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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4 긍정적으로 기대하기



요즘 큰아들 준혁이가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족들도 열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이 늘 좋은 격려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잔소리도 되고, 걱정도 되고, 책망도 됩니다. 가끔은 이런 말들이 오히려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조심스럽게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더 부드러운 남편의 모습을 기대하고, 더 자상한 아내의 모습을 기대하고, 더 착한 자녀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대감은 오히려 실망만 안겨주고 서로의 마음을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더라도 그렇게 잘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계속해서 기대하는 마음만 표현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받게 되면 그 의무를 포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 생각, 능력을 고려하여 때로는 우리가 가지는 기대감을 낮추거나, 혹은 조금 더 천천히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기대감이 관계를 망치지 않고 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 기대감이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고 아직 실망하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면서도, 아직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이해와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한 번 약속을 어겼다고 하여서 크게 실망감을 드러내고 상대방을 상처 주면, 관계는 점점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러나 너그럽게 이해하고, 조금 더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빌립보서 4: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기대하는 것을 숨기고만 살아가지는 마십시오. 기대하는 마음은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다만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면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기대를 통해 점점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요?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샬롬~



肯定的に期待すること

 

2010-10-24 牧羊コラム

 

最近、長男のジュンヒョクが高校入試の準備をしています。できれば、より良い学校に行ってほしいと思って、家族みんなが応援しています。しかし、その期待感がいつも良い励ましにはなりません。時々、その期待は小言、心配、叱責になってしまいます。逆に、このような期待の言葉が子供の心を傷つけてしまうのではと思い心配になります。だからこれからはより慎重に期待しているという心を表現しようと思います。

私たちは愛する人に期待を持ちます。もっと優しい夫の姿を期待し、もっと親切な妻の姿を期待し、もっと素直で良い子供の姿を期待することは自然なことです。なぜなら彼らは私たちが愛する人だからです。だけど気をつ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相手を理解できない期待感は返って失望させ互いの心を傷つけ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からです。人が変わることには相当な時間が必要です。また人は自分がどのようにすればよいか知っていても行動できない時が多いです。そんな状況にも関わらず続けて期待する心だけを表すことは負担になってしまいます。また私たちは自分が負えない負担を受けるとその義務を諦めようとする傾向が現れることもあります。何かを期待する前にまず、その人の立場、考え、能力を考慮し時には私たちが持つ期待感を下げたり、もう少しゆっくり表現する必要があります。そうすれば期待感が関係を壊さずもっと肯定的な結果を作っ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

あなたは今、あなたが愛する人に何を期待していますか。その期待感が簡単に満足できないからといって失望しないでください。互いを愛し、相手が何を期待するか知っていてもまだそのような行動ができないのなら、もっと多くの理解と努力が必要なだけです。一度、約束を破ったからといって失望感を大きく表し相手を傷つけたら、関係はどんどん悪化するだけです。だから寛大な心で理解し、もう少し待つ方法を習ったら私たちが予想したよりもっと良い結果を一緒に作っていけると思います。

聖書のピリピ4:5によると

「あなた方の寛容な心を、あらゆる人々に示しなさい」(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と書かれています。

期待することを隠さないで生きてください。期待することは愛の一種です。ただもう少し穏やかに表現してください。そして待つことを訓練してください。愛する人のために毎日お祈りするとこのような態度を持つことには役にたちます。愛する人が自分の期待を通して少しずつ変わっていくことを見届ける事より美しい姿があるの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事を経験する事は本当に幸せな事のは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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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솔직한 대화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것에는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단계에서 사람은 습관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밥 먹었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주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다른 친구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아이에 대하여 말을 하지만, 역시 자기의 마음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드러냅니다. 대화 하는 동안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자기의 느낌과 감정까지 솔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대화는 관계를 깊어지게 하고 사랑을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대화는 사실 처음의 1~2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서도 정작 서로 깊이 친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커튼을 가운데 두고서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옆에 있으면서도 무엇인가 차단된 것만 같은 느낌이 우리들을 외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성도들뿐 아니라,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침대를 사용하는 부부임에도 대화가 깊지 못하면 오해가 자라납니다. 아주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부부의 견고한 사랑이 금이 간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솔직한 대화를 훈련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방어적인 경계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때문에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일이 대화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분노와 미움과 같은 감정들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쁜 영향력을 미칩니다. 반대로 아름다운 음악이나 좋은 차를 나누어 마시는 것은 솔직한 대화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칭찬'입니다. 

 

당신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오늘 요리는 아주 훌륭했어요. 당신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이군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화하는 사람은 좀 더 쉽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생각하십시오!" (빌 2:3) 

이것이 행복한 대화와 관계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이와 같은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십시오. 특별히 가정에서 칭찬이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돕기 위해서, 당신 부터 편안한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率直な対話

2010-10-17 牧羊コラム


人が互いに対話をすることには四つの段階があるといわれています。

初めての段階では人は習慣的な言葉を使用します。例えば、「食事はしましたか。」「良い朝ですね!」などの言葉です。このような言葉には話している人の心がよく表れません。二番目の段階では私たちは主に自分ではなく他人の話をするようになります。他の友達について、近所の人について、子供について話しますがやっぱり自分の心はよく表れません。三番目の段階でやっと私たちは自分の判断や考えを表します。対話をしている間、相手を警戒していた心が少しずつ 開いていく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最後の四番目の段階では自分の感じや感情まで率直に表すようになります。このような対話は関係を深くし愛を発展させます。

だが、私たちの大半の対話は実は最初の1~2段階を超えていません。だから長い間一緒にいても互いに親密になっていかないのです。カーテンでしきりを作って互いに対話するように、横にいるけど何か遮断されたような感じが私たちを孤独にさせてしまうのです。これは教会の信徒達だけではなく夫婦の関係にも当てはまります。

同じベットを使用する夫婦でも対話が深くなければ誤解が生まれます。とても小さな誤解のせいで夫婦の固い愛にひびが入ってしまうのはとても不幸なことです。だから私たちは率直な対話を訓練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が率直に話そうとすることだけではなく、相手が自分を表し率直に話せる雰囲気を作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人は安心感の中で防御的な警戒心を諦めるようになります。だから相手を感情的に安心させることが対話の中では一番重要です。怒りや憎しみのような感情は対話を始める前に悪い影響力を及ぼします。だが、美しい音楽や良いお茶を分けて飲むことは率直な対話をするのに助けになります 。だけど何より良いことは「褒める事」です。

「あなたと一緒に対話をすることができてうれしいです。」

「今日の料理はとても素晴らしかったです。」

「あなたの声はとても魅力的ですね。」

「配慮していただき有り難うございます。」

このような言葉を聞くと、対話する人はもっと簡単に自分の心を表せるようになるのです。聖書によると「ただ謙遜な心で他人より自分を低く思いなさい。」(ビル2:3)

と書いてあります。これが幸せな対話と関係の秘訣です。神様は私たちが互いに向けてこのような心で尽くすことを 願っているのです。

今日から隣にいる人を褒めてください。特に家庭内で褒める事が足りないのではないか考えてみてくださいいまあなたが愛する人のために必要なことは、自分の心を率直に話せる勇気ですその勇気を助けるために、あなたから安心できる人になっ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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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0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따른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한 젊은이가 학문을 구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어느날 개울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한 노인이 다리 위에서 슬며시 자기의 신발을 물에 떨어뜨리더니, 젊은이 신발 좀 꺼내 주게! 라고 청하였다. 청년은 노인이 일부러 신발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참고 물에 내려가 신발을 가져왔다. 그리고 내친김에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꽤 쓸만한 젊은이군!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청년에게 말하였다. 내 자네에게 좋은 선물을 줄테니 닷새 후 아침에 여기로 나오게.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자기의 길을 가버렸다. 청년은 이상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에 닷새 후 아침에 그 다리에 다시 나갔다. 벌써 노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화를 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자네는 게으르군. 오늘은 줄 수 없으니 다시 닷새 후에 이곳으로 오게. 결국 청년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닷새 후에는 길을 서둘러 아직 이른 새벽에 다리로 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그래도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또 화를 냈다. 아직도 예의가 없군. 오늘도 줄 수 없으니 다시 닷새 후에 이곳으로 나오게. 

다시 닷새 후, 청년은 하루 전 저녁부터 다리에 나가서 노인을 기다렸다. 밤이 늦을 무렵, 노인이 다리에 나타났다. 청년이 공손하게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노인은 흐뭇해 했다. 

내 자네가 두루 학문을 구하는 것을 알고 자네를 시험했네. 좋은 책을 하나 줄 터이니 그것을 익히고 연구하면 반드시 세상에 큰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네.

이 노인이 바로 태공망(강태공)이었다. 그는 말년에 일생의 심혈을 기울여 <육도삼략>이라는 전술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을 바로 이 젊은이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의 이름이 바로 장량(長良)이다. 한나라의 시조가 되는 유방을 도와 나라를 세웠던 전설적인 책사였다.

고전(古典)은 다소 억측과 과장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 살피면 인간과 세상을 꽤뚫어 보는 깊은 지혜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러하다.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한 개인이 항상 같은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들이 과거에 얻은 지혜를 물려받아 그것의 토대 위에서 인생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결국 장량에게 태공망은 발돋음 할 수 있는 토대였다. 태공망의 경험과 지혜가 압축된 <육도삼략>이 있었기에 장량은 혼란의 시대를 끝내고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겸손한 자가 지혜를 얻는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처럼, 미련한 자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고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다. 내 할머니, 내 아버지의 훈계 또한 살아있는 역사이다. 선배가 말해주는 조언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의 경험과 고민이 담긴 역사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자기 인생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막아주는 <육도삼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장량은 노인을 공경했다. 그 겸손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교만한 사람은 당장은 높아도 오래 가지 못한다. 교만은 모든 사람의 적(敵)이 되게 만든다. 교만은 항상 남의 지혜를 무시하며, 자기의 생각에 과도한 자신감을 주어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겸손하면 배우게 된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된다. 겸손은 두루 은혜를 입게 하고, 성공을 오래 간직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에도 아래와 같이 말씀했다. 우리가 가슴에 새길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잠 11:2)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

 

일본어판 

 

謙虚な者には知恵が伴う

2010-10-10 牧羊コラム

 

春秋戦国時代末期、一人の若者が教えを求めて全国を放浪した。ある日、水辺を通り過ぎることになったのだが、一人の老人が橋の上ですっと自分の靴を水に落とし、「青年、取ってきてくれないか!」と頼んだ。青年は老人がわざと靴を落としていたのを見たが、老人を敬う気持ちで水辺に行き靴を持って来た。そしてそのうえ膝をついて礼儀正しく靴を老人にはかせてあげた。「結構使える青年じゃのう」老人は満足そうに笑みを浮かべながら青年に言った。「君にいいものをあげるから、五日後の朝にこの橋に来なさい。」青年は変な老人だと思ったのだが、老人を敬う気持ちにつられて五日後の朝にその橋に行った。老人は先に来て待っていた。老人は怒り出した。「若い青年が老人を待たせるとは君は怠けているなあ 今日はあげ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五日後の朝にまたこの橋に来なさい。」結局、青年は手ぶらで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五日後には道を急ぎまだ早い夜明けに橋に向かった。だがそれでも老人は先に出てきて待っていた。老人はまた怒り出した「また遅れるとは礼儀がなっていないなぁ、今日もあげ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また五日後にこの橋に出てきなさい。」また五日後、青年は一日前の夜から橋に出て待っていた。夜が更けていく中、老人が橋に現れた。青年が礼儀正しく立って待っているのを見て、老人は嬉しそうだった。「君が教えを求めているのを知り、君を試させてもらったよ。いい本をあげるから その本を学び研究すれば必ずこの世で自分の志をかなえる事ができるであろう。」この老人は「太公望」だった。彼は人生の末年、自分の一生の精髄を集略した「六韜」という兵法書を著書していて、それをこの青年にゆずりあげたのであった。そしてこの青年の名が「長良」、後に漢の始祖になる「劉邦」を助け国を建てた伝説的な策士である。古典は多少、憶測と誇張を含んでいるが、それを過ぎ振り返ってみると人間とこの世を正確に捉える深い知恵と洞察力が含まれている。この話もそうである。人が賢明なのは歴史的な生き物だからだ。歴史的な生き物という意味 は、一人、個人がいつも同じ出発点で人生を始めるのではなく、先人達が過去に得た知恵を受け継ぎその土台の上で人生を始めるという意味だ。結果的に「長良」にとって「太公望」と言う人は一歩先に踏み出せる土台だった。太公望の経験と知恵が圧縮された「六韜」があったからこそ「長良」は乱世の時代を終え、大陸を統一することができたのだ。「謙虚な者が知恵を得る」と言った歴史学者のトインビーの言葉のように、愚かな者は経験だけを通して学ぶが知恵のある者は歴史を通して学ぶ。歴史はただの過去の記録ではない、自分の祖父母、親のき訓戒もまた生きている歴史だ。先輩が言ってくれる助言もまた広い意味ではその人の経験や悩みが含まれている歴史だ私たちがこのすべてを自分の人生の養分として受け取ることができれば私たちはたくさんの試行錯誤を止めてくれる「六韜」を得ることになるのだ。「長良」は老人を敬った。その謙虚さが彼の人生を変えた。傲慢な人は最初は成功しても長く続かないものだ。傲慢さはすべての人の敵になっていくように人を変えていく。傲慢さはいつも他人の知恵を無視し、自分の考えに度が過ぎる自信を持たせ決定的な失敗をさせてしまう。だが謙虚を学ぶことができればいい。謙虚な人はすべての人の友人になる。謙虚は周りからの恩恵を呼び、成功を長く続かせる。だから聖書にも以下のように記されてあるのだ。私たちが心に刻まなければならない言葉である。

 

箴言11:2 傲慢な人には恥辱が伴うが謙虚な人には知恵が伴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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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3 변화의 간절함을 품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 '야호'하고 외치고 싶은. 세상 모든 것을 내 발 아래에 두고 서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우러러 보게 만들고 싶은.

그런 욕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도 마음의 한켠에서는 수도 없이 수군거리며 나를 부추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얼추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그것이 틀린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안다. 만약 내가 그런 마음을 좇아 내 인생을 살고나면 결국에는 허무한 날이 올 것이며, 나는 가면을 쓰고 마치 내가 괜찮은 것처럼 가장하며 살아낼 자신이 없다.

길을 떠나던 날과 내가 많이 변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외양적인 과시(誇示)가 아니라 변화이다. 내가 먼저 변하고, 나의 가정과 교회가 변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신성한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목회를 하면서, 날마다 한계를 절감했다. 처음에는 변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하여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고쳐야 한다는 것에 눈을 뜨면서, 나의 싸움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치열하게 옮겨갔다.

아주 사소한 습관, 생각의 방식, 이기심조차 내 안에서 죽어가는 과정에는 엄청난 저항이 뒤따르고 있다. 목사인 내가 이렇게 변하기 힘들다면, 날마다 세상에 온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저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정말 목사라면, 나는 말하는 설교뿐 아니라 보여주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죄성과 악함을 죽이고, 그래서 날마다 점점 더 깊어지고 거룩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나는 실패자에 불과하다.

그것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의 사람이 모이고, 어떤 건물을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이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할 공통의 꺼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모든 기도, 관심, 노력의 꺼리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변해야 한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도록 깊어져야 한다. 그래야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하는 나의 양무리를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그것이 있고 나서야, 많이 모이고 건물을 짓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삶이 나누어지고, 우리 인생을 통해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면, 그제서야 처음부터 어디를 향해 출발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말씨와 행동에서, 그 사람의 신앙과 깊이가 드러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날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내 양무리를 위해 먼저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간절함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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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9 나를 죽여야 비로소 이긴다!



제일 두려운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에 집착한다. 이기는 자만이 기억되고 인정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기를 방어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기술들을 습득한다. 이를테면 조리 있게 말하기, 강력한 인상을 풍기기,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등등의 노하우(know-how)는 결국 승리를 위한 戰法(전법)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여전히 무지하다. 고집쟁이에, 어리고, 유치한 자신의 모습을 방치하며 그 분노와 감정에 끌려 다닐 때가 많다.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이 결판나는 것이 아니듯이 남을 향한 싸움은 인생의 승패에 있어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선연 권찰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들을 넋두리 하며 어머니께 위로를 받고자 했는가 보다. 바다 건너의 어머니가 전화 저편에서 말씀하셨다.

"그런 일로 화내지 마라. 화내면 너만 천박해진다!" 

그 위로가 인상적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더라. 곁에서 그 말씀을 전해 들으며, 자기와의 오랜 싸움을 이겨낸 老將(노장)의 꿋꿋한 모습이 떠올랐다.

남을 이기기 위하여 동원하는 격한 모습들이 오히려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한 초라하고 천박한 品性(품성)의 發出(발출)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흔히 간과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외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내적으로는 '자기부인'이다. 이기심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승리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리고, 그 반대로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과정이 나와의 싸움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승리는 천박한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내적이고 신앙적인 승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방식, 곧 그리스도의 모범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돌이켜 나를 보자. 다른 사람 바꾸려고 할 시간에, 그의 문제는 모든 이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손에 맡기고, 나의 마음과 인생을 바꾸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도록 노력해 보자.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닮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방향을 가리키는 것 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와 반대편으로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 외적 승리의 비결과 영적인 詐欺(사기)의 언어들이 마치 홍수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덮고 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을 덮어, 모두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세상, 그런 교회…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이상일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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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자기다운 마흔은 꽃보다 아름답다



성공과 승리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모든 그림자는 가려지고 좋은 점들만이 부각된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처럼.

이 불편한 반쪽 짜리 - 혹은 그 이하의 -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실패와 패배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인생은 외계의 다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한다. 생명과 삶은 성공과 실패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표피적인 처세술을 혐오한다. 내 자신의 가치관이 너무 고전적 舊式(구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변명 같은 이유를 하나 더 붙인다면, 성공을 위해 살기 보다는, 사는 것 자체를 더 소중하게 여기며 순간순간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과 남을 속이는 표피적인 처세술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게 된다.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입과 행동은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 이런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분열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낸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한다. 슬프면 울고, 우울할 때에는 웃을 꺼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조금은 천박해 보이는 코미디를 보면서 박장대소를 하는 것도, 삼각 관계의 드라마를 보면서 연민의 눈물을 짓는 것도, 창가에 서서 먼 하늘을 응시하며 머릿속에 시를 읊조려 보는 것도 결국은 나의 모습이다.

사람의 내면은 클래식을 듣는다고, 시를 읽는다고 고차원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코미디를 보면서 웃어 준다고, 가요를 따라 부른다고 천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내면을 가장 천박하게 하는 것은 '거짓'이다. 좋은 것을 좋지 않다고 하고, 싫은 것을 싫지 않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은 언제나 불편하다. 반대로 사람의 내면에 가장 좋은 자양분은 '진실'이다. 솔직함은 실수까지도 사랑스럽게 한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에 대하여 자부심이 있다.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초라하고, 한심한 존재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답게 살아왔다. 고민했고, 실수도 많이 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언제나 나의 안에서 깨달아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하여 나 다운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래서 삶의 순간마다, 구비마다 추억이 배이고, 따뜻한 감정이 스미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마흔이 넘은 요즘은 가을에 앞서 외롭다.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이 곁에 많지만, 여전히 인생은 혼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만 한적한 곳으로 숨고 싶고, 말수를 줄이고 싶다. 좋은 책이 고프다. 

이럴 때는 그냥 조금 기다려 주면 된다. 괜찮다. 성공을 향한 의지는 별로 없어도 삶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강하니까. 조금 기다리면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재촉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이 있을까 싶다. 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내적으로는 쉽게 예상되지 않는다. 나는 나다운 인생의 방식을 찾았고, 그것을 이미 구현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不惑(불혹)의 나이에 知天命(지천명)이라, 자기다운 마흔은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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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젊은이여 꿈을 향해 돌진하라!



愚公移山(우공이산)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우직함이 없으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끈기와 인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장점이다. 

요즘 기업에서 人才(인재)를 찾을 때에는, 그 기준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성실함’이 최고의 덕목이었는데, 최근에는 ‘창의성’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예 성실함과 근면성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조직과 융화하고, 순발력이 있으며, 개인적 능력이 극대화 되어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성실함과 근면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현대적인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창의적인 생각이란 허접한 몽상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나름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창의적인 발상, 그 자체를 가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견디고 통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실함의 바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련이 없는 인생이 있겠는가? 누구나 苦生(고생)을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고 꽃을 피우기에 인생의 성공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순발력이 뛰어나고, 자기 능력이 월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적인 강함을 가지고 우직하지 못하면 그는 평범한 성공은 거두어도 탁월한 성공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하나 선택하라. 무언가를 미치게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資産(자산)이다. 그 好感(호감)이 보다 성실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방향과 길을 결정했다면, 일단은 10년을 투자하라.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바로 그 분야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 남아라. 

그렇게 10년을 치열하게 살아남고, 다시 처음에서 자기의 길을 생각하라. 

남들이 하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산을 옮기기 위해서 다시 길을 선택하고 모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최고의 資産(자산)은 ‘돈’이 아니라 ‘경험’이고 ‘안목’이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일하고도 길이 보이지 않고 경험이 빈약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빈곤’이며, ‘실패’인 것이다.

신앙의 젊은이들이여! 

쉬운 길로 가지 말라. 고생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지 말라. 

주님을 신뢰하고, 가슴을 펴라. 지금 고생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직 당신의 이력서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더 멀리 보고, 더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 자신감을 가지라. 그게 부족하면 주실 때까지 기도하라. 적어도 세상 앞에 섰을 때에는 움츠린 자신이 아니라 가슴이 쫙~ 펴진 젊은이가 되라.

꿈에 대하여 미련하라. 不狂不及(불광불급)이라고 했다. 미쳐야 미친다. 미친 듯이 자기의 분야에서 10년을 살아남으면 반드시 길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꿈이고 비전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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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9 신앙은 예배당 밖에도 있다



구약과 신약을 얼마나 보았을까? 

읽은 것도 적지 않지만, 연구하여 설교한 것도 적지 않다. 20여 년을 사역자로 살아왔으니 이 일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경을 많이 보고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니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잡다한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핵심을 짚어내고 요점을 간추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항상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계명과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열린다. 

고아원을 방문했다. 원장은 아이들을 규칙을 통해 통제한다. 고아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규칙을 고안한다. 이를테면 현관에서 신발 정리를 하지 않으면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번에는 가정을 방문해 보자. 부모도 똑같이 아이에게 규칙을 가르친다. 그러나 부모의 규칙은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똑같이 신발정리를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이가 하지 않으면 부모가 그 일을 한다.

하나님은 어느 편이실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고아원 원장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율법을 강요하는 분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도 율법의 허점을 아셨다. 율법은 벌칙이 따른다. 그 벌칙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장치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을 포기하시고 복음을 택하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자녀들을 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이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십자가를 지고, 눈물과 땀으로 헌신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면 그 과정조차 기쁨과 찬양 속에서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일에 여행을 해도 좋다. 어디든 가까운 교회에 가서 예배는 드리면 좋겠다. 

만약 그것도 할 수 없다면 혼자서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만들라. 그럴 정도의 신앙만 있다면 그 사람을 굳이 예배당 안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밖에서라도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모든 목회자가 가르칠 만한 내용은 아니고, 오해와 논란의 소지도 있다. 그래도 나는 주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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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2 행복과 평화는 사람이 결정한다



지난 11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우에노에 나갔다. 준혁이가 국립서양미술관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던 중에 인상파 화가, 모네가 자신의 집 앞에 있는 호수에서 딸들과 뱃놀이를 하던 그림을 보았다. 마침 우에노 호수에도 보트가 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미술관에서 나온 후에 아이들과 함께 보트를 타러 갔다. 준혁이가 노를 젓는 동안,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호수 주변의 사진을 찍었다. 행복했다…

이번 주가 아이들 여름방학의 마지막 주간이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토시마엔에 갔다. 최집사님이 할인권을 주셔서 일일 자유이용권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놀이동산에도 가고 수영장에도 가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해준 도시락과 음료수가 있으니 부족함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는지, 아이들의 체력과 열정에 놀라울 정도였다. 결국 그 하루가 나에게는 어깨의 화상(火傷)으로 남았다. 햇볕에 익어버린 피부 때문에 지금도 부자유함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과 보낸 하루는 더없이 행복했다. 의젓하게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인생의 보람을 느꼈다. 언젠가는 내가 이 날을 추억할 것이고, 아이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 추억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많이 행복할 것이다.

행복과 평화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의 이유를 찾고, 평화의 사람은 어디에서나 평화를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 조건들이 모두 마련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노예의 자리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온 세상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조건과 환경으로 채워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행복해야 하고, 자기 힘으로 평화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 건강한 것이 감사하고, 편안한 교회가 감사하고,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양무리가 감사하다. 내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감사하고, 아직도 내 마음에 꿈이 있는 것이 감사하다.

더 훌륭한 목사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뼛속까지 목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을 다스려 항상 행복하고 모든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내게는 아직도 변하고 자라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경드림교회가 완전하지는 않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이 많은 교회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바꾸어 보면, 참 감사한 교회이다. 이것을 깨닫고 섬길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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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다



큰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지난 주일, 마쯔리가 한참이었다. 가계들 중에 ‘그라페’를 파는 가계가 눈에 들었다.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 가족이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눈의 부인은 프랑스 여자 같았는데, 장사를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딸로 보이는 찬혁이 또래의 딸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눈길이 갔다. 개구쟁이 어린 아이들이 두 명 더 보였고, 서 너 사람의 어른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두 집이 함께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장사에 몰입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놀 거리를 찾았다. 

마침 찬혁이와 준혁이도 텐트 뒤에 있었기에 그 아이들에게 ‘호떡’을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아이들이, 얼마 후에는 서로 가까워져서 호떡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자기 부모에게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러다가 일이 생겼다. 갑자기 어린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대뜸 준혁이를 붙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도 다가갔다. 준혁이는 땅에 앉아 풀만 뜯고 있고 여인은 심각하게 심문을 계속했다.

대충 곁에서 들으니, 어린 아이들이 놀다가 200엔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무에도 거꾸로 매달리고, 준혁이가 아이들을 손잡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분 나쁜 것은 그 엄마의 고압적인 태도였다. 마치 준혁이가 어린 아이들의 돈을 챙긴 것이 아니냐는 듯이 따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많이 상했다.

아이들과 그 엄마가 돌아간 후에, 준혁이를 나무랐다. 어찌 되었든 어른이 묻고 말하는데, 자리에 앉아 고개만 들고 대답하는 무례함과  중학교 3학년이나 되었으면서도 억울한 정황에서 별로 해명하지 못하는 어리숙함에 화를 낸 것이다.

결국 준혁이는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엄마도 미안했는지 아이들의 손에 그라페를 보내왔다. 사과의 선물인지 아니면 보냈던 호떡에 대한 답례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선의(善意)로 받고 그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돌아서 생각하니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이 입장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이니 얼마나 억울할까? 어른을 향해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에 대하여 꾸지람을 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아들을 도둑 취급하는 듯한 느낌에 대한 분노가 섞여 꾸지람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집으로 떠난 준혁이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화를 했다. 

“준혁아, 아빠가 생각해보니 너무 지나쳤다. 너도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아빠가 내 아들을 모함하는 느낌에 화가 나서 오히려 너에게 지나치게 한 것 같구나. 미안하다. 앞으로 어른 대할 때는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아빠도 더 조심할테니…”

준혁이는 아빠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교훈이 남았다. 

역시나 화내는 것은 의(義)를 이루지 못한다. 선을 행하고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우리가 억울함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더 많이 속상하시다. 마지막으로, 목사라도 잘못 했으면 아들에게조차 사과하는 것이 옳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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