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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6


새해에는 몇 가지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마다 드림교회의 목사로서 일기를 쓰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은 처음에 부임해서부터 쓰려고 했었는데, 그 때에는 얼마간 쓰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일기 쓰기의 번거로움 때문이 아니라 일기를 적는 것이 별로 유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기억하지 말고 망각에 흘려보내야 건강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는 법인데, 그 때의 일기들이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기도하다가 당분간은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정을 했었는데, 이번 2008년부터는 그 결정을 바꾸어 다시 목회일기를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교원고를 정리하여 1년 원고를 하나로 묶어보려고 합니다. 목사에게 설교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지만, 설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영적인 말씀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은 항상 무거운 부담감을 주는 일입니다. 저는 원고설교와 비원고설교를 병행합니다. 원고설교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만 때로는 자기의 원고 안에 갇히는 약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비원고설교는 훨씬 자유스럽고 주님께 더욱 민감하게 집중하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을 때에는 초점이 흐려지고 불안정하게 됩니다. 2008년에 저는 원고설교에 보다 치중하려고 생각합니다. 저의 주일설교 원고가 대략 A4용지 5~6매 정도이기 때문에 적어도 50편의 설교를 간추릴 수 있다면 아마도 A4용지 300매 정도의 분량이 정리될 것 같습니다. 목회에 있어서도 좋은 자산이지만, 우리 교우들을 위한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셋째는 2008년도를 통하여 교회의 규범을 새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간에는 보고의 체계도 없고, 격식도 없었습니다. 그저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지향해 왔기 때문에 굳이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면 그뿐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경드림교회도 외연(外緣)을 크게 하고 사역의 기초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목사만 일하는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일하는 교회를 향하여 조금씩 변화를 가꾸어갈 생각입니다.

넷째는 경건훈련의 작정입니다.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하고, 1시간 이상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꼭 실천하려고 합니다. 기도와 묵상 외에도 목사로서 독서와 개인적인 연구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 교회에 있는다 하여도 일도일묵(一禱一黙)의 경건훈련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목사로서 내가 사는 길이요, 또한 드림교회를 세우는 길이라고 믿기에 열심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문서사역을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종이를 막론하고 선교적 도구로서의 글을 보다 활용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볼 생각입니다. 이 일에 주님께서 은총을 주신다면 큰 비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기대합니다.

새해는 새마음과 새뜻으로 밝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번 2008년도에 어떤 뜻과 마음을 품으셨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결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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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0


2007년도는 동경드림교회가 화목했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지체들을 ‘교회식구’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 교회 울타리 안의 지체들을 정말 ‘식구’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런 교회를 원하지만 정작 우리 안에는 사랑에 대한 지독한 장애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화목 하는 교회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서로 쌓인 것도 많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다가 초대교회를 살피며 피식 웃은 적이 있습니다. 

2장42절에 보니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의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것을 나열할 때에도 먼저 언급하는 것이 그래도 뭔가 우선되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웃은 까닭은 교제와 떡을 떼는 것이 기도보다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묵상하니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형제’와 ‘식구’로 받아들이는 교제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교제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하나 되었을 때에, 그들의 기도 또한 집중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여서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은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서로를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정말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주의 사랑으로 충만할 것이며, 바로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 화목 속에서 드린 우리의 기도마다 얼마나 놀라운 응답이 있었습니까?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풍성하게 교회의 사역을 채워주신 것, 지혜가 건강하게 된 것, 두 가정에 아기가 생긴 것, 공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목표를 성취하고 건강했던 것, 무엇보다 조금씩 교회를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싹트고 자라가는 것... 모든 것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들이 아닙니까?

먼 훗날 우리가 2007년을 돌이켜보면, 참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할 것입니다. 지체들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야외예배를 가던 길, 장수호 권찰의 피자, 최동현 집사의 라면, 그리고 크고 작은 섬김과 헌신들. 그 모든 것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으로 인해 동경드림교회가 이처럼 화목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을 연습해 봅시다. 2008년도에는 기도하는 것을, 예배의 부흥을,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을 연습하는 동경드림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로부터 축복과 기쁨의 물줄기가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으로 뻗어나가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믿고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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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3


제법 매서운 날씨 속에 동경의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연말이 늘 그렇지만, 가족들의 품으로 고국에 들어가는 지체들도 있고, 여기 남겨지는 지체들도 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아마도 교회는 떠난 지체들의 빈자리가 제법 크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지체들의 심정이 다소 쓸쓸하고 우울할 법도 하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적응하고 살아남는다. 그러나 사람만큼 환경에 까탈을 부리고, 불평하는 동물도 아마 없을 것이다. 백 가지가 좋고 하나가 부족해도 그 부족한 하나에 몰입하고 불평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래서 감사는 노력과 각성을 필요로 하지만, 불평은 저절로 쉽게 나온다. 

이국의 나그네 생활에 어찌 서러움이 없으랴! 일본이 좋다고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가끔은 만나지만,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일본생활을 찬양하면 할수록 그렇게 믿고 싶고, 그래야만 억울하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암시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곤 한다.

사는데 필요한 것은 빵만이 아니다. 시설이 좋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도 사람끼리 정서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사는 재미를 찾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동경에서의 삶은 나름 편하면서도 피곤하다.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정서적 긴장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 속에 스며들어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은 그들과 똑같은 색깔을 위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연습하고 숙달되어도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못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

연말을 보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어른들을 뵙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고, 가족들과 단란하게 먹던 명절 음식도 그립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른 무엇보다 그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그 땅을 밟고, 그 공기를 호흡하고, 사람들 속에 묻혀 익숙했던 곳들을 배회하고 싶다. 그러면 굳이 무엇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좋을 것 같다. 조금은 나이가 먹어가니 ‘고향’이라는 말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가 보다.

성탄절이 목전이다. 우리가 다 알듯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의 고향 마을인데, 아주 작은 산골마을이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향하여 ‘너는 결코 작지 않다’고 노래했다. 말하자면 작은 마을이지만 거기서 유대의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때문에 작지 않다는 뜻이니, 아모스 시절에도 작기는 작았나보다.

히브리어 ‘벧’은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헴’이란 그들의 말로 ‘떡’이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주 촌스러운데 그 뜻은 의미심장하게도 ‘떡집’이라는 뜻이다. 로마의 식민지 변방, 유대 땅에서 깊은 시골, 촌스러운 동네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되신 하나님이 태어나셨다. 거기가 그분의 고향이 되었다. 

성탄절마다 그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과 구유를 경배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고향이란 거기 어떤 건물과 풍경보다도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의 가치를 통해 세상에 의미를 던지는 이름이라고... 예수님 덕분에 베들레헴이 빛을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내 고향은? 

이곳 일본에서 어떻게 살지에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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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6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소란한 성탄시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구조가 ‘민주주의’라면 우리 대한민국은 그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누리는 몇 개 되지 않는 나라중의 하나라는 것이 감사하다. 

그런 점에서 잠시 정리하고 생각할 것이 있다.

한국사회는 토론의 문화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지만 자기를 주장하는 것에서만은 이미 충분히 강해진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소위 누리꾼으로 불려지는 사람들 중에는 ‘논객’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마치 검객이 칼의 전문가이듯이 말의 전문가들로 사람들의 생각을 이끈다.

문제는 이들의 색깔이 너무 호전적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윽박지르고 조롱하려 든다. 특히 선거와 같은 사회적 이슈는 이러한 분열과 상호비방을 더욱 열렬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매우 근심스럽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 경험과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 

민주주의는 사람마다의 차이를 인정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최대의 행복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탄생했다. 때문에 누구나 자기의 주장을 공정하게 알릴 수 있으며, 그 주장에 대한 대중의 선택을 ‘선거’라는 방식을 통하여 받고, 모두가 거기에 순복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아주 오래 전부터 경험해 왔지만 정작 권력을 가진 자들의 농간에 의하여 ‘속임수’로 결과물이 만들어지거나 뒤바뀌기 일쑤였다. 때문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회적으로도 이미 끝난 선거에 대한 뒷말이 많았었다.

이러한 전례 때문인지 여전히 사람들은 믿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선거의 제도가 최고는 아니라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사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결국 한국 사람들은 한국사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지독한 불신의 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원칙을 생각하고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대한민국의 선거를 모독하거나, 우리의 선택을 스스로 불신하지 말자는 것이다. 

개혁과 진보의 양측이 나라를 위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가운데 정권이 발전하고 사회의 균형이 갖추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큰 틀에서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대통령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민중의 나라, 모든 국민이 주인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부재자 투표라는 제도가 있지만 게을러서 결국 이번 선거에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먼 곳에서나마 조국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기도의 은혜 가운데 주님께서 대한민국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자 한다. 빨리 모든 것이 끝나고 함께 성탄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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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9


최근 들어 두통에 자주 시달린다.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체질적으로 허약하여 스무 가지가 넘는 고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식이나 혈통뿐 아니라 육체의 강건함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사실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몸은 영혼의 그릇인지라 몸의 상태가 나쁘면 기분도 가라앉고,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 빠지기 쉽다.  

갈멜산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엘리야가 곧 이세벨 왕비의 수배를 피해 로뎀나무 그늘로 피했을 때에 한없이 우울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상황도 나빴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엘리야의 피곤함이었다. 주님은 그것을 이해하셨고, 그래서 천사를 보내어 먹이고 마시우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지친 엘리야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바울이나 루터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육신의 약함을 그대로 포용하셨다. 그 모습 그대로 쓰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자신이 ‘자고(自高)’할까 경계하신 것이라고 풀이했다.

‘자고(自高)’라는 마음의 병을 경계하기 위하여 육신의 병을 사용하셨다는 바울의 해석은 하나님의 경륜과 은혜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에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 하나님이 바울을 위해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난, 실패, 고통 또한 그분의 자비하신 은혜의 선택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지체들의 피곤한 모습은 목회자로서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 이제는 좀 걱정을 벗어나 편하고 쉬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목사로서의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르고, 나보다 그분이 더 옳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때문에 편한 길을 달라는 기도 보다는 모든 것을 잘 이겨내는 지혜와 힘을 달라는 것이 요즈음 나의 기도이다. 

이제는 교회가 많이 편안해졌지만, 아주 느슨한 것도 사실이다. 내년에는 뭔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람도, 재화도, 의욕도 빈약한 현실이 목사로서의 내 고민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아마도 그래서 두통이 일주일 내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가보다. 

한참을 싫어하다 생각하니 이 두통도 역시 주님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걱정할 시간에 기도하라는 설교를 했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에 주목하라고 충고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정신적 피곤에 지치고 근심에 함몰된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분의 음성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동경드림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가 아닌가! 

내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근심할 필요도 없다. 내려놓고 기도하고 좇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내가 머리도 아니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두통이 왔나보다. 심히 회개할 일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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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2


겨울이 될수록 햇볕이 따스합니다. 

볕 아래서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치 하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푸근함이 온 몸에 느껴집니다. 얇은 눈꺼풀 너머로 밝은 태양이 온기를 쏘아대고, 그래서 감은 눈 안에서도 태양이 보입니다.

벌써 12월에 들어섰습니다. 언제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옛날 수첩을 꺼내 보니, 제가 일본에 온 것이 12월16일(금)이더군요. 그리고 18일에 제자촌교회의 담임목사로 첫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간 것입니다.

참 매서웠던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해에는 동경에 눈도 제법 왔고, 그래서 길도 꽁꽁 얼어 며칠간 녹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목사로서의 책임이 무거웠습니다. 낙심하고 지친 지체들을 위하여 목사로서 긍정적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나 자신은 많이 불안하고 막연했던 것 같습니다. 내색할 수도 없는 혼자만의 고민이 많았고, 처음에 가졌던 자신감은 점점 고갈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막연하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절실하게 기도했던 세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때마다 합당한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로 인해 정말 절실하게 기뻐하고 하나님을 느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통한 날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날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한 모금의 햇볕처럼 추운 우리의 품에 주시는 빛나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막연했던 하나님을 보다 가까이 느끼고 이해하게 되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리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로 부름 받아 목양에 뜻을 두어 여러분을 이해하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고 알지 못하는 무지와 무능력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인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은혜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결코 그 은혜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경드림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이 건물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하나하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걸음마다 주님께서 섬세한 손길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 느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이것은 사실입니다.

믿고 감사합시다. 교회도 좋은 길이 열리고, 여러분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2007년도를 정리하고 2008년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물론 기도 속에서 말입니다. ^^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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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5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답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그 과정 자체가 감동적이고 의미 있다. 변하고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하나의 목표를 앞에 두고 평생 노력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감동 받고 우리 자신의 삶을 소중히 다루게 된다.

요즘 두레양이 만화가 데뷔를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과 대만을 다녀오는 동안 그 흔한 인사 한 마디 없어서 내심 섭섭했는데, 그래도 본인에게는 마음을 다잡고 자기를 추스리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는가 보다. 

다녀온 이후로 룸메이트와의 관계도 잘 정리되고, 요즘은 본인의 작업에 푹 빠져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아마 지금은 그리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가족 이야기도 있고, 일본 유학생활도 있고, 언젠가는 우리 교회 이야기도 두레양의 손을 통해 만화의 몇몇 장면이 되어 세상에 소개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신나는 과정을 넘어서 더 멀리 가야만 꿈이 있다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다. 가진 밑천이 다 바닥나고(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도),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을 때도 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바람결에 들려와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절에는 스스로도 의심이 생긴다. 정말 내가 이 일에 맞는 사람일까? 정말 나에게 재능이 있는 것일까? 혹시나 내가 오르지도 못할 나무에 매달려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팔팔하고 재능이 뛰어난 젊은 후배들을 보며 주눅이 들기도 한다. 내가 못하는 것을 척척 해내고, 삶에도 뽀얀 기름기가 흐르는 ‘신세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는 사람은 전혀 ‘내꿈’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대답하게 된다. 꿈은 언제나 그 너머에서, 다시 말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충분히 증명한 사람들에게서 열매가 되어 나타난다. 꿈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

힘찬 첫걸음부터 너무 겁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단단한 각오가 없었기에 너무 일찍 꿈을 접고 현실에 동화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목사로서 나의 두레양이, 그리고 내가 목양하는 동경드림교회의 식구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형통과 축복을 바라는가? 나도 그것을 바란다. 하지만 성경이 말해주는 형통과 우리가 바라는 형통 사이에는 큰 시각차가 존재한다. 

진정한 꿈은 인생의 눈물로 영글어간다. 만약 그런 눈물의 자양분이 없다면 그건 온실의 꿈이지, 광야의 꿈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세운 계획, 그 너머에 계신다. 그래서 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시작인 것이다.

절망의 바닥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런 용기와 힘을 우리에게 준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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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8


오랜만에 지혜가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함께 과일을 먹고, 놀이를 합니다. 나무 블록으로 탑도 쌓아 올리고, 오빠들과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함께 책상에 앉아 그림도 그립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모가 억지로 말을 걸었습니다. “촌놈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쁘냐?” 그랬더니 대뜸 지혜가 고개를 돌리면서 “うるさい!”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 한 마디에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지금은 이 녀석이 내 앞에 앉아서 “목사님, 지금 뭐해?”라고 물으며 눈빛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아이입니다.

올해에만 해도 이 녀석에게 모질고 힘든 수술이 몇 번이었는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시간들, 얼마 전까지 병원에 아이를 보내며 가슴으로 울던 날들이 모두 꿈만 같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제는 지혜가 조금 편안해 보이니 교회가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지혜의 미소는 내가 살았던 지난 1년의 세월과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맘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일본을 향해 발길을 떼는 나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물론 다른 소원들도 있었지만 제일 간절했던 것은 지혜로 인해 눈물 흘리던 두 집사님과 포대에 싸여 있던 갓난 아이, 지혜를 곁에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라 믿기에, 내가 목사로서 한 사람을 세워줄 수만 있다면 그 한 사람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옳게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켜 지난 2년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혜뿐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섬겨야 할 사람들이 더 많이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타인과 손님으로 만났던 지체들이 이제는 형제보다 더 가까워져서 내가 기도해줘야 하고, 신앙을 챙겨주어야 합니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가고 있어도 그런 점에서 참 부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도 때로는 하나면 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지난 1년을 통해 가장 귀한 선물,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지혜’라는 선물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응답하실 것이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먼저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것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조직이 아니라 비전을, 겉모양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접대가 아니라 형제의 교제를, 돈이 아니라 건강을,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경건을 추구해야 합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저는 우리가 바르게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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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1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는 항상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문방구나 가게보다 훨씬 싸고 푸짐한 노점상의 먹을거리들은 조그만 주먹에 동전을 만지작거리게 만들며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갈등을 주곤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때로는 그 시절에 먹었던 그 ‘불량식품’들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달고나, 뽑기, 쫀득이, 쭉쭉이, 본드 같은 튜브에 들어서 빨대 끝에 묻혀 풍선을 불다가는 질겅거려 씹던 이상한 껌? 등... 그 시절에는 누구나 먹었던 아이들의 이상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불량식품’을 경계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타일렀고, 선생님들은 종례시간에 노점상 앞에 멈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훈시했지만, 그래도 항상 아이들은 그 노점상 앞에 북적거렸고, 그 푸짐한 유혹은 끝내 유년의 기쁜 추억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건 분명히 건강에 해가 될 만한 음식들이었는데도, 그것을 먹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다시 그 이상한 먹거리들을 추억하게 된다는 것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우리의 몸이 얼마나 독소를 잘 해독하고 소화의 기능이 뛰어난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

곰곰이 더 생각해보면, 건강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병균과 독소가 몸에 해롭다고 하여서 무균실에 들어가 산소만 마시면서 사는 것이 결코 건강한 삶이 아닌 것처럼 때로는 세상의 풍파와 세속에 처해 있으나 그것을 적절히 소화하고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젊은 청년을 보고 ‘돌도 씹어 삼킬 나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듣던 시절에는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좋은 음식 다 놔두고 돌이 뭐야! 그럼 나더러 돌밥이나 먹으라는 뜻인가?’라는 반항적인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은 젊음의 건강함이 흠뻑 묻어나는 담백한 표현이 아니었나 합니다. 돌도 씹어 삼킬 나이이니, 조금 억울한 일이 있어도, 섭섭한 감정이 들어도, 힘들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긍정적 암시가 어른들의 말씀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설교 듣고, 맘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항상 위로와 감동 속에서 사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생활만을 동경하면 평생 만족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신앙이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 때로는 내게 해로운 것까지도 은혜 가운데 좋게 해석하고 유익하게 소화해서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나에게 건강의 비결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정해진 시간만큼 삽니다. 그리고 그 삶의 시간 동안, 불안과 걱정, 두려움으로 살 것인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결정합니다. 참된 신앙은 물론 어떤 경우에도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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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4


항상 위기는 기회도 됩니다.

사람은 무언가 절박함이 없이는 마음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 오히려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살만 해서 안일하게 넋이 빠진 사람보다 뭔가 간절한 이유가 있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께 예민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위기는 위기대로 해결하고 또한 함께 많은 은혜를 받으며 예상치 못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와 삶의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하여 우리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문제 속에서 우리의 초점은 ‘해결’이지만 하나님의 초점은 ‘변화’와 ‘성장’입니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목표가 먼저 이루어져야 다음으로 우리의 목표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가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위기를 통해 뭐가 변해야 하고 어디가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찰하시고, 우리의 미련함을 긍휼히 여기사 마치 가정교사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자상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위기 가운데 기도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위기 자체를 인하여 눈물 흘리는 것이지만, 점차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부어질 때에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삶에 실천하기 위하여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러한 훈련의 방식이 참 감사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해결’만을 주신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수록 점점 유약(幼弱)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고 변화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록 오히려 더욱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위기는 점점 사소해지고, 삶은 모험과 기대로 충만하게 됩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만, 요단강의 범람하는 물결 앞에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종했습니다. 40년의 세월 후에 그들이 겪었던 위기가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면서 그들은 이제 비로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크다 하면 크고 사소하다 하면 사소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결정에 따라 얼굴을 달리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오히려 기대로 가득찰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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