는 말이지만, 강아지도 자기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가족을 알아본다. 하물며 사람이고, 그토록 감수성이 뛰어난 청년들이 어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교회가 청년들을 잃고 있는 것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헌금을 많이 하지 못한다. 청년들은 연애문제를 일으킨다. 청년들은 힘 쓰고, 귀찮은 일을 시키기에는 좋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는 아직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청년들은 그저 간식을 주고, 밥을 사 먹이면 좋아한다. 청년들은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쓰레기를 만든다.

솔직하게 대답해 보자. 이런 생각들이 기본에 깔려 있다면 아무리 청년부 예산을 많이 집행하고, 훌륭한 프로그램과 전임 사역자를 둔다고 하더라도 과연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겠는가?

 

나는 동경드림교회에 부임하고 장년들을 독려해 왔다. 모든 궂은 일을 장년들에게 요구했다. 청년들을 심부름꾼처럼 여기거나 종처럼 시키려고 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청년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을 교회에 심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위세는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은 사람은 나이 먹은 값을 해야 하고, 존경의 몸짓 만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품도록 만들어야 하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어른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장년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장년이 있는 교회는 청년들이 부흥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청년의 시기야말로 사랑에 가장 민감하고 목마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옷에 맞추어야 하는가? 옷이 아이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는 배내옷을 준비한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옷을 손질하여 아이에게 맞추어 입힌다. 조직과 프로그램, 찬양과 훈련 등은 청년들을 교회 안에서 입히는 옷과 같다. 그것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면 저절로 해결되어간다.

청년들 중에서 좋은 리더가 나와 조직을 정비하고, 그들 스스로 연습하여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훈련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모이기 시작하면 말이다.

우리 교회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성에 차지는 않는다. 청년들을 부모로서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데, 동경그림교회의 장년들이 아직 너무 젊어서 그런 시각을 쉽게 가지지 못한다. 형과 누이의 시각으로 보니, 아직도 품고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훈련된 청년은 교회 안에서 심부름이나 잘하는 청년이 아니다. 훈련된 청년은 신앙 안에서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며, 신앙적 삶을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청년이다. 그런 청년은 조직과 훈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감동이 세운다.

목회자가 감동스러워야 하고, 장년들이 그러해야 한다. 그러면 청년들은 그 모습을 보고 꼭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뒤를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청년을 훈련하고 싶다면 당연히 장년을 먼저 훈련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가르침이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청년들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이 시대의 교회들이 헌신된 청년들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1년 워킹비자로 왔다 가면 어떠한가? 그들이 어디서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서 준다면, 함께 살아가고 늙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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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목양칼럼 :: 일본 게임산업의 교훈

 

게임 업계에서 닌텐도(Nintendo)의 약진은 놀랍기만 하다. 거대기업 소니(Sony)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가 날을 겨누는 상황에서 오히려 단일 기업인 닌텐도가 존재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더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더 부러운 상황은 소니와 닌텐도가 모두 일본의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의 게임산업은 독보적이며 든든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귀무자, 록맨, 바이오 하자드로 유명한 게임 개발자 이나후네 케이지가 이번 동경의 게임쇼에서 연설을 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자극적인 내용이 알려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게임산업은 이제 끝났다!”

사실 이번 동경게임쇼에 나온 일본의 게임들은 많이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그 비참한 상황에 대한 개발자로서의 탄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기업의 선전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일본 게임 업계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시나 구조적인 문제가 따르고 있다.

요약하자면 갈라파고스 신드롬 때문이다. 세상과 단절되어 진화마저 비껴갔다는 갈라파고스 섬처럼 일본의 게임시장이 세계와 동떨어진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전 세계에서 히트하는 게임도 유독 일본에만 오면 참패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토록 열광하는 스타크래프트는 물론, 디아블로, 헤일로, GTA 등의 게임들이 모두 일본에서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반대로 일본은 일본다운 게임들만이 반응을 얻고 있다.

이것이 당장에는 일본의 게임업체에게 달콤했다. 자기 파이를 다른 나라의 업체들에게 빼앗길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달콤함은 곧 독으로 변했다. 일본이 아무리 게임 매니아가 많은 거대 시장이라 하더라도 그 파이는 크기가 정해져 있다. 때문에 일본의 게임산업이 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공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식의 게임은 반대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게임업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더 일본적인 게임을 만들어 경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점점 더 세계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하는 양상이 벌어지면서, 이나후네 케이지 같은 개발자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저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일찍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을 산업으로 육성했던 일본이다. 그래서 항상 그 분야의 정상을 주도하던 일본이기에 앞으로도 어떤 변화를 통해 살아남을지 우리는 다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몇 가지는 교훈으로 새길 만 하다. 당장의 편하고 좋은 길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달콤함은 이를 썩게 한다. 음식을 입에 맞추면 건강에는 해롭기 쉽다. 그것은 신앙과 인생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소통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들끼리만의 천국은 결국 몰락을 부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교회를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도, 교회도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한다. 소통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교회와 신앙인다움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옷을 갈아입고, 세상을 품을 것인가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답습하는 것으로는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변화는 언제나 저항을 부른다. 보장된 파이를 거절하고 새로운 개척에 나선다는 것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개척자가 있기에 미래가 열리고 역사가 전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겐 깊은 고민과 기도가 필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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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하나님을 안다는 것



신앙에는 '지식'의 차원과 '경험'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을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머리로 아는 차원의 신앙은 미숙하고 부족한 신앙이며, 경험을 통해 가슴에 이른 신앙이야말로 진실된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의 문자인 히브리어에서 '알다(know)'의 의미를 가진 말은 '야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다양한 용례를 갖습니다. 심지어 아담이 하와를 알았더니 하와가 잉태하게 되었다는 표현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있어 '알다'라는 것은 결코 '머리'에 한정되는 무엇이 아닙니다.

마치 남남으로 만난 부부가 생활과 삶을 통해 서로를 경험하고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처럼, 그 모든 실체에 직면하는 지식이야말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이 말씀을 이해할 때도 이러한 유대인의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문자를 번역하여 이해하면 자유가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진리를 알고 경험하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자유하도록 만들어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꽃은 '변화'입니다. 아무리 오래 믿고, 열심히 믿어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모든 세월은 허무하고 덧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적 변화야말로 진리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청년 시절, 아주 회의론적인 태도를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적 논쟁을 즐겼는데, 그의 결론은 신앙이란 마음의 위안을 위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이었던 저는 화가 나서, "그렇게 하나님도 못 믿으면서 뭐하러 교회에 나오냐?"고 쏘아 붙였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서 교회생활을 선택한 것 뿐이라고 도도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산기도를 갔습니다. 청년회가 산속의 기도원에 올라 밤기도를 하는 행사였는데, 그에게는 신기한 소풍 정도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는 차에 올라 자매들에게 우스개 소리를 하며 히히락락 했습니다.

우리는 깊은 밤에 기도원에 도착했고, 간단한 예배 후에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산속의 기도처에 들어갔습니다. 

산속의 기도실은 두 세 명이 간신히 들어가는 공간에 희미한 전등이 달려 있었습니다. 둘이 함께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옆에서 기도하던 후배가 괴성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짐승의 으르렁 거림과 비슷한 그 소리에 놀라서 그는 무서운 느낌에 질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청년회장이었던 저는 전도사님과 기도실을 돌아 보다가 그 사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당혹감으로 도망도 가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도사님과 저는 두 명도 비좁은 그 기도실에 문을 열고 들어가 함께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자연히 한 구석으로 몰려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30여분을 맹렬하게 기도했을 때에, 이상한 소리를 내던 후배가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돌아오고 으르렁 거리는 듯하던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미혹되었던 그 후배는 흐느끼며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독거려 안정을 취하고, 기진맥진한 그 후배를 붙들고 산에서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도도하게 신앙을 조롱하며 철학을 앞세우던 그 청년이 자기 곁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나름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백 번을 더 설명하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그 한 밤의 경험을 통해 그는 자기의 틀을 깨뜨리고 마음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진실로 아십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찬송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들은 신앙을 결코 문자의 차원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갖고 삶의 현실과 싸웠고 그를 통하여 무수한 '증거들'을 수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수확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참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싸워 보십시오.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경험이 하나 둘씩 쌓여갈수록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문제가 많다는 것은 많이 변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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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영웅처럼 도전하라



1960년에는 로마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그리고 그 해 올림픽 마라톤에는 각국에서 모두 69명의 주자들이 경쟁했다. 그 중에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라는 선수도 있었다.

아베베는 이디오피아의 평범한 목동이었다. 그가 올림픽에 참여했다고 하여서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베베는 들판을 달리던 목동의 습관을 통해 달리기를 익혔다. 때문에 그가 로마에 도착하여 많은 선수들과 달린다고 하여서 그의 달리기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아베베는 올림픽 경기에서 익숙하지 못한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맨발로 달린다.

2시간 15분 16초, 아베베는 맨발로 세계기록을 갱신하며 올림픽에서 우승한다. 그리고 4년 뒤 도쿄 올릭픽에도 참여한 아베베는 종전 기록을 3분이나 단축하며 2시간 12분 11초로 다시 우승한다.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였다. 서구 식민지로부터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앞다투어 독립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아베베의 조국인 에디오피아도 역시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에디오피아의 목동이며, 군인이었던 아베베가 바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베베의 우승은 손기정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단순한 우승 그 이상의 무엇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덕분에 세계는 주목했고, 아프리카인들은 열광했다.

당시 언론들은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탈리아군이 필요했지만, 로마를 점령하는 데는 한 명의 에디오피아군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승한 아베베는 세계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조국 에티오피아가 항상 단호하고 영웅적으로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다시 4년 뒤 아베베는 멕시코 올릭픽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기 중 골절의 부상을 입고 그만 경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디오피아의 황제는 아프리카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에서 두 번이나 금메달을 받은 아베베에게 자동차를 선물했다. 국가적 영웅에 대한 예우요, 호의였다.

그러나 인생이란 새옹지마 [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아베베는 황제가 선물한 자동차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 그가 멕시코 올림픽 얼마 후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목이 부러지고 척추가 손상되는 심각한 사고였다. 아베베는 죽음의 고비를 이겨냈지만, 대신에 그의 하반신이 마비된다.

이 쯤에서 아베베가 절망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이후에도 이렇게 말했다. "내 다리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두 팔이 있다!"


아베베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1970년 아베베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리고 휠체어로 25킬로의 크로스컨트리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일반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 모두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최초의 선수였다.

1973년은 아베베가 41세가 되는 해였다. 이번에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찾아온 뇌종양과 싸웠지만, 그의 불굴의 의지로도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잠들었고, 성 요셉 교회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아베베와 같은 영웅의 이야기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소중한 메시지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경을 탓하고, 출신을 원망하는 운명론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의 군대를 상대했다. 모세가 애굽을 향해 갈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은 강력한 군대와 물자가 아니라, 바로 목자의 지팡이였다. 다윗은 골리앗을 잡을 때에 칼조차 차지 않았다. 그는 냇가에서 주운 돌 다섯 개로 충분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정신이다. 정신이 살아 있으면 그 무엇도 우리를 절망하게 할 수 없으며, 불행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불행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환경만을 탓한다. 결코 자신의 유약하고 부실한 정신의 세계를 직시하지 못한다.


포기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제발 포기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 포기하는 사람은 항상 포기하는 것을 습관처럼 한다. 그는 포기할 이유를 찾고, 포기할 조건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셨다. 성령은 아베베처럼 영웅의 마음을 품게 한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다리가 마비되어도 팔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감동은 우리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고, 인생을 진실로 빛나도록 이끈다.


도전하라! 무모해 보이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도전한다면 세계는 결코 큰 진보의 걸음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영웅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꽃을 피웠다. 그들은 가능성과 싸우지 않고 자기 자신과 싸운다. 그들의 정신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결코 죽지 않는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사자처럼 말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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