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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피가로(LeFigaro)의 기사입니다.  [ 원문 ]
- 원문은 읽기제한이 있습니다. 유료 독자에게만 전문이 공개된다고 합니다.

Coronavirus: en Corée du Sud, la mobilisation exceptionnelle porte ses fruits

-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한국, 엄청난 결집력이 열매를 맺다

 

기술력, 대규모 테스트, 투명성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협력이 바이러스 저지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이 선택한 중요 전략 요소. 

 

Sébastien Falletti 기자

 

바람처럼 달려가는 버스 안 여기저기서 일제히 휴대폰 진동이 들려오고 동시에 마스크 넘어 잡아먹을듯한 눈빛으로 액정을 파고든다. 서울 중심가 부유층들이 주로 거주하는 한남동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은 새로운 확진자가 막 발생했다는 서울시 공지가 이 날 , 3월 12일 뜬 것이다. 

모두들 일제히 확진자의 세부 동선과 지난 며칠간 겹쳐지는 구간이 있는지 걱정스레 찾아보고 있다. 

 

이 35살 폴란드인 확진자는 유럽에서 돌아와 공항 연계 고속철도를 타고 3월 10일 오전 9시 반 경 서울에 당도했으며, 편의점에 들러 오후에 집에 도착해 쉬기 전까지의 데이터가 낱낱이 공개되었다. 저녁 6시 경 부자 피자Pizzeria d'Buzza에서 저녁을 먹으러 가고 7시에 그 옆 편의점에 들렀다. “그 무렵에 전 바로 그 맞은편 카페에 갔거든요, 좀 무섭네요” 라고33살 소현씨가 말한다. 

 

한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된 지난 1월 20일부터 지금까지 오천만 한국인들의 일상은 현재 살고 있는 지역 지자체에서 보내주는 알림문자에 익숙하게 반응하고 있다. 한치의 의혹이라도 있을시 바로 1339번으로 알리도록 독려한다. 한 명 한 명 무려 7700명 이상의 환자들의 동선이 복원된건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역학조사 및 신용 카드 구매 내역 정보 덕분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당국에서 환자 동선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환자의 기밀 및 인권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 

 

첨단 기술과 민주주의의 나라 한국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사악한 모습을 숨긴 채 주변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환자들을 꼼짝 못하도록 바이러스를 뒤쫓고 있다. 신분을 숨기고 새 신자를 포섭하려는 전략을 취하는 이단 “신천지”는 폭발적인 바이러스 확산의 진원지였고 한국 내 발생한 확진자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 특히 서울에서 300km 떨어진 “한국의 우한”이라 불리게 된 대구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이 추적 과정을 질색하여 불륜조차도 개인 생활 침해라 옹호하는 이들이 있는 상황이라 현재 확진자들의 이름만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우리는 환자의 기밀 및 인권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단언한다. 현재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투를 진두지휘 중이다.

 

”대규모 검사가 벌어지고 있는 작전현장”

 

기술력, 대규모 검사, 투명성, 주민들의 협력이 중국발 바이러스 저지를 위해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선택한 전략 구도의 핵심이다. 아시아에서 네 번째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이자 “빨리빨리pali pali”(vite vite)의 신봉자인 이 나라는 위협을 마주하고도 지체하지 않았고 “적색”경보가 울린 지난 몇 주간에 걸친 노력이 오늘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 중국을 상대로 폐쇄정책을 취하지 않고도, 경제 상황이 정지되지 않고도, 한국은 국가적인 전염병의 위협을 저지하고 있다고 본다.” 

 

지난 목요일. 새로운 확진자의 숫자가 110명대로 떨어졌다. 지난 2주 이래로 진행 방향이 가장 약했던 순간이다. 대구지역은 225명으로 집중되어 이 움직임에 영향은 받지 않는다. 중국을 상대로 폐쇄정책을 취하지 않고도, 경제 상황이 정지되지 않고도, 한국은 국가적인 전염병의 위협을 저지하고 있다고 본다. “곡선 커브가 완만해지고 있습니다. 공공의 자유를 유지하되 바이러스를 타겟으로 강력한 싸움을 대비할 수 있는 주목할만한 본보기modèle입니다.” 라고 서울에 거주 중인 유럽의 한 고위 외교관이 중국의 대응과 한국 정부의 조치를 구별하며 전했다. 

 

한국 정부는 아직 승리를 외치기를 거부한 채, 더욱 바짝 주의를 기울여, 특히 유럽을 비롯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지역에서 돌아온 여행객을 최우선 위험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라고 문 대통령이 전했다. 4월 15일 조심스러운 총선을 앞두고 보수 반대 진영의 집중 포화를 견디는 중이다.

 

조용하게 다가오는 대유행 질병의 공포는 대구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새로운 확진자 발생 건수의 꾸준한 하향세는 고무적이다. 비록 이번 주 초 서울의 한 콜센터가 새로운 “감염집단”으로 떠올랐긴 해도 말이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새 환자 90명의 측근들은 한 명씩 검사를 받고 지하철 역 소독하듯 사무실 소독 투어가 이어졌다. 

 

통계자료를 통해 한국이 유럽과는 비교불가능한 대규모 진단 검사를 실시해왔다는 사실에 관한 신뢰도롤 더욱 높여준다. 한국은 이미 210000명 이상 진단 검사를 실시했고, 하루 18000명 검사가 가능하다. 이탈리아를 훨씬 앞선 숫자이며, 50000명 검사한 유럽에서는 전례없는 기록이다. 

산업 장비 동원과 사회적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낸 물류 체계의 쾌거. 이 진단검사는 한 명 한 명을 전부 “위험한 상태”로간주하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치사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0.6퍼센트에 머무르게 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중국의 치사율보다 아래다. 

 

” 위기는 한국문화의 일부다”, Philippe Li,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바이러스의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한마음으로 바짝 경계하되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은 북한의 잦은 도발에 대응하여 살아가며 몸에 밴 또다른 강점이다. ” 위기는 한국문화의 일부입니다.” 라고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인 Philippe Li가 생각을 전했다. 이미 직원들 절반이 재택근무 중이고 지난 몇 주간 미팅도 연기되어 왔다. 

 

약국 앞에는 질서정연하게  마스크를 찾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져 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을 더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을 지닌 이 나라에서 마스크는 이제 일상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악세서리다. 각자 손소독젤을 주머니에 넣어다니고 카페와 상점은 정기적으로 소독한다. “방역의 기본 원칙은 일상에서 세워집니다. 삶은 계속 되지요. 한국인들은 이제 유럽의 상황이나 주식시장의 붕괴를 더 염려합니다.”라고 Philippe Li가 설명한다.

 

전세계가 성장을 멈추면  부메랑 효과로 세계화에 이미 크게 노출된 이 나라에 다시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 이 위기가 경제 전선 위에서 또다른 위기를 낳을 지도 모른다. 

 

인용 :  [ 클리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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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강 ] 왜 큐티해야 하는가?

 

[ 제2강 ] 큐티의 시작

 

 

[ 제3강 ] 본문의 해석

 

 

[ 제4강 ] 큐티의 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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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2 목양칼럼

 

온 세상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난리입니다.
전염병 보다 더 슬픈 것은, 공포의 상황에서 번지고 있는 '혐오'의 감정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동네에서 들었던 "차이니즈, 고 어웨이!"라는 헤이트 스피치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일본인의 눈에는 지금, 모든 아시아계의 이민자가 다 중국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더 심하게는 전염병을 옮기는 환자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맹목적인 혐오는 어제 오늘에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지진이나 대화재의 상황에서 항상 공포의 희생양을 만들어 왔습니다. 
얌전해 보이던 일본인들이 갑자기 흉폭해지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공포의 그늘이 얼마나 크고 짙은가를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경을 폐쇄하자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모든 군대를 다 동원해도 모든 사람들의 이동을 다 감시하거나 막을 수 없는 시대가 이미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제화 되어버린 오늘에, 어떤 나라나 민족을 전염병에 방치하고 우리끼리만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따위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혐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어려움 앞에서 힘을 합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가야 합니다. 
같은 민족과 나라에만 연민을 발휘할 것이 아니라, 이제 '인류'라는 공동의 운명체에 대하여 새로운 시야를 열고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난이 국가간의 협력과 공조를 강화하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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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1 목양칼럼

 

미국 캘리포니아의 인요국립공원에는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자생하는 특별한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브리슬콘 소나무의 일종인데, 그 수령이 무려 4,900년 이상이라고 합니다. 
보통의 나무는 나이테를 통해 수령을 측정하지만, 이런 고령의 나무는 좀 더 특별한 방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1957년 애리조나 대학의 애드먼드 슐먼이라는 학자는 생장추를 이용하여 나무의 나이를 측정한 결과 이 나무가 4,900년 이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에게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우리의 상상 만큼 거대하지는 않습니다.
이 나무는 춥고, 바람이 많고, 강수량이 적은 환경에서 100년에 고작 3센티를 굵어지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나무에게 혹독한 환경이 오히려 나무를 단단하게 만들어 4,900년을 살고도 여전히 건재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릇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교훈입니다.
열악한 환경이 사람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환경을 잘 견디고 생각과 인품을 가다듬으면, 오히려 더 거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거친 비바람 속에 서 있게 되었을 때에, 므드셀라 나무를 떠올려 보시기를 권합니다.
100
년에 3센티를 크는 나무는 자기보다 앞서 거대하게 되는 수많은 나무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급하지 않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에는 '므두셀라'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지고 지구를 대표하는 나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속도 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며 성실함입니다.
무엇을 소유할 것이냐에 얽매이지 말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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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목양칼럼 / 2020. 3. 14. 00:58

 

2019-12-29 목양칼럼

 

"히까리가오까, 히까리가오까… 슈텐데스!"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한 해가 간다는 말은 굳이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량의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무디고 허술하게 산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금은 반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제가 정신이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병환 소식에 놀라기도 많이 놀랐고, 엄청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종점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척 당황하게 했습니다.

금년에 저는 오십살이 되었습니다.
스무살에 사역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어언 나의 사역도 30년을 채운 셈입니다.
처음에는 '
목사'라는 이름이 낯설고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지극히 당연하게 나를 '목사'로 여기는 나를 봅니다.
제가 얼마나 더 '목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 나머지의 여백에 앞으로 무엇을 채울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저에게 각성과 변화를 요구하시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히 점점 가속도가 붙는 일입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올해보다 내년이 더 빨리 지나갈 것입니다.
하던 대로 살고, 익숙한 자기 방식에 길들여지면 인생은 물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할 일도 꼭 하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이 보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과정이지만, 되도록 유익하게, 후회없이 살았으면 합니다.

금년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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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4 목양칼럼

 

올해 60세인 달린 퀸은 미국의 한 농촌에 있는 페덱스 배송 회사에서 관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3개월 전 쯤에 아주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의 고물차가 그만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집에서 직장까지 19km를 걸어서 출퇴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담담하게 그녀의 처지를 이겨 나갔습니다.
동료들은 출근길에 그녀를 보면 차에 태워주고, 퇴근도 함께 해주곤 했지요.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의 동료인 루이스는 몰래 일을 꾸몄습니다.
그녀의 사연을 모금 사이트에 올리고 펀딩을 시작한 것입니다.
직장의 동료들은 그녀를 위하여 연대했고, 일주일만에 8300달러의 거금이 모였습니다.

결국 중고차이기는 하지만, 2014년도식 SUV를 구입하여 그녀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달린 퀸은 지난 주에 그 선물을 받고 "당신들이 나를 울린다"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감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연대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요즘입니다
.
우리 시대의 이 문제는 제도적 개선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극화는 결국 비인간화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손을 이어 잡고 이 문제에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가난한' 우리가 아니라 '행복한' 우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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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7 목양칼럼

 

트리나 파울루스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은 오랜 시간 사랑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 책에는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 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겨 물었습니다.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소원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진짜 소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되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원이라고 믿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소원이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거나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도착하셨을 때에, 그 주변에는 기적을 바라는 병자들도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무려 38년 동안 병에 고통 받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기를 그저 희망하는 정도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낫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하고 위험한 하늘에 도전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기꺼이 던질 각오가 서 있습니까? 
그토록 간절한 소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말 소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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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목양칼럼

 

한겨레에서 출판된 김선주의 책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싫든 좋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모든 크고 작은 이별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이별의 타이밍을 놓치고 허망한 미련을 두어 좋은 추억까지 다 지긋지긋한 원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간혹 생깁니다.
추호(秋毫)의 실수도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독한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혜를 얻어야 하고, 그렇게 얻게 된 지혜가 바로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이 한 문장이 아닐까 합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처럼, 선택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서 북받치는 감정으로 충동적인 이별을 선언하기 보다는, 미리 예감하고 감정을 준비하고 절제된 언어와 방법으로 이별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이별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헤어져도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와 나의 시간이 얽혀 만들어진 기억은 영원히 내 안에 고스란히 남겨질 흔적이라는 점에서... 이별에 예의를 갖추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이별 후에 뒤돌아 욕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초라하고 누추하다는 사실을 과연 모르는 것일까요?
그들도 누군가를 통해 이별을 겪다보면 결국은 알게 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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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목양칼럼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온 마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면 좋은 것입니까?”
좋지 않다.”
그러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좋은 것입니까?”
그것도 좋지 않다.”
그리고 잠시 후에 공자는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너는 마을의 착한 사람들은 좋아하고 악한 사람들은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댓글로 먹고 살기도 하고, 악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요즘 새롭게 생겨난 부류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하며 살아도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칭찬과 욕을 함께 먹으며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외부의 목소리에 너무 흔들리고 낙심하는 연약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왜 그렇게 평화가 깨뜨려지고 불안에 떨게 되었을까요?
내면의 질서와 마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기 전에,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하고, 그 고요함 속에서만 들리는 창조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경건이라 하고, 이러한 경건을 통해 쌓이는 내면의 힘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내면의 단단함을 신앙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질서와 영성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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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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