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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8


신앙인이 제대로 살아야 하며 좀 더 탁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소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너무 피곤하고 손해를 보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둔함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예수님의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이 가진 타성의 장애가 너무 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고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안다’고 했을 때에 당연히 따라올 경건한 의무와 그로 말미암아 감수해야 하는 손해 등이 싫었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척을 했던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이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짐짓 그것을 피해가려 할 때에 그것은 ‘고의적 범죄’ 혹은 ‘교활한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탄식 보다는 꾸지람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결국 이 말씀은 ‘무지’ 보다는 ‘외식’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은혜의 감격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라도 정작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히 스스로 신앙을 기만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강력하게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조국의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학대 당하는 것은 말을 못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교우들은 훈련만 받으면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하나만 아는 단순한 이해입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더라도 정작 변화를 주지 못하면 그 발걸음이 오래 갈 수 없을뿐더러, 참 신앙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고, 진실한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은 신앙적 실천의 부족이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복음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동경드림교회는 요즘의 현실에서 드문 교회입니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교제, 순수한 인격적 매력, 그리고 신앙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바탕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교회의 양적인 성장만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아직도 신앙적이기 보다는 세속적이고, 아직도 적당히 모르는 척을 하고 외면하려 하거나 혹은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내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나가고 어떤 목사를 만나든지 그것은 나의 관심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 혹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려고 노력하며 점점 나아지는 신자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성장은 저 자신을 독려할 것이며, 제가 더욱 주님을 본받아 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몰라서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본심을 보십니다. 그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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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1


믿음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는 것만 같아도 사실은 미미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100% 역사하는 가운데 우리가 믿음의 역사를 경험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정당한 몫을 맡기시고 그것을 통해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그 우리의 몫이 바로 ‘기도’이다.

예수님께 난치의 병을 가진 환자들이 나아갔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그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주님은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하여 상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네 믿음대로 되라!” (마9:29)

만약 그 환자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이 말씀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이미 공은 너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은혜로 싸인을 했는데, 너도 거기에 믿음으로 싸인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다. 겸양의 말이 아니라 이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곧잘 의심하거나 제한한다. 자기의 일은 결코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채워지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낙심하기를 잘한다.

때문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도 우리의 믿음 없음에 막히는 것이다. 

기도는 단순한 청원이 아니다. 해 달라는 요구의 나열만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다. 성령께서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와 교제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를 통하여 믿음 없는 우리의 자아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실 때에,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믿음의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무엇 하나 나의 힘과 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는다. 이유는 바쁘고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러하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구체적으로 기대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기도하기를 더욱 힘쓰게 될 것이다. 핑계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단순한 옵션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삶의 밑바닥에는 추락한 믿음이 있다. 이미 좋은 것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주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거나 실망하거나 혹은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자아가 있다. 그것이 기도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네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도전이다. 이미 나는 네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네가 의지와 결단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자기의 방식을 고집할 것인가? 그 양편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의뢰할 수 있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가 기도의 경험을 좀 더 쌓아가기를 원한다. 목회자로서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정말 느낀다.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라. 그러면 응답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이미 주님의 싸인은 떨어져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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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5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말씀은 기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말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삶이 항상 기쁘지는 않지만,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기로 작정하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그러한 노력을 도와주시고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신앙인은 ‘행복 메이커(Happiness Maker)'입니다. 행복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다니고, 남의 행복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창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부정적인 상황을 바꾸고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복의 원천(origin)이 되라는 뜻입니다. 원래 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믿음 안의 우리에게 그 역할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축복하시고, 우리가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신다 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소임을 우리는 소홀히 하곤 합니다. 우리가 나서면 바꿀 수 있는데, 스스로 자기를 무력하게 여기고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야 할 사람이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거룩한 직무의 유기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한참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어떤 리더십을 원하느냐는 리서치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리더십의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등장했는데, 과거로부터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트와 유머입니다.

리더란 일종의 해석자(analyst)입니다. 그의 해석에 따라서 사람들은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가 위트 있는 긍정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안심을 하고 소망을 품게 되지만, 그가 우울한 현실만을 나열하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막연한 낙천주의자가 되자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신앙인은 그렇게 긍정의 말을 한 후에, 그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적절하게 기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대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주변을 살피면, 다들 고민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의 고민은 크고, 당신의 고민은 작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고민이 가장 심각하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되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고, 스트레스를 풍기고, 마음이 점점 굳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분대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시고,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그런 상황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스스로 기뻐하십시오. 기쁨을 창조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기쁨의 이유가 되십시오.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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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8


촛불을 들고 광화문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오늘은 특별히 5.18입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기념일이지요. 얼마 전 한국영화 ‘화려한 휴가’를 통해 소개되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렸던 과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쉽지 않은 근대사를 겪었습니다. 아니, 아직도 분단된 현실과 외세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서 그 근대사를 계속하여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도 그러하고, 북한 핵문제도 그러합니다. 현 정부라고 정말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나름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성급한 액션을 취하다보니, 지나치게 오버하여 국민적 반발을 호되게 겪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슬픈 자화상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국의 구호물자로 주린 배를 채웠고, 월남전 때에는 군대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다가 새마을 운동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는 ‘상이군인’이라는 분들이 험한 인상으로 잘린 팔다리를 목발에 의지하여 버스에 오르곤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값싼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천 원에 팔았습니다. 그들의 언사가 하도 거칠어서 사람들은 억지로 지갑을 열었는데, 그 시절에는 경찰도 월남전 상이군인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팔 다리, 혹은 목숨을 팔아서 대한민국은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영광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그 오랜 세월, 미국의 그늘에 있다 보니 이제는 미국 없이는 못 사는 나라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싫으면서도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해야 했고, 굶주린 동포에게 식량을 주면서도 눈치를 봐야 했으며, 심지어 다른 나라가 거절하는 쇠고기를 먼저 앞장서 수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그러한 관행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전과 달리 화염병이나 보도블럭의 돌조각을 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손에 촛불 하나 밝혀서 거리로 나섰습니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은 돌아가며 말을 합니다. 물론 격한 언사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고, 생각이 삐뚤어지거나 편파적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5.18 아니, 동학의 후예입니다. 세상을 방관만 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아무도 시키지 않는 짓을 스스로 하는 피가 우리의 혈관 속에는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점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저도 광화문에 아들과 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기도를 했겠지요. 내 조국을 위해, 대통령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몸이 현해탄을 건너 이곳에 있어 그 자리에 촛불 하나를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촛불 같은 기도만은 빼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재협상이 가능할지, 과연 대한민국이 미국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성향에서 앞으로 얼마나 독립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씩 가다보면, 결국 언젠가는 내 조국, 대한민국이 더욱 성숙한 나라, 국민이 참으로 주인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 날까지 부디 내 조국에 광우병도, 조류독감도, 그 어떤 재난도 없었으면 합니다. 힘들게 살아왔던 내 형제들이 부디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그것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곳에 살아도 한국 사람임을 잊지 맙시다. 주님의 은혜가 조국땅을 덮어주시기를 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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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8


음식에도 도리(道理)가 있다. 구약의 음식법은 이러한 도리를 보여주는 율법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땅이었다. 그 땅의 풍속마다 죄의 경향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출 23:19, 34:26, 신 14:21)

염소의 젖으로 새끼염소를 요리하면 아마도 맛이 있었는가 보다. 하지만 단순한 요리법을 지나서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요리하는 것’은 도리(道理)가 아니다. 이것은 모성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하신 품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 먹음에 나름대로 품위가 있어야 한다. 품위를 잃고 함부로 ‘먹음’에만 집중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거나 축복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의외로 성경에는 많다.


요즘 광우병 얘기가 한참이다. 광우병은 왜 생긴 것인가?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소의 사료 값을 아끼기 위하여 버려져야할 소의 내장과 골수를 갈아서 다시 소에게 먹였다. 그 결과 초식동물인 소가 동물성 사료를, 그것도 자기 동족의 찌꺼기를 억지로 먹어야 했다. 덕분에 생겨난 광우병 물질은 그 소를 먹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옮겨와 치료 불가능하며, 거의 사망률 100%인 공포의 질병을 일으킨 것이다.

사람이 기본적인 도리만 지켰어도 이런 엄청난 질병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겨난 이 질병으로 인하여 불안에 떨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세계적인 공조 덕분에 광우병은 서서히 통제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엄격한 검역을 행한 유럽은 물론 미국과 캐나다, 일본과 같은 광우병 이력이 있는 나라들에서 더 이상은 광우병 발병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다소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유럽과 일본은 거의 전수검사를 행할 정도로 광우병에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모든 나라에서 소에게 동물 사료를 즉시로 금지한 것도 적절했다. 

하지만 이 광우병 문제는 결코 국지적인 ‘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에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 도리를 잃고, 심지어 자기들의 음식에조차 야만을 행한 인간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 탐욕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제2, 제3의 광우병이 출연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광우병이 다시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훌륭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만물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보금자리가 된다. 하지만 인간이 인격을 상실하고 이기적인 짐승처럼 행동하면 자연은 그 포악을 열 배, 스무 배로 되돌려준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를 생각해 보라. 다 열거할 수도 없는 이변들이 생겨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우리 모두가 있다. 삶의 일상에서 전혀 자연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작은 습관들이 모아져 결국에는 이 세상의 엄청난 재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하신 독특한 지위와 역할을 다시 자각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이 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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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삶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일 것입니다. 

스무 살 어린 시절에는 겁 없는 꿈을 품고 세상을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정작 나이가 들면 그런 용기가 돈키호테의 돌진처럼 무모하게 느껴집니다. 현실감이 생기면서 꿈은 줄어들고, 자신감은 소심함으로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소심함을 '신중함'이라고 포장하게 되지요.

사실은 겁이 나는 겁니다.  사회적 지위가 생기고, 가족이 생기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모든 것에 있어 모험보다는 안정을 선호하고,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나름 변명하고 싶은 거겠지요. 그것을 비난하거나 자기변절이라고 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답니다.

그러나 진정한 꿈(Vision)은 바로 그 본능을 넘어서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습니다. 안정된 자리에서 다시 모험할 수 있는 용기,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도 그것을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꿈의 주인일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평범한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이 모이고, 나름의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여하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기 의무를 다했다는 자만심에 스스로 '크리스찬'이라는 이름 붙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교회는 제가 세우려는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세우기를 원하는 교회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으로 가족과 같은 교회입니다. 또한 그들의 작은 힘이 모아져 시대를 섬기고 중보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그늘에서는 아이들이 양심과 신앙으로 자라가고, 남편들은 존경을 받는 가장이 되며, 아내들은 부지런하게 가정과 주님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물론 그런 교회는 쉽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1~2년의 분투로 건물은 지을 수 있어도, 제가 바라는 그런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아니 어쩌면 한 사람의 평생이 거름처럼 드려져야 그런 교회가 하나쯤 세워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는 그런 교회를 향한 꿈이 있고, 그 꿈이 있기에 지금 목회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입니다. 그 어려움의 순간마다 나름 선택의 갈림길이 주어질 것입니다. 타협과 포기, 혹은 현실적인 길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꿈을 믿고 그 꿈에 자기를 헌신할 것인지 수없이 갈등하며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에 정말 아름다운 꽃 하나 피워서 주님의 기쁨과 보람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특별한 교회를 꿈꾸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인생 역시 평범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특별한 인생이 되도록 도전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란 역시 거기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그 색깔이 결정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 인생은 안전하게만 살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안전한 것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격려가 필요하겠지만, 격려만으로 모든 실패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는 방안의 평안 보다는 차라리 인생의 들판에서 모진 바람과 싸워본 실패가 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실패를 통해 우리는 손에 잡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들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용기, 신뢰, 관용, 인내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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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영어의 표현에서 'understand'를 ‘이해한다’라고 번역합니다.

그것은 ‘알다(know)’라는 의미와는 또 다른 것입니다.

그 단어를 분해하면 ‘아래에(under) 서다(stand)'라는 뜻이 됩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장에 서고자 할 때에는 항상,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해야 합니다. 그 겸손의 마음만이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많은 종교와 신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인간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신의 이야기를 성경 이외에서는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의 영광조차 잠시 포기하시고 한 아기로 태어나 30여년의 인생을 사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 되심이 곧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구조가 복잡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과 생각이 서로 다르니 우리의 삶도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의 고집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충돌이 일어날 때에 언제나 자기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름 자기의 생각에는 분명한 논리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과 사람의 조화가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그러한 갈등의 현장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해심, 곧 아래에 서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주장이 아무리 탄탄한 논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와 다를 때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또한 그러한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적이 아니라 동지로서 함께 생각할 수 있으며, 그 공존의 과정을 통해 사람다운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거나, 상대를 향하여 화가 날 때에 잠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 아래에 서 보십시오. 물론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되도록 이기려는 마음보다 함께 잘 되는 길을 찾으려고 할 때에 평화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배웁시다. 그분은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상종하지 않거나 모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자름을 그분의 온유함으로 덮어 주시고, 과거의 잘못이 아니라 미래의 축복을 향하여 함께 나가기를 권면하셨습니다.

갈등의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품어서 이기십시오. 갈등의 현실을 자기의 내면을 크게 하는 기회로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편안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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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3


가만히 보면, 착한 행실을 하면서도 말이 덕스럽지 못해서 그 행실의 값을 까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섬기고 입만 단속하면 모두가 감동하고 칭찬할 터인데, 스스로 공치사를 하거나 혹은 무례한 한 마디를 덧붙여 오히려 그 섬김이 욕이 되게 하는 것은 참 미련한 일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한 마디 말이 천 냥의 빚을 갚는다고 했거니와, 성경도 혀가 지극히 작은 지체로되 온 몸을 어거(馭車)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이 이쁘면 행동이 조금 모자라도 이해받고 칭찬을 들을 수 있지만, 말이 나쁘면 선한 일도 오해를 사고 주변의 친구를 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말에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거니와, 신자의 구원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전함으로 말미암으니 곧 신자의 말이 구원의 방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이 축복의 샘인데,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더러운 언어와 세상의 혈기로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목사가 간혹 말에 대하여 권면을 하곤 합니다. 말을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여기면 지금 쓰는 말도 불편하지 않은데, 왜 목사가 그렇게 집요하게 말의 품질을 가지고 따지는지 의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신자의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편한 말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말,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의 입장을 배려하는 말을 연습하여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 참 중요한 영성의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언어를 돌아보십시오. 신자답게 말하고 있습니까? 나의 말에는 정성이 담겨 있습니까? 아니면 부주의하게 그저 감정을 툭툭 던져내고 있습니까? 자주 주변으로부터 나의 말에 대한 지적을 받지는 않습니까?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전달하는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은 단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몸과 심지어 인격을 사용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례(無禮)하다는 것은 단지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의(禮義)란 본래 그 기본이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그를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예의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고 했습니다. 너무 격식을 따져서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적절하고 아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그와 같습니다. 부담스런 격식의 말을 꼭 써야 예의 바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편한 말이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고, 한 마디 농담이 모임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언어의 축복을 소중히 사용하십시오. 내 가족을 향하여 축복의 말을 하고, 타인을 향한 감사와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하십시오. 부주의한 말을 조심하십시오. 마음에 있는 생각이 모두 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잘 걸러내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만을 꺼내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길들이기 힘든 것이 ‘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을 우리 혀와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혀를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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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사람의 인생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회란 항상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다른 시간과 구분하여 ‘기회’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학생의 때에는 공부가 힘들게만 느껴지지만, 나이를 먹으면 그것이 젊은 날에 주어진 소중한 기회였음을 알게 됩니다. 경제적 부담 없이 젊은 생기와 기억력을 가지고 지식을 맘껏 자신 안에 담을 수 있는 기회는 일생에 그리 길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기회입니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려고 해도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의 시조가 있습니다. 늘 부모님 사랑의 그늘 아래서 자라오며, 자식은 부모가 항상 거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자식이 철이 들어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면 부모는 이미 떠나시고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쏜살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나이를 먹을수록 같은 1년의 무게가 그리도 다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맛있게 드실 수 있을 때, 아직은 걸어 구경할 수 있을 때 해드리지 못하면, 나중에는 돈과 시간이 있어도 그렇게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신앙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할 수 있는 것,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열심으로 교회의 중심에 기둥처럼 설 수 있는 것은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부담으로만 여기고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소중한 기회를 버리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축복하실 기회를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장에서 과연 무엇이 지금의 내게 ‘기회’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에서 2008년도가 유일한 것처럼, 무엇인가 소중히 여겨야 하고 꼭 잡아야만 하는 인생의 기회가 여러분의 오늘에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무심히 흘려보낼 때에 우리는 기회를 낭비하고 후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하려면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시급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둘의 긴장 속에서 가장 소중하면서도 가장 시급한 것을 먼저 할 때에, 부족한 인생의 시간을 아껴 행복을 가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회를 살려야 한다!’라는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내일로 미루다가 결국에는 인생에서 완전히 잃어버리고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바른 판단력과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 인생에 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고,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생각만 하지 말고, 그 생각의 보따리를 기도의 자리로 가져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 가운데서만이 우리가 인생의 기회를 소중하게 살려갈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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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0


사랑의교회 개척사를 읽었습니다.

강남이 허허벌판이던 시절, 외진 곳의 건물 4층에서 시작된 사랑의교회는 초기에만 하여도 청년들만 모이는 교회로 알려졌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교회들이 아파트 단지를 끼고 인원이 늘어갈 때에, 사랑의 교회는 그 성장세가 상대적으로 느려서 고민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초점을 흩트리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바른 제자도의 신앙으로 세우는 것에 전념하였고, 그 제자들이 양육되고 교회의 중심에 서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교회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세워졌을 때, 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동력을 잃지 않아 한국교회의 귀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들풀은 한 달에도 수 십 센티가 자라지만, 나무는 더디게 자랍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비로소 어느 것이 진정한 성장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기본을 든든히 하였던 나무는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다음 봄에도 성장을 이어가지만, 속이 비어있던 들풀은 추위가 스며들어 얼고 메말라 죽고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러한 원리는 교회뿐 아니라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변화된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가 될 때에만이 교회는 한 철이 아니라, 한 시대를 책임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해주는 바로 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타협하지 말고, 한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나보다 잘나고 부자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의 성공은 때로 조바심을 일으키고,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 생각은 우리의 삶을 혼란에 빠뜨릴 뿐입니다.

당장의 성공이 아니라, 기본을 든든히 하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록 느리게 보일지라도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세월이 쌓일수록 경륜과 지혜가 자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의 지체들을 하나씩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앞길을 통해 하실 일이 기대가 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젊은 시절, 신앙으로 무장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그 열정과 신앙이 귀하기만 합니다.

언젠가는 오늘을 회상하며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날이 있을 겁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처럼, 비록 지금의 초라한 현실이라도 그 언젠가의 창대함을 잉태하고 있던 시절이라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개를 들고 가슴을 폅시다.

지금은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을 지나고나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놀라운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경드림교회는 일본선교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소중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기둥으로 여러분이 쓰여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사, 여러분을 통해 그 일들을 섬기고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을 향하여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 소망과 믿음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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