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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예배의 다양성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겨 경배하는 예배의 기능을 생각하면 금새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번트(servant, 종)’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서비스’를 정성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이 서비스가 주객이 전도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면, 점점 하나님을 향한 서비스에서 사람들을 향한 서비스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열린예배(Open Service)란 원래,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지칭한다. 이 말은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할 때에 그것을 친절하게 돕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아직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신자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음식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때문에 이 열린예배 자체가 이미 닫혀진 제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작정 맘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곧 성경의 내용 안에서만 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원칙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최근 유럽에서 생기는 참람한 사태처럼, 예배당에서 예배와 함께 칵테일을 제공하거나, 댄스 파티와 예배를 동시에 제공하는 기발한 발상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복잡한 예식의 규칙들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타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예배는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이 있는 것이다.


예배의 근간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다. 다양성은 이 본질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편의와 기호를 최대한 배려하더라도, 결국 예배의 중심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다가도 다시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때도 있다. 설교의 최종적인 평가는 항상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설교를 지금 전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통해 결정한다. 설사 사람들이 거북해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원칙에 확신이 서면 강단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신이다.


지난 주에 <직분자회의>를 하다 보니, 오전예배와 오후예배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왜 두 번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신앙이 어리거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당연히 그런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다들 헤아렸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서 다소 혼란을 겪은 것은, 정말 신앙이 어린 신자들을 향하여 뭔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직분자 자신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이었다.  

맞다, 되도록 예배는 지루하지 말아야 하고,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품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고유한 색깔을 살리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핵심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고, 영혼을 목양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가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두 편의 긴 설교를 듣는 것은, 그 시간이 목양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것을 명령한 것도, 전통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과 내용을 결정한 것은 목회자로서의 나 자신이다.

나는 동경드림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예배의 핵심만큼은 목회자로서 양보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내가 설교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에 대하여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쓴 약일수록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먹어야만 하는 당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면 환자는 입에 쓴 약을 먹으려고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란 죄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시간이다. 선포되는 진리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우리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풀어가고 설명하려면 그런 과정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예배의 다양성과 변화는 이런 과정을 되도록 편안하게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다. 때문에 거북함과 지루함과 같은 요소들을 다 제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감싸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양을 아무리 멋지게 드려도 그것이 목양을 대신하지 못한다. 기도를 아무리 긴 시간 드려도 그것이 기독교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 오랜 시간,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목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영혼의 구원과 목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것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성경이고, 이 모든 것을 책임 있게 추구하며 인도할 인도자는 설교자로서의 목사라는 사실은 타협될 수 없다. 만약 이 근간이 흔들린다면, 교회는 예배를 예배되게 지켜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예배자가 단지 수동적으로 수용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극적인 예배자의 참여와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바탕에서만 정리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조정이 없다면 그야말로 모든 의견은 혼돈만을 더할 것이다.


예배와 관련된 사역자는 모두 설교자를 도와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가 가장 능력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기 색깔을 고집하는 예배사역은 모두 잘못된 쇼맨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고, 그 초점은 언제나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이다. 이 점을 바르게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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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

 

사람은 잘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낍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끔 아주 드물게 게임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신기하게 여겨서 가만히 관찰해보면 게임을 지독하게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임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잘해야 하는데, 전혀 소질이 없는 경우에는 게임이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준혁이가 재미있는 성적표를 받아 왔습니다. 학습에 대한 성적표가 아니라 체력검사에 대한 성적표입니다. 그런데 체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그 성적표를 주면서 준혁이가 학년에서 1등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전교1등이 되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라고, 아내와 제가 ‘전교1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아빠도 못 이기겠다느니, 우리 집에서 제일 센 것은 우리 큰 아들이라는 등의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랬더니 준혁이가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어제는 준혁이가 계획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방학도 끝났는데 무슨 계획표인가 물었더니, 체력 트레이닝 계획표랍니다. 전교1등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 운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결심한 모양입니다.

중학교 시절에 보디빌딩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들으니, 보디빌딩을 하는데 6개월이 고비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근육질의 몸을 만들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운동을 시작하지만, 6개월이 되기까지는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근육이 붙기 시작하려면 기본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기본을 만들기 위해서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참지 못하고 대부분의 초보자들은 포기하고 만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넘어가면 운동을 할 때마다 근육이 올라오고, 안 쓰던 근육들이 자리를 잡아가는데 정말 자기 몸이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그 힘겨운 운동을 하는데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 특성이 있고, 그래서 각자 재미를 느끼고 잘하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하는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잘하는 것을 찾아내어 집중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재능’이라고 부릅니다. 그 재능을 찾아내고 잘 가다듬어 유익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자기가 뭘 못하는지는 스무 가지도 헤아리면서, 정작 자신이 가장 잘 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생과 재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낭비되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능률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최고의 능률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서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다른 것으로 헷갈리지 말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일에 집중하십시오. 거기 당신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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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


작은 외과 수술 후에 손가락에서 실밥을 뽑은 이후에도 손톱이 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뽑았던 손톱을 다시 덮어둔 까닭은 손톱이 새로 생기고 자라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 번 뽑혔던 손톱이 다시 자라는 것에는 생각보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보통 4~6개월 정도의 시간을 잡는가 보다. 그 동안 천천히 자리 잡고 자라나는 손톱을 위해 뽑았던 손톱을 다시 꿰매어 고정해 두었던 것이다.

직업이 목사이니, 손가락은 눈과 함께 가장 혹사 당하는 지체이다. 이렇게 수술을 할 때 까지는 몰랐는데 감각이 아주 예민해진 손가락을 쓰려니 평소에 정말 많이 사용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낮에는 붕대로 감은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고, 밤에는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욱신거리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덕분에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싶은 노래도 못 부르고, 손과 손을 마주 비벼 씻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수술했던 손의 손바닥에서 국수처럼 때가 밀리는 장면을 보며 경악하기도 했다.

매일 씻고 사용하는 동안에는 몰랐던 손가락의 유용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정말 익숙하지만 너무나 요긴한 지체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 그 모든 것들의 절묘한 조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행위도 불편한 사람에게는 ‘기적’과 같다.

작은 아들이 말했다. 손톱이 빠지면 그것을 저를 달란다. 호기심으로 가지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다. 두고두고 빠진 손톱을 보면서,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기적의 의미를 가슴에 되새길까 한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불경(不敬)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 가난함이 아니라 엄살과 어리광에 불과하다.

인생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삶이 당연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떠오르는 태양을 애타게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하루는 세상에서 제일 큰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다.

그 하루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자라나는 손톱과 발톱을 깎는 행위는 평범하지만 결코 당연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가 존재하는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상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커다란 업적이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그리고 그 행복으로부터 매일매일 감사가 꽃피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정말 성공하는 인생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그런 삶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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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한 사람

2010-1-10

 

문학은 사색과 삶을 반영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읽는 것은 단순한 문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시대의 고민과 삶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작가들 중에 아주 우울한 분위기의 글이 많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특별히 젊은 작가들의 글에서 무력감과 우울함이 묻어난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풍요로운 문명을 누리는 오늘이지만, 오히려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패배주의와 절망이 멍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의 글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위기를 겪는 시대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복제를 통해 ‘유일한 자기(Only myself)’에 대하여 혼돈을 겪고 있으며, 또한 점차 늘어가는 인공장기와 기계화에 의해 ‘인간(human Being)’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도전 받고 있다.

더구나 교육은 건전한 시민을 만드는 본래의 목적에 실패했다. 과도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을 과신하는 광증에는 빠져있다. 심지어 신앙까지 교육을 통해 주입하려고 하는 터무니 없는 열정이 교회에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2010년을 열면서 개인적으로 사색하는 바가 있다. 과연 이 우울한 시대 가운데 ‘복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복음은 이 시대에도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진 이 복잡하고 터무니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명백하고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복음이 역사를 이끌어왔던 동력은, 결코 그것이 개인과 그 내면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시대와 역사적 차원에서 소통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시대에는 자유와 자결의 원칙이 성경에서 나왔고, 노예의 시대에는 해방과 평등의 원칙이 바로 그 복음에서 꽃피웠다. 우리의 선배들은, 단지 가만히 골방에서 내세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내세를 믿기에, 지금의 시대를 용감하게 진단하고 더 성경적인 세상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이었다.

그들의 시대에서 그들은 잃은 자(loser)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그들의 피를 먹고 세상의 부조리가 해결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 왔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가 분명히 이 시대에도 우리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고, 기쁨의 원천이 되겠지만, 그것은 말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변화와 헌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뭘 믿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에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믿음은 참 불량이 많다고 생각된다. 시대의 등불이 되는 청년들을 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을 찾고,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나의 사명이요, 숙제이다.

많은 숫자가 아니라 온전한 한 사람에 집중하는 목회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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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시안


1 블랙톤 앞면

2 블랙톤 뒷면

3 블랙톤 뒷면

4 블루톤 뒷면

5 블루톤 뒷면

6 화이트톤 뒷면



7 화이트톤 앞면

8 블루톤 뒷면

9 블루톤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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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참사로 인하여 거친 언어가 난무합니다.


저질러 놓은 일과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욕이 나오는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욕만 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관련된 사람 다 감옥에 넣고, 무능한 공무원과 정치인들 다 옷 벗기고, 그렇게 못할 경우에는 이민이라도 가려고 합니까?

제가 지금 외국에 사는데, 외국이라고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어디를 가도 이상하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해결해가는 것이 인생이고, 책임입니다. 


그래서 화가 날수록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 정도 충격을 받았으니 저절로 깨닫고 알아서 바뀌어 주겠지 생각을 하면, 그것보다 오산(誤算)은 없습니다.


어느 중학교의 도덕숙제를 소개합니다. 

조금은 감정의 앙금을 치유하시라고, 기분전환을 위해, 잠깐의 여유를 위하여 같이 나눕니다. 나쁜 놈도 참 많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직 선량함이 더 많다고 믿습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스스로 좀 위로 받고, 힘을 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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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 목양칼럼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동경드림교회에 예배당을 주신다면 과연 어떤 예배당을 세울까 생각을 해봤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그러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만들어서 동경의 명물이 되고 안식처가 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요즘은 예배당을 극장식으로 많이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콘서트도 열고, 세미나도 빌려주어서 1년 365일 쉬지 않고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은행이 고객을 위해 문턱을 없애는 것처럼 교회도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북카페와 서점과 영화관이 예배당의 부속으로 패키지화 되고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가 과연 성경적인가? 나에게는 뭔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배당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다. 물론 사람들이 부담감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러나 그렇게 편안한 예배당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당을 예배당 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표식이 아니라, 거기서 드려지는 예배와 기도에 있다.

과거의 경험이다. 한 큰 교회로 새벽예배를 나갔는데, 늦게까지 기도하게 되었다.

5시에 시작된 새벽예배를 5시 반에 마치고, 7시가 넘어서까지 기도하며 있었다. 그러자 그 교회의 집사님이 슬며시 찾아와 등을 두드렸다. 8시부터는 지역 사람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에 예배당을 준비해야 하니 그만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면서 뭔가 씁쓸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행사를 준비한다면, 내가 예배당에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행사용 강당에 있었던 것인가?

거룩을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한다. 이 말은 원래 칼로 잘라낸다는 뜻이다. 거룩함의 본질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이야말로 거룩한 낭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구별된 칼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제사를 위해 사용된다. 그 칼이 식사를 위해 사용될 때에는 식칼이지만, 제사만을 위해 사용될 때에 그것은 성물(聖物)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그분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주일에 한 번만 예배에 사용하고, 그냥 비워두는 것이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되도록 이면 사람들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찾아올 수 있고, 또한 1년 365일 항상 사람들의 발걸음이 계속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교제하며,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예배당은 중심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를 갖추고 이루어 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집을 포기하고 다른 용도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0.3%라고 들었다. 가끔 예쁘게 지어진 예배당은 보이는데, 그 예배당이 예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나는 소망한다. 동경에 그분의 집이 생기기를.

언제나 그분을 향한 뜨거운 예배의 불길이 피워올라, 번제처럼 오직 나의 하나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집이 세워지기를. 신자들은 언제나 눈물과 기쁨으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최고의 예우를 받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집이 동경에 세워지기를 원한다.

그 예배당은 장식보다 찬양으로 아름다울 것이고, 조명보다 말씀의 빛으로 빛날 것이며,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세워질 것이다. 어디에나 쉼이 있고, 자연이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바로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세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는가? 가슴 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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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7 새로운 기독교를 기대하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깨우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기독교가 기독교로 섰던 것은 아닙니다.

그 예전(禮奠)과 조직이 여전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렸을 때에, 기독교는 회를 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끊임 없는 예배 속에서도 영적으로 메말라갔고, 시대는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어둠의 일들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둠이 한 시대를 풍미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대가 가르쳐 주지 않는 하나님을 골방의 기도와 말씀으로 만나고, 그 하나님을 위해 죽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익숙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였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를 영화로 만들었던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생각납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고 마침내 못판 위를 맨발로 걸아갈 때에,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일본인 순사는 주기철 목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변절한 목회자를 향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과 주기철이의 하나님은 다르오?”

그렇습니다. 같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도, 주기철 목사님의 하나님과 살기 위해, 아니 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변절할 수 있는 종교인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역사 속에서 역동하는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 그러나 제대로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오늘까지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독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타성을 버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부흥케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멀리 떠난 시대를 각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마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그 바탕이 과거입니까? 아니면 성경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한 각성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행하고 얼마를 제단에 올리든지 그것은 다만 종교적 습관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종교생활을 경고합니다. 감동이 없는 신앙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헌신의 삶일 수 없습니다.

믿음을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께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고 소중한 교회를 교회되게 할 것입니다. 밋밋하고 무능력한 기독교가 아니라, 시대를 놀라게 하는 성경 속의 바로 그 기독교를 새롭게 이 시대에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동경드림교회의 품은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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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3 설교와 설교자  (0) 201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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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행

2009-12-20 목양칼럼

 

월요일에 입원을 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만 사흘을 보내고 있다.

평생에 처음으로 수술을 경험했다. 수술복을 갈아입고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경험은 인상적이었다. 팔만 마취를 했기 때문에 옆방에서 수술을 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다.

마취제가 투여되면서 서서히 나의 팔은 나로부터 분리되어 갔다. 의사는 손가락을 가르고 종양을 떼어냈다. 모든 과정은 1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나는 가만히 찬양을 불렀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어린 시절, 어두운 밤길에서도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두렵지 않았다. 악몽을 꾸는 날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옆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지 모른다.

결국 인생은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막연히 혼자 걷는 길이라면 인생은 항상 예기치 못한 두려움과 우울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는 동행이 있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물론 부모도, 좋은 친구도, 애인도 소중한 동행이다. 지금도 내 옆에서 새우잠을 자며 나를 간호해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안쓰럽고도 따뜻하다. 친구의 자상한 병문안과 아내의 눈물 어린 안부는 다시 한 번 내 삶을 소중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영원한 동행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비애일 것이다. 해서 우리는 누군가를 남겨야 하고, 또한 홀로 남아야만 한다.

 

내 나이 마흔, 주님이 없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가족을 위한 유산도 만들지 못했고, 하나뿐인 어머니를 내 손으로 모시지도 못했다. 유명한 이름도 없고, 남이 알아주는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얇은 환자복 한 벌을 입고 싸늘한 수술실의 침대 위에 누워 밝은 조명등 아래 내 몸이 샅샅이 비춰졌을 때, 나는 편안했다.

나의 주님은 거기서도 함께 하셨다. 그분은 나를 꼭 안으셨다. 내가 동경드림교회를 섬겨왔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수많은 과오와 허물이 숨어 있지만, 주님은 그런 상처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루만지며 쉼을 가지라고 하셨다.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종양이 아니라 내 기억을 떼어내는 수술이었다. 힘들고 쓰렸던 기억들, 내가 교회를 섬기기 위해 흘렸던 눈물을 어루만지는 수술이었다.

 

휠체어에 실려 밖으로 나오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애틋한 눈빛으로 안도의 숨을 쉬는 어머니를 보며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하겠다는 강한 의욕이 피어 올랐다.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아직은 살아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그리고 나의 영원한 동행이 되시는 그분을 위해 남은 평생을 살리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보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살리라. 인생은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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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3 설교와 설교자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된 시대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성경의 완성과 함께 기록자로서의 선지자와 사도는 끝이 났지만,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너무 많은 피해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단이 개인의 숭배를 위한 독설로 가득 차고, 근거도 없는 축복과 저주의 논리들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광경은 불행하게도 이 시대에 너무 흔한 모습이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하는 습관을 가졌지만, 정작 어디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의 경험은 마음을 닫게 하고, 그러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보다는 필터링 하려는 태도를 흔히 가진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자의 말을 구분하여 들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녹음기와 같은 단순한 도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단지 차갑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설교의 동기는 목양(牧羊)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 설교의 동기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양떼들은 그가 사랑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하여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설교자를 설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설교자의 마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우시는 경험을 통해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켜 이루신다. 때문에 변화된 설교자만이 온전한 설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설교자를 특별한 소명의 사람들로 우리가 인식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가 아무리 박식한 지식과 다양한 논리로 긴 시간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으신 설교자의 마음이 없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행위는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성경과 자기의 생각과 시대의 지식들을 적당히 버무린 잡탕 강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강단을 존중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때문에 강단에 서고 거룩한 가운을 입으면 일단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려고 하고, 웬만하면 비판하지 않으려는 터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태도는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그를 인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태도야말로 강단과 거기 선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경건한 태도인 것이다.

속으로는 그의 설교를 비판하고, 자기의 생각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듯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류하는 속셈을 품고서 겉으로만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하여서 어찌 그것이 존중과 경외라는 것인가!

설교자와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진짜 설교는 아무에게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설교자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와 설교자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말씀의 세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혼돈된 세상을 살기에, 처음 그 설교를 듣는 동안 자기의 신앙과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검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출신 신학교도, 소속 교단도, 그를 파송한 유명한 교회도 믿을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과 성령 가운데 설교자를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인간적 잣대를 모두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검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종을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경건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그 설교자를 믿지 못하면서 그에게 영혼의 목양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를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죄와 싸워 자기를 변화시키며,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킨다는 말인가?

<300>이라는 인상적인 영화는 스파르타의 영웅들이 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는 영웅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맞는다. 그 순간 두 병사는 한 몸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의 앞에 최적화 되어 있고, 반대로 뒤편에는 약하다. 뒤는 볼 수 없으며, 찌를 수 없고, 발로 찰 수도 없다. 하지만 두 병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울 때에 그들의 약점은 서로의 강점으로 보완된다. 그들은 단지 전력을 다해 자기 앞에 있는 적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자기의 등을 자신에게 맡긴 파트너를 보호한다.

설교자와 신자도 그러해야 한다. 설교자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공멸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교인들이 넘쳐난다. 자기에게 매주일 설교하는 설교자를 비판하고 못마땅해 하면서도 똑 같은 자리에 앉고, 설교자의 성품과 신앙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축도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종교생활을 과연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복이 과연 당신의 영혼을 살리고 당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것 같은가? 아니면 서서히 고사시켜 마침내 하나님에 대하여도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너무나 자명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신앙을 퇴락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작지 않은 죄악이다!

하나의 설교자가 모든 사람의 해답일 수는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지만, 설교자는 결코 그런 존재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다양한 말씀의 종을 세우시고, 구원의 문을 되도록 넓게 여시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양이라면 자기 목자의 음성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집에서 멀다느니, 큰 교회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논리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당신은 지금 취미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다. 당신이 그 교회에 가려는 것은 시설과 사람들이 초점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예배가 초점이고, 그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설교자와 설교이다.

이 초점을 흐리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많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하지 못할 때 설교자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설교 없이도 살아가는 교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우리 시대의 맹점과 불행을 본다. 그것은 분별력을 잃어버린 양떼들이 목자 없이 유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듯이 생각하지만 가장 미련하다. 자기를 목양할 설교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그들의 생각은 명백하게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하여 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자립된 하나님의 군사로 굳게 서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골방에서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목표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을 돌보고 이끌도록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목회자를 의지해야 한다.

목회자를 가장 훌륭하게 의지하는 방식은, 목회자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설교를 진심으로 듣는 것이다.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들이 다른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專務)하려고 했던 이유이다.

말씀의 영광이 그립다. 강단 아래의 신자들이 그 말씀 한 마디에 눈물을 쏟고 자기를 부인하던 성경의 장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식이 아니라 영적 감동과 은혜가 지배하는 예배가 너무너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한 목양의 관계 없이 온전한 예배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거기 서는 사람이나, 거기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나 좀 더 경외심을 가지고 강단을 대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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